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호

‘신동아’ 창간 1931년, 그해의 재구성[창간 90주년]

경제공황 장기화, 파시즘 발호…세계사적 분기점

  • 전봉관 KAIST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입력2021-10-31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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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 총리대신 하마구치 오사치 피격 5개월 만에 사임(4월)

    • 日 제2차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 출범(4월)

    • 신간회 ‘해소’(5월)와 정치적 중립 밝힌 ‘신동아’ 창간사

    • 朝-中 민족갈등 폭발시킨 완바오산 사건(7월)

    • 조선일보의 최악 오보와 중국인 배척 폭동(7월)

    • 日 군부, 내각 승인 없이 만주에 군사행동(9월)

    • 영국의 금본위제 정지(9월)

    • 日 금화 해외 유출 러시, 금융공황 위기감 고조(10월)

    • ‘신동아’ 창간(11월)

    • 제2차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 붕괴, 금 수출 금지(12월)

    ‘신동아’ 창간호는 1931년 11월호로 간행됐다. ‘창간사’에서 송진우 사장은 “‘신동아’는 조선 민족 전도의 대경륜을 제시하는 전람회요, 토론장이요, 온양소(醞釀所·양조장)다. 신동아는 어느 일당일파(一黨一派)의 선전기관이 아니다”라며, 신동아가 명실공히 조선 민족의 공기(公器)로 우뚝 설 것임을 강조했다. 창간사에서부터 정치적 중립을 강조한 셈이다.

    하지만 보수, 진보가 정치권력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2021년 대한민국과 달리, 1931년 식민지 조선은 조선인 스스로가 조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정치권력에 접근할 길이 원천 봉쇄된 상태였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엘리트 기자들이 사회부나 문화부에 집중된 이유는 경제와 정치 분야에서 조선인이 여론이나 정책 결정을 주도할 여지가 거의 없던 데 있다. 정치권력을 일본에 빼앗긴 조선인에게 정치적 중립은 어떤 의미였을까?

    신동아 1931년 12월 송년호에는 ‘1931년 총결산’이라는 특집이 마련됐다. 그 일환으로 작성된 ‘정치 운동의 회고’라는 기사에서 숭인동인은 1931년이 “정치 운동사에서 중요한 임무를 담당한 1년”이라며, 가장 특기할 사건으로 “신간회의 해소”를 꼽았다. 신간회는 일제강점기 국내에서 공개적으로 활동한 ‘정치단체’ 중 가장 큰 결사체였다. 1927년 1월 15일 창립해 1931년 5월 16일 ‘해소’될 때까지 4년여 동안, 지방의 지회 조직이 150여 개, 회원 수가 4만여 명에 달하는 거대 정치단체로 성장했다. 이렇듯 큰 규모의 정치결사체가 조직될 수 있었던 것은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의 연대와 협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31년 5월 16일 신간회 해소

    신간회. ‘신동아’ 1931년 12월호.

    신간회. ‘신동아’ 1931년 12월호.

    창립 때부터 신간회는 ‘민족 단일당’ ‘민족 유일당’을 표방하며 조선 민족을 하나로 아우르는 정당을 지향했다. 신간회는 순회강연단을 조직해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회를 개최했고, 원산 노동자 총파업을 지원하고, 갑산 화전민 항일운동의 진상 조사에도 앞장섰다. 수재민 구호 활동을 펼치고, 외곽 조직인 근우회를 통해 여성 인권 향상을 도모했다.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때는 조사단을 파견하고 민중 대회를 개최하려다 조병옥, 김무삼, 권동진 등 회원 44명이 구속되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을 보면, 신간회가 좌우 갈등을 잘 조정하면서 성장했다면 일본에 맞서 조선인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정통성 있는 정치결사체로 성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계 역사를 통틀어 좌우 합작이 성공적인 결과를 맺은 경우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신간회 역시 민족주의 세력에 대한 사회주의 세력의 비판과 공격으로 분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신간회 출범 당시 우파 민족주의 세력은 조선총독부와 어느 정도 타협해 자치권을 인정받으려 한 자치론자와 그들의 타협적 노선을 극도로 경계하던 반자치론자로 분열돼 있었다. 이광수·김성수·송진우 등 동아일보사 간부와 최린을 비롯한 일부 천도교 수뇌부들이 주도한 자치론자를 흔히 ‘민족주의 우파’ 또는 ‘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이라 하고, 이상재·안재홍·한용운 등 그 반대 세력을 ‘민족주의 좌파’ 또는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이라 한다. 출범 당시 신간회를 주도한 민족주의 세력은 민족주의 좌파,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이었지만, 1930년을 전후로 자치론자, 즉 민족주의 우파, 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이 신간회의 주도권을 장악한다.

