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윤여준 “나를 성장시킨 ‘신동아’, 한국 사회 지식인들 일깨웠다”[창간 90주년]

‘영원한 책사’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

  • 문영훈 기자

    yhmoon93@donga.com

    입력2021-11-03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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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사 시험 작문 점수 1등해 ‘신동아’ 발령

    • “책 읽어라” “공부해라” 지적 자극 준 선배들

    • 1968년 필화사건으로 연행되던 천관우 주필의 배포

    • ‘신동아’에서 배워 ‘경향신문’에서 인정받았다

    • 장문의 품격 있는 글 중시하는 사람은 늘 존재

    • ‘품격 있는 비평’으로 국민들 지적 인식 깨우쳐주길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신동아’에서 쌓은 경험이 지금까지 살아오는 데 큰 도움을 줬다”고 말했다. [조영철 기자]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신동아’에서 쌓은 경험이 지금까지 살아오는 데 큰 도움을 줬다”고 말했다. [조영철 기자]

    “‘신동아’에서의 배움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윤여준(82) 전 환경부 장관에게 “신동아 기자 시절에 대한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청하자 흔쾌히 응하며 그가 한 말이다. 윤 전 장관은 1966년 신동아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해 ‘경향신문’을 거쳐 김영삼 정부에서 청와대 대변인으로 일했다. 환경부 장관을 마지막으로 공직에서 물러난 뒤 16대 총선과 18대 대선 등 여러 선거에서 맹활약하며 ‘킹메이커’ ‘전략가’ ‘영원한 책사’ 같은 수식어가 붙었다. 이제는 ‘정치 원로’로 불리는 윤 전 장관의 사회 초년생 생활은 어땠을까. 10월 6일 동아일보 충정로 사옥에서 윤 전 장관을 만났다.

    인생의 스승 된 편집장

    - 동아일보사에 입사해 발령받은 첫 부서가 신동아였다. ‘신입’이 긴 글을 써야 하는 신동아로 배치되는 경우는 드문데.

    “최종 면접에서 당시 김상만 부사장이 작문 점수가 1등이라고 하더라. ‘우리가 신문만 만드는 게 아니라 월간지도 발행하는데 거기 가서 3년만 일하면 원하는 부서 어디로든 옮겨주겠다’고 하시는데 ‘못 하겠다’고 할 수 있나. 과거에 종합지 편집장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물론 나중엔 택도 없다고 생각해서 포기하긴 했지만(웃음)….”

    - 글솜씨가 좋아 신동아에 배치된 거 같은데 왜 편집장의 꿈을 포기했나.

    “종합지 편집장을 하려면 모든 분야에서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게 참 쉽지 않은 일인데, 내가 신동아 근무할 때 편집장이던 손세일 부장이 실제로 그랬다. 정치뿐 아니라 문학·음악·미술 다방면으로 뛰어났다. 어떤 전문가를 만나도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제너럴리스트(generalist)’다. 그런 분이 기자 초년생인 나를 옆에 앉혀두고 기사 쓰기에 대해 상세히 알려줬다. 내게 상사라기보다는 일종의 스승 같은 사람이다. 생애를 통틀어 가장 고맙게 생각하는 분이다.”

    - 어떤 스승이었나.

    “항상 내게 책 읽기를 권했다. ‘요즘 이런 책이 나왔으니 읽어봐라’ ‘읽고 나니 어땠나’를 계속 물었다. 지적인 자극을 계속 준 것이다. 조성숙 선배도 떠오른다. 그분이 교열을 봐주셨는데, 띄어쓰기나 맞춤법에 정통하고 깐깐한 분이셨다. 그렇게 배우니 고매한 학자들의 글에도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웃음).”



    - 당시 쓴 기사를 기억하나.

    “기자 초년생이었으니까 한 분야를 맡아서 쓰진 않았다. 르포를 쓰러 이곳저곳 많이 다닌 것 같은데. 한번은 화물기사 차를 타고 서울부터 부산까지 함께 동행하기도 했다.”

