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호

“이건희 회장은 윗사람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영상]

[경제사상가 이건희 탐구㊵] 이건희 회장 별세 3년, 김인 前 삼성SDS 사장 증언㊥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23-10-25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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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은 아랫사람 아닌 윗사람부터 해야

    • 변화는 사람으로 시작된다는 믿음

    • 있는 그대로, 날것 그대로 기록하라

    • 회장께서 가장 강조한 키워드는 ‘사람’

    [+영상] 김인 전 삼성SDS 사장 "이건희 회장은 내게 스승이자 멘토였다"



    [+영상] 반도체 전쟁 중인 지금은 '이건희' 다시 읽을 때



    김인 전 삼성SDS 사장의 증언 하편을 시작하기 전에 지난 호 기사 맨 뒤에 소개한 이건희 회장이 내건 ‘복합화’ 개념에 대해 배종렬 전 삼성물산 사장의 증언이 있어 추가하려 한다.

    배 전 사장 이야기를 듣다 보면 생전 이 회장이 아랫사람들에게 일을 지시할 때 얼마나 꼼꼼하고 세심하게 했는지 느낄 수 있다.

    김인 전 삼성SDS 사장. [ 지호영 기자]

    김인 전 삼성SDS 사장. [ 지호영 기자]

    타워팰리스와 삼성의료원에 내린 주문

    이 회장은 5년 뒤 10년 뒤 미래 비전을 내놓을 때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나게 큰 비전을 제시했지만 일을 하나하나 지시할 때 역시 남들은 잘 생각할 수 없는 파격적이고 디테일한 상상력을 펼쳐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건희 생각법’의 일단을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증언으로 여겨져 추가하려 한다.



    배 전 사장에 따르면 이 회장은 복합화 개념으로 도곡동 타워팰리스와 삼성의료원을 예로 들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원래는 타워팰리스를 주상복합 건물로 지으려고 한 게 아니고 복합화 개념의 102층짜리 삼성타워를 지으려고 했어요. 회장님 집도 있고, 사무실도 있고, 사장단 집도 있고, 필요하면 모두 모여 회의하고 토론하자고까지 얘기하셨지요.

    그러면서 집안 구조까지 세심하게 지시하십니다. 제가 우선적으로 기억나는 말은 이를테면 실내 공기의 질과 습도를 미국 하와이에서 느끼는 수준까지 되도록 해봐라, 기존 아파트들보다 층고를 높이고 층간소음 없게 하고 진동도 막는 연구를 해봐라, 주방에서 요리하면 냄새가 배니 부엌에는 에어커튼을 달아라 이런 것들이었어요. 엘리베이터도 1초에 몇 층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속도까지 물어보셨습니다.

    또 그때만 해도 아파트 실내 구조란 게 지금보다 더 천편일률적이었는데 세대별로 집 구조를 2세대 자녀들과 함께 사는 집, 조부모까지 있는 3세대가 사는 집 식으로 설계를 다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시골에서 부모님이 올라오거나 외부 손님이 올 경우 묵을 수 있게 게스트 룸을 따로 만들어라, 도서관도 만들어 학생들이 이용할 수 있게 하라고도 하셨고요. 지금이야 많은 아파트가 일반적으로 시도하는 것들이지만 당시만 해도 처음 시도하는 파격적인 발상이었습니다.