    비슷한 시기, 신간회의 사회주의 세력은 좌우 합작에서 고립으로 노선을 변경한다. 1928년 12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정치서기국은 ‘12월 테제’를 채택해 조선공산당은 종래와 같은 인텔리 중심의 조직 방법을 버리고, 공장과 농촌으로 파고 들어가 노동자와 빈농을 조직해야 하며, 민족개량주의자들을 근로대중으로부터 고립시켜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에 따라 사회주의 진영에서는 신간회의 신지도부를 ‘개량주의자’라고 공격하면서 신간회를 발전적으로 ‘해소’해 노동자, 농민이 주도하는 새로운 단체를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해소론자들은 신간회를 해체해 사라지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운동으로 지양(止揚·aufheben)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적합한 용어는 ‘해산’이 아니라 ‘해소’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1930년 신간회 부산지회를 시작으로 이원·원산·평양 등지의 지회에서 해소론이 제기되었고, 그들의 요구에 따라 1931년 5월 15일과 16일 경성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신간회 제2회 전체대회가 열렸다. 경찰은 신간회 창립대회 이후 한 차례도 신간회 집회를 허가하지 않았지만, 제2회 전체대회의 안건이 신간회의 ‘해소’라는 첩보에 따라 이례적으로 정치적 성격을 띤 집회를 허가했다.

    신간회 경성지회에서 제출한 해소안은 거수표결 결과 찬성 43, 반대 3, 기권 30으로 가결됐다. 숭인동인은 신간회가 해소된 1931년을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분열의 시대다. 지주와 자본가가 침묵을 지키고, 중산계급이 실망하고, 노동자 농민 계급이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규정했다. 이처럼 신동아 창간사에서 송진우 사장이 밝힌 ‘정치적 중립’이란 신간회 해소 이후 민족운동의 방향을 놓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이 격해지던 시기, 두 진영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1931년 9월 20일 영국의 금본위제 정지

    금본위제. ‘신동아’ 1931년 12월호.

    금본위제. ‘신동아’ 1931년 12월호.

    1931년 세계는 경제적으로 몹시 어렵고 혼란스러웠다. 1929년 10월 24일, 월스트리트의 주가 폭락을 시작된 세계 대공황은 미국의 교역망을 따라 삽시간에 전 세계에 퍼져나갔다. 그 여파와 후유증은 1931년에도 이어졌다. 세계경제가 대공황의 그늘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시기는 그로부터 15년 후인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였다.

    세계경제가 대공황에 빠진 지 석 달 후인 1930년 1월 11일, 일본의 하마구치 내각은 ‘금해금(金解禁)’을 선포하고, 금본위제로 복귀한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9월 이후, 근 13년 동안 금본위제를 정지하고, 금 수출을 금지하고 있었다. 금해금으로 금 수출이 허용됨에 따라 엔화의 법정 가치는 일거에 회복됐고, 환율과 물가는 급락했다.

    금본위제는 통화의 가치를 일정한 무게의 금과 연계시키는 통화제도다. 19세기 영국을 중심으로 발전해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전성기를 구가했다. 메이지유신 직후인 1897년에 제정된 일본의 화폐법 제2조에 의하면 1엔의 가치는 ‘순금량목(純金量目) 2분(二分)’이었다. 즉 5엔의 가치가 금 1돈(3.75kg)과 일치하도록 법률로 정해놓은 것이었다. 금본위제하에서는 금을 상대 국가의 중앙은행에서 인출해 자국으로 수송하는 데 드는 비용, 즉 ‘금점(gold point)’ 이내로 환율이 안정됐다. 특정 국가의 화폐가치가 금점 이하로 하락하면, 그 국가의 중앙은행에서 금을 인출해 자국으로 수송하면 됐기 때문이다.

