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호

희망과 만남의 열매 여는 향유네 포도밭

  • 김광화 농부 flowingsky@naver.com

    입력2007-10-04 16: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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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과 만남의 열매 여는 향유네 포도밭
    나는 가끔 귀농과 관련해 사람들 앞에서 강의할 때가 있다. 그 내용은 주로 자녀 교육이지만 강의가 끝나면 이런저런 질문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도시 살다가 시골에 살고자 할 때 궁금한 게 어디 한둘이랴. 그 가운데 빠지지 않는 질문 하나, 바로 돈 문제다.

    “시골 내려오면서 돈이 얼마 들었나요?”

    선뜻 답하기가 어렵다. 얼마 들었는지 가계부를 쓴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내려오고자 하는 사람의 질문 의도를 파악하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돈 문제란 누구에게나 예민한 문제가 아닌가. 그럼, 내가 되묻는다.

    “그렇게 물어보시는 분은 얼마를 예상하시나요?”

    갑자기 되묻는 말에 당황하며 한다는 말.



    “저는 돈 가진 거 별로 없어요.”

    자신이 돈이 많다고 흔쾌히 자랑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본인은 말을 그렇게 하지만 돈 문제를 물어보는 사람은 어느 정도 경제력이 있는 경우다. 자신이 가진 수준에서 이리저리 계획을 세우기 위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면 서로 이야기하기가 편하다. 사실 땅 사고 집 짓고, 자리 잡는 과정에 적지 않게 돈이 든다. 다만 우리 식구는 남보다 한발 먼저 내려왔기에 땅값도, 집 짓는 자재 값도 지금보다 훨씬 싼 덕을 보았다고나 할까.

    향유네 포도밭의 탄생

    아무리 시골 땅값이 올랐다 해도 도시만큼 오르기는 어려울 거다. 도시에 작으나마 집 한 칸이라도 있는 사람은 농사지을 땅과 집을 마련하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으리라 본다. 내 집은 고사하고 전세거리조차 변변하지 못한 사람은? 이런 분들에 대해서는 나 또한 조심스럽다.

    그럴 때 언뜻 떠오르는 이웃이 있어 그 이야기를 대신한다. 시쳇말로 가진 거라고는 뭐 두 쪽밖에 없이 맨몸으로 땅에 뿌리내린 이웃. 경북 상주에서 포도 농사를 짓는 향유네다. 향유는 일곱 살 여자아이. 아버지 박종관(朴鍾寬·37)씨와 어머니 김현(金賢·37)씨가 한가족이다. 이들 부부는 아이 이름을 따 향유아빠, 향유엄마로 불리길 좋아한다. 자신들이 가꾸는 포도 이름도 향유포도요, 술은 향유포도주다.

    충북 영동에서 황간 쪽 백화산을 넘어가면 경북 상주다. 향유네는 바로 백화산 그 언저리에 산다. 내가 향유네를 안 지는 제법 시간이 흘렀다. 얼추 8~9년. 그동안 나는 이 집 식구와 한 해 두세 번 만나는 사이가 됐다. 올해는 연수다 교육이다 해서 벌써 세 번이나 만났다. 상주는 내 고향이기도 해서 추석 고향 가는 길에 만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멀리 살아도 이제는 이 집 식구들이 어찌 사는지를 어느 정도 안다.

    인터뷰를 하려니 약속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향유네는 워낙 바쁘게 일하는 터라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눌 처지가 아니었다. 낮에는 일로 바쁘고 밤에는 고단해 쓰러져 자는 나날들. 게다가 9월은 포도를 따기 시작하는 때다. 포도 농사로만 돈을 만들어내는 향유네는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랄 판이다. 때로는 잠을 미루면서까지 일을 해야 할 정도. 결국 일을 같이 하면서 이야기하기로 날짜를 잡았다. 마침 내가 향유네를 간 날은 비가 오락가락했다. 좀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향유네 밭에 도착하니 포도가 주렁주렁 익어간다. 포도보다 더 눈에 띄는 건 아무래도 건물이다. 올봄에 지은 창고 두 채가 밭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다. 나는 이 건물이 향유네가 맨손으로 세우다시피한 걸 알기에, 건물 구석구석이 다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시골은 조상 대대로 살아와 땅이 있고 집이 있어도 못 살고 떠나는 곳이다. 그곳에 종관씨는 몇 백만원도 아닌 단돈 20만원을 들고, 대학 졸업식 바로 다음날 시골로 내려간다. 그가 다닌 대학은 농과대도 아니고 신학대였다. 그는 대학 생활 동안 기독교의 폐쇄적인 분위기와 종교적 위선에 숨이 막히고 괴로워했다. 그러다가 정농회(正農會, 대표 임락경)를 알게 되고, 김복관 선생을 비롯한 정농회 어른들과 만나면서 희망을 갖는다. 묵묵히 땅을 일구며 세상을 섬기는 어른들. 종관씨는 그분들에게서 빛을 보았고, 그분들 뒷모습만 보아도 힘이 난다고 했다.

