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굳건하게 유지돼온 미일동맹이 흔들리고 있다는 문제 제기가 일본 내에서 확산되고 있다. 6자회담에서 파생되는 동북아 다자안보 구도의 틀 속에서 미중관계가 가까워지는 사이 일본은 외톨이가 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다. 특히 ‘6자회담을 이용한 동북아 다자안보체제 추진’을 공약으로 제시한 오바마 행정부의 등장이 예고된 후 일본 내에서, 특히 보수진영에서 이에 대한 우려가 한층 짙어지는 모양새다. 이러한 우려를 잘 보여준 일본 시사 월간지 ‘센타쿠(選)’ 2008년 9월호의 특별 리포트 ‘미일동맹 불요론(不要論) 태동하나’ 기사를 ‘센타쿠’측의 허락을 얻어 번역, 게재한다. 미국이 염두에 두고 있는 동북아 안보구조는 21세기 미일동맹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이는 또 한미동맹에 어떻게 작용할지 살펴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편집자’
2008년 7월 일본 도야코에서 열린 G8 정상회담 당시의 사진.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과 친근한 대화를 나누면서도 후쿠다 야스오 일본 총리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의 모습 때문에 화제가 됐다.
라이스 장관과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가 추진해온 6자회담이 현재 교착상태에 빠지기는 했지만, 만약 앞으로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미일동맹은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는 그에 대해 이미 역사적인 경험을 갖고 있다. 20세기 벽두에 체결됐던 영일동맹은 1922년 워싱턴 군축회의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4개국 조약으로 대체됐다. 미일동맹이 6자회담으로 대체될 가능성은 현 단계로서는 기우에 지나지 않지만, 6자회담의 향방에 따라 미국과 일본이 상대에 대해 갖는 중요성의 비중에는 큰 변화가 생길 수도 있다.
미국의 6자회담 발전구상
일본 국내 언론에는 부각되지 않았지만, 라이스 장관은 ‘포린어페어스’ 7·8월호에 기고한 ‘새로운 미국의 현실주의’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6자회담은 검증 가능한 북한의 비핵화를 목표로 협력과 조정의 장이 되고 있다. 특히 북한이 지난해 핵실험을 강행했을 당시 5개국은 재빨리 연대행동에 나서 유엔안보리를 통해 북한에 압박을 가함으로써 북한이 결국 6자회담의 틀 안으로 복귀해 영변 원자로의 폐쇄를 결정하게 했다. 미국은 NAPSM의 설립을 통해 지금까지 추진돼온 6자회담의 협력을 제도화하고자 한다.”
이전에도 라이스 장관을 비롯한 미국의 고위 관료들은 북핵문제가 해결되고 북미, 북일관계가 정상화된 이후에도 6자회담을 해산하지 않고 ‘동아시아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같은 지속적인 기구의 틀을 유지하는 데 대해 아이디어 차원의 의견을 개진한 바 있다. 하지만 미국이 이를 좀 더 구체화한 NAPSM에 대해 직접 언급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이와 함께, 대북유화정책이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6자회담의 틀을 강력히 추진해온 힐 차관보는 7월31일 미 상원 군사위원회에서 중국에 대해 높이 평가한 바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2002년 10월 부시 대통령과 장쩌민 국가주석이 북한 핵문제를 다루기 위한 기구로서 6자회담의 창설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이후 6년 동안 양국은 북핵문제뿐 아니라 보다 넓은 동북아시아 전반의 문제를 토의하는 6자회담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게 됐다. … 6자회담 의장을 맡은 중국 정부의 결정적 역할과 미중 간의 밀접한 협력은 한반도와 동북아를 뛰어넘는 의미를 갖게 됐다. 이는 동북아 내에서 책임 있는 이해공유자(stakeholder)로 등장한 중국에도 플러스가 됐다.”
최근 미중관계가 호전됐는지 악화됐는지에 대해 근거가 충분치 않은 전망이 난무하지만, 분명한 것은 군사, 인권, 민주화라는 가치를 별도로 하면 두 나라의 정치적 관계가 상당한 속도로 진전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2002년 10월25일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 부부가 미국 텍사스 주 크로포드의 부시 대통령 별장에서 엄청난 환대를 받은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도 2003년 5월23일 크로포드 별장에 초대받아 떠들썩하게 보도된 바 있지만, 이는 미중 정상회담이 열린 지 7개월이나 지난 뒤의 일이다.
