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YS 재임 중 ‘논현동 방문’ 음식 준비
- 출국금지 놓고 김현철과 다퉈
- 1997년 대선 때 이회창 후보 자택 드나들어
- 2000년 검찰 조사받으러 귀국할 때 김홍업씨와 상의
- 관련자들, 대체로 부인하거나 부분 시인
- “盧 정부 출범 직후 대통령비서실장에게 ‘자주국방’ 편지”
린다 김은 지난 9월15일 신정아 사건을 주제로 한 ‘신동아’ 인터뷰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과 아들 김현철씨,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등 정치권 인사들과의 인연에 대해 간략히 언급했으나 기자는 이를 기사화하지 않았다. 검증과 추가 취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린다 김의 로비활동과 정치권 인맥에 대해 보강 취재한 후 9월 하순과 10월 초 린다 김을 두 차례 더 만났다.
린다 김은 인터뷰에서 “로비스트에게 보안은 생명”이라며 “이런 얘기를 다 까발리면 어떡하냐”고 볼멘소리를 했다. 하지만 “어차피 지난 일이고 로비스트로서 린다 김의 파워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아보자는 취지”라는 기자의 설득에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관계다. 린다 김은 김 전 대통령과 특별한 친분이 있었다는 의혹에 대해 “단둘이 만난 적은 없다”고 에둘러 답변했다. 린다 김에 따르면 그와 김 전 대통령의 연결고리는 고(故) 김윤도 변호사다. 김 전 대통령과 만날 때는 늘 김 변호사와 함께였다고 한다.
YS 논현동 ‘안가(安家)’ 논란
린다 김에게 김 변호사를 소개해준 사람은 5·6공과 김영삼 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정종택씨. 정 전 장관과 린다 김의 오랜 친분은 2000년 린다 김 스캔들이 불거졌을 때 언론보도를 통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린다 김에 따르면 정 전 장관과 김 변호사는 사돈간이라고 한다.
김 전 대통령과 절친한 관계이던 김 변호사 역시 2000년 스캔들 당시 린다 김의 주요 인맥으로 거론된 바 있다. 김 변호사는 김영삼 정부 시절 린다 김이 정치권 인맥을 구축하는 데 상당한 도움을 줬다. 법무법인 새한양 소속이던 김 변호사는 2000년에 사망했다.
린다 김은 김 전 대통령을 야당 시절부터 알고 지내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친분을 쌓은 것은 김윤도 변호사를 통해서였다고 밝혔다. 김 변호사와 함께 몇 차례 만났으며 그를 통해 자신에 대한 김 전 대통령의 ‘오해’를 풀었다고도 했다.
“노태우 정부 시절 P장관이 YS와 대권을 놓고 싸웠잖아요. 노 대통령 부인 김옥숙 여사는 P장관 편들고, 노 대통령과 금진호 장관은 YS 편들고. 금 장관은 나중에 뒤통수 맞았지. YS가 대통령 되고 나서 금 장관을 낙동강 오리알로 만들어버렸잖아요. P장관이 YS 때문에 외유(外遊)에 나섰을 때 내가 도와준 적이 있어요. LA에 왔을 때 (내가 운영하는) 회사 사장을 시켜 수행하게 했어요. 그걸 YS가 알았다고. 나는 미운털이 박힌 거죠. 이제 장사는 다 해먹었구나 싶었지. 그때 김윤도 변호사가 중간에서 풀어줬어요.”
김영삼 전 대통령은 술을 잘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린다 김에 따르면 YS가 밸런타인 30년산을 즐겼으며, 반 병 정도 마시면 말이 많아졌다고 한다. 린다 김은 김 전 대통령을 재임 중에도 만났다고 털어놓았다. 장소는 서울 논현동에 있는 김윤도 변호사의 집.
“당시 김 변호사 부인이 하와이에 계셨어요. 거기서 학교 다니는 아이들 때문에. 그래서 김 변호사가 혼자 지낼 때가 많았어요. 그 집에 가끔 YS가 놀러가곤 했어요. YS가 취임 후 안가(安家)를 다 없앴잖아요. 말하자면 김 변호사 집이 안가 구실을 한 거지. YS 재임 중 한번은 김 변호사가 나한테 음식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하더라고. YS가 저녁 먹으러 온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음식을 준비해줬어요. 평소 알고 지내는 OO(정치인 단골이 많은 강남의 유명한 한정식집) 사장한테 얘기해 서빙할 여자들도 들여보냈지.”