    삼성의료원을 만들 때도 똑같았습니다. 환자를 이리저리 다니게 하지 말고 의사들이 움직이는 동선으로 설계하되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이동할 수 있는지 고민하라고 하셨습니다. 조경, 배수도 수십 년을 내다보고 ‘이렇게 해도 괜찮을까? 나중에 지루해지지 않을까?’ 궁리하라고 하셨어요. 디자인에 대한 강조는 늘 하셨고요. 어떻게 저런 것까지 다 생각하고 지시하시나 할 정도로 세심하고 꼼꼼하셨습니다. 그건 정말 엄청난 일에 대한 몰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삼성의 전직 CEO들은 한결같이 이건희 회장이 매크로한 비전과 매우 세세하고 꼼꼼한 마이크로 지시에 놀란 적이 많았다고 입을 모은다. 삼성의료원을 설립할 때에도 의사보다는 환자 위주의 병원을 만들라는 다양한 지시를 내렸다. 사진은 1993년 4월 의료원 건설 현장을 직접 찾은 이건희 회장 모습. [동아DB]

    삼성의 전직 CEO들은 한결같이 이건희 회장이 매크로한 비전과 매우 세세하고 꼼꼼한 마이크로 지시에 놀란 적이 많았다고 입을 모은다. 삼성의료원을 설립할 때에도 의사보다는 환자 위주의 병원을 만들라는 다양한 지시를 내렸다. 사진은 1993년 4월 의료원 건설 현장을 직접 찾은 이건희 회장 모습. [동아DB]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회장님이 매사 이렇게까지 파고든 것이 단지 삼성만을 위한 게 아니었다는 겁니다.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신 것이 ‘삼성이 앞서서 나라 전체 수준을 한 단계 레벨 업시키자’ ‘삼성에서 하는 모든 사업은 해당 분야 1등은 말할 나위가 없고 다른 곳의 표본이 돼야 한다’는 거였어요. 회장님은 삼성을 통해 대한민국 수준을 높이고 싶어 하셨습니다.”

    변화의 임팩트가 가장 큰 집단부터

    다시 김인 전 사장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선언은 선언으로 끝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그 정신을 직원들에게 각인시킬 것인지 골몰했다. 그러다 보니 모든 개혁 조치가 비서실 임무로 떨어졌다. 김 전 사장 말이다.

    “신경영 선언이 있었던 1993년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제2창업 5주년 기념식을 아주 크게 했어요. 정말 감동적이었죠. 회장님 기념사도 명연설이었습니다. 얼마나 신경을 쓰셨는지 오전에 리허설까지 하셨어요.

    신경영이 선언된 이후 비서실 업무는 그룹의 체질과 문화를 바꾸는 게 최우선 프로젝트가 됐습니다. 그중에서 특이할 만한 프로젝트가 회장께서 직접 지시하신 ‘21세기 CEO과정’이었습니다.”

    그게 뭔가요.

    “회장님은 ‘현장에서 구체적이고 눈에 띄는 변화가 있으려면 사내 전 직원이 지향하는 바가 같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산으로 가야 하는데 바다로 가자고 하면 안 되고, 총론 찬성 각론 반대식으로 뒷다리 잡지 말라고 하셨죠.

    그렇다면 우선 누구부터 변화해야 하느냐, 변화의 임팩트가 가장 큰 집단이 어디냐, 바로 조직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변화를 주저하는 사람들, 고위 임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바뀌어야 조직이 바뀐다면서 말이죠. 그렇게 해서 만든 게 사내(社內) ‘21세기 CEO’ 과정입니다.

    회장님은 ‘그룹에서 가장 바뀌지 않는 사람들이 관리 쪽이다. 관리본부장들은 빠짐없이 다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이분들은 계열사 살림을 책임지는 분들인데 대부분 비서실에서 오래 일하다 내려간 분들입니다. 다들 누가 뭐래도 유능하고 회사에 대한 로열티가 강한 분들인데 회장님은 이런 분들부터 먼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신 거죠.

    흔히 변화라고 하면 맨 밑의 직원들부터 달달 볶아야 할 것 같은데(웃음) 그게 아니라 중간 관리, 그중에서도 맨 위 직급을 겨냥했으니 정말 탁월한 통찰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회장님은 관리본부장들을 포함해 이사·상무·전무에서부터 부사장·사장은 물론 사장이 될 후보들, 비서실에 오래 근무하다 내려간 계열사 팀장들의 명단을 일일이 다 내려보내 주셨습니다.