당시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공격이 임박한 상황에서 중국을 이용해 한반도를 안정화할 필요가 있었고, 장 주석은 부시의 강력한 요청을 수락하는 대신 미국의 대만에 대한 무기 수출을 삼가달라고 주문했다. 북한을 중국에 맡기는 대신 미국은 대만에 과도한 간섭을 하지 않는다는 ‘보스끼리의 교환’이었다. 이는 1905년 ‘가쓰라-태프트조약’에서 미국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일본은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지배에 이견을 달지 않기로 한 약속과 흡사하다.
이처럼 6자회담에 있어 두 나라의 관계는 시작단계부터 견고했으며, 앞으로 NAPSM이 제대로 기능을 할지도 두 나라 간의 협력 여부에 달려 있다. 동북아 지역에서 압도적인 군사력과 경제력을 과시하면서 미국과의 공고한 연대까지 구가하고 있는 중국과 비교해볼 때, 일본이 주력하고 있는 문화·예술을 중심으로 하는 소프트파워 외교가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둘지 관심이 쏠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변변치 못한 동맹국’ 일본
일본이 동북아의 집단안전보장체제에 편입되면 미일동맹은 폐기되는 것일까. 라이스 장관의 논문은 이 점에 대해 정확히 다루고 있지 않다. 사실 냉전의 산물로 태어난 미일 안보조약은 구소련의 군사적 위협에 대항한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냉전 이후에도 미일 양국은 중국과 북한의 군사적 증강에 공동으로 대응한다는 암묵적인 동의하에 동맹의 명맥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최근 미국이 주도하는 대북정책이 중국의 협조로 성공할 수 있다면 미일동맹은 어떻게 될까.
2008년 베이징올림픽 이후 후진타오 정권이 어디로 향할 것인지와 관련해, 국제사회에서는 대체로 중국의 평화적 번영을 점치는 시각이 우세하다. 세계평화에 역행해 스스로 정치적 고립화를 자초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국제정세 판단에 있어 속단은 금물이지만 6자회담의 중요성은 앞으로 점점 더 커가는 반면 미일동맹의 필요성은 상대적으로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미일동맹의 위기 징후는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일본은 2001년 후반부터 해상자위대가 인도양에서 급유활동을 하고 있지만, 테러특별조치법 기한이 2007년 만료돼 급유활동이 중단됐다. 이는 2007년 참의원선거 결과로 만들어진 ‘여소야대(참의원) 정국’을 이용해 민주당 등 야당이 특조법 연장에 협조하지 않은 데 근본적 원인이 있다.
당시 미국과 영국의 언론들이 일본을 거세게 비판했던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전세계적으로 테러와의 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도 일본은 ‘우리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일관하며 인도양의 주유소 역할에 머물렀다. 민주당 등 야당은 미국과의 동맹은 안중에도 없고 미일동맹에 비교적 열의를 보이고 있는 여당을 뒤흔들었다. 정국을 해산, 총선거로 끌고 가려는 저차원의 당리당략만 있을 뿐 국제사회에서 일본이 어떤 국가가 돼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2002년 10월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텍사스 주 크로포드 목장에서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과 만나 회담을 가진 뒤 미소 짓고 있다. 한국에서도 화제가 됐던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크로포드 목장 방문은 그로부터 7개월 후의 일이었다.
미국의 무관심
국가 지도자의 성향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고이즈미와 아베 전 총리가 미일동맹 중시의 자세를 취하며 미국과의 관계에 역점을 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외무성이 주창한 ‘가치관 외교’는 미국 공화당의 대선후보였던 존 매케인 상원의원으로부터 대단한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후쿠다 전 총리는 2007년 9월26일 취임한 직후 “미일동맹 강화와 아시아 외교의 동시 추진이 보다 나은 성과를 가져올 수 있도록 적극적인 아시아 외교를 펼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고이즈미와 아베 정권의 외교정책이 대미 일변도로 추진돼온 데 대해 불만을 품고 외교정책의 무게중심을 대중(對中)외교로 전환한 것이다. 하지만 미국 내에서는 이 같은 일본의 외교정책 전환에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후진타오 주석이 방일 중에 발표한 중일 공동성명에는 “중일 관계는 두 나라에 가장 중요한 양국 관계”라고 규정돼 있다. 지금까지 일본에 ‘가장 중요한 국가’는 미국이었지만, 이때를 계기로 중국에 그 타이틀을 내준 것이다.
