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호

명작의 비밀⑳

춤추는 부석사 무량수전, 우직한 수덕사 대웅전

  • 이광표 서원대 교양대학 교수 kpleedonga@hanmail.net

    입력2020-11-08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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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선 목재로 만든 아름다운 곡선 ‘부석사 무량수전’

    • 사찰길 걷다 보면 시나브로 보이는 처마 곡선

    • 맞배지붕으로 쌓은 절제의 미학 ‘수덕사 대웅전’

    • 낭만적 화려함 무량수전, 선(禪) 철학 담은 대웅전

    부석사 무량수전은 
화려한 건축양식을 뽐낸다. [동아DB]

    부석사 무량수전은 화려한 건축양식을 뽐낸다. [동아DB]

    소설가 신경숙은 ‘부석사’라는 소설을 썼고, 시인 정호승은 ‘그리운 부석사’라는 시를 썼다. 상처 입은 젊음, 삶과 사랑을 탐구한 작품들이다. 정호승은 이 시에서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라고 절창을 토해냈다. 이에 앞서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통해 무량수전의 미학을 노래하기도 했다. 경북 영주 부석사(浮石寺). 국보 제18호 무량수전(無量壽殿·고려 1376년)으로 특히 더 유명한 곳. 출렁거리는 처마 곡선에 끌려 많은 이가 부석사를 찾는다. 

    수덕사에서 수행하던 비구니 일엽(一葉) 스님은 1962년 회고록 ‘청춘을 불사르고’를 펴내 세인의 관심을 끌었고, 가수 송춘희는 1966년 ‘수덕사의 여승’이란 가요를 발표해 대박을 터뜨렸다. 충남 예산 수덕사(修德寺). 이곳의 국보 제49호 대웅전(大雄殿·고려 1308년)은 부석사 무량수전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됐고 가장 아름다운 전통 건축의 하나로 꼽힌다. 

    한국사 수업시간에 늘 함께 공부한 두 건축물. 그런데 부석사와 수덕사를 다룬 글은 무언가 분위기가 묘하게 다른 것 같다. 그 차이는 무얼까. 부석사 무량수전과 수덕사 대웅전의 미학은 어떻게 다를까. 사람들은 이 건물들 앞에서 무엇을 느낄까. 

    정면 5칸, 측면 3칸.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 서면 사뿐히 고개를 치켜든 날렵한 지붕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한참 들여다보노라면 처마가 춤을 추는 듯 출렁인다. 신기한 노릇이다. 이것은 일종의 착시(錯視)일 텐데 그럼에도 그 출렁거림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곡선의 효과는 극대화된다. 건물 옆에서 보면 처마 곡선은 더욱 압권이다. 마치 새의 날갯짓을 보는 듯하다. 


    무량수전, 출렁거리는 처마 곡선

    무량수전 곡선의 미학은 고려 건축 장인의 다양하고 절묘한 아이디어에서 비롯됐다. ‘안허리곡(曲)’ ‘귀솟음’ 등이 바로 그것이다. 안허리곡은 건물 가운데보다 귀퉁이의 처마 끝을 좀 더 튀어나오도록 처리한 것이다. 귀솟음은 건물 귀퉁이 쪽을 가운데보다 높게 처리하는 방식을 말한다. 고려의 장인들은 왜 이렇게 건물의 귀퉁이 부분을 좀 더 높게 튀어나오도록 한 것일까. 건축물은 정면에서 보면 귀퉁이 쪽 처마와 기둥이 실제 높이보다 처져 보인다. 보는 사람의 눈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안허리곡과 귀솟음은 이 같은 착시를 막기 위한 고안이었다. 모퉁이 쪽이 처져 보이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러 그 부분을 높게 튀어나오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건축적 고안은 그 자체에 머물지 않고 서로 어우러지면서 빼어난 곡선을 연출한다. 안허리곡과 귀솟음 덕분에 건물 앞면은 마치 볼록거울처럼 휘어져 보인다. 그렇게 휘어진 건물의 곡선은 정지된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인다. 무량수전 앞에 섰을 때, 지붕과 기둥이 출렁거리듯 보이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직선의 목재가 만들어낸 곡선의 미학이 아닐 수 없다. 


    숨김의 미학

    많은 사람이 영주 부석사를 찾는다. 최순우의 글이나 신경숙의 소설, 정호승의 시를 읽은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저마다 까닭이 있겠지만 대부분 “무량수전”을 호명하며 부석사를 향한다. 출렁거리는 처마 곡선에 취해 보고 싶은 것이다.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핵심 건물이다. 대웅전에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모신다면 무량수전엔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주재하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모신다. 그런데 보통의 사찰과 달리, 부석사의 무량수전은 그 모습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무량수전을 사찰 입구에서 30도 정도 틀어 배치했기 때문이다. 

