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7월호

‘시베리아 석유자원 확보’ 무산 위기

‘일본의 치밀한 로비’ 盧 정부의 안일함, 러 내부 갈등이 원인

  • 글: 윤성학 러시아 IMEMO 연구소 연구위원 yoonskh@chol.com

    입력2004-06-30 19: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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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너지 확보는 21세기 국가 생존의 필수 조건이다. 고유가 시대에 접어든 요즘 그 중요성은 더욱 증대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 시베리아 석유자원을 확보하려는 한국의 10년에 걸친 노력이 무산 위기를 맞게 됐다. 러시아가 일본을 위해 공급선을 바꿀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 때문. 그 배경을 알아보았다.
    ‘시베리아 석유자원 확보’ 무산 위기

    러시아의 시베리아 석유자원 개발에 동아시아 국가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2004년 5월14일 ‘러시아 시베리아 에너지 개발 회의’에서 코빅타 가스전을 포함, 향후 건설될 시베리아의 모든 가스관과 송유관을 하바로프스크-극동 나홋카 노선으로 단일화하기로 결정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한국이 지난 10년 동안 국책사업으로 진행해온 ‘이르쿠츠크 가스전 개발사업’이 중대한 위기를 맞는 상황이다.

    최근 한국은 “시베리아의 가스를 중국 만주의 다롄(大連)서해를 지나는 가스관을 통해 한국 평택항으로 공급하는 사업이 실현단계에 이르렀다”고 밝힌 바 있다. 이번에 러시아측이 결정한 나홋카 노선은 한국측의 이런 발표를 무색케 하는 것. 나홋카는 동해연안 도시로 서해연안의 평택과는 거리가 멀다. 평택항 노선을 실현시키기 위한 한국의 10년 노력이 자칫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

    나홋카에서 평택항은 지리적으로 너무 멀다. 당장 나홋카와 한국의 다른 도시를 잇는 새로운 노선을 개발하기도 마땅치 않다. 평택은 한국의 가스자원이 집결되는 곳으로, 관련 인프라가 완벽히 갖춰져 있는 유일한 도시다. 더구나 나홋카와 한국 사이엔 북한이 있다. 가스관이 북한 영토를 거쳐 한국으로 들어온다면 그것은 에너지 주권을 북한에 넘겨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홋카노선은 평택노선에 비해 생산지에서 소비지까지 수송거리가 길어 채산성도 크게 떨어진다. 전문가들은 나홋카항에서 배를 통해 국내에 들여오는 것도 가스관을 통해 수급받는 것에 비하면 경제성이 크게 떨어진다고 분석한다.

    동북아 ‘에너지 전쟁’ 개막



    러시아의 에너지 수송노선 변경 움직임은 비단 가스에 국한되지 않는다. 러시아측은 원유 공급로도 나홋카 쪽으로 선회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한국으로선 시베리아 에너지의 확보 문제 전반에 걸쳐 심대한 타격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은 에너지 공급처를 거의 전적으로 중동에 의존하고 있다. 때문에 중동 국가들은 한국에 다른 나라보다 더 비싼 가격으로 에너지를 판다. 이렇게 에너지 공급처가 한곳에 쏠리면 이라크전쟁처럼 중동지역의 정세가 불안해질 경우 한국은 에너지 수급에 비상이 걸리는 취약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에너지 공급처를 다양하게 확보하는 것은 국가적 과제다.

