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수명은 태어날 때 이미 정해진 것일까.
건강한 몸으로 오래 살고픈 것은 우리 모두의 관심사이고 염원이다. 그러나 누구도 자신의 운명을 장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건강하게 하루하루를 산다면 병마의 위협을 모르는 축복받은 삶이다. 허나 천성적인 결함이든 본인의 관리 잘못이든, 중요 신체기관 질환으로 기능이 불완전하여 생명을 위협받게 되면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에게는 물론 가족에게도 두려움의 연속인 나날이 이어진다.
의사는 환자가 생명과 건강을 전적으로 내맡긴 상대이니만큼 절대적인 우위에 설 수밖에 없다. 아무리 환자의 건강회복에 온갖 정성을 쏟는 의사라고 해도 환자나 그 가족의 눈에는 불만스럽게 보이게 마련이다.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환자에게, 의사는 때로는 권위적이고 편의적으로 보일 수도 있고 기대만큼 회복에 이르지 못할 때는 가슴 아프도록 섭섭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의사가 환자의 아픈 곳을 치료해 생명을 구하고 간호사가 상처에 붕대를 감아 건강한 삶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헌신적인 노력은 이 세상의 다른 어떤 관계보다도 훨씬 더 숭고하고 위대하다. 의사와 환자 사이는 이기적인 관계라기보다 오로지 고통을 덜어주고 생명을 구해야 한다는 인간 본연의 건강한 정신과 따스한 인간애가 있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내 아내는 페이스메이커(pacemaker·심박조절기)를 다섯 번이나 교환했고, 간과 폐는 3분의 1을 절단했으며, 심장 판막도 수리했다. 담낭은 아예 제거해버렸다. 신체 주요 기관의 심각한 질환으로 입원과 수술을 열두 번이나 반복해야 하는 길고 긴 질병과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내가 아내와 차를 몰고 골프를 즐기며 음식을 만들어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은 의사들의 위대함과 헌신적인 노력 덕분이다.
1948년생인 아내는 불과 다섯 살부터 병마의 고통에 시달렸다. 과식을 하지 않는데도 가끔 복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차가워진 몸이 식은땀으로 젖으며 자지러질 때마다 부모는 차마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이불을 덮어 애써 외면하곤 했다고 한다. 의원이 달려와 청진기를 갖다 대고 급체라는 진단과 함께 주사를 처방하는 일이 반복됐다. 그러면 아내는 신기하게도 자지러지던 울음을 멈추고 이내 깊은 잠에 곯아 떨어졌다. 움직임도 없이 너무 오래 자는 아이에게 혹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 아닐까 가슴이 철렁한 부모는 가끔 이불을 걷어 숨소리를 확인해봐야 했다.
“그 의원 용하기도 하더라. 금방 숨 넘어가는 애가 주사 한 방에 울음을 뚝 그치고 잠을 새록새록 자는 거야. 어찌나 깊게 자는지 혹시나 하고 겁이 날 정도였다니까. 가끔 깨끗한 옷을 꺼내놓고 남몰래 눈물도 많이 흘렸지.”
결혼할 무렵 장모님이 가끔 내게 들려주신 말씀이다.
결혼 후에도 고열과 복통은 내내 아내를 괴롭혔다. 금방 숨 넘어가는 복통으로 자지러지기도 하고, 때로는 소화불량 수준의 고통을 힘겹게 견뎌내기도 했다. 그때마다 의원이 달려와 응급조치를 취했다. 그 시절엔 누구나 그랬지만, 증상을 정확히 검사하고 진찰해 내린 처방이라기보다는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주사약을 고열엔 이것, 복통엔 저것 하는 식으로 내린 조치였다.
한 가지 신기한 점은, 곁에서 보는 사람조차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복통에 시달리던 아내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씻은 듯이 나아 방긋방긋 웃는다는 것이다. 마치 꾀병을 앓기라도 한 것처럼.
두 번째 출산
“선생님, 이 산모 맥박이 이상해요!”
둘째 아기 출산을 위해 분만대에 누운 아내를 최종점검하던 간호사가 놀라 소리쳤다. 정상인의 맥박수가 72인데 아내의 맥박은 38을 밑돌았다. 의사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재어봤지만 불뚝거리는 맥박은 변화가 없었다.
“이 상태로는 유도분만이 불가능합니다. 분만 중 심장이 어느 순간 멈춰버리면 산모 생명이 위험해요. 멎은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심실재세동기 설비가 있는 서울대병원이나 신촌 세브란스병원으로 빨리 옮기세요.”
분만의 기대에 부풀었던 아내는 당황한 의사와 간호사의 재촉에 놀라 두려움에 휩싸인 채 신촌 세브란스병원으로 서둘러 옮겨졌다.
초산 때는 진통 한 시간 만에 건강한 아들을 순산해서 가족 친지로부터 칭찬과 부러움을 샀던 아내였다. 그런데 두 번째 출산을 앞두고 맥박이 40 이하로 떨어졌다. 건강은 물론 생명까지 위협하는 서맥을 발견한 것이다.
이미 연락을 받은 세브란스병원에서는 산모의 위험에 대비해 심실재세동기를 준비하는 한편 의사 여덟 명이 대기했다. 긴장된 주시가 이어졌지만, 아내는 별다른 이상 없이 건강한 딸을 순산한다. 퇴원하는 아내에게 담당의사는 “산후조리가 끝나는 대로 이응구 박사에게 심장 정밀진단을 받으라”고 지시했다.
아내는 딸을 낳고부터 소화불량을 호소하는 일이 잦아졌고 복통의 강도도 심해졌다. 별로 먹은 것도 없는데 저녁식사 후면 배가 아프다며 데굴데굴 굴렀다.
“어이구 아파 죽겠다….”
통증을 표현하는 셀 수 없이 많은 말 중에서 가장 절실한 어조로 아파 죽겠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통증으로 얼굴이 일그러지고 배를 움켜쥔 채 어쩔 줄 모른다. 복통이란 무엇인가. 복부의 이상상태에서 오는 일종의 경고다. 살려면 이 경고를 무시하지 않고 치료해서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 이 시간이면 아파트 근처의 병원은 문을 닫아 종합병원 응급실이나 약국을 찾아야 한다. 급한 마음에 우선 상비한 소화제를 먹지만 통증은 걷잡을 수가 없다.
아내의 비방이 시작된다. 왼손 장지를 훑어 실로 묶고 피가 통하지 못해 검붉어지면 바늘로 손톱 바로 위를 찔러 피를 터뜨리는 것이다. 의료 혜택이나 별다른 소화제가 없던 시절 배탈이 나면 할머니가 하시던 방법이다. 고통이 수반되는 저런 원시적인 방법이 무슨 효험이 있을까. 내게는 보는 것만으로도 오싹했지만, 별수 없이 바늘을 촛불에 빨갛게 달구어 소독해준다. 그렇게 흘러나오는 피의 양과 색깔 농도에 따라 배탈의 심각성을 가늠했다. 이런 소동을 한바탕 치르고 나면 배를 움켜쥐고 나뒹굴던 아내는 희한하게 고비를 넘겼다.
“저녁 먹은 것이 단단히 체했나 봐. 별로 먹은 것도 없는데.”
언제부턴가 아내는 음식 먹기에 겁을 먹고 조심스러워했다.
새파란 나이에 찾아온 서맥
인간은 심장이 멎으면 죽는다. 생명의 시작과 죽음의 판정이 심장 박동에 완벽하게 연결돼 있다. 정상적인 심장이라면 1분에 90~120번을 뛰면서 5.6ℓ의 피를 1분에 세 번씩 전신에 순환시켜야 한다. 그러나 성인의 평균치 맥박이 72번보다 느리면 서맥으로 분류된다. 피는 순환하면서 산소와 영양을 세포에 공급하고 동시에 몸속의 노폐물과 탄산가스를 제거한다. 서맥은 혈액순환을 원활하지 못하게 해 정상생활에 지장을 줄 뿐 아니라 각종 혈관질환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아내는 심장이 1분에 겨우 38번 뛰는 서맥 환자였다. 이응구 박사는 서맥 환자가 쉽게 직면하는 피곤이나 숨가쁨, 현기증, 졸도 같은 증상 외에도, 아내처럼 심한 환자는 수면 중 심장이 소리 없이 멈춰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의사의 지시로 딸에게는 처음부터 모유를 먹이지 않았다. 그러나 눈앞에서 어미를 필요로 하는 자식이 보채고 있으니 서맥의 후유증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늘 숨이 차고 피곤했지만 눕거나 쉴 형편이 아니었다. 출산 후유증과 육아의 분주함에 휩싸인 채 ‘이 정도 피로는 누구나 겪는다’며 애써 위로할 뿐이었다. 아내는 겨우 31세, 두 아이의 엄마였다.
딸이 세상에 나온 지 7년 후, 38세의 아내는 하루하루 더욱 견디기 힘들어했다. 먹은 것도 없이 복통으로 자지러지는 일이 빈번했다. 소화제나 바늘로 손톱 밑을 따는 방법은 더 이상 효험이 없었다. 시도 때도 없는 복통으로 근처 의원과 세브란스 병원을 전전했지만, 근본적인 치료는 이뤄지지 않았다. 혈압은 정상이지만 맥박은 여전히 느릿느릿 불뚝불뚝 뛰었다. 이응구 박사는 페이스메이커의 필요성을 절실히 강조했다. 심장에 칼을 대는 일은 두려울 수밖에 없었지만, 아내와 나는 마침내 수술하기로 결정했다. 수술만 마치면 태어난 후부터 줄곧 괴롭혀온 원인 모를 복통은 씻은 듯 사라질 것이라는 확고한 희망에 부풀어서.
페이스메이커는 맥박이 분당 60 이하의 서맥 환자에게 시술되는 심박 조절장치다. 전기 회로판과 배터리를 케이스에 밀봉해 살갗 속에 장치한다. 선이 두 개인 경우 우심실과 우심방에 각각 연결해 심방과 심실의 전기적 작용을 감지하고 조절 여부를 결정한다. 동시에 심방과 심실의 잇따른 수축을 확인한다. 상부 하부 심방의 박동을 도와 심장이 자연상태의 박동을 흉내내게 만드는 것이다.
전기기계 엔지니어인 나는 페이스메이커의 메커니즘을 보면서 과학과 의학의 절묘한 접목에 감탄한다. 오늘날 의학의 발전은 과학 발전과 더불어 이루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첨단 검사기기의 발달로 진단의 정밀도와 정확도가 한층 더 높아진 것도 마찬가지다. 인위적인 전기신호로 심장박동을 일으키고, 자체 박동과 비교하여 서맥이나 부정맥의 경우 정상상태로 보완해주는 페이스메이커의 메커니즘이야말로 과학과 의학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하나의 현상인 것이다.
의식을 회복한 지 이틀 후 일반 병실로 옮겼다. 수술 후 의료진이 가장 먼저 시킨 것이 심호흡이었지만, 아내는 시늉조차 힘들어했다. 주치의는 호흡운동의 중요성을 설명하며 계속 강권했고 아내도 죽을힘을 다하는 모양이었으나, 목표치에는 늘 멀기만 했다. 온몸에 호스를 주렁주렁 매달고 물리치료사의 도움을 받으며 복도를 10여m 왕복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내 눈시울이 저절로 붉어졌다. 언제쯤이면 혼자 걸을 수 있을까. 침대에 누워만 있지 말고 안락의자에 앉아 발가락이라도 까딱까딱해야 회복이 빠르다는데, 그조차 아내의 상태로는 쉽지 않았다.
