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호

한산도대첩, 아테네 배가 함포 단 범선에 덤빈 격

[해전의 승부수 군함⑥] 왜구가 때릴수록 더 강해진 조선 수군

  • 정재민 前 방위사업청 지원함사업팀장 박나영 해군 소령

    입력2021-01-10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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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 최초 함포 전쟁 ‘진포 해전’… 유럽보다 200년 앞서

    • 왜구식 선상 백병전에 총통(銃筒) 포격전으로 대응

    • 수군의 중요성 간파한 ‘육군 출신’ 이성계

    • “섬 오랑캐 침입에 대비해 특별히 귀선(龜船)을 만들었습니다”

    • 조선수군에 패해 무인도서 해초로 연명한 왜장(倭將)

    • 거북선, 합참 역할 이순신과 방사청 역할 나대용 합작품

    한산도대첩을 묘사한 기록화.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한산도대첩을 묘사한 기록화.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전근대 한반도에 오늘날의 해군인 수군(水軍)이 본격 등장한 것은 왜구(倭寇) 때문이었다. 고려 말기 왜구의 침입이 특히 극심했다. 공민왕 때에는 해마다 왜구가 침입할 정도였다. 이에 공민왕은 본격적으로 수군을 조직하고 군선에 화약무기를 탑재했다. 최무선이 원나라로부터 화약 제조와 화포 제작 기술을 배워 발전시킨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려 시대의 진포해전(1383)은 세계 최초의 함포 해전으로 평가된다. 금강 하구의 진포(지금의 충남 서천군·전북 군산시 일대라는 설도 있음)에서 해도원수(海道元帥) 최무선이 이끄는 고려 군선 100척이 왜선 500척을 격파했다. 앞서 본 레판토해전(1571)이나 칼레해전(1588)에 비해 거의 200년 앞선다. 

    조선 시대 들어 수군의 규모는 더 커졌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굳이 군종(軍種)을 따지자면 육군 출신이었으나 수군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간파했다. 진포해전에서 패한 왜구 잔당을 육상에서 격퇴한 것이 이성계였다. 현대전에 비춰보면 합동전을 경험한 셈이다. 

    16세기까지 조선 수군의 병력 수는 5만 명 정도로 육군과 거의 비슷했다. 양민에게 부여된 병역 의무인 ‘군역(軍役)’도 육군과 수군이 분리돼 있었다. 육군보다 복무 기간이 길고 복무 환경도 열악해 수군에 배속된 이들의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수군의 중요성 간파한 ‘육군 출신’ 이성계

    조선 수군은 730여 척의 군선을 보유했다. 군선의 종류는 크기나 속도, 목적에 따라 대선(大船)·중선(中船)·별선(別船)·추왜별선(追倭別船) 등 10가지가 넘었다. 다만 조선 시대에 지금처럼 정밀하고 규격화된 조함은 어려웠다. 지나치게 많은 군선 종류의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됐다. 이에 세조 때 대·중·소 맹선(猛船)으로 군선 종류를 대폭 간소화했다. 맹선은 평시에는 한양으로 공물을 운송하는 조운선(漕運船)으로 쓸 수 있게 설계한 군선이다. 



    조선 시대의 군선은 기본적으로 노선이었다. 한반도는 섬이 많고 해안선이 오밀조밀해 장거리 이동보다 노를 이용한 신속한 회전·기동이 요구됐기 때문이다. 돛이 달려 있었지만 부수적·보조적이었다. 칼레해전의 유럽 군함이 범선에 대포를 결합했다면 고려 말기~조선 시대 군함은 노선에 화포를 결합했다. 

    왜구의 침입이 계속되자 조선 정부는 수군의 군선과 화포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켰다. 명종 시절인 1555년 을묘왜변(전남 영암·강진 일대를 침략한 왜구를 도순찰사 이준경 등이 격파) 때 처음으로 판옥선(板屋船)이 주력 군선으로 활용됐다. 이전의 주력선 맹선에 비해 배의 크기를 키웠다. 화물 적재량을 줄인 대신 전투원 승선 인원을 늘린 본격적인 싸움배였다. 

    천·지·현·황자총통 등 임진왜란에서 주력으로 사용된 무기도 이 무렵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군선을 어디서 만들었을까. 임진왜란 직후 군 병력을 양성·지휘하기 위해 설립한 훈련도감은 크게 훈련부서와 군수부서(軍需部署)로 구분됐다. 군수부서는 군사들을 위한 식량·의복 등의 조달뿐 아니라 군선 건조도 담당했다. 명나라나 일본으로부터 조선 기술자를 초빙해 군선을 제작했다는 기록도 있다. 