    고속성장을 누리며 블랙홀처럼 에너지를 빨아들이는 중국, 범세계적 자원 고갈 현상 등으로 에너지의 안정적 확보는 국가가 사활을 걸고 뛰어들어야 할 일이 되었다. 바야흐로 동북아를 포함한 전세계에서 에너지 전쟁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러시아가 광활한 시베리아의 에너지 자원 개발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시베리아는 매장량이 풍부해 지구에서 마지막 남은 에너지의 보고(寶庫)로 통한다. 한국으로서도 지리적으로 가까운 시베리아의 자원을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일은 미래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반드시 성사시켜야 할 사안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시베리아 자원을 둘러싼 정황은 한국의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시베리아 가스와 원유의 수송로로 나홋카 노선이 결정됐다는 보도가 나온 뒤 러시아 언론에는 “시베리아 가스의 최종 소비를 러시아 국내 공급용으로 돌리는 방안과 함께 아예 동아시아가 아니라 서유럽으로 연결시키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다”는 보도까지 나오고 있다.

    시류를 읽지 못한 한국, 중국

    러시아는 왜 시베리아 자원의 공급노선을 바꾸려 할까.

    러시아가 가스관을 기존의 중국 노선에서 극동으로 돌리려는 것은 항구(나홋카항)를 이용함으로써 일본, 한국, 미국 등지로 시장을 다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요자가 많아지면 공급자인 러시아의 영향력이 더 커진다는 계산이 깔려 있는 것이다. 어쨌든 현재로서는 ‘2008년부터 중국과 한국에 시베리아 가스를 공급한다’는 당초 계획대로 사업이 추진되기는 어려워진 것으로 보인다.

    코빅타 가스전의 향방과 관련, 러시아 정부는 아직 확실한 의사 결정을 하지 않은 것 같다. 현재까지는 언론 보도가 있었을 뿐 책임 있는 러시아 정부당국자, 가스개발을 주도하는 가스프롬(Gazprom)이나 TNK-BP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푸틴 정부가 코빅타 가스의 공급선을 재고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렇게 되자 시베리아 가스전 개발 사업에 한국과 함께 뛰어들었던 중국도 내심 당황하고 있는 눈치다. 고속 경제성장에 따라 중국의 에너지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시베리아로부터의 에너지 확보가 차질을 빚게 될 경우 중국은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처할 가능성이 있다. 중국 역시 러시아 정부의 이 같은 방향 전환에 속수무책이다.

    한·중 양국 정부가 시베리아 자원 개발사업의 주체인 러시아의 루시아 페트롤레움(RP)에 투자한 것도 아니다. 두 나라는 가스관 공사와 LNG터미널 사업에 돈을 넣지도 않았다. 때문에 러시아 정부의 결정에 이래라 저래라 간섭할 위치에 있지 못한 것이다.

    한국과 중국이 이처럼 어려운 입장에 빠진 근본적인 이유는 시베리아 석유·가스 개발 사업을 국익 확보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치밀하게 접근하지 않고 미시적 관점에서 안일하게 대응해 왔기 때문이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국가의 외교적 역량을 모두 동원해 추진해야 할 일을 일부 공공기관, 정부 실무부처의 여러 소관 사업 중 하나 정도로 다뤄왔다는 것이다.

    법률적으로 코빅타 가스전 개발 사업권은 이 사업의 주체인 루시아 페트롤레움(RP)이 갖고 있다. RP의 지분은 TNK-BP(러시아 4위의 정유사인 튜멘석유 TNK와 다국적 석유메이저 BP의 합작사)가 62.42%, 러시아 과두 재벌 포타닌이 주도하는 금융산업그룹인 인테로스가 25.82%, 이르쿠츠크 주정부가 11.24%를 갖고 있다. 외형상 최대주주인 TNK-BP가 안정적인 지배구조를 바탕으로 사업결정권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 내막은 다르다. 이 사업의 실질적 결정권은 상당부분 러시아 연방정부에 있다. 가스 파이프라인의 설치와 에너지 자원 수출의 최종 결정권을 갖고 있는 러시아 연방정부의 승인 없이는 이 사업은 사실상 진행이 어려운 구조다. 실제 TNK-BP는 러시아 연방정부의 계속되는 견제로 러시아에서 사업을 철수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서있다. 러시아 내부 사정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 보자.

