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호

“실용적으로 여론 적응하면서 부단히 개혁”

영국 보수당 역사에서 배우는 ‘보수의 길’

  • 홍석민 연세대 학부대학 교수

    입력2024-08-05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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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국 보수당 장기 집권 비결은 ‘혁신’

    • 성공 원동력은 끈질긴 ‘집권 열망’

    • 개혁 안내자는 역사적 경험에서 나온 지혜

    • 한국에서 보수는 反개혁 세력…의도적 왜곡

    • 보수당 지도자 = 정책에 정통한 유능한 지도자

    • 선거 패하면 당 조직·정책 일신…한국 보수는?

    영국 국회의사당. [Gettyimage]

    영국 국회의사당. [Gettyimage]

    인류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보수주의 정당은 당명에 아예 ‘보수’를 표방한 영국 보수당이다. 보수당의 기원은 영국 내전(1642∼1651)에서 의회파에 맞서 왕권과 국교회 권위를 지지한 왕당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Conservative(s)’라는 용어보다 보수당과 보수당원을 가리키는 데 더 많이 사용되는 ‘토리(Tory, Tories, Tory Party)’가 처음 등장한 것은 1679년 가톨릭교도의 국왕 즉위를 금지한 배척법 위기 때였다. 이 두 사건의 발생 시기는 각각 조선의 인조-효종과 숙종 재위 기간에 해당한다.

    영국 보수당의 역사를 조선에 대비하면, 토지 귀족으로서 유학·주자학을 교조주의적으로 숭상하던 사대부 양반들이 근대 정당으로 발전해 현재 집권당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선거 승리를 위해 자신들이 멸시하던 중인인 상인과 공인들이 주도하는 자본 세력은 물론 노비와 천민의 지지까지 얻어야 집권이 가능한 민주주의를 적극 수용하고 그에 적응했다는 얘기가 된다.

    한반도에선 상상조차 불가능한 이런 일이 영국 엘리트 지배층이던 토지 귀족들에겐 현실이다. 이런 믿기 힘든 현상은 영국 보수당이 부단한 개혁을 시행하며 진보를 거듭해 오지 않았다면 실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한국에선 보수가 반(反)개혁 세력이자 진보의 반대로 통용되고 있다. 이는 오해가 아니라 의도적 왜곡의 결과다. ‘진보’의 반대는 ‘보수’가 아니라 ‘퇴보’ 혹은 ‘반동’이다.

    보수주의 본질은 정치적 실용주의(political pragmatism)

    영국 보수당이 지난 400여 년 세월 동안 개혁을 거듭하며 장기간 집권 정당 위상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는 유능하고 인기 있는 지도자, 효율적인 당 조직, 풍부한 재정, 여론을 잘 반영하고 광범위한 사회계층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는 정책, 유능하고 효율적인 선전·홍보 조직, 그리고 경쟁 정당의 분열, 장기간에 걸친 중간계층 확대와 노동계층 축소 같은 우호적 선거 환경 등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보수당이 정치적으로 성공한 가장 핵심적 원동력은 놀라울 정도로 끈질긴 ‘집권 열망’이었다. 집권을 위해 보수당은 오랜 세월 시대와 여론의 변화에 실용적으로 적응하면서 부단한 개혁을 계속해 왔다. 다만 보수당은 여론 변화가 대중뿐 아니라 지식인 사회로까지 확산됐을 때에야 비로소 실용적 적응을 추구했다.

    1846년 이후 심각한 내부 분열을 성공적으로 회피해 온 것도 보수당 성공의 한 요인이 됐다. 실제로 영국 자유당은 제1차 세계대전 중 분당으로 인해 1931년 총선 패배 후 영구 소멸했다. 이런 맥락에서 보수주의의 본질은 체계적 이념이라기보다 정치적 실용주의(political pragmatism)로 보는 게 더 합당하다.

    그렇다고 보수당의 개혁과 변화가 집권을 위해 무원칙적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다. ‘근대 보수주의 아버지’ 에드먼드 버크 등의 저명한 이론가들은 보수주의는 불완전의 정치철학, 유기체론, 전통주의라는 세 가지 원칙에 기초해 작동한다고 강조한다.

    불완전한 인간 이성에 기초한 사회 역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사회 공학적 시각에서 함부로 급격한 개혁이나 혁명을 인위적으로 시행하면 필히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사회는 태어나 성장·진화해 온 역사·관습·경험·지혜·전통의 산물이며, 이런 사회의 변화와 개혁의 안내자는 역사적 경험과 거기서 나온 역사적 지혜라는 것이다. 보수당은 불완전의 정치철학, 유기체론, 전통주의라는 보수주의 3원칙에 기초해 주요 시대와 여론 변화에 적응하며 점진적·부분적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오늘에 이른 것이다.

    19세기 들어 영국 정치가 근대화하는 가운데, 1832년 ‘Conservative’라는 단어가 보수당 당명에 공식 채택됐다. 그러나 1832년은 제1차 선거법 개혁으로 중간계층이 유권자로 등장하고 이들이 옹호하는 자유주의와 자유무역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해였다. 지주와 보호무역주의자에 지지기반을 두고 있던 보수당에는 위기의 서막을 알리는 해이기도 했다.