    1592년 4월 일본군이 조선을 기습 침략했다. 7년 동안 이어진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한 직후였다. 도요토미는 일감이 사라진 사무라이를 그대로 방치하면 자신의 권력에 도전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들을 대외 원정에 동원해 불만을 해소하고 내부 결집을 노렸다. 이를 위해 일본 각지 다이묘(大名·영주)의 병력을 끌어모아 대외 정복을 시도한 것이다. 도요토미의 통일 전 일본은 100년 이상 내전이 지속된 전국시대(戰國時代)를 겪었다. 외세와 싸움은 거의 없었고 다이묘들 간의 투쟁이 계속됐다. 그 탓에 바다로 둘러싸인 섬나라임에도 일본군은 해전보다 육전(陸戰)에 적합하게 발전했다.

    ‘선박 보유한 육군’ 일본 수군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중앙집권적 지휘체계를 갖추지 못했다. 일본 수군의 모태는 해적이라 할 수 있는 왜구였다. 14세기부터 동아시아에서 기승을 부린 왜구는 전국시대를 거쳐 각지 다이묘 휘하에 편입됐다. 모시는 영주가 다르니 지휘 계통도 일원화되기 어려웠다. 일본 수군은 도요토미 직속의 중앙군과 각 다이묘 휘하의 지방군으로 구별됐다. 전 수군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이 누구인지도 불분명했다. 

    도요토미는 조선 침략을 준비하며 다이묘들에게 해상전에 대한 몇 가지 지침을 내린다. 군선을 추가 제작하는 등 해상전에 대비하되, 개전 직후 수군이 조선 각 포구에 상륙해 성(城)을 쌓으라는 것이었다. 조선 군선의 격파나 해로 장악은 주 임무가 아니었다. 해안에 거점을 구축해 조선 내륙을 장악하라는 그의 지시는 일본 수군에게 지상전을 맡긴 셈이었다. 말하자면 일본 수군은 이름만 수군이었을 뿐, 실제로는 선박을 보유한 육군이라고 볼 수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근대 수군의 주된 임무는 이처럼 지상병력을 적선이나 적지로 투사하는 것이었다. 스페인을 주축으로 한 기독교 연합군이 오스만제국과 맞붙은 레판토해전(1571)이 사실상 육전처럼 치러진 것이 대표적이다. 이 시대에 수군의 특수한 임무나 기능이 구체적으로 확정되지 않았던 것이다.

    지휘계통 일사불란한 조선 수군

    반면 당시 조선 수군은 독자적 임무를 갖고 해상전 자체에 특화해 발전했다. 국가 차원에서 왜구를 막기 위한 첫 보루로 강한 수군을 건설했기 때문이다. 일본과 달리 수군의 지휘계통이 일사불란한 것도 특징이었다. 경상도와 전라도에 각 좌·우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정3품 무관직)를 두고, 그 아래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종3품 무관직)와 수군만호(萬戶·종4품 무관직)로 이어지는 일원적 지휘체계를 갖췄다. 

    임진왜란 발발 14개월 전 이순신은 전라좌수영 수군절도사로 부임했다. ‘바다로 오는 적을 막는 데는 수군만 한 것이 없다’는 신념으로 전라좌수영의 전력을 강화했다. 주력 전투함인 판옥선을 보수하거나 추가로 건조하고 돌격 및 근접 포격을 할 수 있는 거북선도 제작했다. 이순신이 직접 거북선을 설명한 기록도 있다. 이순신은 임진년 6월 선조에게 써 올린 장계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신이 일찍부터 섬 오랑캐의 침략을 염려해 특별히 귀선(龜船)을 만들었습니다. 앞에 용두를 설치해 아가리로 대포를 쏘게 했습니다. 등에는 쇠꼬챙이를 꽂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안을 엿볼 수 없게 했습니다. 비록 적선 수백 척이 있어도 그 속으로 돌입해 대포를 쏠 수 있게 했습니다.” 

    다만 우리 역사에서 거북선에 대한 최초 기록은 따로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태종 13년(1413), 임금이 임진강에서 거북선과 가상 왜선이 서로 싸우는 것을 관전했다는 대목이 있다. 2년 후 태종 15년(1415) 좌대언(정3품 문관직) 탁신이 “거북선은 많은 적과 충돌해도 적이 능히 해하지 못하니 승리의 좋은 계책”이라며 거북선 제작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순신이 처음으로 거북선을 구상해 만들지는 않은 것이다. 

