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1년작 ‘김두한과 서대문1번지’(좌). 1987년작 ‘연산군’(우).
“‘거지왕 김춘삼’을 찍을 때 보니까 박노식 선생이 젊을 적에 복싱을 하셔서 그런지 주먹 액션이 아주 좋았어요. 다른 사람들은 쭉 밀어 치니까 볼품이 없는데, 박노식 선생님은 사람 앞에서 끊어 치는 폼이 일품이었거든요. 가히 세계적인 주먹이죠. 내가 처음 영화계에 들어갈 무렵에는 박노식 선생만큼 액션을 제대로 하는 배우가 없었어요. 사정이 그러니까 그나마 권투라도 배운 적 있는 나를 자꾸 쓸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래서 많이 출연하게 된 거예요.
그런데 나름대로 고충이 있는 게, 상대방은 내 스타일을 못 따라오거든. 내가 주먹을 휘두르고 나면 상대배우가 나한테 주먹을 뻗을 때까지 한참 걸리는 거야. 액션물을 자주 하다 보니까 아예 ‘액션배우’라 불리게 됐는데, 그 때부터 지방에만 내려가면 동네 건달들이 진짜 잘 하느냐, 한번 붙자면서 찾아오곤 했죠. 그러면 그들을 위아래로 쓱 훑어보고 ‘내가 배우만 아니면 한번 해 보겠소’ 그렇게 답해주었어요.
액션배우라는 말만 듣다 보니 지겹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러면 예술배우는 누구냐’고 주위에 물어보니까, ‘예술배우는 문학작품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에 출연해서 상을 타는 배우’라는 거야. 그 무렵에는 향토물이라고, 예전 한국문학작품을 영화화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그래서 ‘뽕’ ‘감자’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심봤다’ 같은 영화로 바꾸게 됐죠.”

1979년작 ‘시라소니’
“박노식 선생이랑은 그 영화 딱 한 작품만 했죠. 그 영화를 어떻게 해서 찍게 되었냐 하면, 미국 LA에서 비행기를 탔는데 보니까 박 선생님이 있어요. 이민을 가셨다고 하시더라고. 그때는 내가 한참 날릴 때인데, 나를 보더니 이런 말씀을 하세요. ‘나는 전라도놈이다. 처음에 서울에 와서 얼마나 설움을 많이 당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고향 사람들이 나를 찾을 때는 최소한 곰탕 한 그릇에 여관비는 꼭 쥐어보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걸 모른다.’ 그러면서 ‘대근아, 너 내 주먹에 한 번 맞아다오’ 하시더라고. ‘네가 내 영화에 조연으로 한번 출연해달라’는 뜻이었어요. 단번에 오케이 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거예요.”
한국영화 액션물의 계보에서 박노식은 첫 손에 꼽히는 거목이다. 그는 ‘마도로스 박’ ‘의리의 사나이 돌쇠’로, 또한 ‘남대문 용팔이’ 시리즈의 용팔이로 평생을 살았다. 한국 액션영화의 시작이라 불리는 ‘사나이 시리즈’의 원조 김효천 감독이 1969년에 만든 ‘팔도 사나이’ 역시 박노식이 주인공이었다.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에 학창시절 배웠다는 권투에서 나오는 남다른 액션은 선이 굵은 박노식의 매력을 결정지었다.

1986년작 ‘변강쇠’
반면 이대근의 김두한 캐릭터는 박노식이 갖고 있던 고독한 음지의 이미지보다는 사나이의 육체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혈기 방장한 액션이 특징이다. 지금이야 김두한의 이미지가 TV드라마 ‘야인시대’나 영화 ‘장군의 아들’의 매력남으로 격상되었지만, ‘협객 김두한’이 만들어질 당시에는 대중에게 ‘오물투척사건’의 이미지가 깊이 각인되어 있는 터였다.
‘협객 김두한’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한편 때론 희화화된 인간 김두한의 소박한 양면적인 모습을 그렸다. 특히 김두한을 맡은 이대근이 수하의 부하 단 두 명만을 데리고 안개 낀 장충단공원에서 벌이는 3대30의 싸움은 장쾌하다 할 정도다. 이후 이대근은 박노식, 장동휘라는 선배 액션영웅과 일종의 세대교체를 하면서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엽까지 액션영화의 명맥을 이어 나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