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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비밀⑲] 오묘한 관능미 뽐내는 신라의 미소 ‘수막새’

  • 이광표 서원대 교양대학 교수 kpleedonga@hanmail.net

[명작의 비밀⑲] 오묘한 관능미 뽐내는 신라의 미소 ‘수막새’

  • ● 세계인이 사랑하는 ‘얼굴무늬 수막새’
    ● 작가도 모델도 알려지지 않아
    ● 일본 수집가 손에 들어간 뒤 32년 만에 귀향
    ● 1300년 전 만든 수막새 LG 로고로 거듭나
신라의 고도 경주를 대표하는 유물 중 하나인 얼굴무늬 수막새. [문화재청 제공]

신라의 고도 경주를 대표하는 유물 중 하나인 얼굴무늬 수막새. [문화재청 제공]

천년고도 경주에 가면 ‘얼굴무늬 수막새’(보물 1973호·7세기) 이미지를 만나게 된다. 편안한 아름다움의 ‘신라의 미소’. 그런데 그 미소는 한두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경주의 도처에 있다. 민가의 담장에도 있고 식당 간판에도 있다. 자전거포에도 있고 생활체육야구장 선수대기석(덕아웃)에도 있다. 빵집 로고로도 사용되다 보니 관광객들이 들고 다니는 빵 봉투에는 온통 얼굴무늬 수막새 이미지다. 경주에는 금관도 있고 불국사와 석굴암도 있고 첨성대도 있는데, 왜 하필 얼굴무늬 수막새일까. 그뿐이 아니다. 얼굴무늬 수막새는 LG그룹의 로고(심벌마크)가 되기도 했다. 우리나라 문화재 가운데 글로벌 기업의 로고 모티프가 된 경우가 또 어디 있을까. 소박한 얼굴 모습의 작은 수막새 하나. 이 기와는 대체 어떤 연유로 경주와 신라의 상징이 됐을까. 

얼굴무늬 수막새는 1930년대 초 경주에서 발견됐고 신라 7세기 때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가 깨져 현재의 지름은 11.5cm. 온전한 형태였을 때의 지름은 14cm이다. 두께는 2cm. 둥근 공간에 눈, 코, 입만으로 여성의 얼굴을 절묘하게 표현했다. 살구씨처럼 생긴 시원한 눈매, 약간 큼지막한 콧대, 수줍은 듯 해맑게 미소 짓는 입…. 얼굴을 표현한 전체적인 구도도 빼어난 데다 틀로 찍어 만든 것이 아니라 직접 손으로 빚은 것이라서 정감이 간다. 더 자연스럽고 그래서 더 생명력 넘친다. 당시의 기와에 비해 진흙의 함유량이 많고 단단하다고 한다.

순수와 소박 사이로 느껴지는 관능미

얼굴은 전체적으로 쑥스러워하는 듯한 분위기지만 미소를 잘 들여다보면 살짝 관능적이기도 하다. 코와 입 사이의 간격이 좁은데 보면 볼수록 이 대목 또한 관능미를 자극하는 것 같다. 이렇게 다양한 상상을 가능하게 하니 결과적으로 절묘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백제의 미소가 떠오른다. 충남 서산시에 있는 국보 84호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6세기말~7세기 초). 흔히 서산 마애삼존불이라고 하는 불상이다. 이 삼존불의 미소, 특히 본존불의 미소가 압권이다. 네모진 얼굴에 커다란 눈, 살짝 벌린 입에서 번지는 미소. 그저 해맑고 복스럽다. 순수함과 소박함 그 자체다. 

얼굴무늬 수막새에 담긴 신라의 미소도 순수하고 인간적이다. 그러나 서산 마애삼존불과 비교해 보면 차이가 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신라의 미소가 백제의 미소에 비해 어딘지 모르게 더 관능적이라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동시 ‘웃는 기와’엔 이런 시구가 나온다. ‘기와 하나가 / 처마 밑으로 떨어져/ 얼굴 한 쪽이/ 금 가고 깨졌지만/ 웃음은 깨지지 않고/ 나뭇잎 뒤에 숨은/ 초승달처럼 웃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표현이다. 이 시에 나오는 것처럼, 얼굴무늬 수막새는 일부가 깨진 상태다. 그런데 참으로 절묘하게 부서졌다. 오른쪽 위와 아래가 약간 부서졌는데 그 덕분에 더욱 고풍스럽다. 조금 더 깨졌더라면 수막새의 전모를 알기 어려웠을 것이고 조금 덜 깨졌더라면 고풍스러움이 줄어들었을지 모른다. 누군가는 “온전할 때가 최고이며 더 가치가 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이 기와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이렇게 절묘하게 일부만 부서져, 온전했을 때의 모습보다 더한 매력을 뽐낸다.

