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호

야구의 재미? 무승부를 허(許)하라! [베이스볼 비키니]

연장전 없애면 야구에 박진감이 철철~

  • 황규인 동아일보 기자

    kini@donga.com

    입력2021-11-05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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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림픽 등 국제경기에선 연장전 사라져

    • 코로나19 영향으로 점차 짧아지는 경기 시간

    • 일본 고교야구, 메이저리그는 ‘승부치기’ 도입

    • 한국 프로야구는 연장전 없는 무승부 체제

    • 경기 시간 짧아질수록 고의사구 줄어들어

    • 미국선 7이닝제, 무승부 도입 주장까지 나와

    재일 한국계 민족학교인 교토국제고가 8월 26일 일본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여름 고시엔) 4강에 진출했다. 여름 고시엔은 2018년부터 12회 말까지 동점이라면 승부치기로 승패를 가르고 있다. [동아DB]

    재일 한국계 민족학교인 교토국제고가 8월 26일 일본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여름 고시엔) 4강에 진출했다. 여름 고시엔은 2018년부터 12회 말까지 동점이라면 승부치기로 승패를 가르고 있다. [동아DB]

    “타임아웃이 없는 시합의 재미를 가르쳐드리지요.”

    일본 만화 작가 아다치 미쓰루(安達充·70)가 그린 ‘H2’에서 주인공 쿠니미 히로(國見比呂)가 남긴 대사입니다. 여기서 ‘타임아웃’은 작전 타임이 아니라 ‘시간제한’이 없다는 뜻. 쿠니미는 계속해 “마지막 스리 아웃을 잡기 전엔 야구는 끝나지 않습니다”라고 강조합니다.

    무슬림이 “알라 이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분의 사도”라고 신앙고백을 하는 것처럼 야구팬 사이에서도 저 대사를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여기는 분이 적지 않습니다. 저 대사를 신봉하면 할수록 “야구 경기는 모름지기 끝장 승부를 봐야 한다”고 주장하기 쉽습니다. 이런 분들은 ‘승부치기’(올림픽, WBC, WBSC 프리미어 12 등 아마추어 야구 경기에서 규정 이닝에서 승부를 가리지 못한 경우 무사 1, 2루 주자 진루 상태에서 경기를 치르는 방식)도 ‘극혐’하는 일이 많습니다.

    시간제한 없는 경기 점차 사라지는 추세

    그런데 쿠니미에게 꿈의 무대였던 고시엔(甲子園) 그러니까 일본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는 2018년부터 승부치기 제도를 채택한 상태입니다. 만약 두 학교가 12회 말까지 동점일 때는 13회 초부터 1, 2루에 주자를 두고 공격을 시작하는 방식입니다. 지난해까지 결승전은 승부치기 적용 대상이 아니었지만 일본고교야구연맹은 올해 2월 19일 이사회를 통해 결승전에서도 승부치기를 실시하기로 규정을 바꿨습니다.

    ‘H2’가 세상에 처음 나온 1992년부터 지금까지 일본 고교야구는 18회까지 연장전을 치렀습니다. 만약 18회까지도 동점일 때는 다음 날 재경기를 치렀습니다. 이후 2000년 15회로 기준이 바뀌었지만 재경기를 치른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만약 재경기 때도 무승부면 재재경기를 치렀습니다. 그러니까 저런 대사가 가능했던 겁니다.



    끝장 승부 ‘원조 맛집’이라고 할 수 있는 메이저리그에서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 대책 일환으로 지난해부터 승부치기 제도를 채택했습니다. 10회 초부터 주자를 2루에 두고 공격을 시작하는 방식입니다. 2018년부터 마이너리그에서 채택한 승부치기 방식을 가져온 겁니다.

