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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사랑의 성소(聖所)

이스탄불, 사랑의 성소(聖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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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사랑의 성소(聖所)

‘순수 박물관’<br>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민음사/ 424쪽/ 1만3000원

2년 전 겨울 북이탈리아 밀라노를 거쳐 파리에 잠깐 머물 때의 일이다. 나는 센 강 근처 앙리4세 대로에 있는 파리 7대학의 M교수 집에서 느긋하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 퐁피두센터로 향했다. 퐁피두센터는 뉴욕의 모마(MOMA)와 런던의 테이트모던과 함께 현대미술의 메카로, 파리에 갈 때면 상설 작품들과 함께 그때그때 전시하는 특별기획전을 관람하기 위해 따로 시간을 내곤 했다. 그런데 그날 나는 퐁피두에 가긴 간 것일까 싶을 정도로, 특별전에 대한 기억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대신 퐁피두 광장으로 들어서는 네 개의 통로 중 하나를 걸어가며 보았던, ‘마르마라(Marmara)’라는 낯선 단어와 함께 ‘이스탄불(ISTANBUL)’이라는 지명이 선명하게 뇌리에 박혀 있을 뿐이다. 그렇다. 나는 그날 아침, 평소 하지 않던 충동적인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퐁피두센터의 회전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처음 보는 ‘마르마라’라는 여행사의 유리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다음날, 이스탄불행 비행기에 올랐다,

여행지에서의 또 다른 여행

마르마라 해 연안의, 보스포루스 해협을 품고 있는 매혹적인 도시 이스탄불은 그렇게 돌발적으로 나에게 왔다. 비행기가 샤를 드골 공항을 이륙할 때 나는 비로소 눈을 감고 내가 지금 감행하는 무모한 여행의 근원에 대해 생각했다. 20년 동안 세계의 수많은 곳을 돌아다녔지만, ‘아직’ 이스탄불에 가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플로베르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스탄불에는 6개월 머물러야 한다네’라고 쓴 것처럼, 나는 그저 하루 이틀 스쳐지나가는 것이 아닌, 헬레니즘 문화권의 핵심지로 ‘그곳’을 제대로 답사할 예정이었다. 그러니까 그날 아침 충동적으로 이스탄불행 비행기 티켓을 끊은 것은 오랫동안 꿈꾸어온 여행 계획에 대한 반칙이었다.

비행기가 안정적인 균형을 되찾았을 때, 나는 눈을 뜨고 기내 창밖으로 파란 창공을 바라보았다. 오직 이스탄불만을 위한 사흘. 은근한 설렘이 미세한 떨림으로 온몸을 감쌌고, 원래 파리에서 하려고 했던 일들은 까맣게 잊고 처음 가보는 낯선 도시에 대한 기대로 충만했다. 그러면서 몇 년 전 서울에서 만났던 오르한 파묵을 생각했다. 터키대사관의 초청으로 한남동의 대사관저에서 오르한 파묵과 저녁 식사를 한 적이 있다.



그런데 나는 여느 외국 작가들과의 저녁 식사 때와 다르게 그와 유쾌하게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그의 소설 ‘내 이름은 빨강’이 출간됐으나 읽지 않은 상태였고, 그의 도시 이스탄불은 마음에 품고만 있었지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파묵은 독일인 남성을 연상시키는 큰 키에 서구적인 외모였는데, 놀라울 정도로 영어를 유창하게 했다. 나는 그와의 대화보다는 대사 부인이 차려낸 터키 음식을 섬세하게 음미했고, 그는 그날 한국어로 번역 출간된 ‘눈’이라는 소설의 첫 페이지를 열어 재밌는 일러스트 서명과 함께 내게 선물로 건넸다.

터키대사관저에서 오르한 파묵과 헤어진 뒤 나는 인쇄소의 온기가 느껴지는 신작 ‘눈’을 밀쳐두고, 그의 한국어 번역 첫 소설인 ‘내 이름은 빨강’을 읽었다. 이 작품은 16세기 이슬람 세계의 궁정 화단(畵壇)에서 옛것(전통)과 새것(서구), 개방과 폐쇄를 놓고 벌어지는 권력 암투를 그리고 있는데, 한 그루 나무, 새, 우물 바닥에 누워 있는 시체, 금화, 개, 빨강색 등 10여 가지의 다중 화자가 한 가지 사건을 조명하는 매우 독특한 형식의 소설이다. 그의 작품들은 뉴욕과 파리 등 해외에 번역되어 뜨거운 호응을 얻으면서 그를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았고, 그는 터키 대사관저에서 만난 이듬해 ‘문화들 간의 충돌과 얽힘을 나타내는 새로운 상징들을 발견했다’는 평가와 함께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오르한 파묵의 도시

파묵은 세계의 독자와 소통할수록 태생지인 터키와 이스탄불을 작품에 적극 무대화하고, 그의 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이스탄불의 골목골목과 보스포루스 해협과 마르마라 해에 대해 친숙해진다. 그리고 급기야 그의 도시 이스탄불을 가슴에 품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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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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