    디즈레일리, 유권자 연합 이뤄 보수당 위기 극복

    보수당 당수 로버트 필은 시대와 여론 변화에 적응해 온건한 몇몇 개혁을 통해 상류층과 중간계층 간의 ‘유권자 연합’을 구축함으로써 1841년 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1846년 무리하게 곡물법을 폐지함으로써 당을 필파(Peeltes)와 보호무역주의자들로 분당시키고 말았다. 이후 1874∼1980년 집권 다수당이 될 때까지 30여 년 동안 보수당은 당 역사상 최장기 야당 시절을 겪으며 소멸의 위기에 직면했다.

    영국 ‘근대 보수당의 아버지’라 불리는 .[ Gettyimage]

    영국 ‘근대 보수당의 아버지’라 불리는 .[ Gettyimage]

    ‌이 위기를 극복한 것은 ‘근대 보수당의 아버지’라 불리는 벤저민 디즈레일리였다. 그는 1852년에 보호무역주의를 버렸지만 정책 면에서 보수당은 필파나 자유당과 차별성을 띠지 못했다. 디즈레일리는 중간계층을 건너뛰어 노동계층에 직접 호소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가 의도하진 않았지만 원안보다 더 과격한 제2차 선거법 개혁안 통과(1867)를 주도해 도시 노동자들에게 선거권을 부여했다. 집권 후엔 노동계층의 필요를 자유당보다 더 잘 충족시키는 사회입법을 통과시켰다. 또한 실용적이고 강력한 외교정책을 펼쳐 영국과 대영제국의 위상을 드높였다. 나아가 현재까지 보수당의 전국 당 조직 역할을 하고 있는 전국연합(National Union·1867)과 중앙본부(Central Office·1870)를 창설했다.

    이러한 디즈레일리는 보수당의 정치적 성공에 몇 가지 중요한 유산을 남겼다. 첫째, 보수당은 아이디어와 정책을 결여한 ‘농촌 귀족들의 소수 파당’에서 근대적 정당, 정상적이고 유능한 집권 여당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됐다. 둘째, 선거법 개혁과 사회입법 덕에 보수당은 시대와 여론의 흐름, 즉 대중민주주의 발흥과 필수적 사회개혁에 대한 시대적 요청과 함께 갈 수 있는 능력과 의지, 전통을 갖추게 됐다. 그러면서도 노동계층과 함께 왕실, 국교회, 상원, 제국 같은 전통적 보수주의 가치를 계속 수호할 수 있게 됐다. 셋째, 보수당은 동일한 친노동계층 정책을 통해 이들과 상류층 간의 보수당 유권자 연합을 이뤄내, 1880년대 자유당의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의 아일랜드 자치법안과 과격한 개혁안에 놀란 많은 중간계층의 지지도 확보했다.

    이처럼 보수당은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해 전 계층의 통합을 이뤄내고 동시에 강력하고 실용적인 외교정책을 추구함으로써 1880년대 들어 애국심, 국가안보, 국가와 국민, 제국의 통일성을 수호하는 특정 계급과 특정 지역을 초월한 전국 정당이라는 이미지를 갖추게 된다.

    국가의 실패 이후 시장의 귀환

    계층과 가치 측면에서 국가와 국민적 통일성을 이뤄냄으로써 보수당은 일국 보수주의(혹은 일국 토리주의·One-nation Conservatism/Toryism)라는 전통을 만들어냈다.

    이 전통의 동력은 사회적 엘리트 계층이 피통치자인 국민의 복지에 대한 책무를 다함으로써 사회적 안정성을 높여주는 온정주의(노블레스 오블리주)였다. 일국 보수주의 전통을 통해 보수당은 비록 본질적으로 작은 국가를 선호하지만, 집권에 필요한 경우 큰 국가를 어떤 이념에도 얽매이지 않고 실용적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전통을 갖추게 됐다.

    1886년부터 지금까지 보수당은 총선에서 패하면 정책과 당 조직을 일신하고, 집권하면 이 정책들을 입법화해서 대중적 지지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반복해 왔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19세기에 보수당이 수호하던 전통 가치는 중요성을 잃어갔고, 경제와 복지가 점차 주도적 선거 이슈가 됐다. 동시에 선거권의 확장으로 1918년까지 대중민주주의 시대가 도래해 노동자가 유권자의 다수를 차지하게 됐다.

    대중은 새로운 유권자의 이익을 위해 큰 국가를 선호하기 시작했다. 1890년대의 대불황은 물론 큰 국가를 요구했던 총력전 성격을 띤 제1·2차 세계대전, 두 전쟁 사이의 세계대공황과 실업 등은 그 같은 여론을 강화시켰다.