    올해 여름 고시엔에는 총 3603개교가 참가했고, 메이저리그는 1년에 2430경기, 마이너리그는 A~AAA를 합치면 1년에 6210경기를 치릅니다. 또 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WBSC)에서 주관하는 국제대회 역시 연장전이 되면 승부치기 규칙을 적용합니다. 한국 고교야구도 2009년 황금사자기를 시작으로 승부치기 제도를 도입한 상태입니다. 이제 야구에서 승부치기는 ‘돌연변이’가 아니라 ‘주류’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7월 29일 오후 일본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한국과 이스라엘의 도쿄 올림픽 B조 조별 리그 양의지가 1차전 승부치기에서 몸에 맞는 볼로 승리하자 기뻐하고 있다(왼쪽). 9월 22일 인천 SSG랜더스필드에서 ‘2021 신한은행 SOL KBO리그’ 키움 히어로즈와 SSG 랜더스 경기에서 9회 말 동점 홈런을 허용하며 승리를 지키지 못한 키움의 마무리 투수 김태훈이 아쉬워하고 있다. [동아DB]

    7월 29일 오후 일본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한국과 이스라엘의 도쿄 올림픽 B조 조별 리그 양의지가 1차전 승부치기에서 몸에 맞는 볼로 승리하자 기뻐하고 있다(왼쪽). 9월 22일 인천 SSG랜더스필드에서 ‘2021 신한은행 SOL KBO리그’ 키움 히어로즈와 SSG 랜더스 경기에서 9회 말 동점 홈런을 허용하며 승리를 지키지 못한 키움의 마무리 투수 김태훈이 아쉬워하고 있다. [동아DB]

    일단 승부는 내야 한다면 승부치기 도입

    지명타자제도도 1973년 첫 도입 때는 분명 돌연변이였지만 이제는 확실히 주류가 됐습니다.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 일본 프로야구 센트럴리그, 일본 고교야구 등을 제외하면 지명타자제도를 채택하지 않은 리그(대회)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승부치기는 지명타자와 다른 운명을 걷게 될 거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일본 고교야구나 메이저리그에서 승부치기를 도입한 건 당연히 어떻게든 승패를 가리는 게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일본 고교야구대회는 토너먼트 방식이니까 반드시 승자와 패자를 가려야 합니다. 그리고 미국인은 ‘무승부가 너무 많아서’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심리학 연구 결과가 있을 만큼 어떻게든 승자와 패자를 나눠야 직성이 풀립니다.

    사실 야구를 9이닝제로 진행하게 된 것도 예전 규칙으로는 승부를 내기가 너무 어렵게 돼 생긴 일입니다. 원래 야구는 21점을 먼저 따는 팀이 이기는 경기였습니다. 이렇게 점수를 많이 뽑을 수 있던 건 당시 투수는 그저 타자가 공을 때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당시 타자는 지금 홈런 더비 때 그렇게 하는 것처럼 “어떤 코스로 공을 던져달라”고 투수에게 요구할 권리도 있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21점을 뽑는 데 6, 7이닝 정도 걸리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그러다 갈수록 투구 기술이 발전하면서 21점을 뽑기가 점점 어려워지게 됐습니다. 1856년에는 연장 16회까지 경기를 진행하고도 12-12 무승부로 경기를 끝내야 하는 일이 나왔습니다. 당시에는 조명 시설이 없었으니 밤늦게까지 경기를 이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야구팀이 대부분 ‘사교 클럽’ 형태라 경기가 늦게 끝나면 음주가무를 즐길 시간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1857년 뉴욕 지역 16개 야구 클럽 대표가 모여 그게 몇 점이든 9이닝 동안 뽑은 점수를 기준으로 승부를 가리기로 규칙을 바꾼 겁니다. 그만큼 승자와 패자를 가리는 건 당시에도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승부치기보다 무승부가 낫다”는 주장이 오히려 야구 전통과 더 어긋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장전 없애니 느슨한 경기가 줄어든다

    한국 프로야구 10개 구단과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이번 시즌 후반기를 앞두고 메이저리그와는 다른 선택을 내렸습니다. 코로나19 확진자 발생으로 전반기 막바지 일정을 뒤로 미루면서 일정이 빡빡해지자 후반기에는 아예 연장전을 치르지 않기로 한 겁니다. 그러면서 전반기에는 총 3경기밖에 없던 무승부 경기가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고 있습니다.

    연장전을 폐지하자 재미있는 일이 생겼습니다. 전반기에는 전체 3만452타석 가운데 11.1%(3371타석)가 볼넷으로 끝났는데 후반기에는 이 비율이 9.8%로 줄었습니다. 볼넷이 12%가 줄어든 겁니다. 경기당 평균 볼넷 숫자로 따지면 8.8개에서 7.5개로 1.3개가 줄었습니다.