아내는 밤 취침시간이 아니면 침대에 있으려고 하지 않았다. 잠시 눈을 감았다 떴더니 그동안 6일이 지나갔다는 사실이 두려운 모양이었다. 다시 눈을 감았다간 두 번 다시 못 뜰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인 것이다. 몽롱한 정신과 주사액의 괴로움 속에서도 한사코 안락의자에 앉아 있으려 했다. 이 때문에 아내가 침대에서 떨어졌다는 소문이 병동에 퍼져 의료진이 일부러 방문해 확인하는 일까지 있었다. 아내의 몸에는 남들보다 두 개의 호스가 더 매달렸다. 외부로 나와 선으로 연결된 페이스메이커가 심장 박동을 돕고, 방코마이신이라는 항생제가 감염된 피의 곰팡이를 멸균하고 있다. 만약 침대에서 떨어진다면 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
나는 아내가 입원해 있는 내내 매운 바쁜 일과를 보내야 했다. 새벽 6시에 열어 저녁 8시에 닫는 점포는 정상적으로 운영돼야 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문을 연 후 8시에 직원이 출근하면 전철을 두 번 갈아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도착해서 의자에 앉아 있는 아내를 마사지하기 시작한다. 발가락부터 허벅지까지 손아귀에 넣고 한 번 한 번 쥐어짰다 놓을 때면 엄청난 희열이 몰려온다. 아내가 살았구나. 수술 후에는 특히 몸놀림이 많아야 회복이 빠르다지만 아내가 계속 힘겨워하니, 이렇게 마사지로라도 대신한다면 그래도 한 단계 더 빨리 회복되겠지.
마사지를 하고 있다 보면 아내는 어느 틈에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진다. 중단하면 그 잠이 깰까 봐 마사지를 계속한다. 그 사이에도 간호사가 상태를 측정하거나 주사액을 교환하러 수시로 들락거린다.
“다음 마사지 차례는 접니다.”
내 직업이 마사지사인 줄 알았다는 간호사의 농담이다. 이런 마사지를 두 시간 이상 계속해도 지치거나 힘든 줄 몰랐다. 그저 평화롭게 잠든 모습의 아내가 깨어나면 훨씬 좋은 상태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뿐이었다.
호주의 병원문화
점포 문을 닫고 난 9시 이후에도 마사지가 또 한 번 계속된다. 그래도 피곤을 느끼지 못했다. 피동적인 운동일망정 아내의 몸에 고루고루 자극을 주면 혈액순환이나 생체기능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 그저 즐거울 따름이다.
나중의 일이지만, 퇴원하고 반년이 지난 어느 날 골프를 마치고 돌아온 아내가 피곤한 기색으로 소파에 앉아 발을 주무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마침 병실에서의 기억이 떠올라 그때처럼 발과 종아리를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지 10분이 채 지나지 않아 발이 저리고 손마디에선 힘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속으로 ‘이게 아닌데’를 연발하면서도 억지로 계속했지만, 15분을 못 넘기고 아내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인다.
“그렇게 성의 없이 하려면 차라리 그만둬.”
바로 앞 병실에는 좀 특이한 환자가 입원했다. 배터리 소진으로 페이스메이커의 수명이 다해 양로원에서 갑자기 쓰러진 할머니다. 10년 전에 수술을 받은 할머니는 그동안 한번도 진찰이나 검사를 받은 일이 없다고 했다. 수술 후에 바로 양로원으로 갔다가 10년 후 쓰러져 처음 병원으로 이송되어 왔다는 것이다. 가족도 없어 양로원에서 마련해 준 택시에 실려왔다. 공립병원은 순서가 밀려 개인병원으로 응급 이송된 것이다.
가족은 물론 돈도 한 푼 없어 양로원에 의탁된 노인일지라도 응급상태에 빠지면 1만달러가 넘는 진료비를 걱정하지 않고 개인병원에 신속히 입원할 수 있는 호주의 의료제도도 물론 대단하다. 그러나 그것뿐이 아니다. 지금도 호주의 병원문화를 생각하면 놀랍기 이를 데 없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게 과연 선진적인 제도 때문인지 아니면 교육 때문인지 곰곰이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경험이 이어졌다.
할머니는 아내 병실의 복도 바로 맞은편 병실에 입원했다. 병실이 낯설었는지 가방을 도로 싸더니 양로원으로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피운다. 처음에는 간호사의 눈을 피해 택시를 타려고 하다가 수위의 신고로 병실로 인도돼 돌아왔다. 치매 증상이 심한 할머니는 침대에 누워 내일 수술을 대비하기는커녕,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문 사이로 몸을 숨겨 머리만 내민 채 밖의 동정을 살폈다. 그러다가 틈이 생기면 살그머니 복도를 빠져나왔다. 물론 어김없이 발각된다.
눈길을 끄는 것은 그때마다 이어진 간호사의 대응이다. 여러 번 되풀이되는 숨바꼭질에 짜증을 내는 게 아니라 할머니의 손을 잡거나 어깨동무를 하고 휴게실까지 함께 가서는 TV를 켜주고 잠시 말상대를 해주는 것이다. 가만히 보고 있노라니 말동무가 생기는 것이 즐거운 할머니가 간호사가 교대될 때마다 일부러 들키는 것 같기도 했다.
수술 후에는 한 가지 고집이 늘었다. 환자복이 자기 것이라 우기며 가져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간호사는 맞다며 종이가방에 싸준다. 이때마다 병실은 웃음바다가 된다. 남들은 가족 친지가 들락거리는데 자기는 늘 혼자 있어야 한다는 외로움 때문에 이런 식으로 간호사의 관심을 끌어보려는 듯했다.
결국 할머니는 환자복을 잊고 가져가지 못했다. 그녀는 자기가 왜 택시에 실려왔는지 모른다. 무슨 수술을 했는지는 더더욱 모른다. 10년 후 배터리가 소진되어 졸도하면 또다시 택시에 실려올 것이다. 그때까지 페이스메이커가 정상작동을 해야 할 텐데.
의사를 포함해 이곳 의료 종사자들의 몸에 밴 친절은 놀라울 정도다. 의사는 대기실에 진료기록을 가지러 나와 환자를 안내해서 먼저 앉히고, 진료가 끝나면 기록을 비서에게 건네주며 환자를 배웅한다. 이런 친절이 익숙지 않던 이민 초기에는 뻔히 무료인 줄 알면서도 의료카드만 내밀기에는 뒤통수가 가려워 지갑을 열고 치료비를 묻기도 했다.
예전에 들은 얘기다. 어느 교포 여인이 이혼을 하고 나서 임신임을 알았다. 낙태를 하러 의사를 찾았는데 그 의사가 엄청나게 친절했던 모양이다. 덕분에 그만 생각을 바꾸어 딸을 낳아 지금까지 잘 키우고 있다. 본인 말로는 태어나서 그렇게 인간 대접을 받아보기는 처음이었단다.
의료 종사자들의 몸에 밴 친절은 단순히 메스나 약물로 환부를 치료하는 데 그치지 않는 태도에서 나온다. 두려움 때문에 상처 받은 환자의 마음을 먼저 안심시키는 치유가 선행되기에 의사와 환자 사이에 믿음과 확신이라는 의학의 정도(正道)가 흐르는 것이다
인간사는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의사 지시 한번 어기지 않고 진찰과 검사를 충실히 받은 아내는 기계 수명 5년은커녕 겨우 절반을 넘기고 곰팡이 감염으로 페이스메이커를 다시 바꿔야 했다. 심각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 말이다. 앞가슴 속에 거미줄처럼 배치된 전선도 감염의 위험 때문에 모두 제거했다. 심장 판막도 수리했고 왼쪽 폐는 3분의 1을 절단했다. 그러나 옆방의 양로원 할머니는 같은 조건의 수술을 받은 후 주기적인 검진은커녕 단 한 번도 병원을 찾지 않았다. 그런데도 페이스메이커 수명의 두 배가 넘는 10년 동안 아무런 문제 없이 사용하다 결국 배터리 소진으로 졸도해 입원한 것이다.
남몰래 흐르는 문물
나는 이날 아내로부터 뜻밖의 호된 추궁을 받는다. 내가 방에 있는 불상을 공양하는 정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자기가 이 신세가 됐다는 것이다.
사람이 나이 쉰을 넘기면 갑자기 인생에 회의를 느끼는 모양이다. 남모를 의지를 벼려가며 삶을 살아온 이들이, 어느 날 겨우 처자식 먹여 살리느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허덕이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 초라함에 부끄러움이 고개를 드는 걸 느끼는 것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난날의 선택을 수없이 복기해가며 자책과 후회의 늪에 빠져 건강을 해쳤다. 그러다가 우연히 ‘금강경’을 접하고는 지혜의 한 자락을 보았다고 느꼈다.
독송을 결심했지만, 보고 읽기조차 힘든 한자어 5294자를 무슨 재주로 다 외울 것인가. 그래도 배움이 없으셨던 할머니가 가끔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을 음송하시던 것을 떠올려 기어이 해내리라 다짐한다. 탱화와 불상으로 간단하게 단을 만들고 정신을 집중해가며 틈만 나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외웠다.
코드가 맞았는지 1년 만에 술술 암송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때부터는 관심도 시들해져 공양은커녕 단에 먼지만 쌓였다. 아내는 나의 부족한 정성으로 부처님이 화가 나서 자기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화를 내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태어나 술 담배 한 번 입에 대지 않고 의사 지시 한 번 어기지 않았는데 이런 고통을 당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는 왜 남들보다 재수가 없느냐는 것이다. 수술과 회복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으면 저럴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나는 이날 밤 병원문을 나와 역까지 가는 동안, 그로부터 2년 전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자식들을 객지로 내보낸 후 부모님은 전북 익산에 살고 계셨다. 12월 셋째 토요일 오후,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난다며 두통을 호소하신 어머니는 기력을 잃고 주저앉으셨다. 순식간에 당한 일이라 어찌할 바를 모르던 아버지는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을 향해 걸었다. 100여m를 못 가서 다시 주저앉은 어머니를 다행히도 마침 지나가는 관광버스가 태워 근처 병원에 내려주었다.
병상이 30개나 되는 병원의 토요일 오후, 인턴은 기진맥진한 노인 환자를 그 무렵 유행하던 독감으로 진단하고는 링거와 영양제를 놔주고 입원시켰다. 아버지는 병상 곁에서 어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밤을 꼬박 새웠다. 일요일 아침, 자식들에게 연락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가 병상을 비운 시간은 겨우 한 시간. 그 사이 어머니는 입에서 침을 흘리며 뇌사상태에 빠졌다.
아버지의 경보로 그때서야 알아차린 인턴은 원장을 호출했고, 어머니는 대학병원으로 옮겨졌다. 대학병원에 도착한 후 어머니는 심장밸브가 닫히지 않아 생긴 뇌사라는 판정을 받았다. 그러고는 하루를 더 주사와 구명줄에 의지해 생명을 연장하신 후 세상을 뜨셨다. 향년 77세였다.
