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도 마찬가지다. 수년 전에 문예진흥원에서 퇴직하고 지금은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데, 대학과 집만을 오가는 생활을 하신다.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이 두 공간, 그리고 공간이동은 시와 삶의 이동으로 보인다. 시인에서 생활인으로 넘어가는 삶의 이동은 매일매일 이뤄지기에 특별한 경계선이 없다.
움직이는 동안 저절로 그 공간에 맞는 스타일이 갖추어진다. 양 어깨에 물통을 메고 걸어가듯이 삶의 걸음걸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균형’ 혹은 ‘균형감’이다. 선생의 이러한 단순한 생활방식은 삶의 균형을 중요시하는 데서 온다. 직업을 가지고 있기에 생계수단인 그 직업과 시인으로서의 삶, 이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생활이 흐트러져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
직장에서는 직원들과 어울려야 한다. 특히 선생의 한평생 직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문예진흥원은 우리나라의 모든 예술가가 모인 곳이고, 선생은 그곳에서 예술행정을 비롯한 많은 일을 했다. 조화롭게 어울리지 못한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어울림이 기둥이거나 이파리라면, 그 뿌리는 홀로 있음이다. 젊어서부터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성품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혼자 있다는 것. 옛 선비들은 ‘신독(愼獨)’이라는 ‘대학’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혼자 있을 때 몸가짐을 바르게 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사람들은 온 우주와 연결된 존재이지만 그 근원은 바로 혼자, 자기 자신이다. 부처도 삶의 첫 탄성이 바로 ‘천상천하유아독존’이었다. 혼자 있어 편하고 좋은 경지는 천성도 있겠지만, 절차탁마를 통한 결과일 수도 있다.
무서운 고요의식
인간은 어울려 다니길 좋아한다. 선생 역시 인생의 스승을 만나기 전까진 적어도 시적으로는 매우 방황한다. 그러다 36세 되던 해인 1985년 김달진 선생을 만난다. 한국의 대표적인 은둔 시인, 한학자, 불교학자인 김달진 선생과의 만남을 통해 무섭게 고요하고 깊은 세상을 만난 것이다. 시집 ‘산정묘지’로 올라가는 여정을 여기에서부터 둔다고 했다. 그분을 추억이라도 하는 듯이 나지막하게 두 분의 인연을 이야기했다.
“그분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수유리에 있는 선생 댁을 찾아다니면서 내가 앞으로 걸어야 할 길의 방향을 본 거죠. 아니, ‘올라야 할 길’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네. 선생은 전형적인 은둔시인이죠. 밖의 세상에는 일절 관심을 두지 않았어요. 생전에도 선생 이름이 문단주소록에 작고(作故) 문인으로 기록된 적이 있을 정도니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선생은 그저 웃기만 하셨지요. 그런 분입니다. 저는 그것을 ‘무서운 고요의식’이라고 합니다. 선생의 칩거생활은 단순히 세상으로부터 외롭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선생은 커다란 고요를 품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던 거죠. 격리가 아닌 삶의 포용이었고, 그것이 매우 크고 고요하기 때문에 그 조용함이 저희들에게는 외롭게 보이는 거죠.”
그분으로 말미암아 시인은 선시(禪詩)와 한시(漢詩)의 세계를 만난다. 때론 단 한 문장으로 삶의 비의를 드러내고 깨어버리는 그 무서운 고요함의 세계. ‘산정묘지’의 정신은 거기에서 움트고 자란다. 계속해서 선생은 말한다.
“1980년대가 얼마나 소란스러웠어요.”
그렇다. 전두환과 광주로 시작된 1980년대는 우리 현대사의 살점이 떨어져 나간 아픈 시절이기도 하다. 마치 전쟁을 치르고 난 것 같은 황량함 속에 귀신처럼 돌아다니던 번거로움들. 싸움은 싸움을 낳고, 서로의 주장으로 한여름의 매미처럼 당장이라도 죽어버릴 것처럼 울어대서 마침내 온몸을 텅 비워버리는, 영혼이 말라비틀어져버린 소비적인 외침들이 얼마나 거칠던 시절인가.
필자 역시 이 시절에는 한구석에 틀어박혀 막걸리를 마시고 살았다. 그리고 다른 세상을 꿈꾸었다. 바슐라르나 에밀리 디킨슨을 통해 이런 세상에도 끝내 살아가야 할 신비스러운 곳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시는 근본적으로 서정이다. 그것이 서사를 갖추고 있어도 서정이다. 그런 시절에 만난 김달진 선생. 그 소란스러움 속에서도 선생은 고요히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