    윤 전 장관에게 당시 그가 쓴 기사를 건넸다. 1967년 4월호에 실린 ‘종합병원’ 르포 기사였다. 10쪽 분량의 이 기사는 당시 전국에 9개에 불과했던 종합병원 이야기를 다뤘다. 불친절한 대우에 불만을 느끼는 환자,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간호사, 공무원의 관료적인 습성을 질타하는 국립대학병원장 등 병원과 관련된 수많은 사람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윤 전 장관은 잠시 기사를 살펴보더니 “지금 쓰라고 해도 이렇게 못 쓰겠는데”라고 말하며 빙긋 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긴 기사를 쓰려면 자료도 많이 찾아봐야 했다. 당시 200자 원고지로 짧으면 30매 길면 120매를 썼다. 그러려면 어휘력과 문장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모든 게 기자로 성장시키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10년간 기자를 하면서 입사 교육 때 들었던 김중배 차장 이야기도 계속 떠올랐다.”

    - 어떤 이야기였나.

    “신문기자는 대개 자신이 쓸 분량만큼만 생각하는데 그러면 안 된다고 했다. 또 기자는 계속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동아에서는 써야 하는 분량 때문이라도 더 많이 공부해야 했다. 많은 자료와 책을 읽고 모았고, 그렇게 들인 습관이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을 줬다. 나이가 들어 체감한 것이지만, 책을 계속 읽지 않으면 세상에 뒤처지기 마련이다.”

    중정 요원이 와도 끄떡없던 천관우 주필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신동아’가 국민들이 지적 인식을 하는 데 도움을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조영철 기자]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신동아’가 국민들이 지적 인식을 하는 데 도움을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조영철 기자]

    그가 신동아에 머물렀던 3년 8개월은 언론이 정권의 핍박을 받던 때였다. 박정희 정권은 1964년 언론을 규제하기 위한 윤리위원회 설치 등을 뼈대로 한 ‘언론윤리위원회법’을 통과시키며 언론 장악에 나선다.

    윤 전 장관은 “흉흉한 시기에도 신동아 구성원들이 한국 사회에 도움이 되는 유익한 기사를 실어야 한다는 동의가 있었다”며 “매번 무모하게 나설 수는 없었기에 편집회의 때마다 진지한 토론이 장시간 이어졌다”고 회고했다. 그는 “1968년 신동아 필화 사건 때도 구성원들은 정부 당국이 가만있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고 부연했다.

    1968년 12월 중앙정보부(중정)는 당시 천관우 주필과 홍승면 주간, 손 부장을 반공법 위반 혐의로 연행해 조사했다. 정권 심기를 거슬리게 했던 건 그해 11월호에 실린 ‘차관’ 기사였다. 정부의 차관 도입 실태를 취재해 이 중 일부가 정치자금 조성에 들어간 정황을 파헤쳤다. 해당 기사에서 허위 사실이 발견되지 않자 다른 꼬투리를 잡았다. 10월 호에 게재된 조순승 씨의 논문 번역 문제를 걸고넘어진 것이다.

    윤 전 장관은 당시 천 주필의 배포를 보여주는 일화를 소개했다.

    “천 주필은 풍채가 좋아 ‘코끼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대식가였고 술도 엄청 마셨다. 중정 요원이 와서 천 주필을 연행해 가려는데 ‘잠깐 기다리라’고 했다더라. 그러더니 광화문 근처 설렁탕집에 가서 곱빼기를 시켜 다 먹고는 ‘이제 갑시다’라고 했다는 게 아닌가. 세상에 자기를 잡으러 온 사람 세워놓고 설렁탕 곱빼기를 다 먹는 사람이 있을까. 그를 연행하러 온 사람도 나중에 그 모습을 보고 천 주필을 존경하기 시작했다고 하더라.”

    - 다음 해 9월 ‘경향신문’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앞에서 말했듯 신동아에 3년만 있으면 다른 곳으로 보내주겠다고 했는데 높은 양반들이 젊은 기자를 상대로 약속을 안 지킨 거지. 신동아가 싫어서 옮긴 것은 아니다. 회사를 옮겨서도 신동아에서 훈련 받은 걸 잘 써먹었다(웃음).”