    부석사에서 무량수전에 이르려면 일주문(一柱門), 천왕문(天王門), 범종각(梵鐘閣)과 안양루(安養樓)를 지나야 한다. 진입로부터 일주문, 천왕문, 범종각까지는 건물들이 일직선상에 배치돼 있다. 사람들은 “무량수 무량수” “아미타 아미타” 되뇌며 무량수전 처마 곡선을 향해 올라간다. 

    범종각 누마루 아래를 지나면 안양루가 나온다. 안양루 지나 바로 연결된 계단을 올라가야 비로소 무량수전을 만날 수 있다. 그런데 범종각부터 범상치 않은 상황이 발생한다. 범종각 앞에서는 무량수전을 볼 수가 없다. 범종각 건물이 무량수전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범종각 누마루 아래를 지나노라면 저만치 안양루와 반쯤 가려진 무량수전 지붕이 왼쪽 시야에 들어온다. 드디어 눈에 살짝 들어오는 무량수전의 일부. 그런데 시야의 중앙이 아니라 왼쪽으로 들어온다. 이 대목에서 무량수전이 일직선상에 배치된 것이 아니라 약 30도 왼쪽으로 틀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어 안양루 누마루 아래를 지나야 한다. 먼저 아래쪽 돌계단을 따라 안양루 누마루 밑에 이르면 무량수전 앞마당 석등과 무량수전 추녀 일부가 보인다. 액자 속 그림을 감상하는 것 같다. 석등은 시야의 왼쪽으로 치우쳐 있다. 안양문이 무량수전 마당의 오른쪽에 약간 치우쳐 있는데다 무량수전 건물과 평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마루 아래에 들어서면 석등은 잠시 시야에서 사라진다. 곧이어 안양루 누마루에서 무량수전 마당으로 연결되는 돌계단을 밟고 오르면 다시 석등과 함께 무량수전이 전모를 드러낸다. 

    일주문을 지나 부석사 경내에 들어왔어도 무량수전까지 이르는 길은 단순하지 않다. 특히 범종각부터 무량수전까지의 동선은 시종 드라마틱하고 생동감 넘친다. 이는 무량수전을 드러내는 데 범종각, 안양루와 같은 문루가 매우 극적인 효과를 연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석사는 대웅전이나 무량수전 같은 핵심 주건물을 멀리서부터 드러내지 않는다. 범종각과 안양루로 무량수전을 우선 차단해 놓은 채 가까이 다가오는 이에게만 그 모습을 조금씩 액자 속 그림처럼 보여준다. 특히 범종각과 안양루의 누마루 아래에 들어가면 어두워지고 그곳을 빠져나올 때 밝은 빛 속의 무량수전을 조금씩 만나게 한다. 지세를 활용한 것이지만 이 덕분에 우리는 무량수전을 온전하게 만나기 직전까지 무량수전의 일부를 조금씩 비대칭으로 만나게 된다. 그 비대칭은 관람객에게 긴장감을 제공한다. 치밀한 공간 구성과 시야 연출이 아닐 수 없다. 

    보통의 사찰은 일주문을 지나 어느 정도 올라가면 핵심 건물의 모습을 한꺼번에 보여주건만 부석사는 그렇지 않다. 부석사의 지세와 건물 배치는 기대하던 무량수전의 모습을 살짝살짝 조금씩만 드러낸다. 그것도 비대칭으로 변화를 주면서, 어둠과 빛의 공간을 활용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부석사 무량수전을 그렇게 극적으로 만난다. 안양루 누마루 아래와 다소 어두운 계단을 지나 앞마당에 올라섰을 때 우리는 비로소 환하게 출렁거리는 처마선을 만나는 것이다. 그 처마 곡선의 황홀함에 문득 뒤돌아보면, 저 멀리 소백산의 장대한 능선이 펼쳐진다. 

    정면 3칸, 측면 4칸. 수덕사 대웅전은 단순하고 우직하다. 부석사 무량수전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높은 돌계단을 쭉 따라 올라 대웅전 앞마당에 이르면 우직한 기와집 한 채가 그저 우뚝 서 있는 형국이다. 그냥 그것뿐이다. 크고 무거워 보이는 지붕. 커다란 옷을 입은 듯 다소 어색해 보이기까지 한다. 저 건물을 어떻게 감상해야 할까. 


