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제미와 균형감이 돋보이는 K7.(왼쪽) 기아차의 중형 세단 K5.(오른쪽)
“(오늘 같은 날씨에 늦게 나타난 당신에겐 전혀 내키지 않는 말이지만) 무슨 좋은 일 있나?”
“그럼, 좋고말고. 디자인 품평을 했는데, 아주 잘 나왔지.”
“무슨 차를 품평했기에?”
“하하, 노코멘트. 2년만 기다리면 당신도 감탄할 거야.”
K5, 쏘나타를 잡아먹다?
확신에 가득 찬 슈라이어의 눈빛을 기억하면서, 정확하게 2년을 기다렸다. 그랬더니 정말 ‘끝내주는’ 차가 나왔다. 자동차 판매 ‘전교 1등’을 독차지하던 쏘나타를 단숨에 누른 K5 말이다. 지난 6월부터 K5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차다. 6월1일부터 6월30일까지 1만673대가 팔렸다. 그 뒤를 9957대가 팔린 YF쏘나타가 머쓱하게 따르고 있다. 매월 1만대 넘게 팔리던 쏘나타가 K5가 나오자마자 1만대 밑으로 고개를 숙이면서 2위로 밀린 것이다.
아시다시피, 쏘나타와 K5는 거의 비슷한 차다. 같은 골격에서 출발했고, 엔진도 유사하다. 변속기도 같은 걸 쓰면서, 차체 크기도 비슷하고, 심지어 연비와 최고출력까지 똑같다. 그래서 ‘다른 건 디자인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거고, 2년 전 슈라이어가 확신한 것처럼 많은 사람이 K5의 디자인에 감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기아차가 기세를 올린 건 K5가 처음은 아니다. 맏형인 K7이 판매량에서 국가대표 대형차인 그랜저를 4개월 연속 앞서고 있으며, 6월에는 그랜저보다 두 배 넘게 팔렸다. 스포티지R도 투싼ix보다 많이 팔렸고, 쏘렌토R도 싼타페보다 잘나간다.
기아는 참으로 오랫동안 오르지 못하던 ‘판매왕’ 자리를 꿰찼다. 기아차는 6월에 2만9716대를 팔았다. 현대차보다 4000여 대 많은 숫자다.
기아차가 출시한 ‘야심작’들은 현대차 경쟁모델과 골격, 엔진, 변속기 등이 거의 같다. K5가 쏘나타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K7은 그랜저를, 스포티지R은 투싼ix를, 쏘렌토R은 싼타페를 기본으로 했으나 ‘디자인을 확 바꾼’ 차다. 그래서 이런 말이 나온다. 기아차의 승리가 아니라 ‘디자인 기아’의 승리라고.
잠시, 30여 년 전으로 시간을 되돌려보자. 기아차는 쿨(cool)한 디자인과는 거리가 먼 회사였다. 독자적인 디자인이란 게 없었다. 일본 디자인을 들여와 팔거나 유럽차를 조립해 생산했다. 정부가 단행한 공업합리화 조치 탓에 1981년부터 한동안 승용차를 만들지도 못했다. 트럭과 버스만 만드는 회사가 된 것이다. 기아차는 예쁘고 멋진 디자인의 자동차를 만드는 곳이 아니라 튼튼하고 질긴 운송수단 제조업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