2000년 5월9일, 스캔들에 휩싸인 린다 김이 응급차에 실려 병원에 도착하자 취재진이 몰려들고 있다.
린다 김은 “YS를 재임 중 몇 번이나 만났느냐”고 묻자 “그런 걸 쓰면 어떡하냐. 생존해 있는데…”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대선자금 혹은 정치자금을 건네지는 않았느냐는 질문엔 “몇 번 물어봐도 소용없다. 준 적이 없으니”라고 부인했다. 또 YS와의 친분이 사업에 도움이 됐느냐는 질문에도 “도움 받은 적 없다.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청와대 다녀온 이양호 장관의 전화
1996년 10월 이양호 국방부 장관이 뇌물사건으로 낙마할 때 김영삼 대통령은 안기부·기무사 보고를 통해 이 장관과 린다 김의 관계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대해 린다 김에게 물어보자, 이양호 전 국방부 장관한테 들었다며 흥미로운 얘기를 들려줬다.
“YS와 이 장관, 두 사람 관계가 평소 좋았잖아요. 이 장관 뇌물사건이 터지기 직전이었는데, 어느 날 이 장관이 청와대에 들어갔다 나와서 나한테 전화를 했어요. 장군 진급인사를 보고하는데, (YS 표정이) 싸늘하더래.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YS가 ‘차 한잔 마시죠’ 하더니, 이러더래요. ‘이 장관, 이런 말이 있죠?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고.’ 이 장관이 나한테 전화로 이 얘기를 전하면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갑자기 대통령이 왜 그런 얘기를 했는지 모르겠다며. 이 장관이 그 뜻을 헤아리느라 며칠간 골머리를 앓았어요. 그러다 뇌물사건이 터졌지요.”
이 장관은 1996년 10월26일 무기중개상 권병호씨의 폭로로 경전투헬기사업과 관련해 대우중공업에서 1억5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당시 공범에 해당하는 권씨의 폭로 배경과 개운치 않은 검찰 수사를 두고 뒷말이 많았다.
“재임 중 사가(私家) 간 적 없다”
이전에 다른 사건에 연루돼 사기혐의로 기소중지 상태이던 권씨는 김포공항을 통해 중국으로 달아났고 검찰은 중국에서 보내온 권씨의 진술서를 이 장관의 수뢰혐의를 입증하는 유력한 증거로 삼았다. 이 장관은 그해 12월 1심에서 4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97년 12월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특별사면 때 함께 풀려났다.
김영삼 전 대통령측은 린다 김과의 관계에 대해 펄쩍 뛰었다. 김기수 비서실장은 “김윤도 변호사가 각하를 판 것 같다”며 “확인 안 되는 얘기”라고 관련 의혹을 부인했다. 김 실장은 “정치인은 사람 만나는 게 일 아니냐”면서 “워낙 많은 사람을 만났으니 그중에 혹시 린다 김이 포함됐는지는 모르겠지만 결코 알고 지낸 사이는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린다 김의 로비에 대한 세간의 부정적 평가를 의식해선지 “로비라는 게 꼭 나쁜 건 아니지 않나”라면서도 “야당 시절 식당 같은 데서 우연히 만났는지 모르겠지만, 만났다 해도 그때는 무기 도입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지 않느냐”고 방어막을 쳤다.
‘논현동 방문’에 대해선 기가 막히다는 반응을 보였다.
“내가 30년간 각하를 모시고 5년간 대통령 관저에서 함께 생활했는데, 김윤도 변호사 집을 몰라요. 각하는 재임 중 절대 사가(私家)에 간 적이 없습니다. 성북동 칼국수집이나 봉이설렁탕집을 빼고는. 물론 김윤도 변호사의 집에도 간 적이 없지. 거길 왜 가나. 대통령은 국가기관입니다. 잠행이나 미행을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만약 나간다면 경호실과 관할 경찰이 좍 깔려야 해요. 한두 사람이 움직이는 일이 아니라고요.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소리야. 취임한 후에는 사돈집에도 안 갔는데…. 그리고 준(準)전시상태에서 대통령이 어떻게 사저를 찾을 수 있어요? 소설 같은 얘기예요.”