    소박하고 우직한 수덕사 대웅전

    소박하고 단순한 매력의 수덕사 대웅전. [동아DB]

    소박하고 단순한 매력의 수덕사 대웅전. [동아DB]

    우선 한동안 꿈적 않고 아무 생각 없이 대웅전을 바라보아야 한다. 저 대책 없이 단순한 건물. 응시하다 보면 소박함과 우직함이 느껴진다. 부석사 무량수전을 떠올리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렇다면 수덕사 대웅전 우직함의 미학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대웅전은 왜 국보로 지정된 것일까. 

    수덕사 대웅전의 두드러진 특징이자 묘미는 맞배지붕에 있다. 맞배지붕은 지붕이 건축물의 앞뒷면으로만 맞붙어 있는 형태의 지붕을 말한다. 맞배지붕은 전통 기와 건물의 지붕 가운데 가장 단순한 형식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우리가 흔히 보는 팔작지붕이다. 팔작지붕은 기본적으로 멋이 나지만 맞배지붕은 그렇지 않다. 수덕사 대웅전 정면에선 간결한 힘이 느껴진다. 육중하고 견고하다. 일체의 장식을 배제해 어떠한 군더더기도 없다. 간결하고 명료할 뿐이다. 배흘림기둥은 묵직한 지붕을 튼실하게 받쳐준다. 믿음직스럽다. 

    맞배지붕 대웅전의 매력과 미학은 옆면에서도 여전하다. 최소한의 지붕선만 있을 뿐 거기 어떠한 장식이나 꾸밈도 없다. 그래서 더 힘이 넘친다. 지붕 밑으로는 수평 부재인 보가 가로놓여 있다. 그리고 지붕과 보가 연결되는 지점에 지붕의 하중을 전달하기 위해 다양한 부재가 단아하게 짜 맞춰져 있다. 이들 또한 하나같이 장식을 배제한다. 기둥과 보의 부재들은 가로 세로로 놓이면서 대웅전 옆쪽 벽면의 공간을 멋지게 분할한다. 단순한 듯 보이지만 절묘한 기하학적 구성이다. 크고 작은 사각형 공간 사이사이로 곡선이 가미된 사다리꼴 공간이 변화와 생동감을 연출한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팔작지붕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처럼 날아오르는 곡선은 아니지만, 대웅전 옆면은 간경함과 단순함 속에 은근한 리듬감이 넘쳐난다. 부석사 무량수전과는 전혀 다른 멋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맞배지붕의 매력이다. 우리는 대체로 팔작지붕에는 익숙하지만 맞배지붕은 다소 낯설어한다. 수덕사 대웅전 외에 맞배지붕의 매력을 보여주는 건물로는 강원 강릉의 국보 제51호 임영관 삼문(臨瀛館 三門)과 전남 강진의 국보 제13호 무위사 극락전(無爲寺 極樂殿·1430년)이 있다. 


    수덕사 대웅전과 禪의 미학

    수덕사 대웅전 맞배지붕의 측면. [동아DB]

    수덕사 대웅전 맞배지붕의 측면. [동아DB]

    임영관 삼문은 고려 때 지은 강릉 객사(客舍) 임영관의 정문이다. 현재 객사 건물은 없어졌고 정문만 남아 있다. 문이 세 개 달려 있어 삼문이라고 한다. 임영관 삼문은 우리나라 옛 건축물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가장 두드러진 배흘림기둥을 갖고 있다. 추녀와 서까래, 각종 보와 공포(栱包) 등이 배흘림기둥과 잘 어울린다. 이들을 한눈에 바라보면 간결한 힘이 전해온다. 그것은 모두 맞배지붕의 우직함과 소박함으로 수렴된다. 조선 세종 때인 1430년에 창건된 무위사 극락전 역시 담백과 절제의 미학, 맞배지붕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준다. 맞배지붕에 어울리게 사찰의 분위기 또한 검박하고 명징하다. 

    수덕사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몇 개 있다. 우선, 일주문에 붙어 있는 ‘德崇山 修德寺’라는 현판이다. 이 글씨를 쓴 사람은 소전 손재형이다. 추사 김정희가 그린 국보 제180호 ‘세한도(歲寒圖)’를 1944년 일본에서 찾아온, 바로 그 수집가다. 손재형은 1920년대 초 추사의 글씨 ‘竹爐之室(죽로지실)’을 당시 집 한 채 값에 육박하는 1000원에 사들였다. 또한 국보 제216호인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국보 제217호인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金剛全圖)’, 국보 제139호인 단원 김홍도의 ‘군선도(群仙圖)’ 같은 명작들을 소장했던 당대 최고의 수집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손재형은 특히 서예의 현대화를 개척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독특한 소전체(素筌體)를 통해 광복 이후 국내 서예계를 풍미하기도 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문학월간지 ‘現代文學’의 제자(題字)도 그의 글씨다. 그러한 독특한 서체의 손재형 글씨가 수덕사 일주문에 걸려 있다. 