    달가운 머슴살이 3년

    희망과 만남의 열매 여는 향유네 포도밭

    비가 오는데도 풀을 베는 향유아빠. 머슴 살 때는 그러지 않았는데….

    그러나 바르게 사는 길만 확인했지 손에 가진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이 살 곳을 찾아 전국을 돌다 경북 김천에서 유기재배 포도농사를 짓는 김성순 선생을 만나게 된다. 그분 도움으로 종관씨는 머슴살이를 시작한다. 스물일곱 나이에. 낫 한 번, 호미 한 번 잡아본 적이 없던 사람이 밑바닥부터 시작하겠다고.

    머슴. 요즘에는 참 낯선 단어다. 내가 자라던 1960년대엔 동네마다 머슴이 흔했다. 땅이 없어 가난한 집 아들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부잣집에 들어가 그 집의 농사일과 잡일을 해주는 머슴살이였다. 한 해가 끝나면 새경을 받곤 했다. 한창 자랄 때인 사춘기 무렵부터 머슴살이를 하다가 점차 독립한다.

    우리 사회가 공업화의 길을 걸으면서 시골에서 머슴이 사라졌다. 종관씨가 머슴살이를 시작한 해가 1998년이니 요즘 세상에 머슴이란 ‘오래된 미래’라고 할까. 머슴이라면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지만, 일도 배우면서 최소한의 생활을 꾸릴 수 있으니 종관씨는 달갑게 머슴살이를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결혼 문제가 마음에 걸렸다. 김현씨와 결혼해서 같이 농사짓기로 했는데, 식을 올릴 형편이 못 되었다. 나중에 형편이 나아지면 식을 올리기로 하고 같이 살기로 한다. 그러자 농장 주인인 김 선생이 마음을 써주셨다. 결혼은 인륜지대사이니 꼭 식을 올리라고 하면서 마을 빈집도 소개하고, 우선 급하게 결혼자금으로 쓰라고 300만원을 빌려주셨다.

    부모 도움을 받을 형편이 못 되는 상황에서 그렇게 큰일들을 한꺼번에 치러냈다. 믿었던 부모님은 때마침 터진 외환위기로 사업이 어려워졌고, 집안의 큰아들인 종관씨는 오히려 부모를 뒷바라지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모든 게 낯설었다. 몸도 마음도 다시 태어나야 하고, 기술도 익혀야 했다. 부부 관계도 시작이니 서로 알아가는 과정이요,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것도 아주 큰일이었다. 부부는 젊음 하나 믿고, 척박한 농촌에 적응해가야 했다.

    그러면서 조금씩 독립의 길로 나아갔다. 머슴 일을 줄이면서 독립해서 할 수 있는 농사의 규모를 늘려가는 식으로. 두 번째 해는 주중에는 머슴으로 일하고 주말에는 제 농사를 따로 지었다. 남은 쉰다는 주말이지만 이들 부부에게는 1분이 아까웠다. 달 밝은 밤이면 달빛이 아까워서라도 일을 했다. 남의 일을 하는 거와 자신의 일을 하는 거는 다를 수밖에. 월급쟁이와 경영자의 차이라고 할까. 생산, 선별, 가공, 유통, 서비스 등 전 과정을 자신들이 책임지는 거다.

    서러운 임차농, 그 막막함이란

    그러다가 머슴살이 3년 만에 김 선생에게서 독립한다. 지역도 김천에서 상주로 옮겼다. 하지만 완전히 독립한 것은 아니다. 시간의 독립일 뿐이었다.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자신들 마음대로 시간을 조절한다는 것일 뿐, 땅은 여전히 남의 땅을 빌려야 했다.