김 실장은 린다 김의 증언 내용이 매우 구체적이라는 기자의 지적에 “신정아 사건을 보더라도 원래 거짓말은 매우 구체적이다”라며 수긍하지 않았다. 김 실장은 정식으로 질의서를 넣겠다는 기자의 제안을 거절했다. ‘각하’는 그런 문제에 대해 일절 말씀하지 않는다면서.
“전에도 누군가 린다 김과 관련한 질문을 해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 각하는 ‘걔가 어떻게 생겼냐’는 반응을 보였어요. 만난 적이 전혀 없다고 보면 됩니다.”
“청와대가 ‘금강’을 캐나다에 넘기려…”
1993년 6월 중부전선을 시찰하는 김영삼 대통령. 뒤편 오른쪽 첫줄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이 권영해 국방부 장관과 이양호 합참의장이다. 두 사람은 뒷날 각각 안기부장과 국방부 장관에 오른 후 무기 도입을 두고 갈등을 빚었다.
“두 분이 몹시 친했던 건 맞아요. 각하가 남산체육관에 다니던 시절 거의 매일 만났으니. 그래도 청와대에 맘대로 들어오지는 못했습니다.”
김 실장에 따르면 김 변호사는 김 대통령 재임 중 사람들에게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하면서 인사 문제 등에 관여하는 등 몇 차례 물의를 일으켰다고 한다. 그 때문에 ‘잘 아는 사람’으로부터 경고를 받기도 했다는 것. 김 실장은 “권력 주변을 맴돌던 린다 김이 김 변호사와 자주 만났던 것 같다”고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했다.
그런데 아무리 ‘간 큰’ 린다 김이라도 생존해 있는 전직 대통령을 상대로 거짓 주장을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런 ‘허황된 거짓말’을 해서 얻을 이익이 무엇일까. 이에 대해 김 실장은 “그쪽의 일방적 주장일 뿐”이라며 “자기 과시가 아니겠냐”고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린다 김은 “김 대통령이 백두·금강사업에 대해 알고 있었느냐”는 질문에 “알고는 있었겠지만, 관여하지는 않았다”면서 유종하 전 외무부 장관 관련설에 대해 밝혔다. 최근 한나라당 공동선대위원장(외교안보 분야)을 맡은 유씨는 김영삼 정부에서 외교안보수석과 외무부 장관을 지냈다.
“당시 청와대에서 금강(사업)을 캐나다에 넘기려 한다는 소문이 있었어요. YS는 아무것도 모르니 밑에서 하자는 대로 하려 했죠. 내가 아차 싶어 김윤도 변호사를 찾아가 금강을 캐나다로 넘기면 안 된다고 했어요. (금강사업에 응찰한) 캐나다 회사는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회사였어요. 사업을 따낼 경우 자체적으로 하드웨어를 제작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백두사업에 뛰어든 미국의 E시스템사에 넘길 예정이었거든요. 그렇게 되면 백두·금강 모두 미국 회사가 차지하는 거죠. 그리고 내가 수집한 정보로는 캐나다 회사는 당시 매각 협상을 벌이고 있었어요. 금강을 따내면 매각 가치가 엄청 커지게 되는 거죠.”
자칫 금강사업을 뺏길지 모른다고 생각한 린다 김은 프라자호텔에서 유종하 외교안보수석을 만났다고 한다.
“‘안보수석께서 캐나다 회사를 민다고 소문이 좍 나 있다’고 말해줬죠. 사실은 그런 소문이 난 게 아니었지만. 그 사람도 외무부 장관 바라보고 있던 터라 무슨 얘긴지 금방 알아듣더라고요. 사실 유 수석은 무기 문제에는 개입하지 않던 분입니다. 그런데 당시 외교적 차원에서 캐나다에 뭔가를 넘겨줘야 할 상황이었어요. 캐나다 정부가 한국 정부에 몇 가지를 부탁했는데, 하나같이 들어주기 곤란한 요구였거든요. 그래서 정부 내에서 금강이라도 넘겨주자는 얘기가 나왔던 걸로 알고 있어요.”
