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7월호

로버트 김 심경 고백 “손자들이 늙고 낯선 내게 안기지 않아요. 그게 너무 슬퍼”

  • 글: 김옥채 재미언론인 tutuu@hanmail.net

    입력2004-06-30 10: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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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밀누설 혐의로 미 연방교도소에 수감돼 8년 동안 복역해온 로버트 김이 지난 6월1일 조기 출소했다. 버지니아에 있는 딸의 집에 가택연금된 그는 “미국과 한국, 두 정부에 억울함도 반감도 갖지 않는다”고 말한다.
    로버트 김 심경 고백 “손자들이 늙고 낯선 내게 안기지 않아요. 그게 너무 슬퍼”
    “해군성 정보국에서 그동안 못 받았던 월급 다 지급하고, 지난 세월도 보상해주면서 복직을 허용한다면 다시 가시겠습니까?”“노, 노. 절대로…. 24시간 감시당하는 곳에서 내가 왜 다시 일합니까? 다시는 안 가요.”

    “이번 일이 있기 전에 18년 동안 일하던 곳이 아닙니까?”

    로버트 김은 대답 대신 웃었다. 시골 장바닥 야바위꾼에게 쌈짓돈을 홀린 맘씨 좋은 촌무지랭이 같았다. 그와의 인터뷰는 이 대목이 모든 걸 설명한다. 더 무엇이 있겠는가. 이 이상 그에게 궁금한 것이 있다면 우리 모두는 야수로 변해야 한다.

    선량한 눈빛을 가진 사람

    김채곤씨. 미국에서는 로버트 김으로 통칭되며 일명 ‘로버트 김 간첩사건’으로 유명한 그는 사바나 초원의 초식동물처럼 선량한 눈빛을 가진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 인터뷰를 부탁하면서 내가 마치 그의 목을 지나가는 동맥을 깨물어놓기라도 한 듯한 자의식에 빠지고 말았다. 8년의 옥살이와 패가망신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목전에 놓아두고도 너무나 태연하게 풀을 뜯고 있었으니, 그 무엇이 그의 평화로운 눈빛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로버트 김에게서 기밀을 넘겨받은 전 주미한국대사관 해군 무관 백동일 대령 또한 그에게서 이와 다르지 않은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로버트 김은 페니 한닢 받지 않고도 백동일 대령에게 정보를 제공하고야 말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난 6월3일 그에게 처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나는 ‘여기는 ○○방송국이다. 그동안 성원해준 재미동포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말을 해달라. 내게도 한국과 미국, 두 나라로부터 버림받은 당신을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말했다.

    사실 나는 그를 위해 뭔가를 한 적이 있다. 지난해 4월 노무현 대통령이 처음 미국을 방문했을 때였다. 워싱턴지역 동포간담회 자리에서 이름 없는 한인언론 기자인 주제에 경호진을 뚫고 들어가 크게 소리쳤다.

    “부시 대통령에게 로버트 김 사건을 거론하실 겁니까”라고.

    인터뷰 도중, 로버트 김은 내 무용담을 필요 이상으로 진지하게 들었다. 그는 한참이나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서 노 대통령은 제 얘기를 꺼냈답니까?”

    “저는 모르죠.”

    “그렇죠?”

    “뭐가요?”

    “하지 않았을 겁니다. 아니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섭섭하시죠?”

    “섭섭한 것도 없습니다. 나도 정부에서 일해봤기 때문에 정부가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한국정부도 고심했을 겁니다. 그래서 적극 나설 수 없었는지도 모르죠.”

    나는 아주 건조한 사람

    로버트 김은 잔뜩 밀려드는 한국언론과의 인터뷰 때문에 피곤해했지만 다음날인 6월4일, ‘집 감옥’으로 나를 초대했다. 그는 완곡하게 자신이 관련되었던 사건에 대해 질문해서는 안 된다고 못박았다. 다른 언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단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 했던가. 이날 로버트 김은 모친의 부음 소식을 접했다.

    30분 넘게 설득해서 겨우 얻어낸 인터뷰 기회가 날아갈 판이었다. 다시 인터뷰 약속을 잡는다고 해도 그에게 지난 세월을 추궁해야 하는 악역을 맡아야 한다는 게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운 좋게도’ 필자는 그를 두 번 만났다. 6월4일과 6월8일. 다음은 두 차례 그와 두서없이 나눈 이야기를 정리한 내용이다.

    6월4일 필자는 케이크를 사들고 그의 집으로 갔다. 필자를 맞는 그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그는 눈물을 아꼈다. 아마도 8년 감옥생활 동안 눈물이 다 말랐는지도 모른다.