    그런 조건에서 꾸준히 농사를 지어 기술을 익히고, 독립된 판로를 개척할 만큼 외연을 넓혔다. 그 사이 향유가 태어났다. 향유엄마는 아기가 태어난 걸 기뻐했지만 향유아빠는 기쁨은 잠깐, 부양해야 할 식구가 늘어난 거에 대한 부담이 더 컸다.

    남의 땅에 농사짓는 사람의 마음은 겪어보지 않으면 알기 어렵다. 땅 주인이 환경농업에 대한 이해가 있고 장기 임차가 가능하다면 그나마 아주 좋은 조건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땅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그것도 환경농업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당시에는.

    땅이란 공산품과 달리 아무거나 선택할 수 없다. 인연이 닿아야 하고, 때가 맞아야 한다. 임대하는 땅은 조건이 더 열악할 수밖에 없다. 땅 주인도 농사를 짓지 못해 버려둔 땅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교통이 안 좋다거나 땅 힘이 약하다거나 흠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도 땅 주인은 주인대로 욕심을 낸다.

    풀약(제초제)을 쳐서 풀을 태우듯이 하며 농사짓던 주인은 향유네 농사 방식이 못 마땅했다. 향유네는 초생재배(草生栽培)를 한다. 풀이 ‘적당히’ 있는 게 좋다는 거다. 풀이 있음으로 땅의 온도가 자연스럽게 조절되고, 풀뿌리는 흙이 쓸려가는 걸 막아주며, 풀이 많이 자라면 베어 거름으로 쓰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인은 풀이 있다면 그 풀이 거름을 다 빨아먹는다고 여긴다. 주인 눈에 풀이 보이면 곧장 잔소리를 해댄다. ‘풀 키우냐? 풀약 쳐라.’ 그렇다고 향유네는 독약이나 다름없는 제초제를 뿌릴 수는 없었다. 양심이 허락을 하지 않는 거다. 그럼, 주인은 ‘내년에는 밭을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농사를 지어보면 알지만, 땅을 살리는 일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 한두 해 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비료와 제초제로 땅이 척박해진 곳일수록 더 많은 노력과 애정을 기울여야 한다.

    땅 주인에게 사정하다시피 설득하고 나면 다음은 ‘임차료를 올려달라’라는 말이 나온다. 농업이란 내 땅에 농사를 지어도 돈 만들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 아닌가. 임대차 계약을 하고 농사를 시작했지만 적지 않은 부담에 전전긍긍할 수밖에.

    희망과 만남의 열매 여는 향유네 포도밭

    향유의 글자놀이. 삶이 온전히 묻어나는 놀이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가슴 아픈 건 앞날의 막막함이다. ‘내년에 이 밭에서 계속 농사지을 수 있을까?’ 장기 계획은 고사하고 한 해 앞을 내다보기 어렵다. ‘내 의지와 달리 뿌리내리지 못하는 뜨내기 농사꾼이 되면 어쩌나….’ 이따금 벼랑 끝에 몰리는 느낌을 받곤 한다.

    “그때 아내가 예전에 일하던 보육원에서 러브콜이 왔어요. 교사를 다시 해보지 않겠느냐고. 잠시 흔들렸어요. 여기를 떠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지더라고요. 떠나야 하는 이유가 다른 것도 아닌 돈이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러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유혹이 왔을 때 사람이 솔직해진다는 걸 깨달았어요. 우리가 여기를 떠나지 않고 부여잡고 있는 게 무언가. 곰곰이 돌아보니 그건 ‘만남’이었다고 봐요. 저희 부부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 스승이 있었고, 같은 길을 가는 동지들을 만난 거지요.”

    당장 눈에 보이는 현실은 여전히 암담했지만 나아가야 할 길은 더욱 분명했다. 그렇게 향유네는 몇 년 사이 땅을 다섯 번이나 옮겨 다녔다. 그러다가 지난해, 시골 내려온 지 9년 만에 드디어 자신들이 농사지을 땅을 장만하기에 이르렀다. 등기권리증을 손에 쥐는 순간 얼마나 기뻤을까. 농사꾼으로서 확실하게 뿌리내릴 준비가 된 거다. 땅 규모도 제법 커 9500㎡(3000평 정도).

