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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독립 성지(聖地)의 문화 자존심

필라델피아 미술관

美 독립 성지(聖地)의 문화 자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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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100주년 행사를 준비하면서 필라델피아 사람들은 미술관 설립의 필요성을 느껴 1876년 2월 시로부터 미술관(Pennsylvania Museum and School of Industrial Art) 설립을 인가받았다. 그리고 1877년 5월 10일, 100주년 행사의 1주년을 기념하는 날에 메모리얼 홀을 미술관 건물로 해서 필라델피아 미술관을 출범시켰다. 독립의 성지에서 개최된 독립 100주년 행사가 독립적인 미술관을 만들어낸 것이다.

미술관은 이후 50여 년간 큰 변화 없이 유지돼오다 킴볼(Fixk Kimball·1888~1955)이 관장을 맡으면서 그 면모가 일신됐다. 킴볼은 1925년부터 1955년까지 무려 30년 동안 관장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현재의 건물을 지어 미술관을 이전했다. 새 건물 개관 첫해에만 100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몰려들었다. 킴볼은 매사추세츠 주 태생으로 하버드대를 나온 건축가이자 건축사학자였다.

미국에는 공공미술관도 부자의 기부와 기증으로 더욱 발전해가는 전통이 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JP모건을 필두로 수많은 재벌이 달라붙어 만들어낸 미술관이다. 필라델피아 미술관 역시 공공미술관으로 출발했지만, 많은 부호의 지원으로 오늘날의 위치까지 발전할 수 있었다. 특히 이곳 출신 재벌로 대를 이어 미술관을 후원한 매킬헤니 가문(Mcilhenny Family)의 기여가 컸다.

50여 년 동안 꾸준히 미술관을 후원한 헨리 매킬헤니(Henry Plumer McIlhenny· 1910~1986)는 날 때부터 재벌이었다. 그의 할아버지가 가스 미터를 발명해 사업을 일으켰고, 아버지가 가스 사업으로 재벌이 된 덕분이다. 하버드대를 졸업한 헨리는 미술품과 골동품 전문 감정가이자 세계를 두루 여행하는 여행가, 사교계 명사, 자선사업가로 활동했다. 특히 예술품 수집에 열정이 남달랐다. 부모 때부터 필라델피아 미술관의 후원자이던 가정 분위기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예술 사랑의 유전자 덕분이었을 것이다.

매킬헤니家의 예술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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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에어킨스의 ‘그로스 클리닉’(1875)

헨리의 아버지 존 매킬헤니(John D. McIlhenny)는 1920년부터 1925년 사망할 때까지 필라델피아 미술관 이사회 회장을 지냈다. 1926년에는 그가 수집한 중요 작품이 모두 미술관에 기증됐다. 그의 딸, 즉 헨리의 누이도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미술관 이사회장을 지냈다. 이후 헨리까지 이사회장을 지냈으니, 미술관과 매킬헤니 가문의 관계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헨리는 제2차 세계대전 때 해군으로 참전했고 1935년부터 1964년까지는 필라델피아 미술관의 큐레이터로 봉사했다. 1976년부터 1986년 사망할 때까지 미술관 이사회장을 맡았다. 평생 수집해온 엄청난 양의 예술 작품을 모두 미술관에 기부했다. 그는 부동산 부자이기도 했는데, 사망 후 모든 부동산을 미술관에 기증했다. 필라델피아 미술관은 2층 전시실에서 많은 카펫을 전시하고 있는데, 모두 헨리가 기증한 것이다. 미술관이 소장할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그의 수집품은 크리스티 경매에서 일반인에게 판매됐다. 이를 통해 생긴 370만 달러(약 40억 원)의 수익금 역시 미술관 기금으로 편입됐다.

매킬헤니 가문이 이렇게 돈과 정성을 퍼부었지만, 필라델피아 미술관은 결코 그들의 미술관이 아니다. 미술관은 공익법인이 소유하고, 전문가가 경영하며, 일반 대중이 찾아가 즐기는 시민의 것이다. 재벌은 이런 훌륭한 미술관을 만드는 데 크게 공헌했다는 기록만 남을 뿐이다. 이런 기록만으로도 만족하는 사회가 진정한 선진사회가 아닐까 싶다.

필라델피아 미술관 발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명이 존 존슨(John G. Johnson· 1841~1917)이다. 그는 필라델피아 태생의 유명 변호사로 무려 1300여 점을 미술관에 기증했다. 그는 셰익스피어에 심취한, 기억력이 출중한 문학청년으로 잠시 남북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1800년대 말 미국에서 성행했던 대규모 독점회사와 재벌을 변호하며 큰돈을 벌었다. 부자와 한 배를 타야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한국이나 미국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존슨은 제임스 가필드,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으로부터 대법관으로 지명받았으나 이를 거절했다.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으로부터는 법무장관 요청까지 받았지만 이 역시 사양했다. 우리 사회와 비교할 때 의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부와 권력을 동시에 갖지 않겠다는 철학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1971년 ‘뉴욕타임스’는 그를 영어권 최고의 변호사라고 칭송했다.

존슨은 매년 유럽을 여행하며 유럽에 관한 책을 쓰고 주로 유럽의 유명 그림을 대량 수집했다. 서른네 살 때 세 아이를 둔 미망인과 결혼했는데, 둘 사이에는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이 부부는 필라델피아 사우스 브로드 스트리트에 저택을 짓고 이웃 건물까지 사들여 소장 작품을 전시했다. 존슨은 자신의 건물에서 계속 전시한다는 조건을 달아 소장품을 모두 필라델피아 시에 기증했다.

필라델피아 미술관의 현재 건물이 완성되자 1933년 이 작품들을 미술관으로 옮겨 전시했다. 애초에는 잠시만 옮긴다는 계획이었는데 이후 무려 50년 동안이나 미술관에서 다른 소장품과 구분해 독립적으로 전시됐다. 1980년대에 와서야 존슨의 작품들도 다른 소장품과 함께 전시될 수 있도록 허가됐다. 현재는 미술관 소장품으로 편입돼 있다.

19세기 수술실 풍경

토머스 에이킨스(Thomas Eakins·1844~1916)는 필라델피아의 자존심과 같은 화가다. 이곳 태생인 에이킨스는 젊은 시절 유럽에서 미술 공부를 하던 시기를 빼놓고는 한평생 고향에서 활동했다. 필라델피아 미술관이 소장한 그의 대표작 중 하나가 ‘그로스 클리닉(The Gross Clinic)’인데, 이 그림에는 미술관과 얽힌 특별한 사연이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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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표 |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jpchoi@konk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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