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창의 사촌형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세상을 휘어잡기에 넉넉하다”고 혀를 끌끌 찼다는 표현에서 바둑을 향한 그의 집념을 읽을 수 있다. 이옥은 그가 어려서 자주 병에 걸렸고, 오로지 바둑으로 10년을 보낸 뒤 어느 날 활연대오(豁然大悟)하였다고 적었다. 보성에서 보낸 그의 수업과정은 곤고함의 연속이었다.
실력을 갈고닦은 정운창은 시골에서는 더 상대할 사람도 없어 답답했다. 그는 서울로 진출하여 국수의 명성을 누리는 자들과 대국할 것을 결심하고 보성에서 한양까지 걸어서 올라왔다. 그러나 이 이름 없는 시골뜨기 바둑꾼을 누가 상대나 하였겠는가.
18세기 말, 19세기 초의 유명한 문인인 이옥은 “처음 서울에서 노닐 적에 그의 능력을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썼다. 당연한 사실이다. 당시 한양에서 국수(國手)로 명성을 날리는 자들은 김종귀, 양익분, 변흥평 등이었다. 이들은 전문기사였다. 또 전문기사는 아니더라도 뛰어난 바둑 실력을 인정받던 사대부로 대장 이장오(李章吾)와 현령 정박(鄭樸)이 있었다. 아무리 정운창이 뛰어난 실력의 소유자라 해도 처음부터 최상의 고수들과 상대할 수는 없음은 자명한 일이었다. 이때 정운창은 꾀를 내어 정박과 한번 솜씨를 겨룬다. 그가 생각해낸 꾀가 이옥의 ‘정운창전’에 생생하게 묘사된다.
[당시 금성현령인 정박이 바둑으로 소문이 났었다. 운창은 정박이 남산에서 바둑두기 모임을 갖는다는 소식을 듣고 가서 구경하였다. 정박이 실수를 하자 운창이 옆에서 훈수를 두었다. 정박이 되돌아보며, “객도 바둑을 잘 두오?”라고 묻자 운창이 “시골 사람으로 일찍부터 바둑 둘 줄을 알아 밥을 먹지요”라고 답했다. 정박이 운창의 용모가 몹시 촌스러운 것을 보고서 가장 하등의 기사(棋士)를 나오라 하여 대국하게 하였다. 10여착(着)을 두자 정박이 “네 적수가 아니다” 하고 그 다음으로 센 사람에게 두게 하였다. 겨우 반국(半局)을 두자 “네 적수가 아니다” 했고, 또 자기 다음으로 잘 두는 사람을 시켜 두게 하였다. 하지만 집을 계산할 정도가 되지 않았는 데도 정박은 “네 적수가 아니다” 하고 분연히 바둑판을 당겨서 자기가 직접 두었다. 그러나 세 판을 두어 세 판 내리 졌다. 그러자 좌우에 늘어선 모든 사람이 “당신은 누구요? 국기(國棋)일세”라고 입을 모았다. 이리하여 운창의 명성이 하루아침에 서울 장안에 퍼졌다.]
이옥의 글을 읽으면 시골뜨기 청년이 하루아침에 서울 바둑계에 찬란하게 등장하는 장면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진다. 정박으로 하여금 “네 적수가 아니다”라고 세 번이나 말하게끔 하고는 마지막에 정박을 내리 세 판 이기는 장면은 드라마틱하다. 이후 정운창은 명인들과 계속 바둑을 둬서 내리 이겼던 모양이다. 정박을 비롯해 명성이 자자하던 대장 이장오(李章吾) 등은 정운창을 보기만 하면 손가락을 문지르며 물러나서 감히 바둑알을 가지고 맞먹으려 들지 않았다고 하니 말이다. 이제 정운창은 서울 장안에서 대적할 자가 없는 바둑계의 최고봉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장안에 대적할 사람 없으니
그러나 당대에는 김종귀가 최고로 알려져 있었다. 그와의 승부가 최고를 가르는 분수령이었다. 하지만 정운창은 그와 대국하지 못하였다. 김종귀는 우연한 일로 평양에 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정운창이 한창 김종귀와 자웅을 겨뤄보고 싶어하던 무렵에 평양감사가 된 한 고관이 김종귀를 데려가 휘하에 두었기 때문이다. 정운창은 반드시 그와 자웅을 겨루려 별렀지만, 곧 돌아오리라고 생각했던 김종귀는 오지 않았다. 김종귀는 이때 평양에 머물면서 일부러 서울로 돌아올 날짜를 늦추었다. 그가 정운창의 소식을 접하고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자웅을 겨룰 사람이 없어서 무료함을 견디지 못한 정운창은 마침내 평양까지 찾아가 김종귀와 대국하고자 했다. 평양에 이르른 정운창은 김종귀를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감영(監營)의 포정문(布政門)에서 사흘을 머물렀으나 감영의 아전은 이 시골뜨기를 들여보내지 않았다. 사흘을 기다리다 지친 정운창은 탄식했다.
[재능을 소유한 선비가 그것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불운이 그래 이런 정도란 말인가? 내 차마 걸음을 되돌릴 수가 없구나! 내가 떠나온 고향 땅에서 평양까지의 거리가 거의 수천 리다. 고갯길의 험준함과 나그네의 고생도 마다하지 않고 어렵사리 여기까지 이르른 이유는 한 가지 기예를 가지고 다른 사람과 자웅을 겨뤄서 잠깐 사이의 상쾌한 기분을 맛보자는 심사이다. 그러나 끝끝내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간다면 어찌 기구하지 않으랴.]
‘재능을 소유한 선비가 그것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불운’을 말하는 대목엔 비장미가 감돈다. 고수와 겨루는 목적을 부나 명예가 아니라 잠깐 사이의 즐거움을 얻기 위함이라 했으니 그의 강한 승부욕을 점칠 수 있다.
정운창은 포기하지 않고 또 사흘 동안 감영 문밖에서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 사연을 들은 감사가 뭔가 낌새를 채고 김종귀에게 “이 자는 대체 무엇 하는 사람일까. 특이한 점이 있는 것이 분명해. 자네는 물러나서 내 하명을 기다리게”라고 한 뒤 사람을 시켜 정운창을 들어오라고 했다. 정운창과 몇 마디 주고받은 다음 감사가 “내가 듣기에 자네는 남쪽 지방에 산다고 하던데 이제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 이곳까지 와 종귀를 한번 보려는 것을 보니 종귀와 구면식인가 보구만”했더니 정운창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답했다. 그제서야 감사는 김종귀와 대국하려는 그의 속내를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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