    서방의 러시아 석유회사 사냥

    코빅타 가스전은 1970년대 매장량이 확인되면서 개발 사업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개발 구상이 나온 것은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일본 중국이 시베리아 에너지 자원에 관심을 보이자 투자 자금 부족에 시달리던 러시아 정부와 이해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후 코빅타 가스전 개발은 러시아 정상이 한국, 일본, 중국의 정상을 만날 때마다 거론되는 단골 의제가 되었다.

    3국의 경쟁에 따라 파이프라인의 방향도 몽골을 거쳐 일본으로 가는 방안, 북한 통과안, 그리고 최근까지는 중국의 다롄을 거쳐 한국의 평택으로 연결되는 서해노선이 거론됐다. 가스전 하나를 두고 국가간 이전투구 양상을 보였다.

    러시아 정부는 1990년대 초반 코빅타 가스전 개발을 위해 ‘시베리아-극동석유(Sidanco)’와 이르쿠츠크 주정부를 끌어들여 RP를 설립했다. 그러나 1998년 러시아에 금융위기가 몰아치면서 당시 러시아 5대 석유기업의 하나였던 시단코가 지주회사인 오넥심방크의 파산으로 튜멘석유(TNK)에 흡수되었다. 이 과정에서 시단코가 대주주로 있던 RP의 지분이 튜멘석유와 시단코의 원주인이었던 포타닌의 인테로스 그룹으로 나누어지게 된 것이다.

    1995년 9월에 설립된 튜멘석유는 구소련 당시 최대 국영석유기업 로스네프트(Rosneft)의 계열사들이 민영화되면서 이를 기반으로 설립됐다. 러시아의 민영 석유회사인 루크오일(LUKoil)과 유코스도 같은 방식의 인수합병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이렇게 민영화된 석유·가스 기업들이 투자 재원의 부족으로 어려움에 직면하자, 러시아 정부는 1997년 11월 외국인 투자지분 상한선 15%를 해제하는 대통령 포고령을 발동했다. 이 조치로 외국인 투자자들은 원유채굴, 정제 및 석유 수송과 관련된 러시아 기업에 대해 최대 100%까지 투자지분 확보가 가능해져 독자적인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서방은 대대적인 ‘러시아 석유회사 쇼핑’에 나섰다. 서방 국가들은 러시아 석유회사를 소유, 시베리아 에너지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려 한 것이다. 이 전략은 대체적으로 성공을 거뒀다.

    러시아 석유회사에 대한 외국 자본의 진출은 2003년 영국의 메이저 석유회사인 브리티시 페트롤리엄(BP)이 러시아 4위인 튜멘석유의 지분 50%를 80억달러에 인수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서구의 석유 메이저들은 러시아의 석유회사들이 생산 능력, 잠재적 채굴 가능성에 비해 주식이 저평가되었다고 보고 거액의 투자를 단행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TNK-BP는 이후 하루 120만배럴을 생산함으로써 유코스, 루크오일과 함께 3대 러시아 메이저로 등장했다.

    석유에 ‘올인’

    석유 메이저의 러시아 석유산업 진출에 푸틴 정부는 상당히 고심했다. 정당한 기업 투자에 제동을 걸자니 막 살아나고 있는 러시아 경제에 치명적일 것 같고, 그대로 내버려둘 경우 러시아의 석유자원이 서구 메이저 손에 완전히 넘어갈 상황이었다.

    푸틴 정부는 특히 BP의 TNK 합병에 충격을 받았다. 이후 푸틴 정부는 유코스와 시브네프트(Sibneft)의 합병 때 이를 배후에서 조종한 서구 석유메이저에 대해 칼을 뽑았다. 푸틴은 서구 석유메이저와 제휴 관계인 것으로 알려진 유코스 회장인 호도로코프스키를 탈세 혐의로 구속하고 유코스에 대해 34억달러의 세금을 부과했다. 시브네프트도 10억달러 규모의 각종 세금 탈세 추징 통보를 받았다. 합병은 무산됐다. 러시아 정부가 자국 석유기업들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는 조치였다.