    몸살과 급물살

    돈이 만만치 않게 들었다. 물론 대부분 융자돈이다. 농업기반공사의 FTA 정책자금으로, 3% 이자로 30년 동안 갚기로 약속한 조건이지만 향유네 처지에서는 행운에 가깝다. 해마다 갚아야 할 이자가 그동안 자신들이 소작농을 하면서 냈던 임차료보다 적은 데다, 마음껏 땅을 살릴 수 있으니까.

    곡식이나 나무를 옮겨 심으면 한동안 ‘몸살’이라는 걸 한다. 환경이 바뀜에 따라 큰 뿌리는 물론 작은 뿌리가 많이 손상되고, 흙도 물도 심지어 햇살도 낯설다. 그곳에 이미 뿌리내린 또 다른 식물이 있을 때는 더 몸살을 한다. 그렇지만 향유네는 몸살이라면 누구보다 단련된 사람들이다.

    “7년생 묘목을 옮겨 심은 적이 있어요. 1~2년생 묘목이랑 아주 달라요. 첫해는 몸살을 하지만 그게 끝나고 나면 죽죽 뻗어가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거예요. 내재된 힘이랄까 가속도가 느껴지거든요. 땅을 마련한 요즘, 저희 삶도 급물살을 타는 것 같아요.”

    땅을 샀다니까 마을 사람들이 향유네를 바라보는 눈부터 달라진다. 선뜻 마을 사람으로 받아들인다. 마을에 젊은이가 드무니 당장 새마을 지도자라는 감투를 쓰게 된다. 그 자리가 무슨 큰일을 하는 거는 아니지만 마을 어른들이 한동네 사람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리라.

    이제는 ‘내 땅’이니 그곳에 농사는 물론 집도 ‘마음놓고’ 지을 수 있다. 돈이 없어도 형편대로 조금씩 지어갈 수 있다. 향유네는 올봄 창고를 먼저 지었다. 시골 내려오자마자 집부터 먼저 짓는 사람도 많지만 향유네는 아무래도 일이 먼저일 수밖에.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골집이 좁기는 하지만 당장 살아가는 데는 큰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

    창고를 두 채 손수 지었다. 24평짜리 창고는 두 칸으로 저온저장과 가공을 할 수 있게 지었다. 그리고 또 한 채는 집 지을 동안 식사도 하고 손님도 맞이할 수 있는 살림창고. 향유엄마는 지금 두 집 살림을 한다. 잠은 원래 살던 집에서 자고, 일과 대부분의 살림은 새로 지은 살림창고에서 한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빗줄기가 가늘어지자, 향유아빠는 밭 둘레 풀을 베야 한다며 일어선다. 저녁에는 창고 집 2층 방에서 좀더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힘겨운 ‘이웃 유치 작전’

    자신들이 농사지을 땅과 거처가 마련되자 향유아빠의 발걸음은 좀더 빨라진다. 그동안은 자기 가족의 ‘생존’을 위해 허덕였다면 이제는 눈을 돌려 자신을 필요로 하고 또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을 하려 한다. 전국 조직인 정농회에서는 청년위원장을 맡고, 마을에서는 젊은 사람을 이웃으로 맞이하기 위한 ‘이웃 유치 작전’을 벌였다. 아이가 있는 젊은이 서너 가정만 서로 어울릴 수 있다면 좀더 나은 교육 환경이 되리라는 희망으로, 틈틈이 집과 땅을 보려 다녔다. 지역 주민들과도 폭넓게 어울리기 위해 최근에는 ‘백화산을 사랑하는 모임’에도 참석한다.

    향유네가 뿌리 뻗는 모습이 새삼 눈에 선하다. 땅 없는 서러움을 느꼈기에 더 빨리 뿌리를 내리는 걸까. 이 집은 이제 고민이 없을 거 같다. 그렇게 말했더니 향유아빠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렇지 않아요. 여전히 농사가 어려워요. 한다고 하지만 농사에는 워낙 변수가 많잖아요. 농사도 그렇지만 요즘 제가 가장 어려운 건 사람관계예요.”

    향유아빠가 조심스럽게 털어놓은 어려움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실명을 거론하면 또 다른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울 거 같다. 여기서는 다만 땅에 뿌리내리면서 누구나 이웃과 부딪칠 수 있다는 점만을 살펴보자.

    희망과 만남의 열매 여는 향유네 포도밭

    정농회 연수장에서 사회 보는 박종관씨. 기타 연주 실력이 일품이다.