“위험한 여자다”
유 전 장관은 이런 얘기에 대해 “사실이 아니다”라며 “린다 김을 만난 적 없다”고 부인했다. 다만 어떤 사람이 “린다 김이 무기 구입에 대해 잘 아니 한번 만나보라”고 권했는데, “나는 무기에 관여하지 않는다”며 거절한 적이 있다고 했다. 유 전 장관은 당시 자신에게 그런 제안을 한 사람에 대해 실명은 밝히지 않은 채 “(2000년 린다 김 스캔들이 불거졌을 때) 신문에 자주 거론되던 정치인”이라고만 했다.
“당시 나는 무기 도입과 군 인사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습니다. 백두·금강에 대해선 내용도 잘 몰랐고요. 국방 관련 업무는 안보수석실 소속 국방무관이 챙겼는데, 이슈가 되는 사안만 대통령께 보고했지요. 그런데 당시 백두·금강은 청와대에서 이슈로 취급된 적이 없습니다.”
유 전 장관은 그 문제로 이양호 당시 국방부 장관과 협의한 적도 없다고 밝혔다. 전(前) 정권의 안보수석이던 김종휘씨가 F-16전투기 사업에 손댔다가 교도소 갔던 일을 교훈 삼아 무기 쪽에는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 전 장관은 “분명히 린다 김 스스로 나를 만났다고 하더냐?”고 몇 번이나 물어본 뒤 “위험한 여자다. 큰일 낼 여자”라며 “연락처를 가르쳐달라, 만나보겠다”고 했다. 유 전 장관의 반응을 전해 들은 린다 김은 “그럼 그때 프라자호텔에서 내가 만난 사람은 유 수석이 아니고 누구였냐”고 받아치며 “얼마든지 만나겠다. 내 전화번호를 가르쳐주라”고 호기롭게 나왔다.
2002년 12월19일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후보가 부인 한인옥씨와 함께 서울 종로구 효자동 제2투표소에서 투표를 하고 있다. 린다 김은 1997년 대선 때 이회창씨의 자택을 드나들며 한씨와 친분을 쌓았다.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는 여자는 아예 안 만나는 게 공직자의 금도지요. 일단 만나면 이런저런 말이 나오게 되거든요. 내가 이런 일은 했어요. 당시 정치인들 중에 무기 도입에 관여하는 사람이 더러 있었습니다. 국방부 장관에게 ‘그런 정치인들이 뭔 얘기를 하면 들어주지 말고 대통령께 곧바로 보고하라’고 일렀죠.”
린다 김의 증언에 따르면, 김 전 대통령의 아들인 김현철씨와는 특별한 친분이 있었던 게 아니라 일시적인 만남이 있었을 뿐이다. 린다 김은 2000년 6월호 ‘신동아’ 인터뷰 당시 김씨와의 관계에 대한 질문에 “현철이가 무기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내가 걔한테 도움 받을 일이 뭐 있느냐”며 항간에 나돈 친분설을 부인했다. 또한 “권영해(당시 안기부장) 손에 놀아나는 어린애였다”는 말로 짐짓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 바 있다.
린다 김 얘기대로라면 김현철씨와의 인연은 악연에 가깝다. 어느 날 사업차 이스라엘로 떠나기 위해 김포공항에 갔는데, 출국금지 조치가 내려져 있었다. 공항에 파견 나와 있는 군 정보기관 관계자에게 사유를 알아보니, 안기부 지시에 따른 조치였다. 직감적으로 김현철씨가 개입했다고 판단한 린다 김은 곧바로 김윤도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시 권영해 안기부장이 김현철에게 엉뚱한 보고를 한 걸로 알고 있어요. ‘김 소장(김현철)이 린다 김과 함께 백두·금강사업에 관여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그런데 전혀 사실이 아니었거든요. 그러니 그 얘기를 들은 김현철이 화가 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안기부에 지시해 나를 출국하지 못하게 했다고 생각한 거죠. 김 변호사에게 ‘현철이를 만나게 해달라’고 했지요.”
그날 세 사람은 하얏트호텔 일식당에서 만나 점심을 먹었다고 한다. 계속되는 린다 김의 증언.