    이건 여담입니다만, 21세기 CEO과정은 1차적으로는 그분들에 대한 교육이라는 측면도 있었지만 고위 임원 분들은 ‘내가 하루라도 없으면 회사가 굉장히 어려워진다’고 생각하는 분들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한꺼번에 업무에서 빼서 교육을 해도 아무 문제가 없으니(웃음) ‘당신들 생각이 틀렸다, 자리 지키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라는 걸 보여주는 계기도 됐다고 봅니다.

    어떻든 회장님은 조직이 변하려면 먼저 윗사람들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임원들이야말로 신경영 선언의 메시지를 몸과 마음에 장착해 현장에서 실천해야 될 사람들이니까 따로 교육과정이 꼭 필요했다고 보신 거죠.”

    변화의 대상자를 아래가 아닌 위를 찍은 발상은 공감이 많이 갑니다. 교육 내용은 뭐였고 효과는 있었나요.

    “6개월 과정이었는데 기간도 길었고 내용도 알찼습니다. 동대문 새벽시장, 노량진수산시장도 가서 서민들의 치열한 삶의 현장도 느껴보았습니다. 교육 몇 번으로 사람이 당장 바뀌겠습니까만은 그런 과정을 통해 신경영 이념이 조직 내로 퍼지는 계기는 됐다고 봅니다.”

    21세기 CEO 과정 말고 회장께서 지시하신 또 다른 구체적 조치가 있었나요.

    “그거 말고는 직접적으로 뭐를 어떻게 해라 이런 거는 없었습니다. 아, 디자인의 중요성을 굉장히 많이 말씀하셨는데 그 결과 삼성아트·디자인센터(사디·SADI)가 태동하는 계기가 됩니다. 미국 명문 디자인 학교인 파슨스와 조인하는 준비 작업을 저희 비서실에서 했으니까요.”

    (그가 언급한 사디는 ‘우수 디자이너야말로 국가 자산’이라는 이건희 회장 뜻에 따라 1995년 만들어진 기관이다. 이후 삼성의 디자인 혁명을 이끌어온 싱크탱크를 넘어 한국 최초 디자인 스쿨로 자리매김한다.

    삼성 디자인 싱크탱크이자 한국 최초 디자인 스쿨 사디. 사디 [홈페이지]

    삼성 디자인 싱크탱크이자 한국 최초 디자인 스쿨 사디. 사디 [홈페이지]

    단일 교육기관으로는 이례적으로 30여 년간 졸업생 1600여 명을 배출했으며 세계 3대(IF·IEDA·레드닷) 국제 디자인 공모전에서 수상한 작품만 100개가 넘는다. 1896년 설립된 뉴욕 사립 미술대학 파슨스 디자인 스쿨에 비견될 만큼 국내외 디자인 업계에서 명성이 높았다. 삼성 측은 얼마 전 변화된 시대상황에 맞춰 ‘2024년부터는 신입생 채용을 중단하고 ‘삼성디자인멤버십’ 프로그램으로 확대·강화한다’고 했다.)

    신경영의 다양한 실천 방안을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제일 힘들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마 7·4제였을 겁니다. 출근 시간은 오전 7시로 두 시간이나 앞당겼는데 퇴근 시간은 그대로이니 근무 시간만 늘어났다며 불평 불만이 많았지요.

    하지만 회장님 의지가 워낙 강했습니다. 인사팀장인 저는 수시로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불시 점검까지 했는데 사실 저조차 ‘4시 칼퇴근’을 지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비서실 일이 폭주하는 상황에서 4시 퇴근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죠.

    궁여지책으로 회사 옆 건물 지하에 사무실을 따로 하나 얻었어요. 오후 4시가 되면 그곳으로 퇴근해 일을 마무리하고 자료도 정리하고 저녁 식사도 해결하면서 몇 개월을 지냈습니다.”

