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선험(先驗)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자장가를 독송(讀誦)으로 불러줬다. 늦게 얻은 막내인 그를 신묘장구대라니 같은 주력(呪力)으로 재웠다. “세상 천지에 독송만한 자장가가 어디 또 있겠어요.” 무의식, 혹은 전생에 이미 불교와의 인연이 밀접했다. 그는 할 얘기가 무진장한 사람이다. 제 인생의 비밀과 깨달음을 꽁하고 가슴속에 묶어두지 않는다. 자유자재, 무장무애하게 털어낸다. 드러난 제 삶에 애착하지도, 항변하지도 않는다. 저만치 떠밀어내고 하하 웃으며 바라볼 줄 안다. 그는 춤추는 사람이다. 춤 안에 참선과 명상을 버무려놓은 사람이다. 버무린다, 이것은 혼합물을 만든다는 뜻이 아니다. 춤이 곧 선(禪)이었다. 춤으로써 그 어렵다는 참선에 드는 디딤돌을 놓은 것이다.
이선옥의 이야기는 듣고 또 들어도 새롭다. 제 삶을 치열하게 살고 난 뒤 그걸 윤색도 포장도 하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열어두는 사람만이 갖는 풍요라며 나는 감탄했다.
“사람들은 감정을 돌에 새겨요. ‘I hate you’라고. 집착이죠. 그러니 크게 얽매일 수밖에 없어요. 수행을 한 사람은 모래 위에 글씨를 써요. 파도가 밀려오면 글씨는 곧 쓸려나갑니다. 그만큼 자유로워지는 거지요. 도인은 물 위에 글씨를 씁니다. 쓰는 순간 지워지죠. 부처요? 부처는 허공에 씁니다. 부처라도 아예 쓰지 않는 것은 아니죠. 쓰더라도 아무런 자취가 남지 않는 것일 뿐.”
인간의 마음 안에 떠도는 희로애락애오욕과 탐진치를 이토록 탁월한 메타포에 담아내다니.
그의 어머니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전생을 읽고 미래를 예견하는 힘을 가진 분이셨다. 그는 그런 어머니가 나이 마흔여섯에 얻은 늦둥이였다.
“며느리 볼 나이에 아이를 가진 게 남부끄럽다고 날 떼어내려 모진 한약을 꽤나 들이켰답니다. 그런데도 안 떨어졌으니 내가 더 지독했던 거지. 출산할 때 다리가 먼저 나왔대. 그래서 ‘서있다’고 선옥이라 이름지은 거래요, 하하. 그렇게 낳은 지 1년 동안 사경을 헤맸대요. 어머니가 날 안고 백일기도를 했답니다. 백일째 되니까 드디어 미음을 먹더래요.”
이선옥은 개성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 한국전쟁이 터졌다. 아버지는 전쟁중에 지병이던 천식으로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날, 어머니는 “내일 11시에 너희 아버지가 돌아가실 것”이라며 침착하게 수의를 지으셨다.
피난처 부산에서 이매방 만나
아버지를 개성에 묻고 부산으로 내려간 건 1·4후퇴 때였다. 그의 말투를 가만히 들어보면 서울말씨에 이북말투와 경상도 억양이 살짝살짝 묻어난다. 한때 살았던 땅의 기억은 발음의 습관으로 남아 혀끝을 끝끝내 질기게 휘감는구나. 우리를 훑고 지나간 모든 감각이 무의식에 가라앉아 있듯.
삶은 우연이 아니라 엄연한 법칙에 의해 운행되는 철저한 질서인지도 모르겠다. 피난살이를 하던 부산집 2층에 이매방 춤연구소가 있었다는 것은 우연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매방은 살풀이에 일가를 이룬 춤꾼이었다.
아이 이선옥은 매일 창문 너머 춤연구소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제 집으로 내려와 춤을 흉내냈다. 엄마 치마저고리를 뒤집어쓰고 춤동작을 따라했다. 그에겐 오빠가 셋 있었다. 오빠들은 막내동생이 춤추는 것에 질색했다. 종아리를 걷어 회초리를 들었다. “기생이 되려고 그러냐, 무당이 되려고 그러냐”며 오빠들은 그를 꾸짖었다. 그러나 이선옥은 항복하지 않았다. 매를 맞은 후 다시 춤을 흉내냈다.
“어머니만은 말리지 않았어요. 얘는 이런 걸 해야할 아이이니 그냥 놔두라고 오빠들을 막아줬어요. 하긴, 그때 춤추는 사람은 기생 아니면 무당이었으니까. 어머니는 내가 나중에 먼 나라에 가서 여러 사람의 박수를 받으면서 섬에서 살 것이라고 예견하셨지요.”
“섬이라고요?”
“맨해튼이 섬이잖아요.”
4학년 때 서울로 올라온 이선옥은 을지로에 있는 김백초 무용연구소에 다녔다. 어린애가 선생을 찾아가 당차게 협상했다. “나는 돈이 없다. 대신 최고로 열심히 하겠다. 다른 아이들을 가르치는 걸로 교습비를 대신하겠다”고.
10원 한 장 내지 않고 김백초 선생에게 현대무용과 한국무용을 고루 배웠다. 김백초 선생은 최승희의 제자로 1953년 미국에 건너가 마사 그레이엄에게 현대무용을 배운 이였다. “너무 아까운 분이야. 1963년에 집안문제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거든.”
그는 인복을 타고났다. 늘 최고의 스승이 인생 길목에서 우연한 듯 서 있곤 했다. 김백초 선생이 그랬고, 나중에 다시 만나 살풀이춤을 전수해준 이매방 선생이 그랬다. 창을 가르쳐준 김소희 선생, 승무를 가르쳐준 한영숙 선생도 그랬다. 남들이 도시락을 싸서 찾아다닐 만한 대스승들이었다.
초립동춤을 추는 귀여운 용산초등학교 여학생을 눈여겨본 사람은 상명학교의 배상명 교장이었다. 그는 이선옥을 유난히 예뻐했다. 당시 이화여고가 무용으로 가장 유명했지만 이선옥은 배상명 선생이 계시는 상명학교에 장학생으로 뽑혀갔다.
중학생 때 이미 안무를 직접 했다. 촛불을 켜놓고 쪼그리고 앉아서 어린 나이에 가당찮게도 죽음을 명상했다. 죽음을 주제로 한 안무로 이선옥은 서라벌예대 콩쿠르에서 특등상을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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