“만나서 따졌지요. 나하고 무슨 감정이 있어서 출국금지시켰냐고. 한 가지 웃기는 건, 김 변호사가 자기 아버지와 40년 친구잖아요. 그런데 자기가 상석에 앉는 건 무슨 경우야? 정말 더럽게 싸가지 없다고 생각했죠. 내가 따지니까, 자기가 한 일이 아니라고 부인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오버액션을 쓰더라고. 그 자리에서 김기섭(당시 안기부 기조실장)한테 전화를 걸어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더라고요. ‘아니, 누가 린다 김을 출국금지하라고 했어요? 소문이 있으니 한번 알아보라 그런 거지. 그것 좀 빨리 풀어주시오.’ 내 앞에서 쇼업(showup)한 거죠. 미안하게 됐다고, 안기부에서 오버한 것 같다고 그러더라고요. 듣고 보니 현철이가 시킨 건 아닌 것 같더라고. 그래서 밤 비행기 타고 나갔다니까.”
“전화받은 건 사실이지만, 만난 적 없어”
▼ 수사기관도 아닌 안기부가 맘대로 출국금지 조치를 내릴 수 있습니까.
“그때는 그놈들 맘대로야. 조금이라도 조사할 여지가 있다면….”
▼ 김현철씨가 세긴 세네요.
“나 참, 뭔 놈의 출국금지가 5분 만에 풀리냐. 내가 비행기 시간 늦었다고 방방 뜨니까 경찰 사이드카까지 붙여주데. 공항에 지시해 비행기 10분 대기하게 하고.”
린다 김은 이후 김현철씨와 만난 적이 없다고 했다. 정권이 바뀌면 사고가 날 것 같아 ‘가까이 하면 안 될’ 사람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김현철씨는 이 같은 내용에 대해 일부는 시인하고 일부는 부인했다. 김씨의 오랜 측근은 “당시 김윤도 변호사에게 그런 전화를 받은 건 사실인데, 린다 김을 만나지는 않았다고 한다”고 전했다.
“김 변호사가 전화를 걸어와 검찰이 린다 김을 출국금지했는데 도와달라고 했대요. 김 소장은 ‘내 소관이 아니니 어쩔 수 없지 않냐’고 거절했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김 변호사가 어떻게 린다 김과 아는지 의아스러웠대요. 아버님과 김 변호사가 둘도 없이 가까운 관계였으니. 김 변호사가 어떻게 설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김 소장은 린다 김을 만난 적이 없답니다.”]
린다 김의 활동을 소재로 삼은 SBS 드라마 ‘로비스트’의 한 장면.
“한 여사가 집에서 한복만 입던 양반이잖아요. 그런데 대선후보 부인이 되니 여기저기 외부 행사에 나가야 하잖아요. 내 옷 입는 스타일이 맘에 들었대요. 그때만 해도 늘 정장만 입고 다녔지요. 그래서 한 여사 의상 코디를 도와줬어요. 그걸 안기부와 기무사에서 부풀려 소문을 낸 거예요.”
“사업 얘기는 안 했다”
린다 김이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부부와 알게 된 것은 1997년 대선 때다. 당시 서울 구기동 이회창 전 총재 집을 몇 차례 드나들었는데, 그것을 안기부 비선 라인에서 촬영해 밥만 먹으면 드나든 것처럼 과장해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측에 전달했다는 것이다. 린다 김은 대선이 끝난 후 자신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김홍업씨가 알려줘서 그런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
한인옥씨와 알게 된 경위에 대해선 “정계에 있는 분들이 연결해줬다”고만 밝혔다. 린다 김은 한씨에 대해 “당시 대선후보 부인들 중에는 가장 괜찮은 분이라 생각했다. 참 좋아하고 존경했다”고 우호적인 감정을 드러냈다.
이회창 후보와는 딱 한 번 조찬 때 만났다고 했다.
▼ 사업 얘기를 했습니까.
“그런 자리에서 무슨 사업 얘기를 꺼냅니까. 어떤 멍청이가. 힘내십시오, 그러지.”
▼ 이 후보가 린다 김이 무슨 일 하는지 알았나요.
“내가 얘기 안 했어요.”
▼ 한인옥씨는 알았을 것 아닙니까.
“알았지요.”
▼ 부부간에 다 얘기할 텐데요.
“얘기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할 얘기, 안 할 얘기를 구분할 줄 아는 여자이니. 또 모르죠. 알면서도 모른 척했는지.”
▼ 로비스트로서 유력 대선후보에게 다리를 걸쳐놓은 셈이네요.
“그런 점도 있죠. 장사꾼이니.”