    7·4제는 이후 자율로 넘어가면서 실패한 조치라는 말도 나왔지요.

    “물론 초기에는 잡음도 많았고 나중에는 각사 자율로 넘어가 폐지된 곳도 있어서 그렇게 말하는 분들도 있지만 요즘 기업들마다 ‘유연 근무제’가 확산하고 있는 걸 보면 업무 비효율을 지적한 7·4제 정신은 지금도 살아 있다고 봅니다.”

    가장 강조한 키워드 ‘사람’

    그는 “신경영 선언 이듬해인 1994년은 정말 바쁜 해였다”고 했다.

    “‘다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게 화두였기 때문에 여러 시도가 참으로 많았던 해였습니다. 시간 날 때마다 회장님 말씀도 다시 새겨들어야 했고 단지 새겨듣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액션으로 나타나야 하는 거잖아요. 신경영을 어떻게 확산시킬 것이냐, 어떻게 뿌리내릴 것이냐, 회장님의 각종 지시 사항을 어떻게 이행할 것이냐 하는 게 업무의 대부분이었죠.

    또 계열사마다 금융, 전자, 제조가 다르고 같은 제조업 중에서도 중화학, 전자가 다 달라 문화가 제각각인데 어떤 식으로 각사 사정에 맞게 신경영을 정착시킬 것이냐 하는 데 대한 고민도 많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소그룹 제도도 시행됩니다.

    아시다시피 경영활동이란 게 어느 한 시점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계속 연결, 연결돼 물려가는 거잖아요. 모든 걸 다 완전히 뒤엎는 거니까 엄청나게 많은 새로운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전에 시도하려고 했던 개혁 조치 중에도 방향 없이 묻혀 있던 것들이 있었는데 신경영 선언이 나오니 빛을 발해 추진을 더 가속화할 수 있었습니다. 회장님의 강력한 개혁 주문으로 모든 것을 제로 베이스에 놓고 따져들어 갈 수 있었으니까요. ‘이런 규정을 둬야 할 이유가 뭐냐’ ‘이 일을 꼭 이런 방식으로 해야 하느냐’ 하는 식으로 근본부터 짚어나갔습니다.

    출근하면 비서팀장이 전해주는 회장님 지시 사항이 최소 열 가지가 넘었어요. 뭐뭐를 콕 집어 이렇게 하라는 게 아니라 회장님이 펼치신 이런저런 생각을 비서팀장이 전해주면 이걸 카테고리별로 묶어서 참고 사항, 바로 해야 할 사항 등으로 분류했습니다. 즉시 해야 할 것이 한두 개 정도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항은 향후 고민하면서 실천해야 할 것들이라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그런 게 참 많았어요.”

    저는 평소 신경영 선언은 단지 혁신 정도가 아니라 굼벵이가 나비가 되는 정도의 트랜스포메이션을 향한 선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단지 겉모양의 변화가 아니라 내용의 변화, 행동양식부터 상상력에 이르는 모든 것을 바꾸는 변화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지금까지 언급한 그 많은 개혁 조치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회장께서 가장 중요하게 강조한 키워드가 있다면 뭘까요.

    “사람,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을 키우라’ ‘S급, 천재급 인재 데려와라’ ‘연봉을 사장보다 많이 줄 수 있는 사람들을 영입하라’는 말씀을 제일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결국 변화는 사람으로 시작되는 것이고, 그것은 조직에서 인사로 귀결되는 것 아니겠습니까”라며 “여러 인사 시스템의 개혁도 있었지만 ‘지역전문가 제도’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해 보입니다.

    “아, 그전에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게 생각났어요. 지역전문가도 그랬지만 회장님은 개혁을 위한 행보에 ‘비용’ 개념이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돈을 아끼지 않으신 거죠.