심장병 환자는 그 위기만 넘기면 수년은 더 살 수도 있다고 한다. 초기에 심전도 검사만 했더라도 어머니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다. 내가 분함과 아쉬움에 떠는 것은, 병원이 흔히 말하는 ‘떼법’을 겁낼 줄 안다면 환자의 심각성도 미리 살펴 좀더 의료시설이 좋은 병원으로 보냈어야 했다는 것이다. 자기 병원에 입원해 있는 환자가 죽어가는 것도 모르는 그런 병원에서 환자를 붙잡아두는 뱃심에 분함이 솟구치는 것이다. 호주에 모셔 진찰이라도 한번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으로 눈물은 멈출 줄 몰랐다. 그나마 밤의 어둠이 숨겨주었기에 다행이었다.
아내는 입원 후부터 줄곧 곰팡이 감염 때문에 방코마이신을 쏟아 붓듯 맞았다. 다행히 항생제가 지독한 놈이 아니라서 얼마간 안심이었지만, 매일 12개의 혈액 샘플을 채취하는 것을 보아 쉽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다 주사 12일째 되던 날 밤 갑자기 두드러기가 나고 반점이 생기더니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변했다. 방역 전문의 코시유 박사에게 연락했더니 주사를 중단하고 크림을 처방했다.
아내는 밤새 두드러기가 돋아 가려움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저렇게 마이신을 중단하면 곰팡이란 놈이 내성이 생겨 치료가 쉽지 않을 텐데 하는 염려로 또 잠을 설쳤다. 방코마이신이 가장 좋다는데, 그럼 이제 어떤 마이신을 주사할 것인가.
방코마이신 알레르기 소동
밤새 심하게 고생한 아내는, 코시유 박사가 누구보다도 그 가려움의 고통을 잘 알고 있으니 아침에 출근하면서 먼저 방문할 것으로 철석같이 믿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병실 책임자나 간호사에게 아무리 졸라도 의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답답한 아내는 내게 전화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의사가 바쁘고 또 당신이 심각한 상태가 아니라서 나타나지 않은 것이라고 안심시키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런 말이 통할 리 없다.
아내에게서 다시 전화가 온 것은 알레르기가 나타난 지 24시간이 지난 오후 7시였다. 의사를 보자마자 소리쳤다는 말이 “Are you crazy(너 미쳤니)?”였단다. 가려움으로 신음하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말이겠지만, 전화기 저쪽의 병실 장면이 눈에 선했다. 처음 본 환자에게 간호사들 지켜보는 가운데 무례를 당한 의사는 불쾌한 마음에 역시 “You are crazy(당신이 미쳤군요)”라고 대꾸했단다. 아무리 이해심이 많은 의사라도 기분이 많이 상했을 게 뻔했다. 이 어려운 상황에서 어쩌자고 이런 실수를 저질렀단 말인가.
지독한 곰팡이 감염을 말끔히 제거해야 살 텐데, 살려달라고 애원해도 뭣한데, 이제 어쩌나. 나 같으면 이처럼 무례한 환자는 치료하지 않고 돌아설 것만 같았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견딜 수 없는 가려움 때문이라고 변명해도 소용없다. 의사를 찾아가 사과하는 것만이 최선이다. 정신을 차려 아내에게 의사의 표정과 반응이 어땠냐고 물었다.
“화를 낸 것 같지는 않고…피부를 이곳저곳 살피고 악수까지 했는데.”
내 짧은 생각과 달리 의사는 환자의 고통을 더 잘 이해했던 것이다. 나중 일이지만 방역 전문의 코시유 박사는 고맙게도 또 다른 불행을 불러올 수 있었던 결정적인 혈전을 발견하고 재입원시키는 생명의 은인이 된다.
입원 20일 후, 페이스메이커 수술에 들어갔다. 세 번의 수술 중 가장 위험도 적고 간단하다는 수술이다.
아내를 수술실까지 배웅하고 나서는 신문을 들고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어찌된 영문인지 예정된 두 시간을 넘기고 한 시간이 더 지나도 나오지 않는다. 초조해졌다. 가슴이 철렁하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안절부절못하고 호흡마저 가빠지기 시작했다.
보호자 대기실에 앉아
초조함을 누르려 신문을 다시 펼쳤다. 호주 신문에는 아들레이드 시장이 불어나는 체중을 감당하지 못해 위 일부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은 후 피가 멎지 않아 사경을 헤맨다는 기사가 실렸다. 한국 신문에는 53세의 주부가 위 내시경 검사를 받은 후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사망했다는 기사가 커다랗게 실려 있다. 벌써 열 번도 더 읽은 기사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방정맞은 생각이라 한없이 꾸짖으면서도 불길한 마음을 한순간도 떨쳐내지 못한다. 두 가지 불행이 한꺼번에 아내에게 떨어져 금방 누가 부르러 뛰어올 것만 같았다. 전신의 피가 머리로 몰린 듯 하체가 바르르 떨렸다.
내 옆에는 불과 4주 전에 결혼식을 올린 며느리가 앉아 있다. 아무리 불안한 순간이지만 시아버지로서 최소한의 위엄은 지켜야 한다. 뻣뻣하게 굳은 몸을 풀고 머리로 쏠린 피를 순환시키려고 엄지발가락에 혼신의 힘을 모아 바닥을 긋기 시작했다. 며느리가 눈치채지 못하게 눈을 지그시 감고는.
“아버님, 별일 없을 거예요.”
들킨 걸까. 예정시간을 넘긴 수술실의 시어머니보다 대기실의 시아버지를 더 염려하는 며느리가 밉지 않다. 참다못한 며느리는 간호사에게 다가간다.
“아버님, 수술이 한 시간 더 걸린다고 해서 대기하던 간호사들은 점심식사를 하러 갔답니다. 아버님도 식사하고 오세요.”
“난 괜찮다. 너 먼저 식사하고 오렴. 둘 다 여기 있을 필요가 없구나.”
몇 번이나 사양하는 며느리를 밖으로 내보냈다. 대기실엔 나 외에도 두 가족이 더 기다리고 있다. 복도에서 여러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수술이 끝난 환자가 카트에 실려 중환자실로 들어왔다.
‘왜 내 아내의 수술실 문은 열리지 않는 것일까?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지금 복도를 바삐 오가는 의료인들은 아내의 수술이 잘못돼 저렇게 서두르며 허둥대는 것은 아닐까?’
무슨 일이 분명 생기긴 생겼구나. 시간은 초를 쪼개어 정지된 듯 더디 지나갔다. 대기실과 수술실로 통하는 복도 사이에는 큰 유리벽이 가로막고 있다. 촘촘한 블라인드가 드리워져 있어 오가는 행동을 일부만 파악할 수 있다. 내 청각은 복도의 발자국 소리와 카트 바퀴 소리에 저절로 곤두세워졌다. 수술이 끝난 또 한 명의 환자가 중환자실로 실려온다. 이 순간 내 청각에는 신기하게도 의사와 간호사의 발자국 소리, 카트의 바퀴 소리를 구별하는 초능력이 생긴 것이다.
예정시간을 2시간40분이나 초과해 돌아오는 아내의 카트 바퀴 소리와 집도의 마쉬만 박사의 발자국 소리를 나는 듣자마자 정확히 알아맞혔다. 석고상처럼 앉아있던 자세를 처음으로 풀고 일어났다.
“수술시간을 두 배 이상 초과해 염려 많았을 줄 압니다. 처음 예정했던 왼쪽 가슴 아래를 절개하고 보니 선이 지날 위치의 횡격막에 신경이 지나가고 있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이 경우 신경 반응에 따라 페이스메이커가 반응할 우려가 있습니다. 절개했던 자리를 다시 봉합하고 오른쪽 가슴 위를 새로 절개해 수술하느라 시간이 두 배 걸렸습니다. 수술은 성공적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세상에! 내가 가슴 졸이는 동안 아내는 두 번의 페이스메이커 수술을 한꺼번에 받은 셈이다. 수술이 성공적임을 확인한 나는 정작 아내를 보지도 못한 채 삶의 현장인 점포로 서둘러 향했다.
하루 장사를 마치고 병실로 갔다. 다섯 시간의 수술을 겪은 환자답지 않게 아내는 나를 알아보고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비로소 낮의 긴장과 염려가 한꺼번에 풀렸다. 이제 확실히 살았구나.
아내의 손발과 이마를 만져보며 수술이 성공적임을 확인하는데, 내 발가락이 뜨끔뜨끔했다. 마침 간호사도 멀리 있어 양말을 벗고 확인해보았다. 머리로 몰린 피를 하체로 끌어내린다며 온몸의 체중을 싣고 엄지발가락으로 바닥을 수도 없이 긁었더니, 물집이 생겨나 어느새 까져 있었다. 왼쪽도 마찬가지였다. 이틀 후 일반병실로 옮긴 아내에게 말했더니, 전신마취로 아무 고통도 못 느끼는 채 수술을 받은 자기는 오히려 편안했다며 남편의 피 말린 마음고생에 혀를 찼다.
페이스메이커를 몸속에 장착한 후 주렁주렁 달려 있던 선은 두 개로 줄었다. 부축을 받으며 병실 복도를 오가고 화장실 출입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또 다른 감격이다. 이때부터 아내는 밤늦게 병실을 찾는 나에게 뭔가를 꼭 가져오라고 부탁했다. 자기 방 옷장 두 번째 칸에 있는 밤색 스웨터와 카키색 숄을 가져오라는 식이다. 매일 하루도 빠짐없는 주문은 옷과 화장품이 대부분이다. 평소 관심 없던 옷과 화장품을 찾는데, 일러준 위치가 그렇게 정확할 수 없다. 마치 이때를 예견해 외워두기라도 한 것처럼.
팔뚝에는 링거가 꽂혀 있고 손등에는 샘플 채혈과 마이신 바늘이 꽂혀 있어 옷을 갈아입을 형편이 아니다. 화장은 더더욱 아니다. 환자복이면 족하지 않으냐는 내 물음에 아내는 이렇게 대꾸했다.
“우리가 돈이 있나, 유명하기를 한가. 옷이라도 반반하게 입고 화장이라도 잘해야 동양여자라고 깔보지 않고 회진이라도 한 번 더 오지.”
그 억지 논리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옷 갈아입고 화장하고 손 씻는 데 필요한 몸놀림이 환자가 필요한 운동량을 얼마간 대신할 것 같았다. 잠시 실소를 금치 못하다가도 즐거운 마음으로 모든 심부름을 두말없이 다 해주었다.
퇴원, 그리고 재입원
입원 37일 후, 아내는 간호사들의 환송을 받으며 퇴원했다.
“앞으로 다른 사람을 병문안 오는 경우 빼고는 다시는 오지 마세요.”
간호부장이 짐을 들어주러 내려와 택시까지 잡아주면서 부탁한 말이다.
퇴원은 했지만 감염된 병원균을 제거하기 위해 24시간 마이신을 주사해야 했다. 매일 아침 8시에 간호사가 우리 집을 방문해 주사액을 교환해주었다. 압력용기에 든 마이신은 잠을 자거나 식사를 하는 중에도 저절로 몸속에 쏟아부어진다. 귀가 치료 2주 후 예정대로 방역의 코시유 박사의 진료실로 갔다.
코시유 박사는 소변검사와 정맥피 검사 결과가 비정상인 듯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걸음이 바빠졌다. 얼음 주머니를 옆에 놓고 팔목 맥박을 집더니 주삿바늘을 수직으로 세워 꽂았다. 동맥피를 채혈하기 위해서다.
“미세스 김 때문에 내 검은 머리가 더 많이 회색으로 변한다니까요.”