    향유아빠의 이웃 유치 작전으로 많은 사람이 향유네를 방문했고, 함께 집과 땅을 둘러보았다. 그 과정에서 아이를 가진 세 가구가 이웃으로 이사를 왔다. 함께 마을 빈집도 수리하고 전기와 상하수도도 새로 설치하면서 이웃과 어울려 살 꿈에 부풀었다. 하지만 사람 관계란 그리 만만한 게 아니라는 걸 향유네는 실감한다.

    그 요점은 상대방이 원하는 만큼만 도와주기가 쉽지 않다는 거다. 적으면 적어서 서운하기도 하겠지만, 더 문제가 되는 건 넘쳐서 나타나는 갈등이란다. 누군가 도시를 떠나 시골에 살려고 하면 그 나름대로 뚜렷한 개성을 지니고 있게 마련이다. 쉽게 말하면 자기 빛깔대로 살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리고 요즘 세상은 남을 도와주는 데 삶의 보람을 느끼는 사람도 적지 않다. 누군가에게서 도움을 받기만 한다면 자신의 삶이 더없이 초라하다고 느껴지는 게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선을 넘는 도움은 자칫 간섭으로 비친다.

    “그러면서 나의 뒷모습을 본 거지요. 말로는 조건 없이 돕는다고 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계산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도와준 만큼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거는 그렇다 치고, 나를 오해할 때는 그 사람이 미워지더라고요. 그러다가 누군가를 미워하는 나를 발견하는 순간에는 ‘나 자신이 이거밖에 안 되는가’ 싶어 괴롭기도 하고. 그러면서 내가 아직 사람이 덜되었구나, 이웃에게 뭔가를 베푼다는 게 또 다른 집착과 묶여 있다는 걸 발견하지요.”

    향유네 포도주

    이야기가 깊어지자 향유엄마가 자신들이 손수 빚은 포도주를 내놓는다. 향유는 낮에 얼마나 뛰어놀았는지 어느새 곤히 잠들었다. 향유네 포도주는 주정이나 다른 화학 첨가제를 전혀 넣지 않는다. 그것도 유기재배한 포도로 빚은 와인이다. 1년 숙성을 한 다음 시장에 내놓는다. 나는 지난해 향유네 포도주 맛을 보고 완전히 취해버렸다. 알코올에 취한 게 아니라 맛 자체에 취한 거다.

    이후 나로서는 향유네 포도주만한 술맛을 보기가 어려웠다. 우리 혀는 신기하게도 맛을 오래 기억하는 거 같다. 한번 좋은 맛을 보면 그 맛을 쉽게 잊지 못하는 특성이라고 할까.

    그런데 이번에 맛본 향유네 포도주는 지난해 그 맛이 아니다. 쌉쌀한 맛이 조금 더 돈다. 알코올 도수는 지난해보다 더 높은 거 같지만 지난해만큼 당도가 높지 않다. 이럴 때 맛이 드라이하다고 하는가. 하지만 당도나 알코올 도수 이면에는 훨씬 많은 변수가 있지 않겠나.

    흔히 와인을 마실 때 하는 이야기가 있다. 먼저 눈으로 빛깔을 음미하고, 그 다음 코로 냄새를 맡고, 술을 한 모금 입에 넣은 다음 혀로 굴러가며 맛을 본단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맛은 이런 거다. 오감 이전에 삶에서 느끼는 맛이랄까. 향유네가 땅을 옮기면서 생긴 차이이리라. 땅에 따라 곡식이나 과일 맛이 다르다. 똑같은 유기농산물이라도 찬찬히 맛을 보면 천차만별이다. 퇴비를 무엇으로 하는가, 얼마나 땅을 돌보는가, 땅 주인이 어떤 마음으로 농사를 짓는가, 그 해 날씨가 어떤가에 따라 맛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꽤나 까다로운 것 같지만 그렇게 맛보는 재미는 또 다른 즐거움을 준다. 향유네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는 부분은 향유네가 땅을 구하고, 나무를 돌보면서 느꼈던 즐거움이라 여긴다. 쌉쌀함은 땅 마련 과정에서 고생한 부분, 이웃 사이에 관계 맺기에서 오는 어려움, 그리고 가뭄이나 긴 장마 또는 태풍으로 마음 졸이는 맛으로 느끼고 싶다.

