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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화한 5세대, 저항의 6세대가 뒤엉킨 ‘살부(殺父)’의 변증

권력화한 5세대, 저항의 6세대가 뒤엉킨 ‘살부(殺父)’의 변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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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명한 자의식과 문제의식을 갖고 자신의 영화세계를 구축해가려는 신예 작가들. 중국 영화시장을 키워야 한다는 일념 아래 스스로 권력이 되어 상업영화를 만드는 어제의 거장들. 그리고 무시할 수 없는 양적 지분으로 사회주의 조국을 찬미하는 이른바 ‘주선율 영화’. 이들 세 그룹이 정립(鼎立)한 오늘날의 중국 영화 지형도를 자장커와 장이머우, 펑샤오강, 천카이거라는 아이콘을 통해 들여다본다.
권력화한 5세대, 저항의 6세대가 뒤엉킨 ‘살부(殺父)’의 변증

장이머우 감독의 최근작 ‘황후화’(아래)와 천카이거, 장이머우, 자장커 감독(왼쪽부터 시계 방향).

2007년 2월17일 베를린영화제. 중국 영화 ‘투야의 결혼(圖雅之婚事)’이 황금곰상의 주인공으로 호명됐다. 우리에게는 이름조차 낯선 왕취안안(王全安) 감독의 작품. 생김새가 비슷한 두 여자의 운명을 그린 ‘월식(月蝕·1999)’으로 데뷔한 이래 농촌에서 도시로 탈출한 여자의 삶을 그린 ‘경칩(驚蟄·2004)’을 거쳐 내놓은 세 번째 장편으로,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로 꼽는 베를린영화제 최우수상을 거머쥔 것이다.

이보다 앞서 지난해 베니스영화제는 자장커(賈樟柯) 감독의 신작 ‘스틸라이프(三峽好人)’에 황금사자상을 안겨주었다. 싼샤댐의 건설로 수몰돼가는 마을에서 정물처럼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그려낸 수작으로 평가받았다. 왕취안안과 달리 자장커는 전작 ‘세계(世界·2004)’ ‘임소요(任逍遙·2002)’ ‘플랫폼(站臺·2000)’ ‘소무(小武·1997)’ 등이 부산영화제와 전주영화제 등을 통해 소개돼 중국 영화에 관심 깊은 국내 팬들에게 익숙한 이름이다.

왕취안안과 자장커의 수상 소식 위로 천카이거(陳凱歌)나 장이머우(張藝謀) 같은 그들 선배의 이름이 자꾸 겹치는 것은 필자만의 느낌이 아니리라. 천카이거나 장이머우가 데뷔한 지 20년이 훌쩍 넘었음에도 여전히 오늘의 중국 영화(‘오늘의 아시아 영화’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는 베를린이나 베니스, 칸과 같은 서구에 의해서 ‘호명’되고 ‘발견’됨으로써 자신의 이름을 얻고 있다. 1983년 천카이거가 ‘황토지(黃土地)’를 들고 나타났을 때, 1987년 장이머우가 ‘붉은수수밭(紅高粱)’을 들고 나타났을 때 낭트나 로카르노, 베를린이 이들을 추켜세우지 않았더라면 이후의 풍경이 어떻게 펼쳐졌을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스스로 正典을 만들지 못하고

이들 영화제 수상을 계기로 천카이거와 장이머우는 이후 ‘5세대’라는 찬사와 영예를 얻게 됐고, 타지로부터 자신들의 고향으로, 서구로부터 중국으로, 외부로부터 내부로 귀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외부로부터 연유한 칭호를 자신들의 내부에서 더욱 굳건히 다지면서 정전(正典, canon)화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의 영화는 뛰어났다. 이제 막 악몽과도 같은 긴 터널을 벗어난 1980년대의 중국. 세상에 대한 직설이 허용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이들은 전복적인 화면의 분할과 화려한 색채의 대비, 1920년대 농촌과 여성이라는 제재들을 은유적으로 활용하며 중국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했다. 오랫동안 동양의 정서에 목말라 있던 양인(洋人)들에게 이들 영화는 매혹적일 수밖에 없었다. 개혁과 개방의 길로 들어서긴 했으나 여전히 경직된 정치적 노선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던 중국의 문화예술계가 이들을 외면하는 동안, 그렇게 그들은 외부에 의해 호명되고 발견됐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자신의 내부로 돌아와 인정받기까지는 꽤 여러 해가 걸렸다.

중국 영화의 이런 경로, 즉 내부에서는 상영조차 금지된 채 외부를 전전하다 이름을 얻으면 다시 내부로 돌아와 정전이 되는 구조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스스로 정전을 만들지 못하는 이들의 슬픔. 그것은 어쩌면 이전 세대에 너무나도 강력한 정전을 스스로 만들어온 역사의 반작용일지도 모른다.

사회주의 실험이 시작된 1949년 이후 문화혁명의 시대에 이르러 최고조를 구가한 ‘정전 만들기’ 역사에 대한 소리 없는 두려움. 문화혁명 당시 장칭(江靑)이 주도한 이른바 ‘모범극영화’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국가권력에 의해 선전선동의 도구로만 인식되면서 세세한 영화적 장치까지 모두 예술적 창작이 아닌 이데올로기적 지시에 따라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던 영화들, 그리고 그 영화들이 ‘경전(經典)’이라 불리던 시대의 아픔을 뼛속 깊이 체험한 이들이 갖고 있는 두려움이 오늘도 남아 있는 것이다.

자장커의 이름이 오늘날 중국에서 불려질 수 있었던 경로 역시 비슷하다. 사실 자장커는 중국 영화계의 마이너리티에 불과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기 영화의 무대가 되곤 하는 산시(山西)성 펀양(汾陽)이라는 깡촌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그곳을 탈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미술을 공부했고, 어느 날 ‘황토지’를 보고 느낀 충격을 원체험 삼아 영화의 꿈을 키우게 됐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중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영화인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이던 베이징영화대학에도 감독과가 아닌 문학과에 입학했고, 이로 인해 늘 알 듯 모를 듯한 차별의 시선에 시달려야 했다.

학창시절 그가 만든 ‘샤오산의 귀가(小山回家)’라는 단편영화는 교수와 친구들에게 내동댕이쳐지다시피 거부됐으나, 1996년 홍콩 독립단편영화제 극영화부문 금상을 수상했고 그는 서서히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렇듯 그에 관한 첫 발견은 홍콩에서 이뤄졌지만, 그가 영화의 세상을 항해할 수 있게 만들어준 것은 베를린과 낭트, 베니스였다. 제3회 부산영화제가 ‘소무’에 뉴웨이브 부문 상을 주어 일조했다는 점이 그의 윗세대와 다르다면 다른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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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근 한국외국어대 교수·중국문화 dagenn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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