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골 내려오면서 돈이 얼마 들었나요?”
선뜻 답하기가 어렵다. 얼마 들었는지 가계부를 쓴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내려오고자 하는 사람의 질문 의도를 파악하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돈 문제란 누구에게나 예민한 문제가 아닌가. 그럼, 내가 되묻는다.
“그렇게 물어보시는 분은 얼마를 예상하시나요?”
갑자기 되묻는 말에 당황하며 한다는 말.
“저는 돈 가진 거 별로 없어요.”
자신이 돈이 많다고 흔쾌히 자랑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본인은 말을 그렇게 하지만 돈 문제를 물어보는 사람은 어느 정도 경제력이 있는 경우다. 자신이 가진 수준에서 이리저리 계획을 세우기 위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면 서로 이야기하기가 편하다. 사실 땅 사고 집 짓고, 자리 잡는 과정에 적지 않게 돈이 든다. 다만 우리 식구는 남보다 한발 먼저 내려왔기에 땅값도, 집 짓는 자재 값도 지금보다 훨씬 싼 덕을 보았다고나 할까.
향유네 포도밭의 탄생
아무리 시골 땅값이 올랐다 해도 도시만큼 오르기는 어려울 거다. 도시에 작으나마 집 한 칸이라도 있는 사람은 농사지을 땅과 집을 마련하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으리라 본다. 내 집은 고사하고 전세거리조차 변변하지 못한 사람은? 이런 분들에 대해서는 나 또한 조심스럽다.
그럴 때 언뜻 떠오르는 이웃이 있어 그 이야기를 대신한다. 시쳇말로 가진 거라고는 뭐 두 쪽밖에 없이 맨몸으로 땅에 뿌리내린 이웃. 경북 상주에서 포도 농사를 짓는 향유네다. 향유는 일곱 살 여자아이. 아버지 박종관(朴鍾寬·37)씨와 어머니 김현(金賢·37)씨가 한가족이다. 이들 부부는 아이 이름을 따 향유아빠, 향유엄마로 불리길 좋아한다. 자신들이 가꾸는 포도 이름도 향유포도요, 술은 향유포도주다.
충북 영동에서 황간 쪽 백화산을 넘어가면 경북 상주다. 향유네는 바로 백화산 그 언저리에 산다. 내가 향유네를 안 지는 제법 시간이 흘렀다. 얼추 8~9년. 그동안 나는 이 집 식구와 한 해 두세 번 만나는 사이가 됐다. 올해는 연수다 교육이다 해서 벌써 세 번이나 만났다. 상주는 내 고향이기도 해서 추석 고향 가는 길에 만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멀리 살아도 이제는 이 집 식구들이 어찌 사는지를 어느 정도 안다.
인터뷰를 하려니 약속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향유네는 워낙 바쁘게 일하는 터라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눌 처지가 아니었다. 낮에는 일로 바쁘고 밤에는 고단해 쓰러져 자는 나날들. 게다가 9월은 포도를 따기 시작하는 때다. 포도 농사로만 돈을 만들어내는 향유네는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랄 판이다. 때로는 잠을 미루면서까지 일을 해야 할 정도. 결국 일을 같이 하면서 이야기하기로 날짜를 잡았다. 마침 내가 향유네를 간 날은 비가 오락가락했다. 좀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향유네 밭에 도착하니 포도가 주렁주렁 익어간다. 포도보다 더 눈에 띄는 건 아무래도 건물이다. 올봄에 지은 창고 두 채가 밭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다. 나는 이 건물이 향유네가 맨손으로 세우다시피한 걸 알기에, 건물 구석구석이 다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시골은 조상 대대로 살아와 땅이 있고 집이 있어도 못 살고 떠나는 곳이다. 그곳에 종관씨는 몇 백만원도 아닌 단돈 20만원을 들고, 대학 졸업식 바로 다음날 시골로 내려간다. 그가 다닌 대학은 농과대도 아니고 신학대였다. 그는 대학 생활 동안 기독교의 폐쇄적인 분위기와 종교적 위선에 숨이 막히고 괴로워했다. 그러다가 정농회(正農會, 대표 임락경)를 알게 되고, 김복관 선생을 비롯한 정농회 어른들과 만나면서 희망을 갖는다. 묵묵히 땅을 일구며 세상을 섬기는 어른들. 종관씨는 그분들에게서 빛을 보았고, 그분들 뒷모습만 보아도 힘이 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