“내 친구가 미장원 하는데 염색을 아주 잘해요. 알려드릴까요?”
그 와중에도 농담이 오갔다. 동맥피 검사 결과에 고개를 갸웃거린 의사가 의뢰서를 주며 말했다.
“동위원소 및 방사선과에 가서 촬영을 하고 필름을 꼭 가져오세요. 보통 2주를 기다려야 차례가 오지만 내가 얘기해놓았으니 가면 바로 촬영할 수 있을 겁니다.”
의사는 수간호사에게 방사선과까지 동행해 등록해주라고 지시했다. 수간호사가 자리를 비워가며 환자를 안내하는 일은 좀처럼 드물기 때문에 우리는 장기 입원환자를 위한 배려인 줄 알았다. 30분간 촬영을 한 후 한참을 기다렸지만 방사선과에서는 필름을 내주지 않았다. 나중에 촬영한 사람도 다 찾아가는데 말이다.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방사선과에서 아내를 호명하더니 필름은 주지 않고 가도 좋다고 말했다고 한다.
앞 병동으로 되돌아가자 코시유 박사가 필름에 대해 물었다.
“주지 않고 그냥 가라고 하더군요. 지금 가서 가져와야 할까요?”
“아뇨, 그럴 필요 없습니다. 내가 직접 가서 보고 오지요.”
이런 종합병원 전문의의 진료를 한 번 받으려면 3개월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코시유 박사는 다른 환자들의 진료시간에 맞춰 잇달아 드나들었다. 이토록 바쁜 의사가 다른 병동에 몸소 가서 촬영 필름을 판독하고 오겠다니, 그 친절이 고맙지 않을 수 없었다. 필름을 판독하러 간 의사가 두 시간 후에 돌아왔다.
“미세스 김의 촬영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주치의와 상의해서 재입원을 결정했습니다.”
“정말요? 왜요? 뭐가 문제인가요?’
“폐에 혈전이 몰려 있어 폐압이 정상의 두 배입니다. 이게 숨이 가쁜 원인입니다.”
초조하게 기다리는 동안 이어진 뭔가 심상치 않다는 두려움이 현실로 닥치고 말았다. 차례를 무시하고 동위원소 및 방사선 촬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나 필름을 내주지 않았던 것은 모두 상태가 그만큼 위급했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다시 입원하라는 말에 이성을 잃고 말았다.
“퇴원 전에도 숨이 가쁘다고 여러 번 얘기했어요. 그런데 다시 입원하라고요? 앞으로 나는 페이스메이커도 교환하지 않을 것이고, 오늘 입원하지도 않을 거예요!”
“당장 입원하셔야 합니다. 폐에 몰린 혈전으로 폐압이 높아 위험합니다.”
혈전의 위험
아기가 두 발을 엇비비며 생떼를 쓰는 것은 엄마 품이 한없이 넓고 따뜻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내 앞에서는 어느 신화도, 시인도, 화가도 그려내지 못한 정경이 펼쳐지고 있다. 환자가 밀려 바쁘기 이를 데 없는 전문의는 입원을 설득하려 애쓰고, 환자는 위험한 혈전을 발견해낸 의사에게 감사는커녕 입원하지 않겠다며 억지를 부렸다.
“미세스 김, 이번 입원은 마취를 하거나 수술을 하는 게 아닙니다. 화학적인 치료를 할 뿐이에요. 이미 병실도 예약해놓았습니다.”
아름다운 정경은 건강한 삶에 대한 약속으로 바뀌어갔다. 환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서자 의사가 앞장섰다. 수간호사가 바짝 뒤를 따랐다.
“정상인의 폐압이 34인데 당신은 74나 됩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의사가 하는 말이다. 개인병동까지 함께 도착한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예약된 병실을 직접 확인하고는 병실로 향하는 아내에게 건강을 빌었다. 아내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는 의사가 몸소 입원수속을 해주는 동안 수간호사가 곁에 바짝 붙어 있는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었다.
상처가 나면 우리 몸은 혈전을 만들어 지혈하게 된다. 그러나 혈관 속을 흐르는 혈전은 매우 위험하다. 이 혈전이 혈류를 따라 흐르면 폐에 고착된다. 이런 응혈은 혈액순환 장애를 초래하고 생명까지 위협한다. 그 힘든 세 번의 수술을 잘 견뎌내고도 자칫했으면 큰 불행을 맞을 뻔했다.
대수술, 그 후
문병 오는 것말고는 다시는 오지 말라던 간호사의 놀라움 속에 아내는 다시 입원했다. 용혈제인 와파린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심장 전문의는 “이 약은 쥐약에도 첨가되는 독 성분이 있으니 지시를 철저히 따라달라”고 당부했다. 매일 계속된 혈액검사 수치에 따라 그날그날의 복용량이 달라졌다.
입원 기간에 호주 최고의 갑부라는 미디어 재벌 케리 패커가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68세. 나는 이날 면회온 사람들을 곁에 두고 아내에게 이런 말을 했다.
“당신에게 베푼 최상의 의료 서비스와 의료진의 우수함은 호주 최고 갑부 케리 패커에게 결코 뒤지지 않을 거야.”
내 말에 대한 동감의 표시로 아내와 면회객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호주에 대한 감사함으로 잠시 숙연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재입원 8일 후, 위기를 넘긴 아내는 가정 치료가 가능해져 퇴원하게 된다. 간호사가 매일 9시에 집을 방문해 채혈해 가고, 결과는 바로 홈닥터에게 보내진다. 그러면 홈닥터는 전화로 와파린 복용량을 결정해준다.
호주에서는 크리스마스 이후에는 정상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모든 이가 휴가를 떠난다. 채혈과 검사가 중단되면 어쩌나 많은 걱정을 했다. 그러나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격일 주기일망정 채혈과 검사는 정상으로 이뤄졌다. 모처럼 뉴질랜드로 여행 떠난 홈닥터 신 박사는 와파린 양을 결정해주기 위해 매일 우리집에 국제전화를 거느라 여행을 망쳐야 했다.
연속된 세 번의 수술 후 6개월 만에 정상적인 일상으로 돌아온 아내는 전과 달리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였다. 당연히 지급해야 할 공과금도 절약할 수 없는지 일일이 따졌다. 액수에 맞춰 생활비 계획을 세우는가 하면, 절약할 수 있는 품목을 구입할 때는 몇 번이고 아쉬움을 되뇌었다. 어쩌다가 밥이 남으면 누룽지로 만들었다가 이튿날 뜨거운 물에 불려 아침식사로 내놓았다. 유럽 여행 떠나는 친구를 그렇게 부러워하던 여자가, 이제 자기는 가지 않아 얼마를 번 셈이라며 혼자 좋아라 한다.
아내는 37일 만에 잇달아 4시간의 심장수술, 3시간의 폐 절제수술, 5시간의 페이스메이커 수술을 했다. 하나하나가 1년에 한 번씩 한다고 해도 환자에게 큰 부담과 무리를 줄 만한 수술이다. 의료진도 이를 무사히 견뎌낸 아내의 체력에 혀를 내둘렀다. 입원 기간에 수퍼우먼으로 통할 정도였다.
의사를 전적으로 믿고 따른 나는, 이상하게도 아내의 생명이 정말로 위험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한순간도 없는 듯했다. 대신 그동안 아옹다옹 아등바등 사느라 호강 한번 제대로 못 시켜주었으니, ‘이번에 한 번만 더 건강한 몸으로 되돌려주신다면…’하고 간절한 소망을 빌었을 뿐이다.
입원 동안 이어진 수많은 검사와 24시간 몸속으로 흘러든 주사액, 상태 변화에 따른 의사들의 정확한 진단, 그리고 간호사들의 정성 어린 손길. 아슬아슬한 순간마다 그 어느 하나 어긋나지 않은 것은 꼭 기적만 같다. 마치 광화문에서 출발한 인천공항행 버스가 한 번도 신호등에 걸리지 않아 정차하지 않고 제 시간에 도착해 여유 있게 비행기에 탑승한 행운이랄까. 만약 한 번이라도 붉은 신호에 걸렸다면 귀신도 떨어지면 다시는 못 올라오는 저승으로 곤두박질쳤을 것이다. 의사와 간호사에게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신이 정해준 수명을 변경할 수 있는 위대한 능력이 있다. 그들에게 무한한 감사와 존경을 보낼 뿐이다.
인조여인, 내 아내
아내가 골프를 마치고 돌아오면 인사 대신 언제나 묻는 말이 있다.
“끝까지 다 쳤어?”
억양에 따라 안심과 걱정 사이를 오가던 기억이 새롭다. 아내는 이제 그런 질문엔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그린이 미끄러워 약간의 실수로 버디 파를 못 잡아 1등을 아슬아슬하게 놓친 아쉬움을 몇 번이고 되풀이한다. 아내의 허풍으로는 홀인원을 아깝게 놓친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아내를 볼 때면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생명의 신비함으로 인해 나는 경이감에 사로잡힌다. 의사들에 대한 감사함과 고마움, 샘솟는 안도감, 평화로움, 그리고 아내에 대한 미안함.
요즘의 나는 이 세상 어느 남편보다 행운아임을 자처한다. 아내는 중환자실에서 6일 동안 진통제와 수면제를 맞으며 잠의 늪에 빠져 무의식 상태로 보냈다. 처음 깨어나던 날, 혼미한 상태에서 잡은 내 손의 체온을 알아보고는 순간적으로 눈을 떴다가 힘겨운 듯 도로 감았다. 눈꺼풀에 눈물 방울이 맺히고 속눈썹까지 흥건히 젖는 걸 바라보는 내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맺혀 저절로 떨어지던 그때의 일체감.
부축해서 겨우 1m를 간신히 걸을 수 있던 체력이 어느 날 100m로 늘어나고 마침내는 골프 스윙을 할 수 있게 된 것을 바라보는 감격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짐작조차 못한다. 이처럼 아내를 보살피는 기쁨은 그 어느 충만감과도 다르다. 사실 별로 뒷바라지도 못했는데 주변에서 마치 온갖 정성을 쏟아 부은 듯한 인사말과 치하를 들을라치면 뭐라 말하기 어려운 느낌이 든다. 환자에 비하면 그저 뒷짐 진 구경꾼에 지나지 않건만.
노인들을 바라보는 내 눈도 전과 판이해졌다. 아무런 실수가 없어도, 매일 매스컴을 장식하는 끔찍한 사고는 제쳐둔다고 해도, 끊임없는 병마의 공격을 이겨내 평균수명까지 살아 남는다는 일 자체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노인들을 진심으로 존경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맡은 환자 가운데 가장 두꺼운 아내의 진료기록을 펼칠 때마다 홈닥터는 아내를 ‘움직이는 종합병원’이라고 부른다. 내 생각은 다르다. 의사들이 관심을 갖고 정성을 다해 뱃속의 모든 장기를 분해 수리한 후 보완해 조립한 ‘인조여인’이라고 부른다.
서툴게 혈관을 찌르는 바늘의 섬뜩함을 어쩔 수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보아야 했던 아내. 엑스레이와 CT 촬영 후 진단이 나올 때까지 온갖 염려로 두려움에 휩싸였던 아내. 의사들이 정성 들여 수리한 후 조립한 이 인조여인과 평균수명을 훨씬 넘겨가며 건강하게 웃으면서 살고 싶은 게 내 간절한 소원이다. 그래야 하지 않겠나.