▼ 정치자금을 건네진 않았습니까.
“그런 얘기를 지금 어떻게 합니까.”
▼ 이회창씨가 당선됐다면 덕 좀 봤겠네요.
“오브(of)가 코스(course)지. 자다가 전화를 받았는데, DJ가 됐다는 거예요. 갑자기 머리가 띵 하더라고. 조풍언 생각이 나면서.”
린다 김과 마찬가지로 재미교포인 조풍언씨는 김대중 전 대통령 집안과 가까운 무기중개상으로 김대중 정부 시절 무기 도입과 군납 사업에서 돋보였다.
린다 김은 “2002년 대선 때는 이 후보 부부와 안 만났느냐”는 질문에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그만 물어보라”며 “모른다”고 했다. 잠시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그 심정을 이해할 만했기에 더 캐묻지 않았다.
한인옥씨는 린다 김과의 친분에 대해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측근을 통해 이렇게 설명했다.
“1997년 대선 때 남편의 선거를 돕는 과정에서 만난 많은 사람 중 한 분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특별히 일과 관계되는 얘기를 나눈 적은 없습니다.”
이 전 총재의 측근은 당시 린다 김이 한씨와 몇 차례 만난 것은 사실이라고 부연했다. 한씨의 기억에 린다 김은 “매우 예의바르고 품격 있는 여성”이었다고 한다. 반면 이 전 총재는 “(린다 김을) 만난 기억은 없지만, 혹시 다른 사람들과 조찬을 할 때 거기에 포함됐었는지는 모르겠다”는 답변을 이 측근을 통해 전했다.
이제 김홍업 의원 차례다. 린다 김은 2002년 7월 LA에서 진행된 ‘신동아’ 인터뷰에서 김 의원과의 친분을 드러낸 바 있다. 당시 린다 김의 발언 요지는 이랬다.
“홍업이와는 오랜 친구다. 20대 초반에 친구를 통해 알게 됐는데, 단둘이 사귄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이 어울려 지냈다. 하지만 일과 관련해서는 홍업이에게 부탁한 적이 없다. 김대중 정권 출범 후에는 오히려 내가 피했다.”
“검찰도 봐주려 했다”
기무사는 1996년 린다 김과 이양호 국방부 장관과의 관계를 뒷조사하면서 린다 김의 전화통화를 장기간 감청했다. 군검찰과 군사법원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기무사는 약 2년간 군검찰을 통해 군사법원에 린다 김에 대한 감청영장을 지속적으로 청구했다. 특별한 범죄혐의가 없는데도 영장 청구가 계속되자 군판사가 제동을 걸기도 했다. 당시 린다 김과 알고 지낸 많은 군 관계자와 정치인이 이 통화감청에 걸렸는데, 김홍업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기무사가 수사한 백두사업은 이양호 전 국방부 장관이 1991년 국방부 정보본부장 시절 자주국방 차원에서 적극 추진한 사업이다. 린다 김이 미국 E시스템사의 로비스트로 이 사업에 뛰어든 것은 1995년 초. 사업자 선정작업이 한창이던 이듬해 3월 이양호 국방부 장관은 황명수 국회 국방위원장의 전화를 받고 나간 자리에서 린다 김을 소개받았다. 그 자리엔 김윤도 변호사도 동석했다.
군 관계자들에 따르면, 백두사업에 대한 기무사 수사는 자주국방파와 연합방위파의 충돌에서 비롯된 면도 있다. 한국은 미국의 정보 종속국이다. 백두사업은 한국군이 독자적으로 정찰기를 띄워 휴전선 이북의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다.
당시 군 안팎에서 백두사업을 반대하던 사람들 중엔 이른바 연합방위론자가 많았다. 이들은 “정보는 한미연합자산을 활용하면 된다” “한국이 자주정보력을 갖게 되면 한미관계에 균열이 생길 수 있다” 등의 명분으로 백두사업의 문제점을 부각시켰다. 이는 전통적으로 지상군 중심 무기체계를 선호하는 군 주류 세력의 시각을 반영한 것으로, 공군 출신 이양호 전 국방부 장관으로 대표되는 비육군 세력에 대한 견제이기도 했다. 기무사와 안기부는 국방부와 청와대에 백두정찰기의 부정적 면을 중점적으로 보고했다. 도입되기 전부터 기종(機種)과 ROC의 문제점, 운용부대 내부의 불협화음 등으로 논란에 휩싸인 백두사업이 오늘날 군 일각에서‘무용지물’이라는 과도한 비난을 받게 된 이유다.