    금본위제 복귀를 통해 하마구치 내각은 “환율 하락→ 통화 수축→ 물가 하락→ 생산비 저하→ 수출 증대→ 국제 수지 개선→ 경제 활성화”로 경제가 선순환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세계경제가 대공황에 빠진 상태에서 엔화의 평가절상과 긴축재정은 사실상 경제적 자해행위였다. 생산비 하락으로 수출품의 가격은 어느 정도 하락했지만, 세계경제가 공황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금본위제로 복귀한 지 2년이 지나도록 수출은 전혀 늘어나지 않았다.

    전 세계가 대공황의 수렁에서 헤어나기 위해 한창 발버둥질하던 1931년 9월 20일, 영국이 돌연 금본위제의 정지를 선언했다. 영국은 애초 6개월간 정지하겠다고 선언했지만, 그 후로 다시는 금본위제로 복귀하지 않았다. 국제 금본위제의 강력한 지지자였던 영국이 금본위제에서 이탈함에 따라 파운드화의 대외 신인도는 추락했고, 100여 년간 국가 간 금융거래의 기준이 된 금본위제는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됐다. ‘신동아’ 창간호는 시사 문제 특집으로 배성룡의 ‘금본위제 몰락과 세계공황’을 게재해, 영국의 금본위제 정지가 대공황에 시달리는 세계경제와 조선 경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검토했다.

    영국의 금본위제 정지에 가장 먼저 반응한 곳은 외환시장이었다. 금 수출 금지 직전 4.86달러였던 1파운드는 금지 이후 단 며칠 만에 25% 하락한 3.75달러로 주저앉았다. 애초 금과 교환해 주기로 약속하고 발행한 파운드를 돌연 더는 금과 바꿔주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므로, 파운드화의 신용과 가치가 일순간 폭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의 금본위제 정지로 대공황의 출구를 모색하던 세계경제는 다시 한 번 큰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9월 20일 영국을 시작으로 22일 덴마크, 27일 노르웨이, 28일 스웨덴 등 유럽 국가들이 차례로 금본위제에서 이탈했다. 일본으로서는 새로운 통화제도가 미처 뿌리내리기도 전에 대외적 폐지 압력에 직면한 셈이었다.

    영국의 통화 당국은 금의 보호라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그보다는 파운드화의 가치 하락이 가져다줄 인플레이션 유발 효과에 더 큰 기대를 걸었다. 파운드화의 가치 하락으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게 되면, 대내적으로는 떨어지는 물가를 끌어올릴 수 있고, 대외적으로는 떨어진 파운드화의 가치만큼 저렴한 가격에 영국산 상품을 내다 팔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였다.

    세계시장에 저가의 영국산 제품이 쏟아져 나온다는 것은 영국과 주력 수출품이 정확히 일치했던 일본에 심각한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영국과 일본은 상품시장을 놓고 세계 곳곳에서 경합을 벌이던 경쟁국이었다. 영국의 수출 증대는 일본의 수출 감소로 직결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상품시장이 위축된다는 것은 일본 경제에 완전히 종속돼 있었던 식민지 조선에도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오늘날 세계경제가 회복돼야 대한민국의 경제가 살아나는 것처럼, 일본 경제에 완전히 종속돼 있었던 조선의 경제는 일본 경제의 회복 없이 회복을 기대할 수 없었다. 영국의 금본위제 정지로 가뜩이나 어려웠던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경제는 더 큰 혼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日 총리대신 하마구치 오사치 총격(1930년 11월)과 사임(1931년 4월)