    돈이 아닌 ‘그 무엇’

    향유네는 포도와 포도주를 생협에 대부분 내다주고 일부는 직거래로 판다. 지난해 향유네가 돈으로 거둔 총매출액은 약 3000만원, 이 가운데 경비를 뺀 소득은 2000만원 남짓. 도시 기준에서는 얼마 안되겠지만 자급을 추구하는 시골살림에서는 적지 않은 돈이다. 부부가 그만큼 억척같이 일했으며, 소비자와 관계 맺음에도 그만큼 정성을 들였다는 말이다.

    농산물을 돈으로 바꾸는 게 농사꾼의 현실이지만 향유네는 돈을 뛰어넘는 ‘그 무엇’에 대한 기대가 있다. 농사꾼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거지만 농산물을 생산하고 또 넘길 때 오는 느낌이 있다. 마치 정성 들여 키운 자식을 출가시키는 마음이랄까. 한 해 동안 애지중지 키워, 멀리 내 보내는 그런 마음.

    향유네가 바라는 ‘그 무엇’을 하나로 말하기는 어렵다. 만남일 수도 있고, 나눔일 수도 있다. 돈과 농산물만 오고가는 것이 아니라 정과 믿음이 쌓여가길 바란다. 서로가 서로에게 고마워하고 또 감사하는 관계. 하루아침에 그렇게 되기란 쉽지 않지만 차츰 그 방향으로 나아간다.

    향유네도 손님을 많이 치른다. 다만 이 집만의 특색이라면 놀러오는 손님이 아니라 일을 함께 하는 손님들이라는 사실이다. 가장 바쁜 9월에는 거의 날마다 손님이다. 이맘때가 향유네에 일이 가장 많은 철이다. 포도를 따고, 터진 알갱이를 떼어내고, 상자에 담고, 나르는 일이 산더미 같다.

    “일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면 참 좋은 거 같아요. 소통이 한결 잘된다고 할까. 몸을 움직이니까, 말도 쉽게 나오고 더 친해지고. 소심한 사람도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하게 되고. 중간에 이야기가 끊겨도 일하고 있으면 어색하지가 않잖아요? 어떤 때는 차 한 잔 나누며 이야기하다 보면 손님이 먼저 손을 잡아끌기도 해요. 일하면서 이야기하자고(웃음). 사무실에서 머리만 쓰다가 땀 흘리니 기분이 좋은가 봐요.”

    희망과 만남의 열매 여는 향유네 포도밭

    가까운 이웃이자 2급 청각언어 장애우인 유준태씨에게 수화를 배우는 향유아빠. 수화는 또 다른 만남이자 소통 방식이다.

    향유네는 물물교환도 좋아한다. 그렇다고 이 집 식구들이 단순하게 원시 유통으로 돌아가자는 건 아니다. 각자가 생산한 물건은 그것이 무엇이든 소중하다. 쌀이든 책이든 잡지든 그릇이든 옷이든, 그 모두가 만든 이의 땀이 밴 게 아닌가. 물건을 나눔으로써 얻게 되는 소통과 만남은 그 깊이가 한결 깊을 수밖에 없다. 어떤 손님은 자신들이 쓰는 포도 상자에 디자인을 해주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인터넷 홈페이지(www.hyangyou.net)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나 역시 이번에 향유네 가면서 우리 식구가 농사지은 감자 한 상자를 가져갔고, 돌아오는 길에 포도 한 상자를 받아왔다.

    일곱 살 향유의 원시예술

    이야기를 나누다가 향유네는 잠을 자러 집으로 돌아가고, 나는 창고 집 위층에서 잠을 잤다. 다음날 새벽에 억수같이 퍼붓는 빗소리에 잠이 깼다. 지붕이 컬러 강판이라 빗소리가 유난히 더 크게 들린다. 날이 조금씩 밝아오고, 빗방울이 가늘어지자 산책 삼아 우산을 들고 방을 나섰다.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굵어가며 향유네 창고 집을 감싸고 있다.

    마당으로 나서는데 한 귀퉁이에 작은 돌멩이가 옹기종기 놓여 있다. 지나다 보니 향유가 놀던 흔적이라는 걸 쉽게 느끼게 된다. 그런데 무슨 놀이를 했을까? 언뜻 보아서는 모르겠다. 그런데도 뭔가가 있는 그런 모습. 무질서한 듯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떤 질서가 느껴진다.

