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다양성이 존재하는 세상, 오! 패션 코리아”
패션이 ‘일’과 ‘존재’인 기자이자 쇼퍼홀릭인 나의 시선으로 보면, 21세기 대한민국은 둘로 나뉜다. 패션으로 가득한 세계와 패션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
패션이 ‘있는’ 코리아 서울은 뉴욕, 파리, 밀라노, 런던과 같은 시간대에 있다.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의 컬렉션이 실시간으로 생중계되고, 트위터로 셀린느의 새 수석 디자이너 피비 필로에게 “마지막 옷이 죽여준다”고 축하 인사를 보내면, 바로 그 신상이 청담동 매장에 걸린다.
실제로 겨울과 여름, 유럽의 컬렉션에 참석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비행기를 탄다. 파리나 밀라노에서 한국의 패셔니스타들은 마치 청담동에서 마주친 것처럼, 양손에 들린 쇼핑백을 서로 서로 스캔해, 혹시 자신의 쇼핑리스트에서 빠뜨린 것이 없는지를 챙긴다. 쇼퍼홀릭의 입장에서 우리는 완벽한 세계화를 이루었다.
패션으로 꼼꼼히 네트워킹된 세계에선 하얀색 셔츠의 소재, 박음질, 가슴 부분의 주머니 장식이 취향, 경제적 상황, 정보력, 미적 센스, 상대에 대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이 털어놓는다. 그러니까 이런 말도 가능하다.
“난 그 사람이 싫어요. 아이보리 컬러의 바지에 검은색 슬립온 구두를 신었기 때문에요.”
이곳에서 패션은 열렬한 숭배의 대상이다. 사람들은 검은색의 미묘한 차이를 두고도 격렬한 논쟁을 벌인다. 패션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이다. 미드 ‘섹스앤더시티’의 대사를 그대로 옮기자면, 이곳 사람들에게 ‘스타일은 새로운 신’이다.
패션, 가득하거나 아예 없거나

2009 서울 패션위크에서 열린 패션쇼. 유명 연예인 등 많은 관객이 모여 패션 경향을 살폈다.
그러나 회사에서 그녀의 스타일에 대해 코멘트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그녀의 사무실, 패션이 없는 세계에서 패션은 입거나, 벗거나 둘 중 하나만 의미가 있다. 그녀가 그 유명한 블랙 미니 드레스를 선택함으로써 패션의 역사에 대한 이해와 다소 도도해 보이려는 욕망을 말한다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한 사람의 존재가 그가 외부로 표출하는 행동의 총합이라면, 패션은 분명한 행동이지만, 패션이 없는 곳에서 그것은 침묵이다.
물론 이곳에도 패션이란 단어는 존재한다. 그러나 패션이 없는 세계에서 패션이란 ‘사치’ ‘허영’의 다른 말일 따름이다. 좋게 봐줘야 ‘비정상적인 열정’이며, 종종 ‘된장녀’의 전매특허로 통용된다. 그래서 아무리 패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도, 공공연히 옷이나 스타일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무식함과 무개념으로 보일까 두려워한다.
여기까지. 이런 시각이 패션중독자가 세상을 보는 흥미로운 시선일 따름이라고 말할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나마 매우 너그러운 자세라는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패션이 존재하거나 혹은 아니거나’의 분류법은 생각보다 광범위하게 적용된다. 디자이너가 자신의 패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통망인 백화점은 패션으로 가득한 곳처럼 보이지만, 패션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다. 백화점엔 오로지 상품만 존재한다. 우리의 백화점들은 자리를 빌려주고 자릿세를 받는 부동산업과 비슷하다. 매출이 떨어지는 순서대로 방을 빼야 한다. 그러므로 백화점에 들어가려면 가장 대중적인 상품을, 가장 이윤이 많이 남는 방식으로 만들 수밖에 없다. 창의적인 디자인보다는 해외 디자이너의 컬렉션을 베끼는 순발력과 뻔뻔함이 환영받는다. 백화점이 반기는 VIP는 비싸기 때문에 지갑을 여는 손님들이다.
패션이 필요한 까닭
패션 정책을 수행하는 정부의 시선에서 보자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오로지 패션’이거나 ‘패션은 없다’로 나뉜다. 어느 부에서 패션은 오로지 단가와 수량으로 계산되는 수출 상품이고, 어느 부에선 옷이 아니라 추상화처럼 난해해야 패션이라고 쳐준다. 또 다른 어느 공무원이 보기에 패션이란 외국 관광객을 끌어 모으기 위한 길거리 서커스와도 같다. 어느 쪽이든 한국 패션이 이제 세계로 진출해야 하며, ‘글로벌’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 앞에서는 누구도 패션이 사치라고 말하지 않는다. 패션은 고부가가치 수출 역군, 문화적 자산, 관광자원으로만 인정받는다. 전반적으로 패션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패션은 아름다움에 대한 열정이고, 몰개성한 세상에 대한 저항이고, 순수한 일탈이라고 생각하며 진심으로 패션을 근심하는 이들이 있다. 한국의 패션이 ‘베끼기’에서 벗어나 자기 것을 찾아내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난 생각한다. 그들은 예술가처럼 존경받지도 못하고, 기업가처럼 셈이 빠르지도 않으며 대부분은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천재 디렉터 존 갈리아노처럼 세계적 명성을 얻지 못하겠지만, 슈트의 절묘한 어깨 각에서 감동을 받는다. 남과 같은 것을 만드느니, 마루를 깨끗이 닦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패션이 계급적 구별짓기라는 말을 부인할 순 없다. 그러나 패션을 통하지 않은 구별짓기는 얼마나 잔인한가. 아름다운 것을 창조하려는 열정을 전쟁과 돈벌이에 쏟아 부었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더 난폭했을 것이다. 패션은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세상에 대한 유머러스한 은유다. 패션이 있는 세상은, 그래서 더 재미있다. 대한민국이 ‘패션 코리아’가 되기를 바라는 이유다.
김민경 동아일보 주간동아 차장 holde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