    1931년 4월 14일, 제2차 와카쓰키(若槻禮次郞) 내각이 출범했다. 금본위제 복귀를 결정하고 강도 높은 긴축정책을 추진했던 전임 총리대신 하마구치 오사치((濱囗雄幸)는 1930년 11월 백주에 도쿄역에서 극우파 청년에게 총격을 당해 병상에서 5개월을 보내다 1931년 4월 사임했다. 그는 넉 달 후인 그해 8월, 끝내 총상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1909년 초대 총리를 지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안중근 의사에게 처단된 이래로, 1930년 하마구치 오사치, 1932년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1936년 사이토 마코토(齊藤實) 등 전·현직 총리가 총격을 받아 비명횡사하는 일은 적어도 패전 이전 일본에서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하마구치 오사치는 일본 역사상 가장 고매한 인품을 지닌 정치인이면서 동시에 국가 경제를 파탄 낸 가장 무능한 총리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그는 유달리 강직하고 신념이 강해서 재임 당시에는 ‘개혁의 사자’‘라이언 수상’이란 별명으로 불렸다. 하마구치는 도쿄제대 법대를 졸업한 후 엘리트 코스를 마다하고 미천한 직업인 기생집 악기 심부름꾼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 소식을 접한 대학 동기생들과 선배들이 창피하다며, 그를 불러 일본은행 오사카 지점에서 정식 은행원으로 근무할 수 있도록 주선했지만, 국가의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은 모름지기 밑바닥 인생부터 경험할 필요가 있다며 이를 거부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밑바닥에서 시작해 국가의 최고지도자가 됐다는 점에서 ‘일본의 링컨’이라 불리기도 한다.

    하마구치의 인품은 금해금과 긴축정책 실시 초기에 빛을 발했다. 그는 정부 경비를 한 푼이라도 줄이기 위해 자동차 운행을 제한하고, 공무원들의 급료를 삭감함은 물론 심지어 회식까지 금지했다. 개혁을 위해 정부부터 솔선해서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대중은 이런 그에게 최고의 신뢰와 찬사를 보냈고, 개혁을 탄력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안정적 의석’을 헌사했다. 금해금이 시행된 지 4개월 만에 실시된 총선거에서 그가 이끄는 입헌민정당은 273석을 차지해 174석을 차지한 입헌정우회를 압도했다.

    하지만 대중적 인기란 물거품 같았다. 약속했던 호황은 오지 않고, 불황이 장기화되자 민심은 돌변했다. 대중은 굶어 죽겠다며 특단의 조치를 취해 달라고 아우성쳤다. 런던 해군군축조약 체결(1930.4) 이후, 하마구치 내각은 군축에 불만을 품은 군부와도 대립했다. 군부의 반발은 예상보다 거셌다. 내각은 군부가 성명서 몇 장 내는 선에서 그칠 줄 알았지만, 군부는 기어이 총을 들고야 말았다. 결국 긴축정책으로 경제의 체질을 개혁하겠다는 ‘라이언 수상’의 꿈은 군축에 항의하는 우익 청년의 총탄과 함께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제2차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의 성립(4월 14일)

    1927년 4월, 금융공황의 책임을 지고 총리직에서 불명예 퇴진했던 와카쓰키는 1931년 4월, 4년 만에 총리직에 복귀했다. 그러나 와카쓰키는 총리대신에만 두 차례 오르는 개인적 영달에 마냥 들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의 앞에는 병상의 전임자로부터 물려받은 난제가 산적해 있었다.

    우선 군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특히 만주 주둔 관동군이 불안했다. 그들이 독자적으로 무력을 행사한다면, 내각은 사전 승인은커녕 사후 통보조차 기대하기 어려운 처지였다. 군부는 이미 선출된 권력인 내각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관동군은 영국의 금본위제 정지 이틀 전인 1931년 9월 18일, 내각의 승인 없이 만주철도 보호라는 명분으로 군사행동에 돌입했고, 이는 곧 만주사변으로 비화했다. 관동군의 명분 없는 군사행동으로 일본의 외교적 고립은 더욱 심화됐다.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7), 태평양전쟁(1941), 패전(1945)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전쟁을 일본에서는 ‘15년 전쟁’이라 한다. 1931년은 바로 그 ‘15년 전쟁’이 시작된 첫해였다.

    대공황의 엄습을 받은 국내외 경제 상황 역시 암울하기만 했다. 만성적인 무역수지 적자 문제는 금본위제 복귀 이후로도 좀처럼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수출뿐만 아니라 내수시장 역시 긴축정책의 영향으로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장사가 되질 않으니 공장이 폐쇄되고, 공장이 폐쇄되니 실업자가 늘어나고, 실업자가 늘어나니 구매력이 떨어지고, 구매력이 떨어지니 장사가 더 안 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영국까지 금본위제에서 이탈했다. 일본은 금본위제로 복귀한 지 불과 1년 9개월 만에 금본위제를 유지할지 포기할지의 기로에 설 수밖에 없었다.