    향유한테 물어볼 생각으로 즉석에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그러고는 사진 상태가 어떤지 알아보려고 LCD창을 켜고, 조금 전에 찍은 사진을 다시 본다. 아, 뭔가 있다. 마당에서 넓게 보았을 때는 희미하던 모습이 작은 LCD창에 집약되어 나타나니 향유가 무얼 했는지를 읽을 수 있다.

    글씨놀이를 한 거다. 사람 이름을 쓴 것인데 가운데 두 글자는 보다 선명하게 보인다. ‘박’ ‘종’이다. 아하, 향유아빠 이름을 쓴 거로구나. 그럼 가운데 맨 뒤 글자는 ‘관’이다. 자세를 바꾸어 보니 나머지 글자도 차츰 눈에 들어온다. 글자 한 자 크기가 팔뚝만하다. 맨 위 글자는 박향유, 맨 아래가 김현이다.

    나도 모르게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어쩌면 무슨 동굴 벽화에 나오는 알 듯 모를 듯 원시 기호를 다시 보는 느낌이랄까. 현대인의 기준으로 보면 엉성하고 조악한 기호이지만 당시 상황을 가정하면 많은 해석이 가능하지 않겠나. 그렇기에 그 나름대로 예술적 가치를 가진다고 본다. 그런 기분으로 나 역시 향유 글씨를 어린이가 그린 ‘원시예술’로 보고 나 나름으로 해석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식구 가운데 맨 위에 자신의 이름을 올린 거는 자기 존재감이 뚜렷이 드러난 거라 믿는다. 가끔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보다 보면 아이 심리 일부를 읽을 수 있다. 엄마를 지나치게 크게 그리고 자신은 아주 작게, 그리고 아빠는 아예 그림에서 빠지는 그림을 본 적도 있다. 이런 경우 집안에서 엄마가 차지하는 비중을 아이가 지나치게 크게 느낀다는 걸 말해준다. 그건 엄마에 대한 두려움일 경우가 많다. 억압적이거나 잔소리가 심하다면 아이는 작아질 수밖에 없다. 아버지가 빠지는 건 이른 아침 집을 나가 늦은 밤에 들어오니 존재 자체가 희미하기 때문일 게다.

    그런 각도에서 ‘향유 작품’을 보자면 향유만의 당당함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아빠 이름이 엄마보다 먼저이고 그 글씨도 한결 또렷하고 크다. 부모 두 사람을 굳이 견줄 필요는 없지만 여기서는 내 해석을 확장해본다. 시골에서는 식구가 함께하는 부분이 많고, 또 아빠가 차지하는 비중이 클 수밖에 없다. 그동안 향유는 부모가 땅을 일구고 집을 여러 번 옮기며 수리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 과정에서 향유 엄마 몫도 컸겠지만 아빠 모습은 한결 더 크게 보였으리라. 무엇보다 이곳에다가 자신들의 땅을 마련했고, 그 땅에 처음으로 자신들의 창고 집을 지은 거다. 집짓는 과정을 지켜본 향유로서는 아빠라는 존재가 얼마나 크게 보였을까.

    이를 잘 보여주는 건 글씨놀이한 바로 곁에 향유가 지은 ‘건물’이 있다. 이것 역시 향유가 놀이 삼아 지은 건물이다. 부모가 창고 집을 짓다가 남은 벽돌을 가지고 집짓기놀이를 한 거다. 레고 블록처럼 쌓아올린 건물.

    놀이 삼아 향유 자신도 집을 지어보면서 얼마나 흐뭇했을까. 아빠가 집을 지었듯이 자신도 집을 지을 수 있다는 뿌듯함. 지금 자신이 지은 집은 작지만 자신이 자라 어른이 되면 아빠처럼 큰 집을 지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지 않았을까.

    아이들은 어른들 삶에서 많은 걸 보고 배운다. 말로 하지 않아도, 억지로 가르치지 않아도…. 그리고 그걸 표현하고 싶어 한다. 말이든, 그림이든, 조각이든, 노래든, 몸이든…. 향유 작품 덕분에 즐거운 감상을 했다.

    별명을 붙인다면 ‘겸사겸사’

    희망과 만남의 열매 여는 향유네 포도밭

    향유를 목말 태우고 덩실덩실. 아버지와 딸 가운데 누가 더 기분이 좋은 걸까?

