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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팬케이크는 늘 실패한다.
-영국 속담
나의 첫 번째 팬케이크는 멋지게 실패했다. 그것은 내가 5학년 때 구운 첫 빵이었다. 머릿속 계획은 그럴듯했다. 동그랗고 폭신하게 부푼 팬케이크를 몇 장 겹친 위에 짭짤 고소한 마가린 한 조각 얹어 엄마 앞에 짠! 그러나 구워진 부분은 얼룩덜룩하고 달걀 비린내가 났으며 밀가루 망울이 덜 풀어져서 폭탄처럼 중간에 푹 터지는 것도 있었다. 있는 재료를 눈대중으로 대강 섞어서 비슷하게 흉내 낸 반죽이었다 해도 아마 불 조절을 잘 못했을 것이다.
엉망이 된 주방에 울상으로 서 있는 내 곁으로 와 엄마는 빵의 옆구리를 조금 뜯어 먹었다. 나도 맛보았다. 가루 폭탄을 골라내며 부뚜막에 걸터앉아 둘이 빵을 먹다가 엄마가 나를 쳐다보았다. 이거 은근히 맛있는데? 당연하지. 엄마, 게다가 이건 부침개도 아니고 장떡도 아니고 케이크잖아요!
“소설마다 시작은 일단 우스꽝스럽다”고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도 일기에 고백한 적 있다. 첫 팬케이크를 망친 후로 지금까지 내가 구운 케이크는 몇 장이나 될까? 내 손에서 케이크가 타거나 덜 익는 동안 부뚜막에서 웃던 엄마는 늙었고, 케이크는 두툼하게 쌓였다. 이제 나는 팬케이크를 케이크라고 우기지도 않고 팬케이크 정도는 온갖 변주를 해가며 눈 감고도 만들어낼 수 있다. 거의 해탈(解脫)급 팬케이크랄까. 그러나 빵을 굽다 보면 해탈의 문 언저리에서 다시 돌아오는 수행자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어떤 일에서 노련해지는 것은 꽤 쓸쓸한 일이다. 삶이란 좀 태우고 싶은 날과 덜 익게 놔두고 싶은 날 사이를 오가는 일이니까. 그 줄타기 끝에서 휘청거리며 다시 돌아서 보는 것이야말로 삶의 맛이니까. 케이크가 기막히게 잘 구워진 날엔 귀퉁이를 조금 흠집 내기도 한다. 똑똑하고 성격까지 좋은 미인처럼, 완벽하게 해탈한 케이크는 어쩐지 밥맛이다.
100년 넘은 반죽으로 만든 빵
어느 해 여름, 나는 프랑스 파리 센(Seine) 강변을 걷다가 갓 구운 바게트 하나를 샀다. 배낭여행 중이었고 돈이 없어서였다. 배가 고팠지만 기다림의 짜릿함과 애탐을 조금 더 늘려보기 위해 나는 맛보기를 유예한다. 길쭉한 빵 봉투에 얼굴을 거의 쑤셔 넣은 채로 숨을 들이마신다. 그리고 더는 견딜 수 없을 때 나도 모르게 나온 혼잣말, “자, 이제!” 빵을 영접하기 전, 주문과 같은 말이 나온다. 바게트 껍질을 부수어 쫄깃한 속살과 함께 씹는다. 고소하고 깊은 풍미, 민낯의 조용한 오라(aura). 빵을 씹는 동안 숨으로 더 큰 바게트가 만들어지고 있다. 입에 있는 것을 다 삼키기도 전에 내 손은 빵을 또 뜯고 있다.
프랑스 대부분의 빵집에서는 전날 반죽을 남겨두었다가 다음 날 반죽에 같이 넣어 빵을 만든다. 그 천연 효모 반죽을 르방(levain)이라고 하는데 부댕 가 빵집의 첫 르방은 1849년에 시작됐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 집 화덕에서 막 꺼낸 빵의 전날의 전날의 전날을 톺아보면 175년 전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빵 맛이 더 깊고 촉촉해진다는 것. 그러나 이것은 오래된 프랑스 빵집만 가진 반죽의 비결은 아니다. 이런 이어짐은 우리 엄마와 할머니가 씨간장을 버리지 않고 간장독의 대를 이어오는 것과 나란한 결을 이룬다. 프랑스 어느 마을 사람들은 100년이 넘은 반죽이 섞인 빵을 오늘 아침 식탁에 올릴 수 있고, 만나본 적 없는 증조할머니의 간장을 나는 오늘 맛볼 수 있다. 어느 세계에서나 오래 이어온 것은 엄마와 할머니의 세월이 핏줄처럼 이어져 존재의 물성을 넘어서게 만든다. 르방은 프랑스어로 ‘근원’이라는 뜻이다.