    푸틴 정부의 다음 대상은 TNK-BP. 순수 러시아 기업인 유코스와 달리 TNK-BP는 다국적 메이저기업이어서 러시아 정부가 쉽사리 인신 구속과 세무조사를 할 수는 없었다. 먼저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은 TNK-BP에 근무하는 외국인 CEO들이 러시아 석유 통계를 대외로 유출했다는 이유로 이들을 형사 고소했다. 러시아 법률에 의하면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는 석유 자료에 대한 어떠한 통계도 대외적으로 유출할 수 없다.

    이것은 관례상 거의 사문화된 법이었다. 법률 위반에 대한 처벌 수위도 그렇게 높은 편은 아니었다. 처벌이 목적이 아니라 TNK-BP의 외국인 경영진을 위축시키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뒤이어 러시아 정부는 5월28일 TNK-BP가 갖고 있는, 잠재 매장량 37억배럴 상당의 사모틀로(Samotlor) 유전에 대한 법규 위반 여부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TNK-BP는 사모틀로 유전에 대해 2013년까지 권리를 보유하고 있다.

    러시아 천연자원부에 의하면 TNK-BP는 유전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으며 생산 규범을 위반하였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 유전 개발에 대한 라이선스가 철회될 처지다. 러시아 정부가 문제를 삼은 것은 신고된 생산량을 초과해 원유를 생산했다는 의혹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석유업계에서 이 같은 위반은 흔히 있는 일이며 다른 지역의 유전이 더 심각한 상황이라는 얘기도 있다.

    러시아 정부가 앞으로도 석유회사를 죌 것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런 방식으로 러시아 석유 및 가스에 대한 정치적 통제가 계속될 경우 서구 메이저의 러시아 석유기업 인수나 투자는 상당히 위축될 것으로 예측된다. 예정되어 있던 가스프롬과 루크오일의 정부 지분에 대한 민영화는 이미 물 건너갔다. 나아가 정부 일각에서는 석유 및 에너지 자산의 ‘재(再)국유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비탈리 아트유코프 러시아 천연자원부 장관은 5월5일 러시아 최대 석유회사 유코스의 유전 개발 면허를 즉각 박탈할 수 있다고 시사하여 러시아 석유시장을 뒤흔들었다. 푸틴 대통령이 서둘러 “면허권 철회는 적절하지 않다”며 진화에 나섰지만, 러시아 정부가 사유화된 석유기업을 언제든 다시 국유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미 거액의 세금을 추징 당하고 주식 44%가 동결 조치된 유코스는 당장 국유화되지는 않겠지만 정상적인 민영기업으로 복귀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유코스의 개발 면허를 박탈할 경우 유전은 정부소유가 되며 유코스 주식은 휴지로 변한다. 러시아 석유재벌 아브라모비치는 서둘러 시브네프티의 지분을 처분하려고 하고 있으며, 코빅타 가스전의 지분 25%를 갖고 있는 러시아 금속재벌 포타닌의 인테로스도 해외에 지분을 처분하려 하지만 서구 투자가들은 이른바 ‘크렘린 리스크’ 때문에 투자를 주저하고 있다.

    러시아 경제는 1999년 이후 플러스 성장세로 돌아선 이래 2000년 9%, 2003년 7.3%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러시아는 1998년 금융위기 당시 400억달러에 이르는 대외채무를 이행하지 못해 국가부도의 위기에 몰렸지만 2003년 외환보유고가 760억달러로 급증, 세계 8위의 외환보유국이 됐다. 러시아 경제의 급격한 성장의 일등공신은 석유와 가스다. 고유가에 따라 석유와 가스의 수출로 엄청난 외화를 벌어들인 것이다.