    프랑크푸르트 선언만 해도 절대 사전에 기획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창업 회장님 돌아가시고 그룹을 맡아 삼성을 바꾸는 일에 몰두했지만 쉽지 않다는 걸 너무도 절감하고 있는 상황에서 후쿠다 보고서, 세탁기 뚜껑 조립 사건이 터진 거였거든요. 프랑크푸르트 비행기 안에서 그 두 가지를 경험하고 바로 전 임원들을 비행기로 불러 고급 호텔에서 몇박 며칠씩 숙식을 같이 한 것 아닙니까. 막대한 돈이 들어갔지만, 회장님은 돈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하지 않으면 삼성은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는 절체절명의 절박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죠.

    프랑크푸르트에서 강의한 내용을 모두 녹화, 녹음하라고 한 것도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겁니다. 누구라도 자유롭게 말하다 보면 실수가 나올 수 있고, 이걸 기록으로 남긴다고 하면 언제 어떻게 악용될지 모르는 일 아닙니까.

    하지만 회장님은 만천하에 공개될지도 모를 내용을 말씀하시면서 거침이 없으셨어요. 하루 8시간, 9시간씩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생각을 모두 있는 그대로 날것으로 녹화 녹음해서 돌리라고 하셨으니 당신 스스로 얼마나 떳떳하고 자신감이 있으면 이런 담대한 판단을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죠.”

    29년간 총 90여 개국에 7000여 명 보내

    김 전 사장은 이건희 회장이 돈을 아끼지 않았던 대표적 개혁 조치로 지역전문가 제도를 들었다.

    “지역전문가 제도는 신경영 선언이 나오기 이미 몇 년 전에 지시한 조치입니다. ‘앞으로 해외에 1년씩 보내서 6개월은 어학연수를 하고 6개월은 맘대로 돌아다니면서 해당 지역 문화와 문물을 배우고 익혀 돌아오도록 하라. 거기서 그냥 현지인 만나 결혼도 할 수 있으면 최고’라고까지 하셨어요. 이게 바로 ‘지역전문가’ 제도였죠.

    회장님은 삼성이 지역전문가 2000명을 키우면 엄청난 힘이 될 것이라고 하셨는데 당시로서는 너무나 실현 불가능한 이야기로 들렸습니다.

    우선, 비용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하는 거였습니다. 현장마다 사람이 부족하다고 난리들인데 일에서 빼주는 것은 물론 그냥 놀게 하면서 학비며 생활비를 회사에서 다 대준다는 게 말이 되나 하는 반응이었죠.

    그렇게 했다가 나중에 이 사람들이 퇴사라도 하면 어떻게 하느냐, 그 돈이면 외국어 잘하는 유학 경력자들을 뽑거나 현지인들을 경력 사원으로 뽑는 게 낫지 않겠는가 하는 말도 많았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회장님 귀에 안 들어갔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행하신 거죠. 역시 사람을 키워야 된다는 측면에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물론 유학 갔다 와서 외국어도 잘하고 현지 생활 경험이 많아 현지 문화를 잘 아는 사람을 뽑는 게 당장에는 유리할지 모르겠지만, 조직에서 필요한 인재라는 건 기능만 갖고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애사심도 있어야 하고 인성도 좋아야 하며 폭넓게 사고할 줄도 알아야 하잖아요. 조직관리 능력도 중요하고요.

    회장님께서 일일이 그런 말씀을 하신 건 아닌데 지역전문가 제도를 생각하신 건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졌어요. 그리고 ‘사람을 키워 써야 한다’고 할 때에는 직원들에 대한 애정, 더 나아가 사람에 대한 사랑이 기반되지 않으면 절대 할 수 없는 생각입니다.

