2021년 11월호

大選 앞두고 사색하는 나폴레옹과 패튼 리더십[황승경의 Into the Arte]

영화 ‘워털루’ & ‘패튼 대전차 군단’

  • 황승경 공연 칼럼니스트·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입력2021-11-06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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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0년대 미국과 소련의 초대형 프로젝트

    • 영화에서 기피 대상이 된 나폴레옹

    • 베트남전쟁이 불러온 조지 패턴 리더십

    • 독단적 성격에 발목 잡힌 두 전쟁 영웅

    • ‘대박’과 ‘쪽박’으로 엇갈린 영화의 운명

    영화 ‘워털루’ 스틸컷. [GettyImage]

    영화 ‘워털루’ 스틸컷. [GettyImage]

    내년 3월 9일 치러지는 20대 대선에서 국가 최고 리더가 되기 위한 후보들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흔히 ‘시대정신’이라고 표현하는 20대 대통령의 리더십은 무엇일까. 세계를 호령한 리더들의 흥망을 관람하면서 대한민국의 리더의 리더십을 사색하는 건 어떨까.

    냉전이 정점으로 치닫던 50여 년 전 소련과 미국은 나폴레옹과 조지 패튼의 리더십을 다룬 초대형 영화 프로젝트를 내놓았다. 나폴레옹전쟁을 다룬 영화 ‘워털루’와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의 패튼 장군을 그린 ‘패튼 대전차 군단’이다.

    영화 ‘패튼 대전차 군단’ 스틸컷. [GettyImage]

    영화 ‘패튼 대전차 군단’ 스틸컷. [GettyImage]

    영화에서는 기피 대상이던 나폴레옹

    올해는 나폴레옹 서거 200주년이 되는 해다. 나폴레옹은 코르시카섬 시골뜨기가 스스로 황제가 되는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다. 그와 관련한 서적만 8만 권이 훌쩍 넘는다. 세밀하게 계산된 그의 리더십은 상반된 평가를 받으면서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권모술수도 마다치 않는 냉혈 전제폭군’이라는 비난과 ‘탁월한 승부 감각으로 원칙을 중시하는 세기의 지도자’라는 찬사는 200년 동안 지속됐다.

    1971년 개봉한 세르게이 본다르추크(1920~1994) 감독의 영화 ‘워털루’는 나폴레옹의 빛나는 업적과 맞물려 카리스마 이면의 인간적인 면모를 함께 부각한다. 나폴레옹(로드 스타이거 분)과 웰링턴(크리스토퍼 플러머 분)이 맞붙는 워털루 전쟁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다.

    영화 ‘워털루’는 소련군 1만2000명과 코시크 기병 2000여 명이 동원돼 19세기 전투를 재현했다. [Mosfilm 제공]

    영화 ‘워털루’는 소련군 1만2000명과 코시크 기병 2000여 명이 동원돼 19세기 전투를 재현했다. [Mosfilm 제공]

    컴퓨터그래픽(CG)이 없던 1970년대에 소련군 1만2000명과 기마병을 재현할 코사크 기병 2000여 명이 동원돼 19세기 전투를 재현한 전투신은 당시 소련 공산당 선전부의 집중 사업이었기에 가능한 프로젝트였다. 본다르추크 감독은 앞서 단역 75만 명을 출연시킨 영화 ‘전쟁과 평화’를 흥행으로 이끈 전적이 있기에 영화 ‘워털루’의 물량 공세는 새삼스럽지 않았다. 그러나 영화 ‘워털루’는 경악할 만한 최악의 흥행 성적표를 기록한다. 할리우드식 상업영화와 소련의 국책영화 사이에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고, 나폴레옹이 대중의 관심도는 높지만 상대적으로 영화를 관람할 정도의 호감도는 없었다. 나폴레옹의 불굴의 의지와 리더십, 카리스마는 회자되지만 감성적 면모는 관객에게 감흥을 주지 않는다는 게 입증됐다. 이때의 충격으로 나폴레옹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는 한동안 기피 대상이었다.



    영화 ‘워털루’는 러시아 원정 이후 패전을 거듭하던 나폴레옹이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는 1814년 4월 ‘퐁텐블로 조약’에 서명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파리를 겹겹이 포위한 연합군(영국·러시아·프로이센·오스트리아)이 나폴레옹의 목을 조이며 파리에 입성하고, 한때 전 유럽을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주인공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이탈리아반도와 자신의 고향 코르시카섬 사이에 위치한 엘바섬으로 유배된다.

    영화 ‘워털루’ 포스터. [Mosfilm 제공]

    영화 ‘워털루’ 포스터. [Mosfilm 제공]

    ‘퇴물’ 나폴레옹의 반격

    우리에게 유배지라고 하면 두메산골의 쓰러져 가는 가옥에서 지내는 빈곤한 삶이 연상되지만 나폴레옹은 명목상 황제라는 칭호는 그대로 유지한 채 엘바섬 영주가 돼 대저택에서 어머니와 누이와 함께 지낼 수 있었다. 물, 바람, 꽃, 허브 등 천혜의 자연환경에 푹 빠져 동생을 위해 향수까지 개발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엘바섬 유배 시절 나폴레옹은 철저하게 야심을 숨기고 한물간 ‘퇴물’로 행세한다. 부르봉 왕가의 루이 18세는 연합군이 약속했던 연금(200만 프랑)을 지급하지 않아 나폴레옹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그는 아들과 부인인 오스트리아의 황녀 마리 루이즈와 조우하기를 강렬하게 원했지만 유럽 황실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1809년 첫 번째 부인인 조제핀 황후와 이혼한 이후, 이듬해 마리 루이즈와 결혼했다.