    “저는 부모와 인연이 없었나봅니다. 올해 2월엔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지만 임종을 못했어요. 이제는 어머니마저 떠나셨습니다. 곧 미국으로 오신다고 했었는데….”

    -어머님과 각별하셨을 텐데요.

    “그렇진 않았어요. 어머니께선 자식들에게 큰 사랑을 주지 않으셨어요. 세상 모든 자식들은 어머님의 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어요. 그렇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렇게 눈물샘을 틀어쥐고는 놓아주질 않았다.

    -출소하신 후 공교롭게도 개인적으로는 어머님의 죽음을 맞아야 했고 사회적으로는 레이건 전 대통령의 죽음이라는 소식을 접하셨습니다. 수감 생활중에 수양을 많이 하셨을텐데요, 본인에게 죽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바른 자세로 살다가 죽을 때가 되면 죽는 거죠. 거기에 별다른 감흥은 없습니다. 저는 아주 건조한 사람이거든요.”

    -1980년대 초·중반, 미 해군정보국에서 한창 일할 때 레이건은 현직 대통령이었습니다. 직간접적으로 접촉한 일이 있었습니까?

    “저 같은 프로젝트 매니저가 대통령을 직접 접촉할 일은 없었습니다. 제가 한 업무가 레이건 대통령에게 전달됐을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전 그를 개인적으로 좋아하진 않습니다. 월급이 오르질 않았거든요. 카터 행정부 시절엔 1년에 9%까지 오르곤 했는데 레이건 행정부에서는 겨우 2% 올랐죠(웃음).”

    -대충 어떤 정보가 레이건 대통령에게 전달됐을까요?

    그는 웃었다. 대답을 회피하는 것이다. 사실 그는 이 인터뷰를 몹시 껄끄러워했다. ‘신동아’ 2003년 5월호에 실렸던 백동일 전 주미대사관 해군무관의 글을 읽은 그가 ‘신동아’에 대해 가지는 애정과는 무관한 이유에서였다. 7월27일까지 가택연금 상태에 놓여있고, 나머지 3년 형기(刑期)에 대한 사면 추이를 미 정부가 지켜보고 있으며, 지금 발목에는 전자발찌를 차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전화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모니터링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검거되기 전 마지막으로 맡은 프로젝트가 무엇이었습니까.

    “불법이민과 마약의 유통경로를 추적하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바다를 통해 유입되는 사람과 마약이죠. 그 무렵 특히 중국에서 컨테이너에 불법이민자나 마약을 숨겨 서부해안을 통해 들어오곤 했습니다. 이 루트를 추적했습니다. 알만한 사건이 많았죠.”

    -백동일 대령은 선생님이 한국군의 지휘통제 계통과 통신, 컴퓨터 및 정보의 능력과 수준에 대해 궁금해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직접적인 업무였습니까?

    “그런 게 사실 돈이 많이 드는 건 아니에요. 그렇게 큰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요.”

    -한국정부가 필요로 하는 사업이라면 한국정부를 위해 일하실 의향이 있나요.

    “아뇨, 절대로…. 저보다 잘하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한국정부가 노력한다고 듣긴 했으나…

    로버트 김은 1996년 3월 백동일 전 해군무관의 주선으로 한미해군 고위급 회담 참석차 워싱턴을 방문했던 한국 해군 실무장교들을 만났다. 그는 이 자리에서 나눈 이야기에 대해 밝히지 않았다. ‘별로 중요한 얘기가 아니었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다만 “회고록을 정리하고 있다”고 언급할 뿐이었다.

    -교도소에서는 집필이 허용되지 않나요?

    “여건이 좋지 않았습니다. 연필만 사용할 수 있는데 편지 한 장만 써도 연필심이 다 닳습니다. 연필 한번 깎으려면 연필깎이 기계 앞에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죠. 또 감옥 안이 어수선해 내게서 무슨 글이 나올 지도 겁났습니다.”

    필자가 “백동일 대령이 ‘신동아’에 쓴 글에서 본인과 연관된 부분이 모두 사실이냐”고 묻자 그는 대답을 망설였다.

    “눈물을 흘리면서 감동적으로 읽었습니다. 백 대령과는 사실 인간적인 교류를 했다고 할 순 없습니다. 거의 만난 적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글에서 그의 진실이 느껴졌습니다.”

    -백 대령은 선생님께서 준 정보를 ‘독이 든 사과’라고 표현했습니다. 자신은 서서히 선생님으로부터 받는 정보에 중독되었으며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선생님이 위험해질 수도 있음을 알았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선생님만 이용당한 셈이라고 생각하진 않는지….