    초창기에는 반대 여론이 많아 실천하기가 상당히 어려웠지만 나중에는 자리를 잡았죠. 저는 삼성이 지역전문가를 많이 양성한 결과가 우리 그룹은 말할 것도 없고, 나라 전체로도 큰 힘이 되는 정도까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삼성의 지역전문가는 1~2년간 현지 언어와 문화를 익히도록 지원하는 해외 연수 프로그램이다. 해외여행이나 비행기 타는 게 특권이던 시절과 비교하면 현재에는 무게감이 덜하다. 코로나 때문에 사업이 멈추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인재 육성 측면에서 의미가 깊다고 판단한 삼성전자는 올해 9월, 코로나 이후 4년 만에 중단된 지역전문가 모집을 다시 시작했다고 밝혔다.

    삼성 측에 따르면 지역전문가는 1990년부터 2019년까지 총 90여 개국에 7000여 명이 파견됐다고 한다. 연봉과 체재비를 합쳐 대략 1인당 1억 원이 든다고 하면 최소 7000억 원이 투입된 프로젝트다.

    지역전문가 제도는 기업의 특정한 사내 인재 육성 방안이다 보니 바깥에는 그냥 두루뭉술하게 알려진 측면이 있다. 그런데 김 전 사장뿐 아니라 삼성의 퇴임 임원들을 만나 신경영 선언 전후 가장 파격적 조치를 물어보면 7·4제와 함께 지역전문가 제도를 꼽는 이들이 많았다. 그 이유는 뭐고, 이 회장은 왜 이런 걸 생각하게 된 걸까.

    국제화를 해야겠는데 사람이 없다

    지역전문가 제도는 김인 전 사장이 앞에서 언급했듯이 신경영 선언 이전부터 기획됐다는 증언이 있다. 김석 전 삼성증권 사장의 기억이다.

    “1989년에 회장님이 김순택 상무, 진대제 이사님과 함께 대만을 방문했을 때 현장에 함께 있었습니다. 이때 ‘지역전문가’ 제도를 도입하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입사 후 3년 내지 4년 되는 사람을 독신으로 파견해서 1년 동안 연수를 시키고 복귀를 시킨 다음 과장이 될 때쯤 해당 지역에 정식 주재원으로 다시 파견하라 이런 내용이었죠. ‘내가 예전부터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결국 이듬해인 1990년 시작됐습니다.”

    기자가 만난 다수의 삼성 임원은 “지역전문가 제도는 이 회장이 국제화를 처음 시작하는 때 누구로부터도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상황에서 먼 미래를 보고 착안한 사람 키우기 전략이었다”고 했다.

    이와 관련, 손욱 전 삼성종합기술원장은 이런 체험담을 소개했다.

    “1980년쯤 삼성전자 미국법인이 만들어집니다. 모든 게 다 처음 경험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상이한 법과 제도를 익히는 것도 그렇지만 미국 사람들은 어떻게 관리하고 어떻게 동기부여를 해야 할지 안팎에서 조언을 들을 만한 사람이 없었어요. 그냥 ‘능력 있는 사람을 잘 뽑아 일을 잘 시키면 된다’는 정도의 마인드였죠. 그렇게 해서 미국 전자업계에서 일했던 분을 발탁해 첫 미주 법인장을 시켰습니다.”

    삼성전자 DS 미국법인 사옥. [동아DB]

    삼성전자 DS 미국법인 사옥. [동아DB]

    하지만 시행착오가 많았다고 했다.

    “제가 삼성전자 기획실에 있을 때인데 어느 날 텔렉스(Telex, 팩스나 컴퓨터가 나오기 전 기업 간 통신 필수품. 다이얼을 돌려 텔레타이프를 두드리면 문자가 송신돼 문서 증명서, 서류를 보내거나 보관하는 데 유용했다)가 1m 넘게 들어오는데 미주 법인장 후보로 내정된 그 미국인으로부터 온 거였어요.

    급여는 얼마를 받아야 하고 신용카드는 비자카드 외에 또 무슨 카드도 필요하고 골프클럽 회원권도 있어야 한다 등등 요구 사항이 자세히 죽 적혀 있는 거예요.