    이 집 부부를 보면서 부러운 게 있다. 부부 사이가 참 좋다. 연수든 교육이든 부부가 늘 붙어 다닌다. 향유도 당연히 함께 다닌다. 이런 모습은 보는 것만 해도 기분이 좋다. 보통 시골에 살면 곡식이나 동물에 매인다거나 일이 바빠 부부가 함께 집을 비우고 어디를 가기가 어렵다. 또 사람에 따라서는 약간 가부장적인 문화도 남아 있어 남자들이 주로 모임에 나온다. 향유네는 그런 점에서 아주 자유롭고 당당하다. 이번 여름 연수 때도 그랬다. 향유아빠는 연수회 전체 진행을 보기도 하고, 기타 반주를 하며 분위기를 돋운다. 향유엄마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연수회에 참여해 뒷일을 열심히 한다.

    향유엄마는 시골 살림에도 잘 적응한다. 재래식 화장실을 불편해하지 않으며, 냇가에서 빨래하는 걸 즐거움으로 여길 정도다. 게다가 제철 음식과 자연의학에 매력을 느껴 지금 삶을 행복해한다. 여름밤이면 반딧불이 나는 모습을 즐기고, 밭가는 길을 향유랑 걸으며 온갖 호기심에 들뜨곤 한다.

    한마디로 향유엄마는 농촌 생활에 별 어려움을 못 느낀다. 그래도 바람은 있다.

    “향유아빠는 일에 너무 매달려요. ‘일만 하면 소, 공부만 하면 도깨비’라는 말도 있잖아요?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식구가 함께 도서관에도 가고 하면 좋은데 그렇게 말하면 나랑 향유랑 둘이서만 다녀오래요. 자기는 일해야 한다고. 어쩌다가 나들이를 가더라도 편하게 지내지를 못하고 다른 일이랑 꼭 겹쳐서 볼일을 보려고 해요. 그래서 내가 향유아빠에게 붙인 별명이 ‘겸사겸사’예요(웃음).”

    그리고 향유가 커가면서 기쁨도 많지만 고민도 하나둘 생긴다. 마을에 또래 아이들이 늘어나면서 활기가 넘치지만 향유가 학교를 다닌다면 풀어가야 할 숙제들. 그 가운데 하나가 학교 운동장에 나는 풀을 없애는 문제다. 한번은 향유를 데려오려고 병설 유치원에 갔는데 학교 관리인 아저씨가 아이들이 놀고 있는 곁에서 제초제를 치더란다. 환경농업을 하는 사람들은 제초제가 얼마나 독성이 강한지를 뼈저리게 안다.

    새 세계를 여는 만남

    그런 독약을 아이들이 놀고 있는 곁에서 뿌리고 있는 거다. 향유엄마는 너무 놀란 나머지 교장선생님에게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교장선생은 아이들이 학교에 없는 사이에 치겠다고 답변을 했지만 영 찝찝한 게 사실이다. 또 하나는 학교 급식이다. 아이가 학교 급식에 익숙하다보니 집에서 엄마가 해주는 음식을 잘 안 먹는다는 거다. 이 집 부부는 기회가 되면 학교 운영위원으로 참여해 학교 급식 문제에도 관여하고 싶단다.

    희망과 만남의 열매 여는 향유네 포도밭
    김광화

    1957년 경북 상주 출생

    한양대 경제학과 졸업

    1996년 서울을 떠나 1998년부터 전북 무주에서 자급자족 농사

    정농회 회원

    저서 : ‘아이들은 자연이다’


    종관씨네 부부는 이제 30대 중반. 젊은 부부가 맨손으로 내려와 서로 의지하고 산 지 10년. 신뢰를 쌓으며 이웃과 사회로 뻗어가는 향유네 모습이 아름답다. 그러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힘은 향유네가 성실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삶의 근본을 돌아본다면 거기에는 자연이 있다. 향유네를 보면서 새삼 느끼는 건 자연은 땀 흘린 만큼 정직하게 되돌려준다는 사실이다.

    이제 이들 부부는 과일나무로 견주자면 가장 왕성하게 열매 맺고 가지를 뻗을 나이이다. 이들 가족이 가꾸고 거두는 열매란 포도만이 아닐 것이다. 땅에 뿌리내리고 지역으로 뻗어가는 게 뭔지를 나누는 것이고, 돈이 없어 뭘 못한다고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작으나마 희망을 주는 게 아닐까 싶다. 그 과정에서 ‘만남은 새로운 세계를 여는 열림’이라는 향유네 철학이 이 땅에 튼튼히 뿌리내리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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