이 박사는 고작 38세 나이의 아내를 몹시 안타까워했다. 수술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그림으로 설명하며 안심시키려 애썼다.
“심장박동 횟수는 하루에도 수없이 오르내립니다. 잠잘 때나 휴식을 취할 때는 낮지만 운동을 한다거나 흥분하면 빨라집니다. 활동에 필요한 혈액을 공급하기 위해서지요. 그런데 환자분의 경우 심방의 자극이 불규칙하게 전달되고 또 심장차단 현상도 일어납니다. 페이스메이커가 대신 자극을 주어 심장리듬 장애를 정상으로 조절하지요.
수술에는 두 시간이 걸립니다. 한번 수술하면 5~10년은 계속 사용할 수 있고, 그 후에는 배터리 소진으로 새로 교환해야 합니다. 심장 계통이 치료되는 것은 아니지만 정상인과 다름없는 활동으로 만족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어요.”
나는 난생 처음 듣는 어려운 수술방법과 기능을 단숨에 기억에 새겼다. 남편으로서의 본능과 심장수술이란 두려움이 뇌세포를 전부 동원케 했던 것이다.
수술 하루 전, 아내는 일반병실에 입원했다. 두려움 반 기대 반으로 의외로 침착한 모습이다. 저녁 8시, 일반병실을 회진하던 인턴과 레지던트가 맥박을 재더니 움직임이 바빠졌다. 겨우 38을 오가는 서맥 환자를 일반병실에 두다니. 그들은 어디론가 연락하더니 아내를 지체 없이 중환자실로 옮겼다. 이때부터 아내는 초조와 두려움 때문에 약한 모습을 보였다.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하는 환자들의 절망과 가족들의 한숨소리, 칼끝이 가슴을 파고들 수술에 대한 두려움…. 불규칙한 맥박은 더욱 불뚝거리며 힘겹게 피를 내보냈다.
아침 9시30분에 시작된 수술은 의료진이 노고를 아끼지 않은 덕택으로 성공적으로 끝났다. 이응구 박사는 평생 몸의 일부로 지니고 살아야 할 페이스메이커에 대해 몇 가지 주의사항을 일러주었다.
“상처가 아물 때까지는 당분간 무거운 것을 들지 말고, 일주일 후부터 운동이나 목욕 등 일상적인 활동을 시작하세요. 강한 전장이나 자장에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6개월에 한 번씩 검진하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
이 박사의 친근한 어조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두려움이 가시지 않는 듯했다. 왼쪽 가슴에 불룩 튀어나온 밤알 크기의 페이스메이커에서 손을 떼지 못한다.
그러나 산뜻하게 벗어버릴 줄 알았던 복통은 예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맥박만 정상으로 돌아오면 복통에서 해방된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갈등 또한 컸다. 단순히 뭔가 잘못 먹어서 체했을 것이라 믿고 싶었지만, 그러나 증상은 수술 전과 너무 흡사했다. 어떤 소화제도 도움을 주지 못했다.
아내는 이번에는 전과 다른 방법으로 통증을 이겨내려 했다.
봉독요법. 생벌을 핀셋으로 잡아 환부에 대고 복부 끝에 있는 침으로 독을 내쏘게 하는 방법이다. 땅벌이나 말벌 독은 견딜 수 없지만 꿀벌 독은 견딜 만하다. 벌을 새장에 가두어 온 용하다는 남자는 아내의 손등과 발등, 복부에 대고 직접 침을 쏘았다. 처음엔 침을 빼내도 한동안 피부가 벌겋게 부었다. 횟수가 늘어나자 부기도 가라앉고 통증도 가셨다. 침이 벌의 몸에서 분리되어 살갗을 파고들 때는 매번 새로운 두려움이 퍼졌다.
독침의 따끔함으로 원인 모를 복통의 두려움을 잠시 잊을 수 있다. 그러나 꿀벌의 독액이 치료에 보탬이 된다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반 년이나 지속한 봉독요법은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정규의학 검사에 의한 치료가 절실히 필요했다. 췌장염에 의심을 두고 검사를 계속했다. 정상이라는 진단에도 불구하고 자지러지는 복통은 여전했다. 전문의도 어디서 오는 복통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호주 이민 길에 오른 것이 1990년, 바로 그 무렵이었다.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복통을 안고 산다는 것은 큰 두려움이다. 혹시 ‘걸리면 죽는다’는 암이 원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두려움은 배가 된다. 복통은 주로 저녁식사 후에 찾아왔다. 48세 생일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새벽, 또다시 아내에게는 느닷없는 복통이 찾아왔다. 새벽에 발생한 것도 처음이려니와 강도도 전과 달랐다. 아내는 배를 붙잡고 신음과 함께 데굴데굴 굴렀다. 지체 없이 구급차를 불렀다. 구급요원의 간단한 조치와 함께 10분 후 우리는 병원에 도착했다.
이어지는 복통
그러나 30분 후 의사가 왔을 때는 신기하게도 언제 아팠느냐는 듯 복통이 사라진 뒤였다. 아무런 처치도 없는 불과 30분의 시간차였다. 꾀병이 아니고는 설명하기 어려웠다. 정말 통증이 없느냐는 물음에 아내는 겸연쩍은 얼굴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의사는 의심 가는 데라도 있는 듯 하루를 더 머물며 검사하자고 제안했다.
“환자의 통증은 췌장염이나 담석 증상에서 오는 것 같습니다. 좀 더 정확한 정밀검사가 필요합니다. 로열노스쇼 병원에 입원해 검사를 받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담석과 췌장염인가. 복통 때마다 담석과 췌장염 검사는 빠지지 않는 항목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감기처럼 사라졌다 재발하는 질병으로만 알았다.
일주일 동안 입원해 갖가지 혈액검사와 CT촬영을 했지만 복통의 원인은 끝내 찾지 못했다. 호주에서는 이런 경우 외부에서 전문의가 초빙되어 오는 일이 많다. 스틸 박사는 췌장 전문의로 영국에서 근무하다 갓 돌아온 의사였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복통의 원인은 발견되지 않았다.
“췌장과 담낭 어느 곳에도 결석이나 염증 증세는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췌장에서 위로 통하는 관이 정상의 두 배 크기입니다. 이것이 통증 원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일단 정상 크기로 줄여놓았습니다. 이제 의심 가는 곳은 간뿐입니다. 다음에 통증이 발생하면 입원해서 간을 CT 촬영해 정밀검사를 받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통증이 발생했을 때 촬영하면 매우 효과적입니다. 간 질환은 스미스 교수가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는 의사입니다.”
이제서야 췌장과 담낭은 정상이라는 사실이 판명된 것이다. 진단과 달리 복통의 원인이 두 배 크기의 관 때문이라고 믿고 싶었다. ‘의사가 뭘 잘못 알고 있을 거야. 비정상적인 크기의 관이 어찌 정상 기능을 할 수 있겠어. 정상 크기로 줄였으니 복통은 틀림없이 사라질 거야….’
간절하고 소박한 기대와는 달리 복통은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퇴원 3개월 후 아내가 갑자기 배를 움켜쥐고 복통을 호소했다. 응급실로 차를 몰았다.
입원 수속은 간단하다. 입원 서류를 작성하고 메디케어(호주의 국민건강보험) 카드와 개인보험 카드를 제시하면 끝난다. 간 결석에 대한 중점적인 검사가 시작되었다.
CT 촬영 후, 드디어 48년을 괴롭혀온 복통 원인인 간 결석을 발견했다 간에서 위로 통하는 간도에 결석이 있어 염증이 생기면서 그 고생을 했던 것이다. 제거하려면 간의 3분의 1을 절단해야 한다고 한다.
“간 결석은 서양인에겐 그리 흔치 않은 질환입니다. 이상하게도 동양 여자, 그중에서도 한국인에게서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 질환이지요. 1년 전에도 한국의 50대 여자를 당신과 동일한 증상으로 수술한 일이 있어요. 확실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어릴 적에 민물고기를 많이 먹어서 그렇지 않나 추정하고 있습니다.”
스미스 교수가 은인처럼 여겨졌다. 수술은 이틀 후 오전 10시에 시작되었다. 나는 점포를 여느라 분주했기에 아내 혼자 카트에 실려 수술실로 향했다. 병원제도가 가족의 도움을 별로 필요로 하지 않아 퍽이나 다행한 일이었다.
비록 점포를 열었지만, 나는 수술실의 아내를 생각하며 좁은 점포에서 안절부절못했다. 신체 장기 중 가장 큰 간을 3분의 1이나 절단하는 일이다. 카트에 실려 수술실로 향하는 심정은 어떨까.
강한 광도의 집중된 조명 아래 푸른 수술복으로 전신을 감싸고 눈을 크게 뜬 의사가 메스로 복부를 절개한다. 연신 흐르는 붉은 피를 닦아내며 간 3분의 1을 적출물로 잘라낸다. 피는 얼마나 솟구칠 것인가. 손가락을 조금만 다쳐도 겁나는데 간을 잘라낸다니 얼마나 아플까. 다만 48년을 괴롭혀온 결석이 한 방에 날아가길 바랄 뿐이다. 오늘로 복통은 영구히 사라지길 바랄 뿐이다.
오후에 병실을 찾았을 때, 아내는 의식을 회복하고 무척 기다린 듯 반가이 나를 맞았다. 입을 여는 대신 손으로 복부를 가리켰다. 메스로 갈랐던 자리를 하얀 붕대가 감싸고 있었다. 입 언저리엔 산소 관이 꽂혀 있고, 복부엔 두 개의 호스가 있어 대소변을 처리했다. 간호사가 다가와 친절하게 설명했다.
“수술은 매우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이 호스에선 절단한 간 상처액이 흘러나오고 다른 하나로는 진통제를 투여합니다.”
복부를 절개하고 간을 잘라내는 엄청난 수술을 견뎌낸 아내가 장했다. 스미스 교수는 빠른 회복을 매우 기뻐했다.
“간의 재생능력은 놀랍습니다. 원래 크기로 자란 후 성장을 멈춥니다, 멈추지 않으면 큰일나지만. 기능도 전과 다름없고요.”
일주일 만에 가방을 챙겨 병원을 나오는 걸음이 무척 가벼웠다. 이제부터 남들처럼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기쁨처럼 큰 것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적출물로 잘라낸 간의 해부 분석 보고서를 읽고 인체의 오묘함을 다시 실감했다. 복통의 원인인 간석을 무슨 소중한 보물인 양 48년이나 양분을 주며 자기 몸의 일부로 키워오다니. 권위 있는 전문의가 간신히 발견할 수 있는 그토록 작은 간석이 48년이나 아내를 괴롭혀왔다니. 문득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대체 무슨 색깔일까. 진주처럼 단단하고 신비한 광채를 띠고 있을까. 아마도 지독한 미움 덩어리가 그런 것일 게다. 건강한 간 부위가 담홍색을 띠는 것과 달리 감염 부위는 푸르뎅뎅하다는 말이 지금까지도 귀에 생생하다.