1998년 10월 기무사는 백두사업 비리를 수사한다며 린다 김이 회장으로 있던 무기중개업체 IMCL의 한국지사를 압수수색하고 직원 2명을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당시 린다 김은 미국에 머물고 있었다. 그해 12월 군검찰 관계자가 LA로 건너와 린다 김을 조사하고 돌아갔다. 군 수사기관으로서는 현직 대통령의 아들인 김홍업씨와의 관계에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린다 김의 전언으로는, 김홍업씨는 기무사에서 린다 김의 관계에 대해 물었을 때 “친구 사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예상치 못한 구속
2000년 3월 린다 김은 자진 귀국해 검찰 조사를 받았다. 미국 영주권자인 그는 당시 한국 검찰에 의해 기소중지된 상태였다. 린다 김의 귀국을 두고 정권 실력자의 ‘안전 보장’을 받고 들어온 게 아니냐는 관측이 유력했다. 한 달 뒤 검찰이 불구속기소한 점도 이를 뒷받침했다.
이에 대해 린다 김은 2002년 인터뷰에서 “귀국하기 전 검찰과 협의했다”는 말로 ‘방패막이’가 있었음을 시사했지만 그 이상의 언급은 피했다. 이번 인터뷰에서 다시 묻자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당시 김홍업씨한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린다 김은 난처한 기색으로 뜸을 들이다가 “내가 얘기할 사람이 걔밖에 더 있었겠느냐”고 시인했다.
2007년 4·25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민주당 김홍업 의원에게 박상천 대표(오른쪽)와 김효석 의원이 꽃다발을 건네고 있다. 김 의원은 린다 김을 20대부터 알고 지냈다고 밝혔다.
린다 김이 말한 ‘꼴통 같은 판사’는 지난 6개월간 법원 내부 통신망과 언론 기고 및 인터뷰를 통해 이용훈 대법원장 탄핵을 주장하다 끝내 이 대법원장을 직무유기 혐의로 검찰에 수사의뢰한 J부장판사다. J부장판사는 최근 대법원으로부터 정직 2개월의 징계를 받고 서울행정법원에 징계에 불복하는 소송을 냈다.
“판결문이 정상이 아니었어요. 내 죄명이 2급군사기밀보호법 위반인데, 나처럼 (무기 중개업) 자격증을 가진 사람 중에 2급 비밀을 다루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그것도 죄라고…. 그리고 (군검찰 수사기록에 포함된) 기무사 녹취록만 보고, 사실이 아닌 내용을 사실인 것처럼 판결문에 썼어요. 어떻게 내가 이OO 대령과…. 정말 소름 끼치고 징그러웠어요.”
2000년 7월 재판부는 린다 김을 법정구속하면서 백두사업 주미사업단장이던 이OO 대령과 린다 김의 ‘부적절한 관계’를 언급했다. 군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기무사 조사를 받을 때 린다 김과의 성관계를 시인했던 이 대령은 군검찰에 가서는 “강압에 의한 허위자백이었다”고 부인했다.
린다 김의 죄목은 두 가지였는데, 나머지 하나는 뇌물공여 혐의였다. 백두사업체계관리단장 권OO씨에게 500만원씩 두 번에 걸쳐 1000만원을 건넨 사실이었다. 법원은 뇌물이 아니라는 린다 김과 권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두 사람이 무죄를 주장한 것은 그 돈에 대가성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백두사업자 선정이 끝난 것은 1996년 6월이고, 린다 김이 권씨에게 돈을 건넨 것은 1997년 10월과 12월이다. 대가성이 있었다고 해도 관례에 비춰 1000만원은 구속에 어울리지 않는 액수임에 틀림없다. 검찰이 불구속기소한 데는 그런 사정도 있었다.