미국 역시 일본에 대해 무신경해지고 있다. 2007년 미 하원은 ‘전쟁 중 위안부에는 일본군의 강제동원이 있었다’는 결의안을 본회의에서 가결했다. 제안자는 중국계 미국인으로부터 적지 않은 선거자금을 받은 마이크 혼다 하원의원이었다. 일본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데 대해 사과하지 않은 미국이 세계의 재판관 같은 모습으로 타국을 심판하는 데 대한 일본 내의 불만은 비단 보수진영만의 것이 아니었다.
외무성에서 인도와 프랑스대사관 근무 등 요직을 지낸 히라바야시 히로시(平林博)의 저서 ‘수뇌외교력’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미국과 일본 양국의 관계에 커다란 변화가 오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설명이다.
“외무성 북미국은 그 어떤 부서보다도 막강했다. 특히 북미국 안전보장과는 외무성에서 미일동맹을 중심으로 하는 안전보장정책을 담당하는 중요한 과였다. 하지만 종합외교정책국이 창설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종합외교정책국 창설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북미국의 위치를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되돌리자는 것 때문이었다. 북미국의 권한과 권위를 적정한 수준으로 떨어뜨려야 한다는 것이다.
정계에서도 그 어느 때보다 친미파가 줄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미국에서 대학을 나온 젊은 의원이 크게 늘었음에도 미국 중시의 목소리는 그리 높지 않다. 예전에는 시나 모토오(椎名素夫) 의원 등 미국과의 의원교류에 열성을 보인 자민당 의원이 있었지만 지금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정계도 ‘미국의 주술’로부터 해방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역사의 반복?
반면 미중관계는 군사와 인권 분야를 제외하면 긍정적인 변화가 미묘하게 나타나고 있다. 부시 행정부 동안 미중관계 개선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로버트 죌릭 전 국무부 부장관은 2005년 중국에 대해 “책임 있는 이해공유자가 됐으면 좋겠다”고 발언한 바 있다. 이듬해인 2006년에는 미 의회 증언에서 대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유명한 발언을 했다. “(대만의) 독립은 전쟁을 의미한다. 전쟁은 미 해병대(의 개입)를 의미한다.” 대만의 독립론자가 독립을 외치면 미국의 해병대가 희생될 수밖에 없으니 독립을 논하지 말라는 요구다. 부시 대통령이 직접 ‘대만의 독립 반대’를 언급한 것도 바로 이 시점이다.
미국이 명시적으로 미일동맹을 경시하는 언급을 할 리는 없다. 그러나 미국이 NAPSM을 강조하면 할수록 미일동맹이 약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22년 위싱턴 군축회의에서 주력함대의 비율 유지에만 급급했던 일본은, 영일동맹이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4개국 조약으로 대체되고 있다는 점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다. 이는 곧 (일본이 전승국으로서 4개국 군축조약에 참가한 이상 영국으로부터 더 이상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어) 영국으로부터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는 의미였음을 읽지 못했다는 뜻이다.
러일전쟁 직후에 러시아와 일본은 협상관계가 형성되면서 관계도 호전됐다. 이 무렵 미국은 일본을 위험한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만주라는 넓은 시장을 놓고 일본과 일전을 벌일 수 있다고 상정한 미국에 영일동맹은 눈엣가시와 같은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이에 따라 미국은 배후에서 영국을 부추겨 영일동맹 관계를 조금씩 약화시켜나갔다.
주지하다시피 국가 간 동맹은 서로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라 전략적 필요에 의해 성립되는 것이다. NAPSM의 중심을 중국이 맡고 미국은 상황에 따라 적당히 개입하는 형식으로 미래 동북아 안보체제가 확립된다면, 그 기능은 결과적으로 아시아 전역으로 확대해나갈 수도 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영일동맹은 폐기된 후였다’라는 90년 전의 교훈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주의를 집중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