일본으로 원치 않은 이민 떠난 수막새

일제강점기이던 1930년대 초, 경주시 사정동 영묘사(靈妙寺) 터에서 독특한 와당(瓦當) 한 점이 발견됐다. 바로 얼굴무늬 수막새였다. 이것은 경주경찰서 근처에 있는 구리하라(栗原) 골동상으로 넘어갔다. 그때 골동가게 근처에 야마구치(山口) 의원이 있었다. 1934년 봄, 이 병원의 일본인 의사 다나카 도시노부(田中敏信·1905~1993)의 귀에 수막새 소식이 들어갔다. 그는 1933년 한국에 건너와 경주의 야마구치 의원에서 공의(公醫)로 일하며, 경주 일대에서 출토되는 신라 기와를 열심히 수집하고 있었다. 젊은 기와 수집가는 이 소식에 귀가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고, 골동가게를 찾아 100원을 주고 그 기와를 구입했다. 

그해 6월 조선총독부 기관지 ‘조선(朝鮮)’ 229호에는 ‘신라의 가면와(新羅の假面瓦)’라는 제목으로 수막새를 소개하는 짧은 글이 실렸다. 3개월 뒤인 1934년 9월엔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고고학교실이 편찬한 연구보고서 ‘신라 고와의 연구(新羅古瓦の硏究)’에도 이 수막새가 소개되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조선’에 ‘신라의 가면와’라는 글을 쓴 사람은 당시 경주고적보존회에서 활동하던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였다.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출신인 오사카 긴타로는 일제강점기 경주를 중심으로 활동한 고고학자다. 아오야마(靑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 건너와 1907년 함경북도 회령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뒤 1915년부터 경주공립보통학교 교장을 지냈다. 1930년 정년 퇴직 후 백제관(국립부여박물관의 전신) 관장과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국립경주박물관 전신) 관장으로 일했고, 경주 고적 조사에 나서 경주 금관총, 부부총의 발굴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가 쓴 ‘신라의 가면와’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귀면(鬼面)을 나타낸 것을 귀면와(鬼面瓦)라고 부른다면 이것은 전적으로 가면와(假面瓦)가 된다. 실물은 사진보다도 훨씬 좋은 표정이며, 그뿐만 아니라 그 얼굴이 딱 정면이 아니라 약간 기울어져 있다는 점에서 교묘(巧妙)함을 보이고 있다. 원래 경주 출토의 신라와(新羅瓦)는 그 무늬가 다종다양하고 수준급으로 빼어나 자랑할 만하지만, 아울러 이 가면와와 같은 것은 종래에 단 하나도 출토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러한 종류의 것이 있으리라고는 추정하지도 않았다.” 오사카는 얼굴무늬 수막새의 특이성과 아름다움을 명쾌하게 짚었다. 

그 후 1940년, 소장자인 다나카 도시노부는 공의 근무를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 무렵 얼굴무늬 수막새도 함께 가져갔다. 물론 다나카가 1940년 이전에 일본으로 옮겨놓았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하나밖에 없는 이 독특한 수막새는 경주 고향땅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그러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혔다.

9년 설득 덕 32년 만에 귀향

다나카 도시노부(田中敏信·1905~1993)가 경주박물관에 얼굴무늬 수막새를 기증하고 있다(위). 기증 당시 다나카가 경주박물관에 전달한 기증서. [경주박물관 제공]

다나카 도시노부(田中敏信·1905~1993)가 경주박물관에 얼굴무늬 수막새를 기증하고 있다(위). 기증 당시 다나카가 경주박물관에 전달한 기증서. [경주박물관 제공]

24년이 흐른 1964년, 이 와당을 기억해 낸 사람들이 있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에 이 와당을 소개한 오사카 긴타로와 당시 국립박물관 경주분관(현재 국립경주박물관)의 박일훈(朴日薰·1913~1975) 관장이었다. 1964년 박일훈은 일본에 있는 오사카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신라사 연구 협조에 관한 편지였는데 이후 그와 편지를 주고받게 됐다. 그 과정에서 수막새의 존재를 기억해 냈고 그 수막새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졌다. 