    “누가 누굴 이용했다는 말은 적당하지 않습니다. 백 대령도 이 일로 큰 고통을 겪었어요. 전 재판받을 때까지 제가 10년이나 감옥살이를 할 정도로 큰 죄를 지었다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필자는 로버트 김으로부터 강렬한 인상을 받은 적이 있다. 1996년 9월24일, 국군의 날을 앞두고 주미 한국대사관 리셉션 행사장에서 로버트 김이 막 체포됐을 때다. 그는 양복을 입은 채 죄수 기록판을 들고 사진을 찍었는데 그 표정이 성자(聖者)처럼 평화로워 보였다. 앞으로 벌어질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전혀 감지하지 못한 듯이. 그는 “당시에는 조사받고 금방 풀려날 줄로만 알았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한국과 미국 두 나라 모두에게 배신당한 셈이 됐습니다. 억울하지 않습니까?

    “억울함도 반감도 없습니다. 내가 잘못해서 받은 벌이니까요. 내가 이민 온 나라의 법을 어겼으니까요. 억울한 게 있다면 딱 하나입니다. 형량이 과했다는 점이죠. 판사는 앞으로 시민권을 받게 될 사람들에게 시민권 선서가 형식적 절차가 아니라는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내게 중형(重刑)을 내렸습니다. 내가 이민자가 아니라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이었다면 21개월의 형을 덜 받았을 겁니다. 그게 억울해서 항소했지요. 법원이 판결을 유보해 논의할 기회를 얻지 못했지만.”

    -한국정부가 소극적으로 대응한 데 대해 서운한 감정이 없습니까?

    “정부의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정부가 노력했다고 들은 바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국정부의 태도에 대해 모순된 감정을 가진 듯했다. 그는 “‘노력한다’는 말처럼 모호한 표현이 없다”고 말했다. 그저 정부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아보는 것 정도도 ‘노력했다’고 할 수 있으니까. 그는 “확실한 동사로 표현해주었다면 이해하기 쉬웠을 텐데…”라고 덧붙였다.

    로버트 김 심경 고백 “손자들이 늙고 낯선 내게 안기지 않아요. 그게 너무 슬퍼”

    로버트 김이 가택연금된 집. 그는 7월27일까지 문밖으로 나설 수 없다.

    로버트 김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깊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부인 장명희 여사를 만난 후로 자신도 기독교 신자가 된 것. 종교는 긴 감옥생활을 견디게 해준 버팀목이었다. 감옥에서 새벽 4시에 기상해 6시까지 기도를 하고 편지를 읽고 성경을 공부했다. 6시부터는 운동을 하고 6시40분에 식사를 했다. 7시30분부터는 일터에 나가 일했다. 그리고 오후 4시 감방으로 돌아와 잠들기 전까지 또 신앙서적을 읽었다. 그는 한번도 신에 대해 회의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수감됐을 때도 하나님이 자신을 시련으로 단련시키려고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6월6일 일요일에 그는 혼자 운전해서 교회에 갔다. 부인 장명희 여사는 시어머님의 장례식을 위해 한국에 가고 없었다.

    일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 이 짧고도 긴 6시간은 종교활동을 하라고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외출시간이다. 그는 워싱턴한인장로교회의 장로이다. 수감된 지난 8년 동안 한번도 교회에 나가지 못했지만 여전히 이 교회의 장로다. 그는 “아직 해고당하지 않았다”며 웃었다.

    그가 아내와 함께 짠 노후 계획은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벌이는 것이었다. ‘로버트 김 사건’이 없었더라면 지금쯤 중국에 가 있을 것이다.

    “여건이 된다면 중국에 가고 싶어요. 탈북자를 선교하는 일 등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것 같습니다.”

    동포들의 사랑이 큰 힘

    현재 로버트 김이 머물고 있는 버지니아 애쉬번의 타운하우스(아파트와 단독주택의 중간형태)는 딸의 집이다. 10만달러의 연봉을 받던 그가 8년 세월을 허비한 탓에 매달 주택융자할부금을 갚을 길이 없어 집을 팔았고, 아내는 생계를 위해 한인교회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스파이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아들은 실직의 고통을 맛봐야 했다. ‘모국의 배신’이 개인적인 불행을 몰고 온 것이다.

    -출소 후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무엇이었나요.

    “가족과 사랑을 나누는 일이에요. 내가 잃어버린 세월만큼 가족들은 고통을 받았으니 보상을 해줘야 해요. 손자들이 이 늙고 낯선 사람에게 잘 오려고 하지 않아요. 난 고것들이 너무 예쁜데 말이죠. 그럴 땐 정말 서글픕니다.”