    일주문에서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 들어가면 오래된 여관이 하나 나온다. 수덕여관이다. 화가 이응노가 매입해 작품 활동을 하면서 문자 추상을 남긴 곳이다. 또한 나혜석의 상흔, 일엽 스님과 나혜석의 교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동갑내기 친구였던 나혜석과 일엽 스님은 일제강점기 남녀평등과 자유연애의 기치를 내세우며 한 시대를 풍미한 신여성의 선두주자였다. 하지만 한 사람은 가부장제의 벽을 넘지 못하고 결국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했고 한 사람은 세속의 영욕을 모두 버리고 불가에 귀의했다. 일엽 스님(김주원)은 1933년 출가했고, 나혜석은 1937년 일엽에 의지해 지친 삶을 보듬고자 수덕사를 찾았으나 출가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나혜석은 1940년대 초까지 수덕여관에 머물렀지만 끝내 그곳을 떠나야 했고, 1948년 행려병자로 길에 쓰러져 고단했던 삶을 마감했다. 그래서일까. 수덕사에는 소설보다 더 소설 같고 시보다 더 시 같은 삶의 애환이 절절하게 묻어난다. 

    수덕사는 선종(禪宗)의 근본 도량이다. 수덕사 대웅전 앞에 서면, 어떤 설명이 필요 없다. 가장 단순한 기와집 한 채가 우뚝 서 있는 형국이다. 선(禪)의 사찰 수덕사에 걸맞게 침묵하면서도 심오한 깊이를 전해주는 듯하다. 이것이 대웅전의 진정한 미학이다. 

    수덕사 대웅전의 맞배지붕은 불필요한 것, 본질적이지 않은 것을 다 덜어냈다. 쓸데없는 욕망과 번잡함을 털어내고 최후의 뼈대만을 건축으로 구현한 것이다. 그렇기에 처음 보면 다소 둔탁하고 밋밋하지만 보면 볼수록 깊이가 느껴지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것이 선(禪)의 요체다. 대웅전 앞에선 아무런 말을 할 필요가 없다. 부석사 무량수전에서와 같은 탄성도 필요하지 않다. 그저 침묵할 뿐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엔 진입 동선의 리듬감이 있고, 감춤과 드러냄이 있고, 비대칭의 긴장감이 있다. 착시를 보정하기 위한 장치도 개입돼 있다. 결과적으로 모두 정교하고 치밀하다. 그러나 수덕사는 아무것도 없다. 그저 묵직하고 단순한 맞배지붕 건물 한 채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일엽과 나혜석이 수덕사를 찾았던 것일까. 대웅전 앞에선 일엽의 고뇌와 구도의 길도, 나혜석의 비극적인 삶도 모두 내려놓아야 할 대상이 되고 마는 것일까. 대웅전은 우리에게 끝없이 단순해지라고 말하는 것 같다. 


    무량수전의 낭만과 대웅전의 철학

    늘 짝을 이뤄 공부하던 부석사 무량수전과 수덕사 대웅전. 부석사 오르는 길 초입엔 좌우로 사과밭이 있다. 사과의 고장 영주다운 풍경이다. 가을에 가면 빨간 사과가 주렁주렁 열려 있다. 그런데 예산도 사과의 고장 아닌가. 수덕사로 가기 위해 예산군 덕산면에 들어서면 도로 좌우로 크고 작은 사과밭이 즐비하다. 

    사뿐히 고개를 치켜들고 마치 출렁이는 듯한 무량수전의 처마 곡선, 그 상쾌한 율동감. 요지부동 그 자리를 지키는 우직한 맞배지붕 대웅전, 그 대책 없는 단순함. 하나는 날아갈 듯 경쾌하고 다른 하나는 무언가를 묵직하게 눌러준다. 무량수전은 첫눈부터 우리를 반하게 하지만 대웅전은 찬찬히 여운을 전한다. 무량수전이 좀 더 낭만적이라면 대웅전은 좀 더 철학적이라고 할까.


    이광표
    ● 1965년 충남 예산 출생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 고려대 대학원 문화유산학협동과정 졸업(박사)
    ●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 저서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박물관’ ‘한국의 국보’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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