건강은 일상 모든 활동의 원동력이다. 아내는 무척 활동적인 사람으로 변했다. 하루에 일곱 차례나 운전해 자식들의 등하교를 도왔고 뒷바라지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새벽 바람이 차가운 5시에 출근하는 나를 전철역까지 태워줄 때는 ‘이제 건강은 해결됐다’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러고도 활력이 남아도는지 골프를 시작했다. 호주에서 골프는 값싸고 부담 없이 즐기는 운동이다. 아내는 자동차로 불과 20분 거리에 있는 골프장을 정해 일주일에 두세 번씩 열심히 클럽을 휘둘렀다. 자연과 어울리니 긴장이 풀어지고 건강에 대한 염려도 말끔히 잊는다고 했다. 어느새 골프 예찬론자가 되어 화요일 목요일의 골프를 위해 나머지 5일을 기다렸다.
그렇게 간 수술 후 7년은 아내에게 인생의 황금기였다. 꿈에 그리던 핸디 18을 기록하기도 했다. 골프장 행사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열성을 보이면서도 몸살로 눕지 않았다. 건강한 삶이 얼마나 축복받은 인생인지 되새기는 뜻 깊은 하루하루였다. 48년을 기다렸다가 맛보는 건강한 생활과 병마로부터의 해방감으로 남보다 두 배 더 즐거웠던 것이다.
수명 다한 페이스메이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행복한 시간은 빨리 흘러가기 마련이다. 간 수술 후에 건강한 삶을 누린 7년의 시간은 화살처럼 지나갔다. 아내는 언제부턴가 쉽게 피곤해하고, 떠날 줄 모르는 감기로 힘겨워했다. 움직이는 시간보다 누워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일상에 맥이 없어졌고, 소화불량과 통증을 자주 호소했다. 문득 페이스메이커를 의심하게 되었다.
“수명이 다됐습니다. 환자분의 맥동은 페이스메이커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거의 자력에 의해 발생합니다. 서둘러 교환하는 것이 좋겠어요.”
심전도를 본 홈닥터 신봉제 박사의 진단이었다. 내과전문의인 신 박사는 병약한 아내에게 각별한 관심을 쏟는 촛불과도 같은 존재다. 페이스메이커를 시술한 지 벌써 10년이 흘렀다. 5년 후부터는 6개월에 한 번씩 검사를 받으러 오라는 충고를 완전히 잊고 살았다. 간 수술 후의 건강한 삶이 페이스메이커의 존재를 까맣게 잊도록 만든 것이다.
맥박은 40을 겨우 넘겼다. 지난 10년 동안 페이스메이커는 3억5000만번 맥동을 발생해 8800만 ℓ의 혈액을 순환시키고 수명을 다한 것이다. 무심함을 후회했다. 서맥 환자라는 것을 잊고 정상적인 활동을 하게 해준 페이스메이커가 고마웠다. 남들처럼 건강하게 살게 해준 이응구 박사가 고마웠다. 많은 환자의 생명을 연장해주고 건강한 삶으로 되돌려준 이응구 박사가 정작 본인은 몸이 많이 불편하다는 이야기를 바람결에 들었다. 제발 누가 잘못 전한 헛소문이길 비는 마음이 간절했다.
페이스메이커를 교환할 의사로는 심장 전문의로 권위를 인정받는 닥터 마쉬만으로 결정했다. 마쉬만과의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된 것이 바로 이때였다.
“빨리 교환해야 합니다.”
마쉬만 박사는 페이스메이커가 이토록 수명을 다할 때까지 활동장애를 모르고 병원을 늦게 찾은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불안한 마음으로 입원을 서둘렀다. 공공병원은 4개월을 기다려야 하지만 보험 가입자인 우리는 개인병원에 바로 입원할 수 있었다.
점포 문을 닫고 수술을 끝낸 아내를 찾자 무척 반가워했다. 손으로 페이스메이커를 가리켰다. 예상과는 달리 전보다 더 볼록 튀어나왔다. 아내는 앞으로 일생을 마칠 때까지 몇 번이나 더 이런 수술을 해야 할지를 되풀이해 계산했다. 수술 과정에서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는지 오래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할 정도였다.
“과학이나 전자산업이 눈부시게 발달하면서 페이스메이커도 소형화하고 배터리 수명과 신뢰성도 몰라보게 발달했잖아. 10년 이상 문제가 없을 거야. 앞으로 어떤 페이스메이커가 세상에 나올지 알겠어?”
나는 주제넘게도 엔지니어다운 말로 아내를 위로했다. 그러자 아내는 옛날에 태어나지 않아 조절기를 달고서라도 정상적인 활동을 하며 살 수 있는 게 무척 다행이라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이후 아내는 다시 정상생활로 돌아왔다. 조절기의 도움을 받는 심장이긴 하지만, 다시 골프를 즐겼고 아이들과 나를 역까지 바래다주었다. 시드니 북부의 우리집은 큰 나무가 많아 시도 때도 없이 잡초를 뽑고 낙엽을 쓸어야 한다. 아내가 기운 없다 불평하면서도 정원 일에 열심인 것이 무척 흐뭇했다. 움직임 하나하나가 페이스메이커의 미세한 펄스에서 출발한다 생각하니 짜릿했다.
국민총생산의 9%를 보건비로 지출하는 호주의 의료제도는 서구 선진국에 비해 짧은 역사를 가졌음에도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연방정부가 관리하는 공공의료보험의 메디케어 카드만 제시하면 무료로 기초적인 진단과 처방은 물론 증세에 따라 전문의를 소개받는다.
환자는 홈닥터라 부르는 일반의의 진단을 먼저 받는다. 상태에 따라 전문의에게 진료를 의뢰하는데 반드시 일반의의 의뢰서가 필요하다. 이 의뢰서 없이는 임의로 전문의를 만날 수 없고, 예약은 필수다. 전문의는 환자의 상태와 치료과정을 일반의에게 문서로 보낸다.
전문의의 진료를 받을 경우 정부 보조는 85% 정도이고 차액은 본인 부담이다. 의사와 진료의 종류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보통 전문의가 30분을 진료하면 150호주달러를 청구한다. 일반의는 하루에 보통 60명 이내의 환자를 진료하는데, 정부가 환자 1인당 부담하는 액수는 30호주달러 정도. 연금자나 저소득자는 정부 보조로 의약품도 값싸게 구입할 수 있다.
호주에는 공공병원과 개인병원이 있다. 환자가 공공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을 경우 장기간 차례를 기다려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입원에서 퇴원까지 병실료는 물론 수술비와 의약품 등이 전부 무료다.
정부 보조가 적용되지 않는 진료를 받기 위해서는 개인 의료보험에 가입해야 다양한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다. 개인보험 가입자가 개인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을 경우 담당 의사가 지정되고 정부는 의료비 청구액의 75%를 부담한다. 차액은 개인보험과 본인이 일정액을 부담한다.
세 번째 교환
2004년 6월 햇살이 따스한 겨울날, 우리는 어느새 수술 5년이 지난 걸 알았다. 집도의 마쉬만 박사를 찾았다. 교환해야 한단다. 기계 자체의 수명보다 제조회사 권장 교환주기를 고려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횟수가 되풀이되면서 수술에 대한 두려움도 줄었다. 이번에는 노스쇼 개인병원에서 수술하기로 했다. 최신식 시설을 자랑하는 이 개인병원은 번잡함이 없어 환자나 가족에게 여유와 위로를 준다.
아침에 아내가 수술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점포로 향했다. 5년 전에도 무사히 끝난 수술이었고 더구나 마쉬만 박사는 두 번째 집도였으므로 마음이 한층 놓였다. 생명이 오가는 이런 수술에서는 의사라면 누구나 최선의 결과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확신했다.
수술 이튿날 기능을 최종 점검했다. 결과에 만족한 주치의도 퇴원을 허락했다. 집까지 가는데 아내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다. 입원하는 동안 궁금했던 집안일을 물을 법도 한데, 모두 귀찮기만 하다는 표정이다.
“이것 봐, 전보다 많이 튀어나왔지?”
아내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수술 자리를 가리켰다. 맥없어 보인 이유가 바로 이건가. 아무리 많이 튀어나왔대도 정상 맥동만 유지한다면 모양이 대수인가. 옷을 입으면 보이는 것도 아닌데. 나는 아내의 지쳐 보이는 표정이 겨우 수술자리에 대한 불만 때문이라는 사실에 얼마간 안심했다.
집에 도착하고 아내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쾌적한 온도가 유지되는 병실에서 낮과 밤의 온도 변화가 생기는 집으로 환경이 바뀌어 그러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한번 재채기로 시작한 기침이 걷잡을 수 없이 이어졌다. 폭발하는 기침은 ‘저런 고통을 어떻게 참아내나’ 싶어 보는 사람의 가슴이 다 서늘해질 지경이다. 맥박을 짚어보니 분당 60 ~70회를 오르내렸다. 새 페이스메이커가 아닌가.
한바탕 기침을 하고 난 아내는 전신이 노곤하고 지쳐 도무지 맥이 없다. 기침하는 게 유행하는 환절기 감기와 비슷했다. 홈닥터도 감기라고 진단했다. 저 정도면 이미 늑막이 찢기는 듯하고 옆구리는 두들겨 맞은 듯한 고통일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참아내는 아내를 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아파 못 견딜 지경이다. 뭔가 이상했다. 경험으로 미루어 이 정도면 열이 나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다시 집도의 마쉬만 박사를 찾았다.
엑스레이 사진을 본 마쉬만 박사가 놀라운 사실을 알려줬다.
“심방에 자극을 전달하는 단말이 조각나 있습니다. 5000명에 한 명꼴로 이런 불상사가 발생합니다. 빠른 시일 내에 다시 교환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맙소사! 수술한 지 한 달 만에 재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심방에 연결된 단말은 전도와 유연성, 내(耐)부식성이 모든 금속 가운데 가장 강한 금으로 되어 있어 활동을 해도 손상되지 않아야 한다. 최소 5년은 사용할 기기임에도 고통과 돈과 시간을 허비해가며 불량품을 장치했던 것이다.
허탈감이 엄습했다. 생명이 오가는 물건을 불량으로 제조한 회사가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우리에게 다른 선택은 없다. 불평도 수술비 보상도 공손히 접어야 한다. 의사가 서둘러 재수술 일정을 잡아준 것만도 다행이 아닌가.
한 달 전과 똑같은 수술이 반복됐다. 우리는 5년을 앞당긴 수술이라고 위로했다. 집도의는 무척 미안해했다. 나는 아내의 작은 손을 꽉 잡고 이번에는 문제없을 것이라며 안심시켰다. 그러나 수술이란 얼마든지 잘못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현실적으로 경험한 우리는, 퇴원을 앞두고도 일말의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자기 몸의 건강은 자기가 책임지고 가꿔야 한다는 말을 나는 존중한다. 나름대로 건강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생활습관을 개선하면 건강한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평생 술 담배를 입에 대지 않고 그렇다고 특별히 나쁜 생활습관을 가진 것도 아닌 아내의 건강은 왜 살얼음판을 내디디는 것 같은 아슬아슬함을 거듭하는지 모를 일이다.
건강 적신호가 켜지고
감기만 해도 그렇다. 흡사 환절기 예보나 되는 듯, 한번도 남들처럼 그냥 지나가는 일이 없다. 열과 기침으로 고생을 겪을 대로 겪은 뒤에야 기운을 차리는 그런 생활의 연속이다. 온종일 누워 있다 보니 본인은 물론 곁에서 지켜보는 이도 힘들다. 심한 열과 기침이 오래 지속될 때는 감기가 아니라 다른 병일까 불안하다. 홈닥터가 흔한 감기라는 진단을 내리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되풀이된 수술의 후유증일까. 아내는 이상하리만큼 감기를 항상 달고 다녔다. 감기란 기본적으로 바이러스 침입으로 생기는 호흡기 계통의 염증성 질환이다. 지구상의 인간치고 코 막히고 머리 아프고 기침이 이어지고 열이 오르는 감기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심한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얼마간 고생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정상으로 돌아오는 흔한 질환이다.