두 사람의 의기투합은 박일훈과 오사카 긴타로의 각별한 인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오사카 긴타로가 경주공립보통학교 교장일 때 박일훈은 그 학교의 학생이었으며, 오사카 긴타로가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장일 때인 1937년 경주분관에 취직했다. 오사카와 박일훈은 사제지간이었던 셈이다. 

1964년부터 박일훈은 오사카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수막새의 존재를 찾기 시작했고, 1967년 일본을 방문했을 때엔 오사카에게 수막새의 소재를 확인해달라고 부탁했다. 이후 오사카는 수소문 끝에 다나카 도시노부의 소재를 찾는 데 성공했다. 다나카가 후쿠오카(福岡)의 기타큐슈(北九州)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다나카가 얼굴무늬 수막새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소식을 전해 들은 박일훈은 다나카에게 “한국에 하나뿐인 얼굴무늬 수막새라는 점을 감안해 경주박물관에 기증해 달라”는 뜻을 전했다. 오사카 긴타로도 적극 협조하기로 약속했다. 오사카는 기타큐슈를 두 차례나 찾아가 직접 다나카를 만나 진지하게 설득하기도 했다. 

박일훈은 1972년 2월 오사카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한 자리에서도 이 수막새를 화제로 올리곤 “기증이 잘 성사될 수 있게 해달라”고 오사카에게 거듭 부탁했다. 오사카 또한 끝까지 노력하기로 약속했다. 

9년에 걸친 이들의 간곡함과 절실함은 드디어 다나카의 마음을 움직였다. 기증을 위한 구체적인 서신이 오갔고, 1972년 10월 14일 다나카 도시노부는 직접 국립경주박물관을 찾아와 얼굴무늬 수막새를 기증했다. 당시 다나카는 기증서도 함께 전달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오사카 긴타로 전 경주박물관장님과 박일훈 현 경주박물관장님의 온정 가득한 간청에 따라, 마음속에 감명을 주는 인면와(人面瓦)를 제작한 와공을 생각하면 느끼는 바가 있어, 신라 땅에 안식처를 제공하고자 경주박물관장에게 증정합니다.”

1300년 전 수막새, 글로벌 디자이너 사로잡다

얼굴무늬 수막새 모습을 본떠 만든 LG 로고.

얼굴무늬 수막새 모습을 본떠 만든 LG 로고.

얼굴무늬 수막새는 기와다. 막새는 기와지붕의 처마를 마감하는 기와다. 암키와를 마감하는 것은 암막새, 수키와를 마감하는 것은 수막새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얼굴무늬 수막새 또한 7세기에 경주의 어느 기와지붕에 설치했던 것이리라. 얼굴무늬 수막새의 뒷면엔 반원통형의 수키와를 붙였던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어 실제로 지붕에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고대 세계에서 사람의 얼굴을 표현하는 것을 두고, 무언가를 기원하는 주술적(呪術的)인 목적이나 나쁜 것을 물리쳐달라는 벽사적(辟邪的) 행위로 해석한다. 그렇다면 얼굴무늬 수막새는 험상궂거나 무서운 표정 대신 여성의 웃음으로 나쁜 것을 달래서 돌려보낸다는 의미를 지닌다. 무서운 도깨비나 귀신의 얼굴이 아니라, 불교적인 의미의 연꽃이 아니라, 편안한 여성의 미소로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려 했다는 말이다. 흥미로운 발상이다. 그렇지만 궁금증이 남는다. 여성의 미소로 사악함을 물리치려 했다고 해도, 기와에 등장하는 여성 얼굴의 은근한 관능미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궁금하고 또 오묘한 일이다. 

이런 상상을 해본다. 이 얼굴무늬 수막새로 지붕 처마를 돌아가면서 수키와를 모조리 마감했을까. 아니면 지붕 처마의 일부만 마감했을까. 모를 일이지만, 지붕 처마를 쭉 돌아가면서 여인의 미소로 마감 장식을 했다고 상상해 본다. 그것이 벽사의 의미라고 해도, 낭만적이면서도 대담한 파격이 아닐 수 없다. 

