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봄, 고등학교 1학년이던 나는 당시 대구 남산동에 자리잡고 있던 대건고등학교 별관 5층건물 맨 꼭대기로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갔다. ‘문예실’이라는 낡은 팻말이 매달려 있는 그곳은 일반 교실의 3분의 1 크기였는데, 거기에선 어깨가 딱 벌어진 선배들이 시커먼 교복 주머니에 기세등등하게 두 손을 찔러 넣은 자세로, 어리고 연약한 후배 하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나는 문예반에 들어가려고 용기를 내어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그곳을 찾아간 것이었다.
어느 중학교를 졸업했느냐, 중학교 다닐 때 백일장에서 상 받아본 적이 있느냐, 어떤 작가를 좋아하느냐 따위의 아무런 형식도 갖추지 않은 ‘면접시험’을 치르고, 전통 있는 문예반이라고 선배들이 우쭐대는 소리를 수없이 들은 후에야 무사히 신입생으로서 문예반원이 되었다. 앞으로는 문예반원이라는 명칭보다 ‘태동기문학동인회’의 동인이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는 근엄한 주문사항에도 귀를 기울여야 했다.
그저 ‘백조’니 ‘창조’니 하는 우리 근대문학 초기의 아련한 문학 동인 이름만 알고 있던 나로서는 하루아침에 대단한 문사가 된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문예반 명칭에 붙은 태동기란 ‘포유동물이 어미의 뱃속에서 꿈틀대는 시기’라는 선배들의 설명을 듣고는 그 의미심장한 이름 앞에서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그날 처음 가본 문예실 벽에는 길게 늘어뜨린 한 폭의 시화가 걸려 있었다. ‘풍경의 경사(傾斜)’라는 좀 까다로운 제목의 그 시는, 어느 바닷가 마을의 오밀조밀한 풍경을 배경 그림으로 깔고 있었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사는 사람은
바다가 수만 개 별빛을 바구니에 담아
남몰래 하나씩 주고 있음을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사는 사람은
알게 된다.
언덕 아래에는
뜰이 넓은 양옥들과
교회당을 사이 하여
성냥곽만한 酒店들도
눈에 띄지만,
언덕 위에 사는 사람들이
아침저녁으로 비탈길을 오르내리면서
바다가 아무도 모르는
별빛 하나씩 남몰래 주고 있음을
물감색 원피스나 입고 다니는
살아가는 지혜로는
알 수가 없다.
겨울이 지나고
바다에 봄이 와도
술렁이는 도시에는
異常이 없고
바다만이 더 깊은 제 사연으로
하얗게 하얗게 침잠해 가도
비탈길이 海岸通으로 길게 뻗어
해질녘 귀로에서는
목이 쉬고, 목살이 메어,
노을처럼 메아리져 가도
바다가 남몰래
별빛 찍힌 편지 한 장씩 노놔주고 있음을
그냥 사는 사람들은
알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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