    거북선의 설계나 건조 과정을 자세히 기록한 문헌은 현전하지 않는다. 훗날 그림으로 전해지는 형태도 저마다 다르다. 이순신은 전쟁 중에도 일기를 남겼으나 아쉽게도 거북선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나 그림은 없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거북선을 누가 처음 설계했는지, 이순신이 여기에 어느 정도 관여했는지를 두고 사람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이순신의 전술을 거북선으로 현실화한 나대용

    조선 후기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거북선해진도’. 거북선(그림 속 둥근 모양의 배) 등 군선의 포진 상황이 묘사됐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조선 후기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거북선해진도’. 거북선(그림 속 둥근 모양의 배) 등 군선의 포진 상황이 묘사됐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예나 지금이나 군함을 설계·건조하려면 높은 수준의 과학 지식이 필요하다. 이순신이 직접 거북선의 설계도를 그렸다기보다는 구상한 전술을 구현할 수 있게끔 전문가에게 설계를 요구하지 않았을까 싶다. 

    대한민국의 무기체계 개발 방식과 비교하면 이해가 쉽다. 오늘날 해군은 군함의 제원과 성능에 대한 요구 사항을 정리해 운용요구서(ORD·Operational Requirement Document)를 작성한다. 이를 토대로 합참은 다시 작전요구성능(ROC·Requirement Of Capability)을 수립해 방위사업청에 전달한다. 군의 요구에 맞는 군함을 실제 제작하는 것은 방사청의 몫이다. 

    거북선 제작에서 이순신의 역할은 말하자면 오늘날 해군, 합참과 비슷했을 것이다. 이순신의 수하 군관이던 나대용이라는 인물이 거북선의 실질적 개발자였다는 분석도 있다. 나대용은 1583년 훈련원 별시무과에 합격해 약 10년 간 거북선 설계·제작을 연구했다고 한다. 그가 임진왜란 1년 전, 이순신을 찾아가 거북선 제작에 대해 협의해 실제 건조한 기술자였다는 것이다. 군의 요구 사항을 받아들여 군함을 제작하는 방사청 실무자였던 셈이다. 

    전술과 기술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다. 특정 전술을 구현하기 위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무기체계를 발전시키기도 한다. 반대로 새 기술이 탄생한 덕분에 전술이 크게 바뀌기도 한다. 거북선 개발사를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순신의 철저한 준비 덕에 조선 수군은 임진왜란 발발 직전 2척의 거북선을 건조해 해상에서 화포를 쏘는 실전 연습까지 완료할 수 있었다. 

    1592년 4월 13일 부산포를 점령한 일본의 선봉대는 빠르게 북진했다. 침략 20일 만인 5월 3일 수도 한성을 무혈점령했다. 선조는 4월 30일 한성을 포기하고 평양성으로 몸을 피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순신의 활약은 개전 직후부터 빛을 발했다. 조선 수군은 임진왜란 첫 출전(1592년 5월 4~9일)부터 옥포(경남 거제시 앞바다)에서 일본 수군을 격파했다. 두 번째 출전(1592년 5월 29일~6월 10일) 때 거북선이 처음 실전 투입돼 사천·당포 일대에서 대승을 거뒀다. 두 차례 출전에서 조선 수군이 격침한 일본 군선은 114척에 달했다. 

    일본군은 남해를 통해 지상군에 물자를 보급해야 했다. 이순신과의 일전을 피할 수 없었다. 도요토미는 일본 수군의 연패 소식을 듣고 경악했다. 남해의 제해권을 확보하지 못하면 보급로가 끊겨 침략전쟁이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그동안 지상 전투에 임하던 수군 지휘관 3명(와키자카 야스하루·구키 요시다카·가토 요시아키)에게 충분한 병력과 함선을 주어 조선 수군에 대한 공격을 지시했다. 한산도 대첩의 막이 오르고 있었다. 

    조선 수군도 일본 측의 움직임에 반응했다. 이순신은 1592년 7월 6일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49척의 군선을 거느리고 세 번째 출전에 나섰다.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이 이끄는 군선 7척과 합세했다. 이튿날 저녁 당포(경남 통영시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조선 수군에 중요한 첩보가 날아든다. 인근 섬에서 말을 기르는 목자(牧子) 김천손이라는 인물이 일본 군선 70여 척이 견내량(경남 통영시와 거제시를 잇는 거제대교 아래 해협)에 정박했다고 알린 것이다. 레이더가 없던 시절에 적군의 위치를 먼저 파악한 것만으로도 전투의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이순신은 그날 밤 일본 함선들을 견내량 수로 밖의 한산도로 유인해 격파할 계획을 짠다.