    로버트 김이 수감생활을 하는 중에 후원회가 결성되어 많은 사람이 그에게 격려편지를 보내주었다.

    “동포들의 사랑이 큰 힘이 됐습니다. 세월을 잃었지만 돈 주고 살 수 없는 동포들의 사랑을 얻었지요. 이 사랑으로 다시 출발하고 싶어요.”

    그렇다고 미국의 한인이 다 그를 좋게 보는 것은 아니다. 미국 사회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한인들 중 일부는 ‘로버트 김은 미국을 배신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특히 워싱턴 지역 한인들에게 비난을 받고 있다. 내 사건 때문에 한인 2세들이 직업을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말을 들었다”며 유감을 나타냈다. 그러나 로버트 김 사건 때문에 한인들이 직업을 구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얘기는 별로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집에 오니 어떻습니까?

    “참으로 기쁘죠. 감옥에서는 항상 불안한 마음으로 살았거든요. ‘저 사람이 나를 해치지는 않을까’하는 피해의식을 떨쳐버리기 힘들었어요. 그런데 집에 오니까 모두가 나를 위해 사는 사람들 같아 해방감과 행복감을 느껴요.”

    로버트 김의 한국에 대한 애정은 변함없었다. 한국의 현실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자 그는 애정어린 비판을 쏟아냈다.

    “젊은 사람들이 바로서야 합니다. 남의 나라 특허를 로열티를 내고 사오려 하지 말고 스스로 발명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공계 출신을 홀대하는 분위기도 고쳐야 하고요. 육체노동을 기피해 외국인 노동자를 수입해야 하는 현실 또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젊은이들이 왜 힘든 일을 기피하는지 모르겠어요.”

    -현재 한국에선 주한미군 이라크 차출과 주한미군 감축협상 때문에 시끄럽습니다. 안보공백에 대한 우려가 큽니다.

    “전쟁은 돈과 무기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월남전만 보더라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라크 상황을 보더라도 미국이 현재 밀리고 있는 형편입니다. 전쟁은 정신으로 하는 겁니다. 정보나 첩보는 이 세상, 수많은 팩트 가운데 일부분에 지나지 않아요.”

    로버트 김은 옥중에서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읽었다고 했다. 통제장치가 가장 이상적인 국가기관에서 정보를 다루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져 가장 원시적인 수형 생활을 한다. 그리고 ‘감시와 처벌’을 읽는다. 아이러니하다.

    “해군 정보국에서 일할 때나 감방 생활을 할 때나 저는 늘 국가 공권력의 영향 아래에 있었습니다. 감시받고 처벌받았습니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감시자와 처벌자는 국가뿐만이 아닙니다. 아주 미세한 권력들이 작용하죠. 생활의 부분 부분에서 말이죠. 저번에 사다주신 케이크가 얼마나 맛있었는지 모릅니다. 케이크의 달콤함에 제 혀가 통제받았던 거죠. 아주 미세한 관계들에 영향을 받은 겁니다.”

    영화 ‘모던 타임스’의 서글픈 주인공이 떠올랐다. 그는 거대한 기계 속에서 일을 하다가 벨이 울리자마자 일을 중단하고 도시락을 꺼낸다. 학창시절 수업시간에 딴전을 피울 때면 선생님들은 늘 같은 말을 하곤 했다. ‘안 보일 것 같지만 다 보인다’고.

    세상과 권력은 우리에게 보일 수 있는 행동만 하라고 강요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들이 형이상학의 탈을 쓰고 면전에서 악 쓰는 일은 없다. 그러나 늘 의식된다.

    어느덧 밤 10시. 웬만한 미국사람이라면 모두 잠들었을 시간이다. 그는 아직 저녁을 먹지 못한 상태였다. 생각 같아서는 전자발찌고 뭐고 밖으로 모시고 나가 순댓국이라도 한 그릇 대접하고 싶었다. 하지만 필자가 선 문밖과 그가 선 문안은 엄연히 다른 세상이다.

    그는 문밖에 걸려 있는 전화번호부를 집어들기 위해 위험스럽게 허리를 구부렸다. 발만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된단다. 마치 라인 크로스 규칙을 적용받는 농구선수 같았다. 그의 집 문밖으로 나선 필자에게 그는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저쪽에 우리집 우편함이 있습니다. 14번인데요, 우편물 좀 가져다주시겠습니까?”

    코끝이 시큰해졌다. 몇 통의 우편물을 로버트 김에게 가져다주면서 세상과 진정으로 소통이 가능한, 한바탕 시원한 웃음소리를 내어볼 수 있는 그런 소식이 있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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