    금본위제 정지, 제2차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 붕괴(12월 13일)

    와카쓰키 레이지로(왼쪽)와 이누카이 쓰요시. [일본 국회도서관]

    와카쓰키 레이지로(왼쪽)와 이누카이 쓰요시. [일본 국회도서관]

    만일 일본이 영국과 보조를 맞춰 금본위제를 정지한다면, 금본위제 복귀와 긴축정책에 사활을 건 와카쓰키 입헌민정당 내각은 그날로 무너져 버릴 것이었다. 설령 정권을 내놓을 각오로 금본위제를 정지한다고 하더라도, 세계 경제가 회복되지 않는 한, 일본의 경제 상황이 호전되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렇다고 금본위제를 유지하면, 일본은행에서 인출된 금화가 세계 각국으로 흩어지고 종국에 가서는 일본의 통화제도가 뿌리째 흔들릴 것이 명백했다. 열강 다수가 금 수출을 금지한 상태인 만큼, 일본의 금화가 해외로 유출되기는 쉬워도, 외국의 금화가 일본으로 유입되기 어려웠다.

    문제는 금화만이 아니었다. 파운드화의 하락으로 경쟁력이 한층 강화된 영국산 면화는 가뜩이나 위축된 일본산 면화의 수출선을 급속히 잠식했다. 면화와 함께 일본의 대표적 수출품이던 면직물, 모직물, 견직물, 고무 제품 등도 똑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산업자본가를 중심으로 엔화 가치의 하락 곧 금본위제 정지 요청이 줄기차게 이어졌지만, 엔화 채권을 다량으로 보유한 금융자본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와카쓰키 내각은 일단 한번 버텨보기로 했다.

    “일본은 금본위제를 정지하지 않는다.”

    와카쓰키 내각이 책임지지 못할 공언을 거듭하는 동안 일본의 경제는 급속히 무너지고 있었다. 1931년 9월 20일 이후 석 달 동안 일본은 금 준비의 40%에 해당하는 금화 3억3400만 엔을 잃고 말았다. 이 석 달을 포함해 금 수출이 허용된 2년 남짓한 기간에 일본은행에서 유출된 금의 총량은 6억2000만 엔에 달했고, 남은 재고량은 고작 5억2000만 엔이었다. 이 밖에도 시중에서 유통되던 2억4000만 엔의 금화도 모두 해외로 유출됐다. 이에 따라 금화의 자유로운 인출과 수출이 당장에 금지되지 않으면, 일본 내에 금이란 금은 모조리 해외로 유출돼 버리고 결국 또 한차례 금융공황에 휘말리게 될 것이라는 위기감이 날로 고조됐다.

    결국 1931년 12월 13일, 와카쓰키 내각은 만주사변 처리 지연과 경제위기의 책임을 지고 총사퇴하고,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를 수반으로 하는 정우회 내각이 들어섰다. 일본이 금본위제 복귀한 지 2년, 와카스키 내각이 출범한 지 8개월, 영국이 금본위제에서 일탈한 지 3개월 만의 일이었다. 이누카이 총리는 취임 당일 새 내각의 첫 번째 각의 첫 번째 안건으로 금본위제의 정지 문제를 상정해 전격적으로 금 수출 금지를 결정했다. 금본위제의 정지가 얼마나 시급하고 중대한 경제 문제였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조-중 민족 갈등 폭발시킨 완바오산 사건(7월 2일)

    반만년 역사의 한민족이 가해자로 기록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1931년 7월에는 한반도 전역에서 중국인을 배척하는 폭동이 일어나 조선과 중국의 민족 갈등이 극에 달했다. 갈등의 시작은 그해 봄 만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1년 4월, 완바오산(萬寶山) 지역 산싱바오(三姓堡)로 이주한 조선 농민 200여 명은 중국인 허용더(郝永德)로부터 미개간지를 임차했다. 하지만 허용더 역시 그 땅의 지주가 아니라 임차인일 뿐이었다. 허용더가 지주와 맺은 임대차계약서 마지막 조항에는 “만일 지방정부에서 허가하지 않으면 계약은 무효가 된다”고 명시돼 있었지만, 허용더는 지방정부의 허가가 나기도 전에 임차한 땅을 조선 농민에게 재임대했다. 법적으로 허용더와 조선 농민이 맺은 계약은 무효였다.