    현재 에너지 생산 산업은 러시아의 대외 수출과 연방 세수의 50%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는 고유가 시대의 최대 수혜 국가다. 러시아는 하루 평균 822만배럴의 원유를 생산수출하는 세계 최대 원유수출국이며 1700조 입방피트의 천연가스 매장량을 갖고 있는 세계 1위의 천연가스 수출국이다.

    러시아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에 가입하지 않았지만 생산량이 워낙 많아 국제 석유 수급동향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는 국제 정치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원천이 되고 있다. 푸틴 대통령조차 “러시아 전략무기는 핵무기가 아니라 석유와 가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푸틴은 민영화된 러시아의 석유기업들이 막대한 이익을 국가에 환원하지 않고 불법적으로 해외로 빼돌리고 있다고 본다. 러시아로선 대응책마련에 노심초사할 만한 일이다. 실제 러시아의 석유가 해외로 수출될 때, 생산분배법(PSA)에 의해 보장되는 국가 지분과 수출 관세 이외 국가 수입으로 들어오는 액수는 수익에 비해 미미한 실정이다. 대부분 수익은 석유기업들의 탈세를 통해 해외로 빼돌려진다. 러시아 민영 석유회사 유코스가 이렇게 빼돌린 불법 자금 수십억 달러가 스위스 은행에 예치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석유재벌 아브라모비치는 보잉 제트기를 구매하면서 러시아 국민의 분노를 샀다. 이런 이유로 러시아 석유기업들에 대한 정부의 통제 강화에 러시아 국민들은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고 ,이러한 여론은 러시아 정부의 석유 통제권을 한층 강화시키는 원천이 되고 있다.

    러시아 정부의 강력한 통제 움직임 때문에 러시아 석유회사들은 유가상승에도 불구하고 파산위기에 처해 있으며 주식은 폭락했다. 유코스 주가는 올 초 주당 15달러에서 7달러대로 떨어졌으며, TNK-BP, 시브네프트 등의 석유회사들의 주가도 바닥세를 이어가고 있다. 이들 기업의 주가 급락으로 러시아 주가지수인 RTS는 최근 몇 달간 세계에서 가장 큰 하락률을 기록했다. 이에 따라 세계 석유메이저 등 해외투자자들은 러시아 신규투자를 꺼리는 것은 물론 기존 투자자금의 조기 회수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고유가 시대를 맞아 에너지 산업이 막대한 부(富)를 창출하는 데로 관련업체가 파산 상황으로 몰리는 이율배반적인 일이 지금 러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는 에너지 확보를 둘러싼 러시아 정부와 다국적 석유자본 사이에 힘 겨루기가 얼마나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이다.

    노선변경 부른 러시아 내부 암투

    한국과 연관된 시베리아 가스 공급노선을 변경하려는 움직임은 바로 TNK-BP 등 러시아 내 다국적 석유자본에 대한 러시아 정부의 압박 조치의 연장선상에서 나왔다.

    TNK-BP는 시베리아 가스전 개발사업의 주체인 RP의 지분 62%를 소유함으로써 시베리아 가스전 사업을 주도해왔다. 그러자 러시아 정부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가스프롬은 TNK-BP가 시베리아 가스전 개발에서도 법률을 위반한 혐의가 있다고 주장했다. TNK-BP가 러시아의 유일하고 합법적인 가스 수출업자인 가스프롬을 배제하고 시베리아 가스를 수출하려고 한 것은 불법이라는 얘기다. 가스프롬은 시베리아 가스전 사업을 자사의 독점적 지위에 대한 위협으로 판단하여 가스전 사업 주관사인 RP를 직접 통제하려 하고 있다.

    러시아 정부는 RP의 주도 세력인 TNK-BP가 국제시세보다 저렴한 가격에 러시아 가스를 중국과 한국에 판매하려 한다고 의심하고 있다. 특히 가격협상 과정에서 중국이 현재 러시아가 유럽에 수출하는 가격의 절반도 안 되는 낮은 가격을 제시하자 러시아 정부 내에서는 “차라리 가스관을 유럽으로 돌리는 편이 낫겠다”는 주장까지 터져 나왔다.

