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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고수들의 인문학 비평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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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고수들의 인문학 비평 모음집

‘비평고원 10’<br>비평고원 지음 / 도서출판 b / 1072쪽 / 2만5000원

책모양새가 만만찮다. 두께가 1000쪽이 넘으니 목침만큼 두툼하다. 판형도 보통 책보다 커서 거의 A4 용지 크기에 달한다. 책에 담긴 원고 분량이 약 7000매라고 하니 웬만한 책 7~8권에 해당한다. 당연히 무게가 묵직해 아령 대신에 팔 운동 기구로 써도 손색이 없겠다. 신체가 허약한 철학자 칸트는 무거운 책을 들고 내리며 근력을 키우고 규칙적인 산책으로 심폐 기능을 단련했다지 않은가.

저자 이름도 특이하다. 개인이 아니라 온라인 커뮤니티 명칭이기 때문이다. ‘비평고원’은 포털사이트 ‘다음’에 인문학 비평을 목적으로 2000년 4월28일 개설된 카페(http://cafe.daum.net/9876)다.

사이버 공간에서 펼친 활동 결과를 전통적인 종이 책으로 묶은 것으로 보아 손으로 만지는 책의 유용성은 여전한 듯하다. 우주비행사가 영양소가 모두 든 캡슐 알약을 복용해도 더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을 먹고 싶은 욕망을 버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책 이름에 ‘10’이라는 숫자가 붙은 것은 이 카페의 개설 10주년을 기념해 만들었기 때문이다. 문을 연 지 10년이 지난 지금 회원수는 1만여 명이다. 회원 가운데 적극적으로 글을 올리는 열성파는 500여 명. 지금까지 30만여 명이 이 사이트를 방문했고 약 2만개의 게시글과 3만5000개의 댓글이 실렸다.

이런 통계 수치만 보면 10년 성과치고는 외형이 화려하지는 않다. 그러나 질적(質的)인 면에서 살피면 여느 서평(書評) 카페와 비교해 단연 돋보인다. ‘비평고원’은 신간 서적에 대한 독후감 위주의 아마추어 서평이 아니라 고전 또는 고전급 인문학 서적을 전문적으로 비평하는 모임이다. 그런 만큼 핵심 회원들의 필력과 지적(知的) 수준은 인문학 관련 사이트 가운데서 최고로 꼽힌다.



이들은 주로 전공분야 대학원생, 강호(江湖) 고수 네티즌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카페의 연륜이 쌓이면서 회원 상당수는 철학박사,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리라. 그리고 ‘보따리 시간강사’로 여러 대학 캠퍼스를 전전하며 자신의 지식에 걸맞지 않은 열악한 대우에 분노하며 현 사회체제에 대한 비판의 필봉을 더욱 매섭게 휘두르리라.

커뮤니티의 여러 저자를 대표해서 ‘소조(小鳥)’라는 소박하고 겸손한 품성을 나타내는 필명을 가진 회원이 서문을 썼다. 소조는 지난 10년간 자신이 쓴 거의 모든 글을 카페에 올렸고 이를 바탕으로 회원들과 댓글, 답글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소조는 문학평론가로 데뷔해 저서 2권과 번역서 5권을 냈다.

비평 활동은 진검승부

소조는 서문에서 카페가 10년 동안 별 탈 없이 유지된 비결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운영원칙 덕분이었다고 밝혔다. 첫째, 지인들은 카페에 가입하지 못하도록 하는데 오프라인에서 개인적 친분이 있는 사람을 온라인에서 만나 뭔가 창조적인 작업을 할 확률은 거의 0%이기 때문이다. 둘째, 가능한 한 오프라인 모임을 갖지 않는데 회원끼리의 친분 강화는 불필요한 인간관계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셋째, 어떤 명분에서든 집단적인 의사표현은 배격한다.

현명한 운영원칙으로 보인다. 진정한 비평 활동은 냉철한 자세로 벌이는 진검 승부 아닌가. 장유유서(長幼有序) 의식, 학연 등이 아직 남은 한국의 현실에서 안면이 익은 상대에게 날카로운 칼질을 할 수 없지 않겠는가. 카페 회원 대부분이 필명으로 활동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겠다. 익명 집필의 순기능이 발휘되면 진정 자유롭게, 가식 없이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지 않겠나. 무림(武林)의 고수끼리 오래 갈고 닦은 내공으로 일합을 겨루려면 거추장스러운 계급장을 떼야 하지 않으랴. 이들의 눈에는 기존의 한국 지성계는 환관(宦官)들에 의해 유지되는 국가기구의 하나로 비친다.

이 책은 사이트의 10년간 집적물 가운데 알맹이를 골라 11개 부문으로 나눠 정리했다. 인문학 일반, 문학, 번역, 영화, 현실문제 쟁점 등 다양한 분야를 다루었다. 찬찬히 읽으면 한국 인문학의 종합적인 현주소를 가늠할 수 있다. 20~30대 소장파 인문학자들의 사유(思惟)체계와 문제의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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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철│저널리스트 koyou33@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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