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8월호

자신있게 내놓은 습작시 난도질한 빨간펜

‘입술 퍼런 산그늘’ 같은 압축과 절제를 깨치다

  • 안도현 시인, 우석대 교수·문예창작 ahndh61@chol.com

    입력2006-08-14 16: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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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인을 꿈꾸던 고교 문예반 시절, 지도교사이던 도광의 선생님의 시를 읽는 자체가 내겐 문학수업이었다. 내 시에 언어를 절제하는 능력이 손톱만큼이라도 보인다면, 내 시에 인간의 냄새가 눈곱만큼이라도 배어 있다면 그것은 다 선생님에게서 배우고 익힌 것이다.
    1977년 봄, 고등학교 1학년이던 나는 당시 대구 남산동에 자리잡고 있던 대건고등학교 별관 5층건물 맨 꼭대기로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갔다. ‘문예실’이라는 낡은 팻말이 매달려 있는 그곳은 일반 교실의 3분의 1 크기였는데, 거기에선 어깨가 딱 벌어진 선배들이 시커먼 교복 주머니에 기세등등하게 두 손을 찔러 넣은 자세로, 어리고 연약한 후배 하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나는 문예반에 들어가려고 용기를 내어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그곳을 찾아간 것이었다.

    어느 중학교를 졸업했느냐, 중학교 다닐 때 백일장에서 상 받아본 적이 있느냐, 어떤 작가를 좋아하느냐 따위의 아무런 형식도 갖추지 않은 ‘면접시험’을 치르고, 전통 있는 문예반이라고 선배들이 우쭐대는 소리를 수없이 들은 후에야 무사히 신입생으로서 문예반원이 되었다. 앞으로는 문예반원이라는 명칭보다 ‘태동기문학동인회’의 동인이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는 근엄한 주문사항에도 귀를 기울여야 했다.

    그저 ‘백조’니 ‘창조’니 하는 우리 근대문학 초기의 아련한 문학 동인 이름만 알고 있던 나로서는 하루아침에 대단한 문사가 된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문예반 명칭에 붙은 태동기란 ‘포유동물이 어미의 뱃속에서 꿈틀대는 시기’라는 선배들의 설명을 듣고는 그 의미심장한 이름 앞에서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그날 처음 가본 문예실 벽에는 길게 늘어뜨린 한 폭의 시화가 걸려 있었다. ‘풍경의 경사(傾斜)’라는 좀 까다로운 제목의 그 시는, 어느 바닷가 마을의 오밀조밀한 풍경을 배경 그림으로 깔고 있었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사는 사람은

    바다가 수만 개 별빛을 바구니에 담아

    남몰래 하나씩 주고 있음을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사는 사람은

    알게 된다.

    언덕 아래에는

    뜰이 넓은 양옥들과

    교회당을 사이 하여

    성냥곽만한 酒店들도

    눈에 띄지만,

    언덕 위에 사는 사람들이

    아침저녁으로 비탈길을 오르내리면서

    바다가 아무도 모르는

    별빛 하나씩 남몰래 주고 있음을

    물감색 원피스나 입고 다니는

    살아가는 지혜로는

    알 수가 없다.

    겨울이 지나고

    바다에 봄이 와도

    술렁이는 도시에는

    異常이 없고

    바다만이 더 깊은 제 사연으로

    하얗게 하얗게 침잠해 가도

    비탈길이 海岸通으로 길게 뻗어

    해질녘 귀로에서는

    목이 쉬고, 목살이 메어,

    노을처럼 메아리져 가도

    바다가 남몰래

    별빛 찍힌 편지 한 장씩 노놔주고 있음을

    그냥 사는 사람들은

    알 리가 없다.

    자신있게 내놓은 습작시 난도질한 빨간펜

    학창시절 문예반원들과 도광의 선생님이 함께 찍은 사진. 맨 뒷줄 안경 쓴 학생이 안도현 시인.

    ‘傾斜’를 비롯한 몇 개의 한자가 중학교를 갓 졸업한 나를 괴롭혔지만, 빨려들듯이 읽었다. 이렇게 긴 시가 겨우 세 개의 마침표만 가지고 있다니! 나중에야 알았지만 시의 호흡이라는 것을 나는 이 시를 읽음으로써 조금씩 깨치게 됐던 것 같다.