그러나 아내의 증상은 이상했다. 감기를 항상 몸에 달고 사는 것도 그렇지만, 추위와 더위에 과도하게 민감한 것도 특이했다. 정상인이 느낄 수 없는 미세한 온도 차이나 환경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척추동물인 인간의 체온은 36.5℃. 이보다 높으면 땀이 나 노출된 피부로 열을 발산하고, 낮으면 몸을 웅크리고 떨어 정온을 유지한다. 이렇게 일정온도를 유지해야만 거대하고 복잡한 화학공장인 인체가 화학반응을 가장 활발하게 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이 인체의 생리작용이고 생명유지 원리다. 그런데 아내는 이 체온 자동조절장치가 고장나 전혀 작동하지 않거나 부실해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감기에 소화불량이 겹쳐 이런 한기와 떨림이 일어나는 줄 알았다. 해가 지면 한기를 느낀 아내는 내복을 껴입고 양말을 신고 얼굴은 눈과 코만 내놓고 싸맨다. 저녁식사에 뜨거운 음식을 먹으면 콧등을 시작으로 땀이 흐르기 시작하고 입었던 옷을 금방 벗어야 한다. 시드니는 한겨울이라도 최저기온이 영상 9℃ 밑으로 내려가지 않는다. 방안 난로를 용량의 절반만 가동해도 5분 이내에 훈훈해진다. 그런데 땀이 흘러 가벼운 옷차림을 한 아내가 어느 순간 한기가 들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 입술이 순식간에 시퍼렇게 변하고 사지를 벌벌 떨기 시작하는 것이다. 당장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것 같은 떨림이다. 옆에 있는 사람도 이렇게 당황스러운데, 하물며 본인은 얼마나 두려우랴.
이 절박한 상황을 해결하는 응급조치를 경험적으로 안다. 한기를 느끼는 순간 뜨거운 꿀물과 함께 진통제를 먹는다. 그래도 해결되지 않으면 욕조의 뜨거운 물 속에 몸을 담가 체온을 올리는 것이다. 이스터 섬의 파충류 이구아나가 스스로 체온을 올리지 못해 따뜻한 바위에서 햇빛을 쪼이다가 바다에 뛰어드는 것처럼.
이 모든 동작이 한기를 느끼는 바로 그 순간 순식간에 이뤄져야 한다. 잠을 자는 도중에도 한기가 발생하면 욕조로 뛰어들고 뜨거운 물을 마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불행한 사건이 일어날지 모르다 보니 늘 불안에 떨며 고생해야 했다.
두려운 한기와 떨림
미세한 온도 차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증세는 점점 심해졌다. 자주 호흡이 가빠지고 맥박이 빈맥으로 바뀌어 90을 쉽게 오르내렸다. 더불어 기운을 잃고 누워 잠자는 시간이 무척 길어졌다.
우리는 이 모든 증상의 초기부터 그 원인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페이스메이커를 점검했지만 지극히 정상이다. 위염과 궤양 증세가 있어 내시경 검사를 한 후 치료를 받았다. 호흡이 가쁠 때 가슴 엑스레이도 찍었다. 모두 정상이란다. 그럼 도대체 어디가 문제란 말인가.
“간에 다시 돌이 생긴 모양입니다.”
홈닥터인 신봉제 박사는 풍부한 임상경험에 비추어 간석 감염 증세와 유사하다고 말했다. 다시 스미스 교수를 찾았다. CT촬영 결과를 보러 가는 날, 우리는 서로 다른 두려움에 몹시 긴장했다. 아내는 복부를 중복 절개하는 간 절제 수술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는 제발 이번에도 수술이 가능한 위치에 돌이 생겼기를 바라는 절실함으로.
“간에 돌이 생기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반가워야 마땅한 스미스 교수의 진단이 또 다른 의문으로 남는다.
“갑자기 닥치는 한기와 숨가쁜 고통은 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스미스 교수는 한기가 일어나는 시간과 체온을 기록해오고 폐 엑스레이를 찍어오라고 했다. 한기는 아침이든 저녁이든 잠자는 도중이든 예고 없이 일어났다. 체온은 35.5℃ 이하로 내려가지 않았다. 교수를 다시 찾았지만, 간과 폐 모두 정상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뿐이다.
그러는 와중에도 아내는 점점 상태가 나빠졌다. 가까스로 극복하고 침대에 들어 잠을 자다가도 불과 네 시간 만에 또 한기가 일어났다. 이 가증스러운 한기를 겪고 나면 극도의 허탈과 피곤으로 전신이 땀 범벅이어서 내복까지 후줄근해질 정도였다.
아내는 조금만 움직여도 짜증을 냈고, 그렇게 좋아하던 골프도 일주일에 겨우 한 번 쳤다. 늘 기진맥진해하며 옷도 갈아입지 않는가 하면 내가 귀가하는 9시까지 세상 모르고 잠에 빠진다. 이렇게 쉬어야만 겨우 세 식구 먹을 음식을 만들고 최소한의 개체유지를 위한 활동을 할 수 있다. 마치 낡은 휴대전화를 장시간 충전해도 잠시 사용하면 어느새 방전되어 다시 충전해야 하듯이.
아내는 나를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 철렁하게 만들었다. 시도 때도 없이 눕고, 누우면 등이 바닥에 닿는 순간 전화 벨 소리도 못 알아듣는 깊은 잠에 곯아떨어진다. 장모님이 깊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지 못하고 영영 세상을 떠나신 기억이 떠올라 잠든 아내를 보면 섬뜩섬뜩 땀이 솟았다.
휴화산이 활화산으로
한기와 숨가쁨, 장시간의 깊은 수면이 무엇 때문인지 찾아내기 위해 온갖 검사와 진찰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각종 첨단기기를 동원해 검사해도 원인 발견은커녕 아무 이상 없다는 진단만 나온다. 환자의 호소가 이어지자, 한기를 느끼거나 숨이 차는 원인은 100가지도 넘는다며 그걸 다 검사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장기 어딘가에 분명 감염이 있습니다. 다만 원인이 터져 나오기 전엔 발견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내의 몸을 잘 아는 신봉제 홈닥터의 진단이다. 분명히 존재하는 이상의 원인은 조기에 발견해 제거해야만 한다. 터져 나와야만 발견할 수 있다니 이런 불안함과 답답함이 어디 있나. 터진 후의 발견은 너무 늦다. 원인을 알 필요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듣는 것만으로도 오싹한 감염은, 그러나 얼마 후 현실로 나타났다.
흔히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 한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태어나면서부터 길이가 정해져 있다는 의미일 게다. 그 길이를 미리 잴 수 있다면 의학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아들의 결혼식을 불과 9일 앞둔 2005년 10월13일 정오. 골프를 치던 아내는 3번홀부터 깊은 기침과 함께 입에서 새어 나오는 피를 휴지로 막아가며 동료들이 눈치 채지 않게 처리하고 있었다. 휴지엔 선홍색 자국이 선명하다. 코피나 상처의 피보다 더 맑은 선홍색. 어쩌면 좋단 말인가.
이런 출혈은 4월에도 있었지만, 그때는 피곤해서 나오는 코피인지 분간되지 않을 만큼 양이 적었다. 이때도 각혈을 의심해 엑스레이를 찍었으나, 폐에는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8월에 다시 발생한 각혈은 기침도 심하고 토하는 양도 많아 불안감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폐가 정상이라는 진단에 의구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동료들을 앞서 보내고 9번홀 휴식시간에 휴지를 하나 더 준비해 나머지 코스를 계속했다. 불과 두 달 전의 폐 진단에서 정상이라고 했는데, 그동안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 걸까? 몇 번의 각혈 경험을 통해 이러다가 곧 멎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각혈은 그치지 않았고, 친구들도 이를 눈치챘다. 불안 속에 가까스로 18홀을 마치고 난 아내는 선혈로 발갛게 물든 휴지가 골프백에 수북한 것을 보고 왈칵 겁이 솟구치는 듯했다. 벌써 오후 2시30분, 서둘러 25㎞ 떨어진 홈닥터의 진료실로 차를 몰았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부터 호주의 이상적인 의료제도 아래 의사를 위시한 여러 의료진이 정성을 다해 펼친 아내 살리기 장정이 시작됐다. 수술에서 완쾌까지 픽션보다 더 드라마틱한 현실이 이어지며 아내를 저승 문턱에서 구해오게 된 것이다. 흡사 각본이라도 있는 듯, 현실이라고 믿기 어려워 비현실적이고 비현실이라고 하기에는 엄연히 아내의 건강하고 새로운 삶이 있는, 그래서 더욱 가슴 뭉클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생사의 갈림길
차를 몰고 가는 도중에도 각혈이 그치지 않아 안전벨트도 피로 얼룩졌다. 신 박사의 진료실은 항상 환자들로 넘친다. 시간은 벌써 오후 3시30분. 무사히 도착한 아내는 다른 환자의 진료카드를 가지러 온 신 박사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엑스레이를 찍고 기다렸다가 꼭 가져오세요.”
신 박사가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것이다. 의뢰서를 받아 차를 운전해 방사선과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었고, 가까스로 병원이 문을 닫기 전에 사진을 가져왔다.
“폐와 심장이 이상하게 부어 있어요. 남편이 퇴근하면 어드밴스 개인병원 응급실로 바로 입원하세요.”
저녁에 귀가했을 때 아내에게서 고통스러운 징후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심장과 폐가 많이 부었다는 경고도 우리로서는 그 심각성을 알 리 없었다. 오늘은 이미 의사들도 다 퇴근했을 테니 내일 입원하기로 미뤘다. 두려움과 걱정 속에 저녁식사를 마쳤다. 일과대로라면 나는 산보를 나가야 한다. 그러나 어디 그럴 정황인가.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아내가 식사를 마치자마자 바로 잠을 자려고 하는 것이었다. 이건 큰일이다 싶었다. 이미 이불을 덮은 아내를 일으켜 서둘러 개인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이 입원 결정이 아내의 운명을 얼마나 크게 바꿔놓았는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숨이 막힌다. 수많은 가정법이 꼬리를 문다. 만약에, 만약에 우리가 그 밤을 무사히 자고 났다면 아내는 언제나 그렇듯 혈색 좋은 모습으로 다음날을 맞았을 것이다. 나는 새벽에 점포를 열어야 하고, 번거로운 입원과 고통스러운 검사들이 뒤따를 것을 미리 겁내 다음 각혈까지 기다렸을 것이다. 만일 그랬다면, 아아….
이튿날 병원을 찾았을 때 아내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밝은 얼굴로 웃는다. 폐 전문의인 해리스 박사가 CT촬영과 혈액 배양결과를 집중적으로 검사했다.
퇴원 11일 후 나는 해리스 박사로부터 한 통의 팩스와 전화를 받았다.
“환자분의 오른쪽 폐 동맥과 페이스메이커가 감염되었습니다. 출혈은 이 동맥의 감염 부위에서 기침과 함께 나오는 것입니다. 만약 다시 출혈이 일어나면 과다출혈로 30분 이내에 절명할 위험이 있습니다. 나는 이 사실을 페이스메이커 집도의인 마쉬만 박사에게 전했고, 모든 검사결과를 CD로 구워 보냈습니다.”