    임진왜란 판세 바꾼 한산도 대첩

    조선 수군은 판옥선 5~6척으로 견내량의 적선을 급습했다가 일부러 패퇴하는 척했다. 예상대로 적선이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자 거북선이 등장했다. 거북선은 적선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화포를 쐈다. 일본 수군의 전열이 무너지자 모든 군선이 학익진을 펴 일제히 진격했다. 대패한 일본 수군은 군선 59척과 병력 9000여 명을 잃었다. 이때 일본의 수군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화살을 맞고 무인도인 한산도에 몸을 숨겼다. 열흘가량 해초만 뜯어 먹으며 연명하다 간신히 도주할 수 있었다. 와키자카의 후손들은 지금도 매년 한산도 해전일이 되면 밥 대신 미역이나 다시마만 먹으며 조상을 기린다고 한다. 

    한산도 해전은 그 이전 1·2차 출전과 차원이 다른 싸움이었다. 도요토미가 조선 수군을 제압하려고 꾸린 일본 정예 수군과 맞붙은 전면전이었다. 한산도 해전에서 패한 후 도요토미는 일본 수군에 이순신 함대와 전투를 피하라고 지시했다. 해상 보급로가 끊겼음에도 조선 수군을 의식해 해전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선 수군이 연전연승한 배경에는 조·일 양국 무기체계 차이가 있었다. 당시 일본 수군의 기본 전법은 상대방 배에 올라타 냉병기로 선원을 제압하는 ‘등선육박(登船肉薄)’ 전술이었다. 배와 재화를 빼앗는 것이 목적인 왜구식 싸움법이다. 반면 조선 수군의 주력 무기는 오늘날의 함포 격인 총통(銃筒)이었다. 적이 접근해도 충각(衝角) 전술로 일본 군선을 파괴해 선상 백병전을 피할 수 있었다. 조선 수군의 주력선 판옥선이 일본 수군 주력선 세키부네(關船)보다 크고 견고했기 때문이다. 유럽 해전에 비유하자면, 그리스 삼단노선(일본 수군)이 범선시대 함포를 장착한 범선(조선 수군)에 덤빈 격이다. 

    거북선의 활약도 있었다. 이순신이 실전에서 거북선에 타지는 않았다. 애초에 거북선은 지휘관이 탑승해 함대를 지휘할 수 있는 배가 아니다. 대신 승선 지휘관인 ‘돌격장(突擊將)’이 이순신의 명에 따라 거북선을 적진 깊숙한 곳으로 이끌었다. 거북선은 판옥선과 달리 갑판 위로 지붕을 씌워 선원 전체를 보호하면서 쉽게 적선에 접근했다. 갑판에 올라타는 일본군의 전통적인 전술을 원천 봉쇄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 해군에 이순신 제독과 거북선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국민들은 ‘이순신 장군’이라는 말에 익숙하지만 대한민국 해군의 공식 호칭은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다. 육·해군의 장성급 장교를 가리키는 호칭이 장군(General)과 제독(Admiral)으로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무과 급제자는 육군·수군 구분 없이 보직을 받았다. 공교롭게도 이순신은 만호 이상의 모든 직책을 수군에서 지냈다. 

    1946년 우리 손으로 만든 최초의 경비정 이름이 ‘충무공정(PG-313, 이후 충무공함으로 개칭)’이다. 6·25전쟁 정전협정 후, 열악한 해군 전력 증강을 위해 도입한 미국 해군의 중고 구축함도 이순신의 시호를 붙여 ‘충무함(DD-911)’이라고 명명했다. 2003년 취역한 4400t급 구축함(DDH-975)의 명칭도 ‘충무공이순신함’이다. 거북선을 설계·건조한 나대용의 이름을 딴 잠수함 ‘나대용함’과 국내 최초의 훈련함 ‘한산도함’도 있다.

    주한미군 부대 마크에도 선명한 거북선

    거북선은 해군의 부대 마크나 표지에 자주 등장한다. 해군 1·2·3함대 마크의 핵심 도안이 거북선이다. 장교가 착용하는 정모의 모표(帽標), 함정(艦艇)에서 근무하는 장교·부사관이 패용하는 ‘수상함 배지’ 등 해군복제에도 거북선이 등장한다. 심지어 한국에 주둔하는 미국 육군 837 수송대대의 공식 부대 마크도 거북선 문양이다. 거북선 사랑은 해군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지금까지 거북선은 우리나라 돈 13종(지폐 7종, 주화 6종)에 도안으로 사용돼 ‘화폐 최다 출연 모델’이다. 

    왜구의 침략을 겪으면서 조선 수군은 오랫동안 군선 제작 기술을 발전시켰다. 여기에 이순신이라는 명장의 대비와 지휘가 맞물려 조선 수군은 왜란의 위기를 돌파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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