    “선배님, 저 시는 어떤 선배가 쓰셨는데예?”

    “임마, 저 시는 선배가 쓴 게 아이고 도 선생 시다. 아니, 도 선생도 우리 학교를 졸업한 동문이니까 니 말대로 선배는 선배다.”

    “도 선생예?”

    ‘도선생(盜先生)’이 언뜻 떠올라 웃음이 쿡쿡 터져 나오려고 했다. 도선생이라면 으슥한 밤에 남의 집 담장이나 넘을 일이지 고상한 시를 왜 쓴담?

    나는 그때 처음으로 도광의 선생님의 이름을 선배들한테서 들었다. 이 학교 선생님 중에 키가 제일 크고 외모부터 뭔가 시인처럼 생기신 분을 찾으면 문예반 지도교사인 도광의 선생님이 맞을 거라고 했다.

    전형적인 시인 모습

    문예실을 나와서도 내 머릿속에는 ‘풍경의 傾斜’라는 시의 앞부분이 맴돌며 좀체 지워지지 않았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사는 사람의 심성까지도 풋내기 문학소년의 마음으로는 헤아려질 것만 같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쓰신 분이 국어선생님 중 한 분이고, 더욱이 문단에 이미 등단한 시인이라니. 그분에게서 문학을 배운다면 머지않아 나도 시인이 될 것 같은 황홀한 착각이 그날 이후 계속되었다.

    그러나 1학년이 다 끝나가도록 나는 선생님과 이야기 한 번 나누지 못했다. 그저 마음속으로만 선생님에 대한 문학적인 연모를 키울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과의 대화 창구는 당시 3학년 문예반장이던, 지금은 문학평론가이자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는 박덕규 형 한 사람뿐이었다. 조무래기 신입생인 나에게 도 선생님은 범접하기 어려운 큰 산과도 같았다.

    다만 선생님께서는 술을 무척 좋아하신다는 이야기, 수업시간에 유난히 시에 관한 말씀이 많으시다는 이야기들을 풍문으로 전해들을 따름이었다. 선생님은 수업을 하시다가도 곧잘 주전자 물을 들이켜곤 해서 금붕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전날 과하게 마신 술 때문에 붙은 별명이었다.

    먼 발치에서 바라보는 도광의 선생님은 정말 내 상상 속에 숨어 있던 전형적인 시인의 모습이었다. 키 180cm가 넘는 미루나무같이 훤칠한 선생님이 천천히 걸으면서 간혹 긴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길 때면 나는 아무 이유도 없이 쓸쓸해져서 시야에서 선생님이 사라질 때까지 서서 바라보곤 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가을비가 오는 날, 대구의 중심가인 동성로 한복판에서 바바리코트를 입고 우산도 없이 걸어가는 선생님을 누군가가 보았다는 이야기를 듣곤 가슴이 사정없이 울렁거리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도광의 선생님에게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었으나 나는 이미 많은 것을 배우고 있었다. 아니, 많은 것을 선생님으로부터 느끼고 있었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자기 주변에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든든해져서 그 존재를 어두운 밤에는 가물거리는 등불로 여기고, 찬바람 부는 날에는 따뜻한 아랫목의 온기로 느끼면서 살지 않는가. 그 존재로 하여 삶의 의미가 날마다 새록새록 새로워지고, 그 충만감에 몸을 떨면서.

    생살 베이는 아픔

    2학년이 되자 드디어 선생님은 나를 부르셨다. 1년 동안 선배들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학교 바깥에서 열리는 이런저런 백일장에서 몇 개의 상장을 받아온 덕분에 선생님의 눈에 들었던지 그동안 쓴 시들을 가지고 한번 찾아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몹시 황송하고 기뻐서 이튿날 습작노트를 들고 교무실로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자신있게 내놓은 습작시 난도질한 빨간펜

    안도현 시인은 도광의 선생에게서 문학적 면모를 느꼈다고 말한다. 백두산 천지에 오른 안 시인.