    - 어떻게 써먹었나.

    “이직 후 줄곧 정치부 내근직을 하던 내게 당시 ‘경향신문’ 부장이 읽어보라며 원고지 뭉치를 툭 던졌다. 정치부 수석 기자가 쓴 1960년대 정치사 정리 기사였다. 부장이 기사가 어떠냐고 물어보는데, 별로였지만 대선배가 쓴 기사에 코멘트를 할 수 있겠나. 가만있었더니 부장이 자기도 별로라며 새로 써 오라고 하더라. 그날 집에 가서 기자가 된 뒤 스크랩해 뒀던 신동아 정치 관련 기사를 모조리 읽었다. 1960년대 정치 흐름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더라. 새벽에 써서 부장에게 들고 가니 내 기사를 1면에 실었다. 신동아 손 부장도 ‘기사 잘 봤다’고 연락해 왔다.”

    - 신동아에 실린 글은 좀 달랐나.

    “저명한 교수들이 글을 많이 썼다. 그때는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가 없으니 학교를 벗어나 사회적인 주제로 글을 쓸 수 있는 창구가 거의 없었다. 신문은 지금처럼 칼럼이 활성화되지도 않았고 분량도 짧았다.”

    다시 ‘질문하는 사람’이 되다

    2019년 윤 전 장관은 인터뷰 전문 잡지 ‘아이브’를 만드는 일에 참여한다. 신동아를 떠난 지 50년 만이다. 그는 인터뷰어이자 자문 역할을 맡아 정치·경제·북한·역사 전문가와 대화를 나눴다. 창간호 표지는 윤 전 장관이 장식했는데, 해당 잡지가 인터뷰이(interviewee·인터뷰 대상자)가 아닌 인터뷰어(interviewer·인터뷰 진행자)가 중심인 대화를 표방했기 때문이다.

    - 오랜만에 인터뷰를 해보니까 어땠나.

    “재미도 있었지만 고민도 깊었다. 본래 취지를 살리려면 인터뷰이의 이야기에 제대로 반론을 펼쳐야 했지만, 막상 인터뷰할 때는 상대방이 불쾌감을 느낄까 봐 질문과 주장 사이의 지점에서 말을 던지게 되더라. 엉거주춤했다는 우려도 했는데 반응이 좋아서 다행이다.”

    그는 ‘아이브’에서 30대 청년들과 함께 일한 기억을 되살렸다.

    “같이 일했던 세 명은 각각 브랜드 컨설팅·영상·디자인을 하는 친구들이었는데 대화가 너무 잘 통했다. 그들을 통해 많이 배웠다. 창조적 능력을 가진 젊은 친구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이 나와는 다를 것 아닌가. 의견이 충돌해 발생하는 논쟁과 토론도 즐거웠다. 생각해 보니 그들에게도 책 추천을 받았네.”

    - 요즘도 책을 많이 읽으시나.

    “지금은 경기 남양주에 살고 있는데, 가끔 서울에 나올 때 서점에 들러 신간을 확인한다. 흥미로운 주제가 있으면 목차를 대강 훑어보고 어느 수준이 된다 싶으면 산다. 아내가 책 그만 사라고 질색하면 더는 안사겠다고 하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가 많다(웃음).”

    “지적 인식할 수 있도록 이바지해 달라”

    마지막으로 윤 전 장관에게 신동아가 갈 길을 물었다.

    그는 “신동아는 과거 한국 사회의 지식인들이 우리의 역사와 현실을 인식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며 운을 뗐다. 이어지는 그의 말이다.

    “지금은 온갖 매체가 등장해 정보의 홍수 속에 국민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단편적으로 보면 월간지의 시대가 지났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장문의 품격 있는 글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늘 존재한다. 내가 일할 때와는 다르지만 시대 상황과 국가 현실을 통찰하는 품격 있는 비평으로 국민들이 지적인 인식을 하는 데 이바지해 주길 바란다.”

    #창간90주년 #윤여준 #장문의품격있는글 #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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