    미개간지를 임차한 직후, 조선 농민들은 벼농사를 짓기 위해 20여 리 떨어진 이통허(伊通河)의 물을 끌어오는 수로 공사를 시작했다. 수로는 폭과 깊이가 각각 10m, 길이가 8km에 달했다. 수로가 지나가는 땅도 사유지였지만, 조선 농민은 지주에게 아무런 양해도 구하지 않고 수로 공사를 단행했다.

    중국 농민들은 당연히 반발했다. 남의 땅을 제멋대로 파헤쳐 수로를 놓는 것도 문제였지만, 멀쩡한 땅이 두 쪽으로 갈라지고, 댐을 쌓는 바람에 하천을 통한 뱃길이 막히고, 수로 부근 논밭이 상습 침수지역이 되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지방정부는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수로 공사를 중단할 것을 명령했지만, 조선 농민은 그대로 밀어붙였다.

    창춘 주재 일본영사는 법적으로 ‘일본 국민’인 조선인 보호를 구실로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 경찰 60여 명을 산싱바오로 파견했다. 조선 농민의 수로 공사는 엉뚱하게도 중국과 일본의 외교 문제로 비화했다. 일본 경찰의 보호 아래 수로가 완성되자, 격분한 중국 농민 400여 명은 농기구를 들고 800m 가량의 수로를 막았다. 일본 경찰은 수로를 파괴하는 중국 농민에게 발포했지만, 다행히 사상자는 없었다. 7월 1일의 충돌 이후, 중국과 일본이 외교적으로 옥신각신할 뿐 완바오산 일대에서 더는 무력 충돌이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불거졌다.

    1931년 7월 2일 한밤중에 간행된 ‘조선일보’ 호외는 다음과 같은 소식을 전했다.

    “산싱바오(三姓堡) 동포 수난 갈수록 심해져. 200여 동포 또다시 피습. 완공된 수로를 전부 파괴. 중국농민 우리 동포를 대거 폭행. (창춘 김이삼 특파원 급전)”

    만주 완바오산 부근 산싱바오에서 조선 농민 200여 명이 석 달 동안 피땀 흘려 닦은 수로를 중국 관민 400여 명이 모조리 파괴·매립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소식이었다. 호외는 이튿날 밤에도 이어졌다.

    “중국 관민 800여 명과 200여 명 동포 충돌 부상. 대치한 중·일 관헌 한 시간 여 교전. 중국 기마대 600여 명 출동. 급박한 동포 안위. (창춘 김이삼 특파원 급전)”

    수로 파괴 이후 중국 관민 800여 명과 조선 농민 200여 명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다수의 조선 농민이 ‘살상’됐고, 150m 거리를 두고 대치하고 있던 일본 경찰과 중국 경찰 사이에 교전이 발생했다는 소식이었다. 호외에 적힌 대로라면, 야박한 중국인은 먹고살 길을 찾아 고향을 등지고 만주로 이주한 조선 농민의 생활 터전을 짓밟는 것으로도 모자라 목숨까지 빼앗은 셈이었다. 연이틀 한밤중에 간행된 호외는 조선인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중국인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했다.

    완바오산 사건의 발단이 된 수로(왼쪽)와 7월 5일 중국인 배척 폭동으로 폐허가 된 평양 중국인 거리.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서문당, 1996]

    완바오산 사건의 발단이 된 수로(왼쪽)와 7월 5일 중국인 배척 폭동으로 폐허가 된 평양 중국인 거리.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서문당, 1996]

    조선일보의 최악 오보와 중국인 배척 폭동(7월 5일)

    흥분한 사람들은 전보의 발신지가 ‘산싱바오’가 아니라 ‘창춘’인 것을 눈여겨 살필 겨를이 없었다. ‘조선일보’ 창춘 특파원 김이삼은 일본영사관에서 제공하는 정보를 사실 확인 절차조차 거치지 않고 서둘러 타전했고, 서울의 본사 편집국은 전보만 믿고 부랴부랴 호외를 간행했다. 너무 서둘러 간행한 나머지 ‘부상’이 ‘살상’으로 오기된 것조차 걸러내지 못했다.