    내가 쓴 시들을 한참 들여다보시던 선생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나는 슬그머니 불안해지기 시작했는데, 선생님은 내 노트에다 빨간 볼펜으로 밑줄을 긋기도 하고 수많은 가위표와 동그라미들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선생님의 빨간 볼펜이 내 노트에 적힌 시에 닿을 때마다 나는 생살이 베이는 것 같은 지독한 아픔을 느껴야 했다. 전정가위에 싹둑싹둑 잘리는 생나무의 아픔이 또한 그러하리라. 스무 줄짜리의 시가 열 줄도 채 안 되게 앙상하게 뼈만 남는가 하면, 선생님의 볼펜 끝에서 아예 자신의 숨소리를 놓아버리는 시들도 생겨났다.

    하지만 나는 선생님이 간혹 한 마디씩 던지는 말에 그저 “예, 예, 알겠습니다”만 되풀이하면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엉거주춤 서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도마에 올려진 생선에게 가하는 난도질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나중에는 반론 한번 제기하지 못하고 그냥 교무실 문을 닫고 나온 나 자신이 원망스럽기조차 했다. 내가 밤을 하얗게 보내면서 고치고 또 고치고 해서 들고간 시가 무참하게 찢어졌다는 생각에 아예 시 쓰기고 뭐고 다 포기해버릴까 하는 자포자기의 마음도 들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날의 비참함이 없었다면 나는 언어를 함부로 남발하거나 혹사시키는 언어의 난봉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모름지기 시인이란, 언어를 다스리면서도 언어로부터 다스림을 당하는 자가 아니던가. 혹시 내가 쓴 시에 언어를 절제하는 능력이 손톱만큼이라도 보인다면 그것은 다 도광의 선생님에게서 배운 것이리라.

    이따금 접할 수 있었던 선생님의 시를 나는 거의 외우다시피 하였다. “교외로 나오니 햇볕은 나뭇잎을 흔든다”로 시작되는 ‘물 오른 포플러’며, “명절날 둑길 위로 분홍치마 자락이 소수레 바퀴의 햇살에 실려 가면”이라는 구절이 아름다운 ‘甲骨길’이라는 시를 즐겨 읊조렸으며, “서서 우는 타관 풀잎”이라는 시구를 읽으며 궁핍한 자취생이던 나 자신을 머쓱하게 돌아보기도 하였다. 이밖에도 ‘분교’ ‘저녁답이면’ ‘봄물빛에 묻어오는’ ‘눈 오지 않는 겨울’ 등의 시가 끌어당기는 힘과 시에서 풍기는 따스하고 그윽한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선생님의 시는, 당시 유행하던 현학적인 모더니즘류의 시와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촉촉한 물기 어린 서정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쉽게 세상과 타협하지 못하는 자의 쓸쓸함과 회한이 주조음을 이루고 있었다. 혹시 내가 쓰는 시에 인간의 냄새가 눈곱만큼이라도 배어 있다면 그것도 다 도광의 선생님에게서 익힌 것이리라.

    선생님은 일찍이 1965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됐고, 그 후 ‘현대문학’지의 추천을 받은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인 1982년에야 ‘甲骨길’이라는 표제로 첫 시집을 내셨다.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선생님께서 문단에 나온 지 18년 만의 일이었다.

    인쇄매체의 급속한 발달과 흘러넘치는 종이의 홍수 속에서 이런 일은 아주 못난 시인이거나 아주 특별한 시인에게서 나오는 법이다.

    이른바 ‘문단정치’하고는 담을 쌓고 글을 쓰는 선생님의 모습은 요즘 흔히 볼 수 없는 특별한 존재로 내 마음속에 각인되어 있는데, 나는 여기서 서슴없이 도광의 시인은 아주 특별한 시인이라고 말해야겠다. 이 한 권의 시집 속에는 선생님의 욕심 없는, 그러나 고투(苦鬪)의 흔적이 역력한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내 문학소년 시절을 달구었던 숨 가쁜 말씀들의 집, 이제는 세월의 손때가 묻고 귀가 닳은 선생님의 시집을 나는 지금도 종종 펼쳐본다.