맙소사! 언제부턴가 아내는 심지가 타기 시작한 시한폭탄을 안고 그 고통을 겪었던 것이다. 무지는 사람을 얼마나 무모하게 만드는가. 점화한 시한폭탄을 안은 채 미국과 한국을 여행했고 아들 결혼식을 치르느라 그 부산을 떨었다. 외출혈이었으니 살았지 내출혈이었다면 손쓸 겨를도 없이 30분 이내에 절명했다는 것이 의사들의 공통적인 의견이었다. 생각만으로 아찔했다. 신 박사가 진단한 염증이 전혀 예상 밖의 기관에서 터진 것이다. 동맥에서 나온 피라서 그토록 맑은 선홍색이었구나.
호주의 의사들은 환자를 안심시키기 위해 충격을 줄 만한 진단은 알려주지 않는 관습을 가볍게 무시한다. 어떤 병이든 사실대로 가족과 환자에게 지체 없이 알린다. 듣는 것만으로도 오싹한 진단을 들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아들 결혼식을 치르면서 그토록 세세하게 간섭하던 아내가 어느 순간 심지가 다 타 각혈과 함께 사망할지도 모르는 상태가 됐다니, 머리가 멍해 도무지 실감이 나질 않는 것이다.
의사와 병실이 턱없이 부족해 종종 의료사고가 생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당장 병실에 여유가 있을지부터 걱정되기 시작했다. 뭔가가 잘못돼 아내가 어느 순간 절명이라도 한다면…. 이건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아내의 얘기였다. 수화기 건너편의 해리스 박사는 집도의인 마쉬만 박사에게 모든 검사기록을 보냈다고 할 뿐 구체적인 입원 일정이나 계획을 말하지 않았다. 혹시 뭔가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도대체 어쩌면 좋단 말인가. 우왕좌왕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일손을 놓은 채 멍하니 허둥댔다.
의사들끼리의 정보교환
그러나 해리스 박사로부터 전화를 받은 지 두 시간 후, 위급상황에 처한 내 아내가 호주라는 의료 선진국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를 확인시켜주는 일들이 이어졌다. 집도의의 비서로부터 전화가 온 것이다. 닷새 후인 다음주 화요일 오후 입원하라는 것이다.
호주에서 병원을 자주 다니며 가장 감탄한 것은 의사와 의사, 병원과 병원 간의 환자에 대한 활발한 정보 교환이다. 아내의 경우 어드밴스 병원의 해리스 박사가 그동안 찍은 엑스레이와 CT 사진은 물론 혈액의 제반 검사기록을 자신의 소견서와 함께 로열노스쇼 병원의 마쉬만 박사에게 고스란히 전달했다. 따라서 아내는 비용 절약은 물론 시간을 다투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긴급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내의 면역체계에 문제가 있어 이 분야 전문의를 찾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앞서 진찰을 받은 폐 전문의가 참고가 될 만한 병력 기록 일체에 ‘이러이러한 검사를 해보라’는 소견서까지 보내 우리보다 먼저 면역 전문의에게 도착해 있는 것이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물론 면역 전문의는 아내의 검사결과를 자세히 기록해 폐 전문의에게 보낼 것이다. 이것으로도 모자라 앞으로는 환자의 모든 기록을 정부가 관리해 진찰 의사들이 필요할 때 인터넷으로 확인하게 만드는 방식도 예정돼 있다고 한다.
아내의 병실은 이미 마쉬만 박사의 비서가 예약해놓은 상태였다. 병실 사정이 넉넉지 않은 호주의 현실에서 이렇듯 신속한 입원은 드문 일이다. 아내가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를 짐작케 했다. 예정보다 하루 이른 월요일 오후 의사를 만나러 갔다가 바로 입원을 결정했다.
입원 다음날에는 수술에 필요한 혈액 검사와 CT 및 엑스레이 촬영으로 하루를 보냈다. 이틀 후 오전 9시, 아내는 수술실로 향했다. 세 번에 걸쳐 행해질 수술 중 오늘은 첫번째로 네 시간 예정이다. 감염된 페이스메이커와 가슴에 배열된 선을 제거하고 손상된 심장 밸브를 수리하는 수술이란다. 그동안 네 번에 걸친 수술로 선 여덟 개가 거미줄처럼 온통 가슴을 점령하고 있다. 감염의 우려 때문에 그 모든 전선을 빼내고 나면 임시 페이스메이커가 몸 밖으로 나와 있을 것이다.
심장에는 네 개의 밸브가 있다. 이 밸브들은 박동과 함께 개폐 작용을 하며 피가 한 방향으로 흐르게 한다. 그런데 이들이 감염으로 손상되었기 때문에 수리해야 하는 것이다. 마쉬만 박사는 몇 개 밸브를 수리해야 할지, 아예 기계밸브나 생물학적인 대체 밸브로 바꿔야 할지에 대해선 아직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내가 수술실에 들어간 지 4시간20분 후,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중환자실로 돌아온 아내를 보자 이것이 의술이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입과 코는 물론 양팔을 위시해서 손등, 복부까지 빈 자리가 하나도 없이 호스로 연결된 주삿바늘이 피부를 뚫고 있다. 아내는 아직도 무의식 상태였다. 몸에 달린 주사 호스와 선을 세어보니 여덟 개나 되었다.
“환자분은 지금 깊은 수면 상태입니다. 무의식 상태를 유지하지 않으면 입에서부터 위까지 내려가 있는 호스들을 붙잡아 뽑아내려 할 것입니다. 이걸 방지하기 위해서 강제 수면을 유지해야 합니다. 진통제도 계속 주사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술 상처의 고통으로 금방 졸도하고 맙니다. 지금 저 호스는 진통제, 영양제, 항생제, 수액, 페이스메이커, 인공호흡 호스, 그리고 대소변을 처리하는 호스입니다.”
의료기기에 관심을 보이자 간호사가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로열노스쇼 개인병원 중환자실은 최첨단 시설을 자랑한다. 환자의 심전도와 호흡, 체온 등이 스크린에 표시되고 컴퓨터로 중앙 통제된다. 주사액의 유량도 컴퓨터로 감시된다.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경보가 울리고 간호사가 달려와 신속하게 처리한다. 담당의사 두 사람이 15분 간격으로 회진하며 상태를 점검했다. 첨단기기와 간호사의 정성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안도감이 들었다.
수면 상태의 아내는 어쩌다 진통제가 필요량에 못 미칠 때마다 고통에 못 이겨 눈을 부릅떴다. 이때의 애절함이란 상상을 초월한다. 몸에 호스와 바늘을 꽂고 발과 장딴지에는 혈전 방지를 위해 조이는 양말까지 신은 채 깊은 잠에 빠진 아내를 아침과 저녁에 방문했지만, 아내는 나를 알아볼 길이 없다. 한동안 침대 곁에 앉았다가 이제 살았다고 확인하는 차원에서 양말을 뚫고 나온 엄지발가락을 겨우 만져보고는 중환자실을 나오는 게 고작이다.
병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것은 수술 다음날이다.
“환자분을 내일 수술하기 위해 CT를 촬영해야겠습니다. 당신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동의하시면 전화로 ‘예스’ 해주시면 됩니다.”
48시간 만의 폐 절단 수술
CT 촬영이 얼마나 위험하길래 보호자의 동의를 필요로 할까. 겁이 왈칵 났다. 어느 보호자가 이런 상황에서 ‘노’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호스와 주삿바늘을 온몸에 주렁주렁 매단 무의식 상태의 환자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주사하고 촬영하려면 위험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아내는 이날 촬영에서 오른쪽 폐의 동맥 가운데 감염된 위치를 정확히 발견하는 행운을 얻게 된다.
이튿날 폐 절단 수술은 오전 9시에 시작됐다. 불과 48시간 만에 두 번째 수술인 셈이다. 수술 동의서에 보호자 서명을 받을 만큼 위험한 수술이다. 주치의는 부푼 폐를 풍선 바람 빼듯 압축한 후 절단한다고 했다. 마취한다지만 얼마나 아플까. 제발 무사한 수술이 되어다오.
폐 절단 수술은 예정대로 2시간40분 만에 끝났다. 여전히 아내는 수면 상태다. 세 번의 수술 가운데 가장 위험하다는 두 번째 수술을 무사히 마친 것이다.
중환자실은 환자 1인당 병실 하나를 사용하고 전속 간호사가 배치된다. 병실에 들어서면 친절한 간호사는 방문자 숫자대로 의자를 가져와 앉기를 권한다. 만약 의료기기가 환자 가까이 앉는 걸 방해하면 치우고 의자까지 옮겨준다. 그리고 환자에게 있었던 일을 일지를 보면서 자세히 설명해준다.
조카 결혼식에 참석하러 호주에 왔다가 언니를 간병하고 있는 부산 처제에게 간호사가 상태를 설명해준다. 간호사는 처제에게 아침식사를 했느냐고 묻는다. 먹었다고 하자 이번에는 차를 마시겠느냐고 묻는다.
간호사가 전용 부엌에서 쟁반에 담아온 따뜻한 차와 비스킷은 아침식사로 손색이 없었다. 이렇게 이른 시간이면 틀림없이 아침을 걸렀을 것으로 믿은 모양이다. 처제는 뜻하지 않은 친절에 놀란 듯 맛을 느낄 새도 없이 식사를 마쳤다. 혹시 돈을 내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간호사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에 “웰컴” 하고 답하며 환한 미소로 돌아선다.
서울에서 남편을 간호하기 위해 병실에서 지낸 경험이 있는 처제의 머릿속은 복잡한 듯했다. 환자 가족이 의사나 간호사에게 식사를 산다면 모를까, 아무리 호주라지만 생판 낯 모르는 간호사에게 환자 가족이 식사 대접을 받다니. 처제는 점심식사를 하러 병원을 나온 길에 12달러를 주고 초콜릿 한 상자를 사서는 작은 선물이라며 간호사에게 주었다. 간호사는 미소와 함께 고맙다고 답하고 중환자실에 근무하는 다른 간호사들과 나눠 먹었다. 처제는 얼마간 부담감을 덜었는지 은근히 자랑까지 했다.
아내는 첫 수술을 받은 지 6일 후에 햇빛이 잘 드는 창가 병실로 옮겼다. 입에 물린 호스도 제거하고 수면제도 중단해 6일 만에 의식이 돌아왔다. 144시간의 그 긴 잠에서 깨어난 아내의 첫마디는 이랬다.
“어이구 힘들다.”
다행이었다. 사람도 잘 알아보고 말도 정상적으로 잘한다. 막 깨어난 아내에게 간호사가 들려준 이야기는 처제가 선물한 12달러짜리 초콜릿이었다. 중환자실 구석구석은 하루 종일 CCTV(폐쇄회로TV)로 녹화되는데, 처제가 간호사에게 초콜릿을 주는 장면이 잡힌 모양이다. 환자 가족으로부터 받은 어떠한 선물도 보고하고 모아서 자선단체에 기증해야 한다는 병원 내규를 어겼다는 것이다. 아내는 한국에서 온 동생이 잘 모르고 한 짓인데 일종의 성의 표시로 생각하라고 잘 설명했다고 한다. 설명을 잘한 것인지 해프닝은 별다른 문제없이 넘어갔지만, 하마터면 엉뚱한 피해를 줄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