    한국 역사상 최악의 오보는 엉뚱한 곳으로 불똥이 튀었다. 첫 번째 호외가 간행된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은 7월 3일 새벽 2시, 인천 율목리 중국인이 경영하는 호떡집 앞에 격분한 조선인들이 몰려들어 돌을 던졌다. 유리창이란 유리창은 모조리 깨졌고, 잠결에 놀라서 뛰쳐나온 중국인은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구타당했다. 성외리, 중정, 용강정 등 7곳에서 중국인 폭행 사건이 발생했다.

    인천에서 시작된 중국인 배척 폭동은 이튿날부터 전국적으로 번졌다. 7월 3일 밤부터 4일 오전까지 서울에서만 55건의 폭행과 기물파손 사건이 발생했고, 47명이 검거됐다. 7월 4일 밤 평양에서는 6건의 중국인 폭행 사건이 발생했고, 중국인 5명이 중상을 입었다.

    최악의 상황은 7월 5일 평양에서 발생했다. 평양시내가 사실상 무정부 상태에 놓인 그날 밤, 중국인 119명이 사망, 163명이 부상, 63명이 실종됐으며, 방화 49건, 가옥 파괴 289건, 재산 손실 250만 원이 발생했다. 뒤늦게 폭동 주동자 색출에 나선 경찰은 1200여 명의 조선인을 검거하는 기염을 토했다.

    ‘조선일보’ 호외 이후 인천, 서울, 평양, 진남포, 부산, 전주, 대구, 개성, 사리원, 원산, 함흥, 흥남, 청주, 공주, 이리, 군산, 안주, 재령, 신의주, 의주, 선천, 수원, 청주, 춘천, 마산, 선천, 운산, 해주, 안변 등 전국적으로 400여 회의 중국인 배척 폭동이 일어났다. 심지어 재일 조선인들이 일본에 있는 중국인들을 폭행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일주일 남짓 지속된 중국인 배척 폭동으로 전국적으로 중국 국민당 정부 추산 142명의 중국인이 사망했고, 546명이 부상당했고, 91명이 실종됐다. 조선에 있던 7만여 명의 중국인 중 1만7000여 명이 영사관에 피신했고, 재산 피해도 400만 원에 달했다. 인명 피해의 대부분은 7월 5일 밤, 무정부 상태에 놓인 평양에서 발생했다.

    역사적 분기점에 창간된 ‘신동아’

    지나고 보면, 다사다난하지 않은 해는 드물다. 하지만 ‘1931’년은 조선, 일본, 세계 어느 관점에서 보건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던 시기, 역사의 분기점이었다. 세계 대공황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던 시기, 세계 각국은 경제공황 타개를 위해 금본위제 정지와 같은 극단적인 선택도 서슴지 않았고, 독일의 전쟁 채무 문제는 독일의 재무장을 부추겼다. 경제공황이 장기화하면서 일본 정국은 군부 주도의 파시즘으로 기울었고, ‘15년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그렇듯 역사적 분기점에 놓인 시기, 정치적 중립과 조선 민족의 공기(公器)임을 표방하며 출범한 잡지가 ‘신동아’였다.

    #신간회 #금본위제 #신동아

    전봉관
    ● 1971년 부산 출생
    ● 서울대 국문과 졸업, 동 대학 석·박사(국문학)
    ● 서울대, 아주대, 한신대, 한성대, 덕성여대에서 강의
    ● 現 KAIST(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 저서 : ‘황금광시대’ ‘경성기담’ ‘럭키 경성’ ‘경성 자살 클럽’ ‘경성 고민 상담소’ 등
    ● ‘신동아’ 2005년 7월호부터 2008년 10월호까지 ‘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 가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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