센 강변에서 뜯어 먹던 바게트는 몇 년이나 이어온 반죽으로 만든 것이었을까? 안타깝게도 나는 그날의 바게트를 넘어서는 바게트를 아직 맛보지 못했다. 그 이후로 프랑스에 다시 가지 못했고 아마 그때만큼 배고프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다시 프랑스에 간다면 나는 바게트 맛의 차이를 짚어낼 수 있을까? 아마도 파리지앵이 느끼는 바게트의 맛은 쌀을 오래 먹어온 우리가 밥맛의 차이를 미묘하게 느끼는 것과 같을 것이다. 물, 소금, 르방, 밀가루만으로 만든 바게트는 프랑스의 흰 밥이다. 그 백지와 같은 빵을 천천히 오래 음미하면 삶의 희로애락을 모두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빵에는 근원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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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 빵
술을 마시고 나면 꼭 빵을 먹고 싶다. 나의 오래된 습관인 술과 빵의 연결에 고개를 젓는 이가 많은데 사실 술과 밀의 상호작용은 정말 조화롭다. 술은 밀을 부드럽게 해체하고 밀은 술의 모서리를 껴안는다. 빵이라면 자다가도 오물거리는 내게도 건강의 문제로 술과 빵 어느 것도 먹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수술 후 몸을 서서히 회복하면서 소화가 잘되는 것부터 조금씩 먹기 시작했는데 그때 먹었던 빵이 트럭 뒤에서 하얗게 김을 올리며 쪄내는 술빵이었다. 나는 동네에서 산 술빵을 먹으며 어릴 적 엄마가 해주신 막걸리빵을 떠올렸다. 밀가루 반죽에 막걸리를 섞어 따뜻한 곳에 놓으면 보글보글 끓으며 부풀어 올랐다. 발효가 잘된 반죽을 동그랗게 떼어내 쿡쿡 찧은 통팥을 넣어 포앙(앙금을 반죽으로 감싸는 일)하고 한소끔 쪄낸다. 끓는 물 위에서 덜컹거리는 뚜껑을 열면 훅 끼쳐오던 막걸리 냄새, 지금껏 나를 사로잡는 술과 빵의 기원은 엄마로부터 시작된 것이 분명하다.
18세기에도 빵에 술을 넣은 제빵사가 있다. 슈브리오는 치통에 시달리던 이를 위해 빵을 어떻게 하면 부드럽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구운 빵을 럼주에 담근다. 술빵을 먹은 이는 이름난 미식가 레슈친스키 공작이었는데 그 맛에 감탄해 자신이 읽고 있던 ‘천일야화’의 주인공 알리바바의 이름을 따, 빵에 ‘바바’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것이 18세기의 가장 유명한 술빵, 바바의 탄생이다.
요즘도 나는 빵으로 해장한다. 누군가 우스갯소리로 “너를 위해 이 세상에 술빵이 존재하나 보다”라고 놀렸는데, 술 다음 순서로 늘 빵을 챙기는 내게 술빵은 해장의 주술과 같은 존재다. 주술(酒술) 말고 주술(呪術) 말이다. 이 주술은 다음 술과 빵을 몸 안에 예언하므로 이 몸은 벗어날 길 없는 술과 빵의 영원한 굴레다.
모든 첫 번째 팬을 위하여
팬케이크, 르방, 막걸리빵, 바바, 이름에서 맛있는 윤이 돈다. 내가 오래된 가게와 빵을 특별히 좋아하기에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욱 마음이 굽는 것은 이 빵들도 나의 첫 팬케이크처럼 어느 부엌에서 우스꽝스럽게 망치며 시작됐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이야기의 근원이 된 모든 첫 번째 팬으로부터 오늘까지,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 곁을 지켜온 오랜 이름은 그 자체로 작은 신화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손끝에서 벌어지는 일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 넌출처럼 이어지고 있다. 아침마다 100년 전의 반죽으로 만든 빵을 먹는 여자, 몇 대를 이어온 간장으로 끓인 국을 먹는 아침, 너무 가까워 신화인 줄 모르는 신화를 우리는 오늘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다.
나는 오늘 당신이 첫 번째 팬을 들기 바란다. 그 위에서 멋들어지게 망치며 당신의 신화가 시작되기를.
● 1977년 충북 단양 출생
● 청주대학교 사범대학 음악교육 학사
● 2023 시와반시 에세이스트 신인상 수상
● 저서: 에세이집 ‘페이스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