상상력을 좀 더 발휘해 보자. 1300여 년 전 신라 사람들이 그 처마 밑을 걸어간다. 그가 눈을 들어 처마를 바라보면 온통 여인의 얼굴이다. 편안한 얼굴이지만 그래도 거기 살짝 관능이 담겨 있다. 그 처마 아래를 걷는 이가 남정네였다면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얼굴무늬 수막새 이미지는 경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경주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매일매일 이 이미지를 만난다. 럭키와 금성이 만나 1995년 LG그룹으로 다시 태어날 때의 일이다. 한 해 전부터 LG 그룹은 미국의 유명 CI전문업체인 랜도사에 의뢰해 새로운 로고를 제작했다. 해가 바뀌고 1995년 1월 1일 종합일간지 1면 광고를 통해 로고 디자인을 공개했다. 로고 디자인은 낯설기도 했고 신선하기도 했다. 원형 안에 알파벳 L과 G를 배치하고 점을 하나 찍어 사람의 눈을 표현했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사람 얼굴에 L과 G를 억지로 끼워 넣었다” “하필 왜 애꾸를 만든 것인가”라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LG그룹은 “그건 애꾸가 아니라 윙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 웃는 모습이라는 것이었다. 얼마 후 그 디자인은 얼굴무늬 수막새를 모티프로 삼았다는 사실이 공개됐다. 

미국 랜도사의 일류 디자이너들을 사로잡은 얼굴무늬 수막새. 처음엔 낯설었던 LG의 심벌마크는 이제 우리에게 익숙해졌다. 보고 있노라면 나도 씩 웃음이 나온다. 누군가는 TV나 김치냉장고와 함께, 누군가는 스마트폰이나 노트북과 함께 거의 매일 얼굴무늬 수막새 이미지를 만난다. 한국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11㎝ 기와, 신라 문명 상징되다

사람들은 얼굴에 매력을 느낀다. 잘생겼는지 그렇지 않은지가 아니라, 얼굴 속에서 한 사람의 생을 읽고 싶기 때문이다. 얼굴무늬 수막새 또한 예외일 수 없다. 이 수막새를 보고 있노라면 종종 이런 생각이 든다. 저 얼굴은 누구의 얼굴일까. 실제 모델이 있었을까, 없었을까. 물론 알 수 없는 일이다. 누군가는 선덕여왕 때 활동했던 신라 최고의 소조(塑造) 장인인 양지의 작품일 가능성도 거론한다. 하지만 관련 자료가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실제 모델이 있든 없든, 누가 만들었든 저 얼굴은 이제 하나밖에 없다. 지름 11cm. 자그마한 저 얼굴이 우리에게 큰 감동과 상상력을 제공한다. 

이 기와를 우리가 만나게 된 지 50년도 되지 않았다. 다나카 도시노부가 우리에게 기증한 1972년 10월부터이니 이제 48년째에 불과하다. 문화재와의 만남에 있어 무척 짧은 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때까지 이 존재를 알고 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많은 사람이 좋아한다. 문화재의 역사에서 본다면 그야말로 벼락 스타가 된 것이다. 

박일훈과 오사카의 9년 집념이 소장자 다나카의 마음을 움직였기에 저 신라 여성을 고향에 돌려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소장자로부터 기증의 마음을 이끌어내고 소장자가 기증을 결심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다나카는 자신이 한국에서 수집한 기와와 탁본 등 160여 점을 기타큐슈시립박물관에 이미 기증한 상태였다. 그런데 기증하면서 이 얼굴무늬 수막새 한 점만 기증 목록에서 제외했다고 한다. 다나카가 얼굴무늬 수막새를 얼마나 아꼈는지 말해 주는 대목이다. 그는 얼굴무늬 수막새를 자신의 집 거실에 걸어놓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다나카는 매일매일 이 신라의 미소와 눈을 마주쳤을 것이다. 그토록 아꼈던 신라 기와 한 점. 너무 소중했기에 궁극적으로는 그 기와가 원하는 곳, 즉 신라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흥미로운 역설(逆說)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좋아하는 신라의 미소. 일본인 의사 다나카의 수집과 기증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 매력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다나카 도시노부는 1993년 세상을 떠났다. 그가 1930년대 근무했던 경주의 야마구치 의원 건물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경주경찰서 맞은편 쪽에 위치한 화랑수련원이 그 건물이다. 그가 1934년 이 수막새를 수집했던 골동가게도 바로 그 근처였다. 그런데 화랑연수원 건물 주변에서 얼굴무늬 수막새에 얽힌 스토리를 만날 수 없다. 아쉬운 대목이다. 얼굴무늬 수막새의 현장에 그 흔적 하나 정도는 남겨 놓아야 하지 않을까.


이광표
● 1965년 충남 예산 출생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 고려대 대학원 문화유산학협동과정 졸업(박사)
●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 저서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박물관’ ‘한국의 국보’ 外



신동아 2020년 10월호

이광표 서원대 교양대학 교수 kpleedong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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