당시 재판장이던 J판사는 판결문에서 “피고인(린다 김)은 동인(이OO 대령)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으면서 동인으로부터 백두사업 관련 군사정보를 제공받아온 것으로 보여져 그 범정(범죄의 정황)이 극히 불량한 점, 피고인에게 뚜렷한 개전의 정상이 없는 점 등을 참작해 형을 정한다”고 밝혔다. 여론을 감안해 법률적 단죄보다 도덕적 단죄를 한 것 아니냐는 의심이 들 만하다. 어쨌든 린다 김의 얘기대로라면 엉뚱한 데서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김홍업씨의 ‘보장’과 검찰의 ‘봐주기’가 ‘이상한’ 판사를 만나는 바람에 물거품이 됐다는 얘기다.
김홍업 의원은 보좌관을 통해 린다 김과의 친분을 인정했다. 요지는 이렇다.
“20대 초반부터 알고 지냈다. 따로 만난 것이 아니라 주변사람들과 함께 만났다. 미국에 있을 때는 린다 김의 남편과 같이 두세 번 만난 적도 있다. 린다 김은 무기사업을 하느라 많은 사람을 만났다. 나는 그중 한 명일 뿐이다.”
“린다 김 남편과도 같이 만났다”
하지만 김 의원은 “사업과 관련한 얘기는 나눈 적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기무사의 통화 감청과 관련해서는 “통화를 자주 하지는 않았다. 두세 번 했던 것 같다”라고 그 의미를 축소했다. 2000년 3월 린다 김이 귀국하기 전 검찰 수사 문제로 상의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는 “내용도 모르는데, 뭘 상의하느냐. 별다른 얘기가 없었다”고 부인했다.
김대중 정부에서 구속당하는 비운을 겪은 린다 김은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직후 새로운 기대를 갖고 재기를 모색했다. 예전 인맥을 동원해 청와대 접촉을 시도했다. 그것은 명예회복 차원이기도 했다. 린다 김이 가장 억울해한 것은 이양호 전 국방부 장관과의 스캔들 탓에 자신이 ‘심혈을 기울였던’ 백두사업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채 매도당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스캔들과 사업을 구분해 평가해달라는 것.
2003년 봄 린다 김은 문희상 대통령비서실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린다 김에 따르면 문 실장 쪽에서 자신에게 자주국방 문제에 대한 의견을 구했다는 것.
“무기사업을 오래 한 사람으로서 자주국방 인프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얘기해달라고 누군가를 통해 제안해왔어요. 이 정부가 초창기엔 자주국방 의지가 강했거든요. 뭔가 안 되는 걸 해보려다 죽도 밥도 안 됐지만. 편지는 인편으로 전달했어요. 실전에서 뛴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의 자주국방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썼어요. 중간에서 심부름한 사람으로부터 문 실장이 내 편지를 읽고 ‘이게 정답인데… 아까운 여자 하나 죽였다’고 말했다고 전해 들었어요.”
편지 분량은 A4 용지로 6장.
“왜 우리가 자주국방이 안 되는지, 자주국방의 방해 요소가 뭔지 중점적으로 설명했어요. 그리고 무기 구매방식의 문제점과 개선점, 다른 나라들과의 무기 구매방식 비교, 지나친 미국 의존의 문제점, 무기 분야 실무자들의 책임 회피 등을 언급했어요. 무기 도입시 장관이든 실무자든 무조건 FMS(미국 정부가 보증하는 해외 무기판매 방식)로만 하려는 게 큰 문제거든요. 책임을 안 지려는 거죠. 백두·금강 얘기는 안 했어요.”
비서실장실에서 국방보좌관실로
린다 김의 편지는 비서실장실을 거쳐 관련부서인 국방보좌관실로 전달됐다. 편지에는 차기전투기사업(F-X)과 관련해 미국 전투기 F-15 도입을 비판하는 내용도 담겨 있었는데, 이는 군 출신 청와대 고위 관계자의 견해와는 어긋나는 것이었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청와대 관계자는 “무슨 청탁이 아니라 고급 로비스트라는 인상을 주는 전문적인 내용이었다”며 “특히 자주국방과 관련한 내용이 눈길을 끌었다”고 기억했다. 그는 또 “공감이 가는 얘기도 적지 않았지만, 린다 김의 주장을 그대로 정책에 반영하기는 부담스러운 면이 있었다”면서 “실무부서에서 참고하는 정도로 끝냈다”고 전했다.
문희상 의원은 린다 김 편지 사건에 대해 비서관을 통해 “기억나지 않는다”는 짤막한 답변을 전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