    이런 변화가 정말 연장전 폐지 때문일까요? 네, 그럴 확률이 아주 높습니다. 1~9회에는 전체 타석 가운데 10.5%가 볼넷이었습니다. 연장전이 되면 이 비율은 17.8%로 1.7배 가까이 올라갑니다. 올해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프로야구가 10개 구단 체제를 갖춘 2015년 이후 지난해까지 6년 동안 연장전 볼넷 비율은 12.7%로 정규 이닝(8.7%) 때보다 46.2% 높았습니다.

    왜 연장전이 되면 볼넷이 늘어날까요? ‘고의사구’ 때문입니다. 고의사구를 제외하고 최근 6년 동안 볼넷 비율을 다시 계산해 보면 연장전 9.8%, 정규 이닝 8.5%로 차이가 줄어듭니다. 물론 어떻게든 실점을 막아보겠다는 생각에서 고의사구 사인이 나오게 됩니다. 연장전이 되면 이렇게 실점을 막는 게 큰일이 되다 보니 당연히 점수를 올리기가 어렵고 자연스레 경기도 느슨하게 흘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차라리 승부치기로 ‘고득점 환경’을 만드는 쪽이 오히려 경기를 ‘쫄깃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야구 종주국도 경기 시간 단축에 혈안

    롭 만프레드 메이저리그 커미셔너는 7월 15일 기자회견에서 “7이닝 더블헤더와 연장 승부치기가 미래에도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라며 당초의 9이닝 체제로 돌아갈 것을 시사했다. [뉴시스]

    롭 만프레드 메이저리그 커미셔너는 7월 15일 기자회견에서 “7이닝 더블헤더와 연장 승부치기가 미래에도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라며 당초의 9이닝 체제로 돌아갈 것을 시사했다. [뉴시스]

    사실 세계야구소프트볼총연맹(WBSC)은 ‘9이닝도 너무 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WBSC는 2019년 2월 이사회를 통해 올림픽과 프리미어12를 제외한 나머지 국제 대회는 7이닝제로 치르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올해 10월 2일 막을 내린 23세 이하 야구 월드컵을 7이닝제로 진행했습니다. (물론 7회까지 동점일 때는 8회부터 승부치기로 승자를 가렸습니다.) 참고로 23세 이하 야구 월드컵은 프로선수가 참가할 수 있는 대회로 세계 랭킹을 정할 때 프리미어12,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다음으로 배점이 높습니다.

    사실 야구를 꼭 9이닝까지 해야 하는 어떤 당위적 이유가 있는 건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1857년 규칙 제정 회의 때는 7이닝파(派)와 9이닝파가 서로 맞섰는데 다수결을 통해 9이닝제를 채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니까 야구를 7회까지만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그 사람들 힘이 더 세다면 규칙을 바꾼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닌 겁니다. 야구 종주국을 자처하는 미국이 각국 주재 대사관 홈페이지를 통해 자랑스레 소개하고 있는 것처럼 야구는 민주적인 스포츠니까요.

    다행히(?) 미국에서는 9이닝파의 힘이 더 셉니다. 메이저리그 연속경기(더블헤더) 1, 2차전을 모두 7이닝제로 치르고 연장이 되면 승부치기를 채택하기로 결정한 롭 만프레드 메이저리그 커미셔너(최고책임자)는 “코로나19 확산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이었다”며 다시 ‘끝장 승부’ 체제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만프레드 커미셔너 최대 관심사는 ‘경기 시간 줄이기’인데 더블헤더 7이닝제와 승부치기가 경기 시간을 줄이는 데 별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미 승부치기와 무승부라는 ‘빨간 약’을 먹은 미국인들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괜히 엉뚱한 짓 하지 말고 차라리 무승부를 허(許)하라!’고 주장하게 된 겁니다. 미국 CBS 방송은 “12회가 넘도록 진행한 경기는 메이저리그 전체 일정 가운데 0.43%밖에 되지 않는다”면서 “12회까지 동점이면 그냥 일본과 한국에서 그러는 것처럼 무승부로 처리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역시 만화 속에서 ‘시간제한이 없는 경기’는 그렇게 낭만적일 수가 없는 존재지만 현실 세계 풍경은 사뭇 다른 모양입니다.

    #신동아 #무승부 #승부치기 #메이저리그 #K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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