    나폴레옹은 복수의 칼날을 갈며 와신상담한다. 느슨해진 감시를 포착한 그는 9개월 만에 영국 상선으로 위장한 범선을 타고 엘바섬을 탈출한다. 그러곤 유유하게 프랑스 해안에 상륙해 국민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파리로 진격한다. 루이 18세가 진압하라고 보낸 프랑스 군인들은 오히려 나폴레옹군의 선봉에 서서 루이 18세를 향해 총을 겨누고, 나폴레옹은 다시 황제에 오른다. 그가 오합지졸의 병사들을 이끌고 전장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휘권을 통일해 속전속결로 전투를 끝내는 원칙에 있었다. 그래서 프랑스군은 후방 부대의 보급 지원 없이 현지에서 무자비한 약탈을 통해 물품을 조달했고, 이는 어렵게 얻은 자유를 빼앗길 수 있다는 두려움에 떨던 프랑스 시민들과 풍족(?)했던 전장을 그리워한 시민군들의 지지로 나타났다.

    원래 정치적 입지가 약했던 나폴레옹은 부르주아들의 입맛에 맞게 헌법을 수정하고 국내 정세를 안정시키려 노력했다. 외교적으로도 당장 전쟁을 하기보다는 평화조약을 맺고 싶었지만, 프랑스 군대의 야만적인 행위에 질린 영국과 독일(프러시아), 오스트리아 동맹국들은 바로 선전포고에 들어갔다. 프랑스 국민에게는 자유, 평등, 박애의 삼색기를 휘날리며 전제 유럽을 해방시킨다는 명분이 통했지만 다른 나라 국민에게 나폴레옹은 잔악한 침략전쟁의 원흉일 뿐이었다.

    ‘맞수’ 웰링턴의 등장

    여기에서 나폴레옹과 동갑내기로 정반대의 인생을 산 웰링턴 공작 아서 엘즐리(1769~1852)가 등장한다. 아일랜드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소년가장’ 나폴레옹과는 태생부터 달랐다. 어머니의 치맛바람으로 어렵게 입학한 명문 이튼스쿨을 중도하차할 정도로 학업은 뛰어나지도 못했고, 이후 귀족 장교로 반짝거리는 유니폼을 입고는 허송세월할 뿐이었다. 뒤늦게 철이 든 그는 1794년 프랑스혁명군과 맞닥뜨리며 전쟁을 알게 됐다. 그는 절대 성급하게 서두르지 않으면서 사전에 정보를 확인해 상황에 적합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경우의 수를 대입해 상대의 전술을 꿰뚫어봤다.

    그는 나폴레옹처럼 직접 전장을 누비기보다는 한 걸음 뒤에서 객관적으로 전세를 관망하며 현장 지휘관들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덩달아 지휘관들의 무공도 일취월장해 그를 중심으로 세력화를 이뤘고, 이들은 후일 그가 총리로 등극하는 주춧돌이 된다.

    반면 나폴레옹은 부하들과 신의는 중요시했지만 결정적 순간마다 독단적으로 결정·실행하며 2인자를 키우지 않았다. 그 바람에 나폴레옹은 독야청청 홀로 전장을 동분서주하면서 지휘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1815년 벨기에 남동부 워털루(Waterloo) 전장에서도 나폴레옹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쳤 있었다. 승기를 잡아도 여기저기에서 터지는 돌발 위기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휴식을 위해 잠깐 눈을 붙인 나폴레옹을 대신해 공격 명령을 내린 한 참모의 패착으로 승기를 빼앗기자, 나폴레옹은 전투를 머뭇거리게 됐고, 날씨 또한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결국 행운의 여신은 웰링턴의 손을 들어준다.

    워털루 전쟁 이후, 아프리카 해안에서 2800km나 떨어진 남대서양의 외딴 섬 세인트헬레나로 유배당한 나폴레옹은 6년 후 쓸쓸하게 눈을 감는다. 반면 웰링턴 장군은 영국 총리, 외교장관, 내무장관 등의 요직을 두루 겸하며 남작에서 공작 작위까지 서임받으며 영국 명문 가문 대열에 합류해 부와 명예를 누리며 평온하게 생을 마감했다.

    비록 워털루전투에서는 완패했지만 후세에 웰링턴 장군은 나폴레옹을 언급할 때만 기억되는 역사의 아이러니다. 두 사람 중 누가 더 자국민에게 자긍심을 드높인 리더일까.

