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서 깊은 고개 하늘재.
해마다 봄이 되면 수만 명의 미국인들이 이 트레일에 도전하기 위해 배낭을 꾸린다고 한다. 완주하려면 눈이 녹기 전 남부에서 시작해 겨울이 되기 전 북부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이다. 건강한 사람이 부지런히 걷는다면 6개월 남짓 걸리는 이 코스를 실제로 완주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6개월 연속해 달리는 것 자체가 만만치 않은 일일 뿐 아니라, 수십kg의 장비를 지고 산길을 걷다 보면 생각보다 빨리 피로가 찾아오는 탓이다.
미국의 여행작가이자 언론인인 빌 브라이슨은 자신이 직접 애팔래치아 트레일에 도전한 뒤 산에서 보고 느낀 것을 생생한 기록으로 남겼다. 이것이 바로 1999년 출간돼 ‘뉴욕타임스’에 3년 연속 베스트셀러로 선정된 ‘A Walk in the Woods’이다. 이 책은 2002년 한국에서도 ‘나를 부르는 숲(동아일보사)’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돼 나왔는데 미국에서처럼 선풍적인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하지만 단 한번이라도 산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책이 던지는 새로운 도전 앞에서 가슴 벅차오르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다.
길동무와 함께 걷는 길

조령 입구에서 제3관문으로 오르는 길엔 자연휴양림이 잘 가꾸어져 있다. 문경 쪽이 KBS ‘무인시대’ 세트장 등으로 번잡하다면 충주 쪽은 가족끼리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한적한 숲길이다. 조선시대 때 같으면 한양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갈 때 밟는 길이었을 것이다. 과거에 붙었거나 장사를 잘했으면 콧노래를 부르며 넘었겠지만, 시험에 떨어졌거나 실속 없이 다리품만 팔았다면 눈물과 한숨으로 오를 수밖에 없었을 고개다.
제3관문 약수터에서 목을 축인 뒤 성벽을 따라 대간으로 붙었다. 오른쪽으로 군사들이 머물렀던 군막터를 지나쳐 40분쯤 오르면 마폐봉(927m)이 나온다. 마패봉이라고도 하는데, 조선시대를 빛낸 암행어사 박문수가 마패를 걸어놓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제3관문에서부터 시작된 산성은 마폐봉을 지나 북문 동문으로 이어진다. 이 성벽을 기점으로 왼쪽 지역이 충북 북부의 명물 월악산 국립공원이다.
오락가락하는 날씨를 걱정하며 서둘러 동문까지 내려서자 중년의 부부가 제3관문으로 빨리 빠질 수 있는 길을 물었다. 우리는 지도를 살펴본 뒤 지름길을 가르쳐주고 산행을 재촉했다. 이곳에서 부봉(916m)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다리에 잔뜩 힘을 모아야 한다. 밧줄을 잡고 암벽에 붙는 것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아내고 바위 위로 올라서면 문경새재 능선이 시원하게 들어온다. 며칠째 감기 때문에 온몸이 고달팠지만, 이 순간만은 생생한 기운을 되찾을 수 있었다.
길을 잃고 밤에 취하다
부봉과 959m봉을 지나 평천재로 가는 길에서는 표지를 잘 확인해야 한다. 대간이 남쪽으로 내려왔다가 동쪽으로 꺾어진 뒤 다시 북으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보통 백두대간 주능선은 북북동을 기본으로 하면서 뻗다가 이따금씩 서쪽으로 휘어진다. 때문에 이례적으로 남쪽으로 흐르는 이 코스에서는 독도(讀圖)에 특히 신경을 써야 한다. 결국 필자 일행도 부봉 너머 바위지붕에서 기분 좋게 산세를 감상한 뒤 내려서는 길에서 그만 길을 잘못 들고 말았다. 나침반을 꺼내들고 위치를 확인했으나, 세상일이 다 그렇듯이 한번 잃어버린 길은 좀처럼 되돌리기가 어렵다. 이렇게 되면 일단 내려섰다가 다시 힘을 모으는 것이 최선이다. 1시간 남짓 걸어내려가자 3시간쯤 전 중년 부부에게 일러주었던 동화원 지름길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