    우랄산맥 서쪽에 위치한 서시베리아에선 1960년대부터 가스전이 개발됐다. 여기서 생산되는 가스는 장거리 가스관을 통해 지리적으로 가까운 유럽에 공급되고 있다. 현재 유럽 전체 가스 소비량의 30%이상을 서시베리아에서 공급하고 있다.

    러시아 정부가 전면적 압박을 가해오자 TNK-BP는 타협적 자세를 보이게 됐다. TNK-BP의 빅토르 벡세버르그 이사는 가스프롬의 밀러(Alexei Miller)회장과의 회담에서 가스 수출은 가스프롬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했다. 중국 노선(다롄~평택노선)이 가격이나 가스 파이프라인 문제로 힘들다면 나홋카로 가스관을 돌리는 방안도 받아들일 수 있다며 백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한국과 중국은 러시아 내부 정세를 읽지 못해 결국 불리한 상황에 처했다. 이제 러시아 코빅타 가스전의 결정권은 다국적 기업에서 푸틴 정부의 손으로 완전히 넘어가게 됐다.

    러시아의 유명한 벼룩신문 제호 ‘이즈 루키 브 루키’는 한국어로 번역하면 ‘누구의 손에서 누구의 손으로’이다. 지금 푸틴의 고민이 바로 여기에 있다. 러시아 과두재벌에 장악된 석유기업을 다시 국유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이것을 다른 어떤 조직이나 기업이 운영하여야 하는데, 누구에게 맡겨야 할 것인가에 대해 확실한 답이 없는 것이다.

    푸틴은 그 자신이 오랫동안 몸담았던 옛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의 후신인 FSB(연방보안국)를 어떤 조직보다 신뢰한다. FSB는 러시아의 관료 조직 가운데 가장 부패하지 않은 조직이다. 일례로 부패한 관리들의 행패로 외국인들의 원성이 컸던 공항 출입국 관리를 지난해부터 FSB가 맡은 이후 그런 불만이 크게 줄어들었다. 푸틴은 경제 운영과 관련하여 FSB만큼 믿을 수 있는 조직으로 가스프롬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에 따라 가스프롬이 러시아 최대의 석유기업 유코스를 인수할 것으로 보인다. 가스프롬은 공식적으로 유코스 인수를 언급지는 않지만, 유코스의 자산 매각이 공개적으로 이루어질 경우, 참여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밝혔다.

    러시아 가스의 독점 공급사인 가스프롬은 외국인 지분 획득이 금지되어 있는 국영회사다. 러시아 정부는 러시아 민영화의 최종 단계로서 가스프롬(가스), UES(전력), 스베르방크(은행), 스베야인베스트(통신)를 민영화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가스프롬에 대한 국가 지분이 늘고 국가 통제도 더욱 강화되는 추세이다.

    가스프롬이 유코스를 인수하더라도 석유산업에서 러시아가 큰 이익을 볼지는 불확실하다. 가스산업의 경우, 가스프롬은 독점적 사업자이고 유럽에 20년 이상 독점적으로 가스를 공급해왔지만 석유산업은 사정이 다르다. 국내외에 경쟁자들이 즐비하다. 또 석유산업의 특성상 생산·경영 효율성을 높이지 않으면 일순간에 부실화되기 쉽다. 서구 메이저들이 러시아에서 큰 이익을 취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러시아 석유산업의 비약적인 생산 증대와 공급 물량의 확대는 이들의 선진 경영 능력 때문에 가능했던 것도 사실이다.

    러시아는 지금 핵이 아니라 카스피해와 시베리아 에너지 자원을 지렛대 삼아 세계 외교무대에 복귀하고 있다. 에너지 자원을 무기로 투자 유치와 외교 역량을 강화하려 하는 것이다. 시베리아 가스전의 공급노선을 둘러싼 정착도 푸틴의 신외교전략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다.