    1886∼1964년 보수당은 자유당(1906∼1915)과 노동당(1945∼1951)에 두 번의 참패를 당하면서 이런 시대와 여론의 변화에 적응했다. 보수당은 1924∼1940년(1929∼1931 제외) 집권기에 경제와 사회정책 분야에 실용적이며 선택적인 국가 간섭을 시행했지만 이러한 온건하게 팽창적인 재정·통화 정책은 당대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한 ‘진통제’에 그쳤다. 이어진 1951∼1964년 집권기에 보수당은 전후 ‘합의’ 즉, 케인스주의적 총수요 관리 정책을 통한 완전고용과 주요 기간산업의 국유화, 복지국가 및 조합주의와 노조와의 협조 등을 실현하려 했다.

    사회주의에 근접한 보수당의 이런 ‘좌클릭’ 행보는 당내 큰 저항 없이 온정주의에 기초한 일국 보수주의 전통에 따라 이뤄졌다. 전후 두 정당의 정책이 너무 유사해서 ‘이념의 종말’이란 말까지 나왔다.

    하지만 두 당이 큰 국가를 통해 추구한 이상은 달랐다. 노동당은 재분배와 평등의 이상을 추구한 데 반해, 보수당은 자본주의가 한결 효과적으로 작동하게 만들고 사유재산의 특권 남용을 방지함으로써 자유가 더욱 질서 정연하고 책임감 있게 실현되도록 했다.



    시대와 여론 흐름과 함께하는 정책

    영국 의회는 긴 벤치형 의자가 서로 마주 보도록 좌우로 나뉘어 배치됐다. [영국 의회]

    영국 의회는 긴 벤치형 의자가 서로 마주 보도록 좌우로 나뉘어 배치됐다. [영국 의회]

    1960∼70년대에 경기가 침체하자 영국은 ‘영국병’이 든 ‘유럽의 환자’로 전락했다. 1970년대 경기침체에 따른 실업률 상승과 인플레이션의 동시 발생이란 사상 초유의 스테그플레이션은 케인스주의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결국 ‘국가의 실패’가 확인되고 ‘시장의 귀환’이 요청됐다. 대중 여론도 다시 작은 국가를 요청했고, 보수당은 1966년과 1974년 총선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1978∼1979년 ‘불만의 겨울’ 이후 집권한 보수당은 대처주의(Thatcherism)하에 커다란 ‘우클릭’ 행보를 내디뎠다. 인플레를 통한 성장과 완전고용의 이상 포기, 통화론에 기초한 건전 통화와 균형예산, 감세와 탈규제, 국유화된 기업 3분의 2의 민영화, 공영 임대주택과 정부 소유 공기업 주식 민간 매각을 통한 재산소유 민주주의(property-owning democracy), 노조 권력 축소, 복지국가 개혁 등이 추진됐다. 보수당이 집권을 위해 작은 국가로 회귀한 것이다. 이런 정치적 실용주의의 결과, 보수당은 1979∼1997년 18년 동안 당 역사상 최장기 연속 집권을 이뤄냈다.

    선거 때마다 복잡한 이해관계를 가진 다양한 유권자 집단이 늘면서 보수당 유권자 연합을 형성해 낼 필요성도 커졌다. 이에 보수당은 전국연합과 중앙본부의 꾸준한 개혁 외에도 현재와 미래의 유권자에게 보수주의를 교육·선전하기 위해 성인, 청소년, 유초등부, 여성, 노조, 재외국민을 전담하는 당 조직을 만들고 각각의 기관지를 발행했다. 또한 불완전한 이성에 기초한 프로그램 정치를 불신한다 해도, 대중민주주의 시대에 정책 없이 더는 집권할 수는 없었다. 이에 보수당은 어느 정당보다 먼저(1929) 그리고 더 많은 정책 연구소를 설립했다. 많은 보수당 지도자는 이런 연구소에서 정치 경력을 시작하기 때문에 정책에 정통한 유능한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1918년 이후 보수당이 집권하기 위해선 상류층과 중간계층에 더해 최소한 노동 유권자 3분의 1 이상의 지지가 필요하게 됐다. 이런 불리한 선거 환경 속에서도 보수당은 20세기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기간에 영국 정치를 지배하는 ‘대중/노동계층 보수주의(popular 혹은 mass/working-class Conservatism)’라는 현상을 이뤄냈다.

    20세기는 몰락한 자유당 대신 발흥한 노동당이 아니라, 보수당의 세기였다. 2010년 총선에서 신노동당(New Labour)의 최장기 14년 집권을 끝내며 이어진 보수당의 14년 집권은 2024년 총선에서 1906년 이후 최대 참패로 막을 내렸다. 한국 정치에서 보수 진영을 대표해 온 국민의힘이 22대 총선에서 크게 패한 상황과 묘하게 일치한다. 하지만 영국 보수당이 그동안 보여준 정치적 실용주의에 기초한 집권 열망을 고려하면, 머지않아 시대와 여론의 흐름과 함께하는 정책을 갖추고 부활하리라 생각한다. 한국 보수 진영에서 지지를 받아온 국민의힘도 영국 보수당처럼 시대와 여론이 원하는 정책을 갖춰 다시 민심의 지지를 회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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