    아니 이런 것까지 들어줘야 하나, 우리로서는 생소한 경험이었습니다만 비교할 만한 경험이나 사례도 없고, 우선은 미국 시장에 진출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에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자’는 심정으로 다 들어줬습니다. 다행히 기대했던 만큼 수출도 잘됐고 매년 성장세였습니다. 동시에 부실도 커져서 나중에는 그분을 해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사장의 일이란 것은 성장도 성장이지만 관리가 중요하지 않습니까. 매출이 아무리 늘면 뭐합니까, 부실이 늘면 안 되죠. 전체적으로 영업이익을 플러스로 만들어야 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 양반이 1m 이상 길이의 텔렉스 종이에 자기 요구 사항을 조목조목 써서 보냈듯이 우리도 ‘매출은 얼마, 이익은 얼마, 회사 구조는 어떻게 할 것’ 등등 세세한 주문을 다 적어 넣었어야 했어요. 그런데 그저 ‘잘 부탁합니다’ 하고 말았던 거죠.

    지금 보면 좀 황당한 에피소드 같긴 하지만 글로벌 무대에 새로 진출하는 저희 같은 입장에서 법적인 지식이나 경험이 제대로 있을리 만무한 상황이니 시행착오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몰라서 당하는 일도 많았고요.

    당시 이건희 회장님은 부회장 시절인데 “해당 지역 문화를 알고 접근해야 하는데 우리는 몰라도 너무 모른다. 그러니 사람을 키워야 된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어요. 저는 이런 문제의식이 ‘지역전문가’ 제도를 생각하신 계기가 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보통은 부실이 나면 처벌을 강화하고 감사를 하는 식으로 가지 않겠어요. 사람을 키우는 것이 근본 해결책인 것은 맞는데 돈과 시간이 들어가니 문제이지요. 하지만 회장님은 근본적인 해결책을 택했습니다.”

    지금이야 국제화, 현지화라는 말이 당연하게 들리지만 남보다 앞서서 세계 일류 무대에 진출하고자 했던 삼성의 시행착오는 다종다양한 형태로 많았을 것이라는 건 능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다들 국내시장만 바라보며 경쟁하던 시절 이건희 회장은 일찍이 국제화를 설파하면서 가는 곳마다 직원들에게 다양한 메시지를 남긴다. 이와 관련해서 황영기 전 KB금융지주 회장의 이런 증언도 있다.

    “1994년 싱가포르 출장 가셨을 때 제가 모시고 갔어요. 그때 현지 지사장이 파견된 지 5년 정도 됐을 때예요.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차 안에서 회장님이 갑자기 싱가포르 초·중·고교에서는 뭘 가르치느냐, 가정교육에서 중시하는 건 뭐냐 자세하게 물어보시는데 저도 그랬지만 지사장으로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죠.

    지사장은 주로 정치, 경제와 관련한 내용만 준비했을 텐데 회장께서 실제 현지에서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하시니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결국 호텔까지 쩔쩔매면서 모시고 왔지요.

    호텔에서 회장님이 사람들을 다 모아놓고 ‘싱가포르에서 일한 지가 5년이나 됐다는 사람이 겉만 훑고 다니고 내부 사정은 하나도 모른다. 이렇게 해서 국제화, 현지화가 되겠느냐’며 그 자리에서 막 야단을 치셨습니다. 사실 삼성 같은 문화에서 회장으로부터 현장에서 야단을 맞으면 거의 혼이 나갑니다(웃음).

    돌이켜 보면 그때 회장의 의도는 다른 곳에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나중에 CEO가 돼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었어요. 제가 해석하는 당시 회장의 의중은 이랬던 것 같아요.”

    어떤 건가요.

    “‘책에 있는 자료 달달 외워서 묻는 말에 답하는 게 주재원으로 있는 목적이 아니다, 여러분이 이 나라를 깊이 이해하면 그 폭발력은 100배, 200배가 될 것이다’ 하는 가르침이죠. 회장께서 국제화나 현지화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던 경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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