    푸틴은 평택으로 올 뻔한 시베리아 가스관 노선을 백지화시킴으로써 가스전 개발을 국제 경매에 내놓았다. 러시아는 터키 송유관에서 당한 뼈아픈 경험을 바탕으로 단일 수요자에게 독점권을 주는 것은 주저하고 있다.

    일본은 푸틴의 에너지 자원을 이용한 신외교전략에 적절히 대응했다. 일본은 한국, 중국보다 일찍 시베리아 에너지 자원의 전략적 중요성을 간파했다. 고이즈미 총리 등 일본 수뇌부들이 시베리아 에너지 자원의 공급선을 일본 쪽으로 끌어오기 위해 직접 나섰다. 고이즈미는 푸틴과 ‘인간적’으로 가까워졌는데 일본은 러시아에 대폭적인 선물 공세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가의외교력, 자본력을 총동원해 러시아에 접근한 것이다.

    이러니 러시아가 일본에 호감을 가지게 된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하겠다. 러시아 극동지방인 연해주는 일본 기업들의 주무대가 되어 연해주 자동차 시장은 일본 기업들이 완전 장악했다. 푸틴 대통령은 최근 대국민 연설에서 미국, 중국, 인도와 함께 일본을 ‘러시아 최대 파트너’라고 언급했을 정도이다.

    나홋카 노선은 시베리아의 원유와 가스가 일본으로 가는 최단거리 노선이다. 러시아가 다롄-평택 노선 대신 나홋카 노선을 최종 결정할 경우 최대 수혜를 보게 되는 나라는 두말할 것도 없이 일본이다. 나홋카 노선이 확정되면 일본은 시베리아 에너지를 지속적이고 안정적이며 효율적으로 공급받게 된다. 에너지 확보가 국력의 바로미터가 되고 에너지 확보 전쟁이 개시된 국제정세를 고려했을 때 1라운드에서 일본은 승리한 셈이다.

    반면 한국 노무현 정부의 대러시아 외교는 낙제점에 가깝다. 노무현 정부는 ‘동북아 경제중심’이라는 구호만 주창했다. 노무현 정부가 러시아에 차관상환을 면제해주는 엄청난 선물을 주었지만 한·러 관계는 더 멀어졌다는 극단적 평가까지 나오고 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후 오랫동안 러시아를 방문하지 않았다. 또 북한 핵 문제 관련 회담에서 러시아를 배제하려는 듯한 한국의 자세도 러시아 외무성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 주요 에너지 소비국들은 정상이 직접 나서 에너지 확보 문제를 챙기는데 한국 정부는 실무선이 알아서 하도록 방치했다.

    에너지와 안보의 상관관계

    중국·일본 등은 시베리아 에너지 자원의 배타적 독점을 원한다. 따라서 에너지 확보를 놓고 동북아시아 국가들 간 호혜적 타협이 쉽게 이뤄질 것 같지 않다. 에너지 문제만큼은 다자간 관계보다는 한·러 양자간 관계의 강화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에너지 확보 차원에서 한국이 러시아와 협력을 강화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한국의 안보를 튼튼히 하는 일과도 이어진다.

    러시아 조야(朝野)의 분위기로 볼 때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한반도 주변 4강국 중 한반도 통일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국가가 바로 러시아다. 러시아는 ‘자본력’을 갖춘 ‘통일 한국’과 두만강 국경을 접하게 될 경우 △시베리아철도 이용의 활성화 △한국자본의 시베리아-연해주 투자 증대 등 경제적 실익이 큰 반면 통일 한국 등장에 따른 러시아의 안보 불안이나 외교력 위축 등 부정적 요인은 미미하다고 보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을 계기로 한·러 관계가 미래지향적 우호관계로 발전하게 될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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