    더운 이름으로 당신을 불러봅니다

    햇볕도 偏愛하듯

    가는 숨결로 타고 있습니다

    하늘 속 빗방울로 가슴을 씻고

    피 흘리며 타고 있습니다

    아빌라,

    모든 것을 赦罪해 주십시오

    살아 있는 남자에게 남은 할 일은

    저무는 寒驛에서 눈을 감는 일입니다

    -‘샐비어’ 전문

    나는 ‘편애(偏愛)’라는 딱딱하고 삐딱하고 비교육적인 한 낱말이 이 시에서처럼 빛을 발하는 글을 보지 못했다. 선생님은 편애를 통해 진정한 사랑을 꿈꾸는 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 세상 모두를 다 사랑하겠다는 것은 욕심 많은 인간의 환상이거나 한가한 종교적 잠언일 뿐이다. 그 욕심이 수많은 상처와 분열을 자꾸 재생산해낸다고 할 때, 선생님은 그것을 미리 알고 자신만의 외로운 길을 걸어오신 것은 아닐까.

    그런 외로움 속을 걸어가는 사람은 저무는 곳에서 자성(自省)의 눈을 혼자 감을 줄 아는 법이니까.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스승

    선생님은 두 번째 시집을 2003년에 내셨다. 문단에 등단한 지 40여 년 만에 낸 시집의 제목은 ‘그리운 남풍’(문학동네)이다. 시집 초판이 나온 날 서울에서 선생님의 제자들이 모여 조촐하게 출판을 기념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그때 술자리에서 어린아이처럼 마냥 좋아하시던 선생님을 뵈면서 괜히 눈시울이 붉어지던 기억이 난다.

    이 시집에 실린 시 ‘저물 무렵’ 한 편만 읽어봐도 선생님이 얼마나 말과 감정을 아끼는 시인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산에서 울던 목청 높은 산꿩이

    해질 무렵에는 무밭으로 내려와

    낮은 목청으로 운다

    기우는 햇살이 설핏해지면

    입술 퍼런 산그늘이

    주막 쪽으로 내려온다

    이 시각 또한 비어 있는 마음들도

    주막 쪽으로 하나둘 모여든다

    말을 경제적으로 운용하면서 한 폭의 풍경을 이렇게 밀도 있게 그려내는 시를 요즘은 보기가 매우 드물다. 산꿩의 울음소리도 잦아드는 저물 무렵의 스산한 기운을 “입술 퍼런 산그늘”로 압축하는 것, 그 산그늘과 함께 허한 마음을 주막 쪽으로 집중시키는 결구(結句)는 무릎을 탁 치게 만든다.

    우리는 이미 이런 풍경의 세계로부터 멀리 떠나왔으나, 짧은 시 한 편을 통해 그 아련한 세계의 주막으로 초대되는 행운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누군들 그 주막집에 가고 싶지 않겠는가. 비록 주머니가 텅 비어 궁한 신세라 하더라도 주머니에 두 손 찌르고 그 주막집 부근을 얼씬거리고 싶지 않겠는가. 다 도광의 선생님 덕분이다.

    자신있게 내놓은 습작시 난도질한 빨간펜
    안도현

    1961년 경북 예천 출생

    대구 대건고, 원광대 국문과 졸업

    1981년 대구매일신문,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와 시학상, 소월시문학상, 모악문학상 금관상, 노작문학상 등 수상

    現 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저서 : ‘연어’ ‘그리운 여우’ ‘서울로 가는 전봉준’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등



    되돌아가서 옛날이야기 한 토막.

    고등학교 때, 도 선생님이 갑자기 나를 부르셔서 교무실로 가 봤더니 서무실에 가서 봉급을 좀 찾아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달치 선생님의 봉급이 담긴 그 봉투를 차마 선생님께 전해 드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무척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겉봉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던 것이다.

    ‘실수령액 : 7천원’

    그 월급봉투를 갖다드렸더니 선생님은 나에게 묻듯이 말씀하셨다.

    “내가 이 달에 술을 너무 많이 먹었나?”

    얼마 안 되는 박봉을 가불해서 과연 선생님 혼자 그것을 모두 술값으로 썼는지, 아니면 쪼들리는 살림에 보탰는지는 그리 중요하지가 않다. 그게 선생님의 삶의 방식이고 현실일진대 제자인 내가 어찌 가벼운 입을 놀려 깝죽댈 수 있겠는가. ‘실수령액 7천원’의 선생님은 나에게 그저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스승이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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