    베트남전쟁이 불러온 조지 패턴 리더십

    영화 ‘패튼 대전차 군단’ 포스터. [20세기 폭스 제공]

    영화 ‘패튼 대전차 군단’ 포스터. [20세기 폭스 제공]

    나폴레옹과 웰링턴은 그들이 잔뼈가 굵은 전장에서 발휘한 능력을 정치 무대에서 꽃피운 케이스이지만, 모든 군인이 정치를 아는 것은 아니다.

    명장 조지 패튼(1885~1945) 장군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군인 본분에는 충실했지만 인간적 예의 앞에선 불성실했던 승장으로 영화는 기억한다. 그는 전투에서는 용장이었지만, 리더로서의 처신에 관해서는 두고두고 회자된다. 생전 그는 거친 말과 공격적인 표현으로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았고, 국민적 비난은 계속됐다.

    영화 ‘패튼 대전차 군단’(1970)은 특유의 저돌적인 맹렬함으로 적을 공포로 밀어 넣지만 패튼(조지 스콧 분)의 그림자도 함께 조명한다. 영화 제작 당시는 베트남전쟁(1960~1975) 10년째였다. 당시 미국은 반전 여론이 만만치 않았고 전쟁을 두고 정치인들의 노림수에 국민은 지쳐갔다. 정치는 ‘빵점’이지만 실리를 계산하지 않고 오로지 소임을 다하는 전쟁 영웅이 그리웠을까. 1300만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제작비를 투입한 이 영화는 국내에서만 투자비 대비 5배의 흥행 수입을 올렸고, 1971년 아카데미상 10개 부분 후보에 올라 6개 부문 트로피를 거머쥐는 쾌거를 올렸다.

    영화 ‘패튼 대전차 군단’ 스틸컷. [20세기 폭스 제공]

    영화 ‘패튼 대전차 군단’ 스틸컷. [20세기 폭스 제공]

    적군에게는 공포를, 아군에게는 원성을

    남편이 전쟁광으로 그려질 것을 두려워한 부인 베아트리스 패튼의 반대로 영화 제작을 20년간 미룬 결과가 빛을 말하는 순간이었다. 영화에서 패튼에 대한 평가는 오롯이 관객의 몫이었다.

    군인 집안에서 태어난 패튼은 어릴 때부터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무장됐다. 전장에서도 거침없이 돌진했지만, 생활 면에서도 재벌 집안인 처가의 영향으로 ‘폼생폼사’ 명품 소비를 즐겼다. 패튼은 최고 원단의 제복을 사시사철 자신의 취향에 따라 맞춰 입었다.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면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는 다혈질 싸움닭이었만, 전장에서는 냉정하게 적의 동태를 파악하고 즉각적으로 임무를 하달해 적의 허를 찔렀다. 군인의 용기와 명예를 누구보다 중시한 패튼은 군대 내 인종차별 철폐에도 앞장섰다.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아프리카 전선 2기갑 사단장으로 부임한 패튼은 제일 먼저 패배주의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미군의 군인 의식을 고취시켰다. 당시 연이은 패전과 독일의 명장 롬멜의 위력 앞에서 미군의 사기는 사막의 모래바람처럼 사라지고 말았던 터. 패튼은 예하 군인들이 항상 철모와 넥타이, 각반을 착용하게 해 느슨해진 군인 정신과 연대 의식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패튼은 전장에서는 승리했지만 군 수뇌부는 그의 처신 때문에 노심초사해야 했다. 어느 날 심한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병사가 꾀병을 부린다고 착각한 패튼이 환자에게 막말과 구타를 하는 일이 발생한다. 패튼은 공개 사과했지만 파장이 만만치 않자 끝내 제7군 사령관에서 보직 해임된다. 곧 이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한데 연합군은 독일군을 교란하기 위해 패튼이 선봉에서 프랑스 북부 칼레를 향하는 것처럼 거짓 정보를 흘렸고, ‘패튼’이라는 이름 탓에 독일군 주력부대를 칼레에 묶어두는 공을 세웠다. 그만큼 독일군에게 패튼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이후 제3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패튼은 ‘기동력의 정수’를 선보이며 독일로 진군한다. 궁지에 몰린 히틀러가 회심의 반격을 펼치던 아르덴 대공세에도 패튼은 제일 먼저 진격해 전세를 뒤집고 독일군을 무너뜨렸다. 그의 부대는 제일 먼저 라인강을 건넜다.

    전쟁이 끝나고 미군정에서 일하던 그는 어느 날 불의의 교통사고로 독일에서 사망한다. 죽어서도 자신의 제3군단과 함께하고 싶다는 유언대로 그의 유해는 룩셈부르크의 미군묘지에 안장됐고, 소박한 그의 묘지에는 아직도 그를 찾는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황승경 #리더십 #워털루 #나폴레옹 #패튼 #신동아

    황승경
    ● 1976년 서울 출생
    ● 이탈리아 레피체국립음악원 디플럼,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성균관대 공연예술학 박사
    ● 국제오페라단 단장
    ● 前 이탈리아 노베 방송국 리포터, 월간 ‘영카페’ 편집장
    ● 저서 : ‘3S 보컬트레이닝’ ‘무한한 상상과 놀이의 변주’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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