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5년 12월 한반도 신탁통치안이 포함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이 발표되자 반탁운동이 시작됐다. 하지만 좌익 세력은 해가 바뀌자 찬탁으로 돌아서서 지지시위를 벌였다
우리는 모스크바 3상회의를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정된 역사적 회의로 기억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크게 두 가지의 과소평가와 왜곡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모스크바 3상회의가 한국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회담이었다는 그릇된 인식이다. 이 회의의 결과로 1945년 12월28일 오전 6시(모스크바 시각)에 발표된 코뮤니케(의정서)를 보면 한국에 관한 결정은 주변 문제 중의 하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모두 7개 부분으로 이루어진 의정서의 셋째 항목이 한국에 관한 조항인데, 한국문제는 토론된 여섯 가지 의제 중 하나에 불과했다. 즉 한국인에게는 모스크바 3상회의 내용의 핵심이 한국문제로 비쳤겠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戰後)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것이지 한국문제를 다루기 위해 열린 회의가 아니었던 것이다.
두 번째 왜곡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한국문제에 관한 결정은 곧 신탁통치이며 이 회의에서 미·소가 신탁통치 실시에 합의했다는 주장이다. 의정서를 면밀하게 검토해보면 신탁통치라는 중요한 문제에 대한 합의를 단지 연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한국에 미소공동위원회를설치하고 일정 기간 신탁통치하는 문제를 협의한다는 것 외에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국문제에 관한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은 미·소간 타협의 산물로 어느 누구의 독단으로 결정된 게 아니었다. 1945년 12월16일 미국은 ‘유엔 주도하의 4개국(미·영·중·소) 5년내(5년 연장 가능) 탁치(託治)’ 안을 제출했지만 소련은 별다른 관심을 표명하지 않았고 대신 일본문제에 주의를 돌렸다. 18일과 19일 회합에서 소련은 미국의 양보를 얻어 일본 점령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보장받았다. 이에 소련은 더욱 타협적인 자세를 견지해 중국문제에서 미국의 주장을 인정했다. 이로써 전후 미·소의 협조는 최고조에 이른 것처럼 보였으며 냉전(冷戰)은 결코 시작되지 않을 것 같았다.
소련의 수정안 제시
한국문제에 대해 별다른 반응이 없던 소련은 12월20일 이후 4개항으로 된 안(案)을 제출하면서 유화적이고 능동적인 태도를 취했다. 소련안은 ‘선(先) 임시정부 수립, 후(後) 후견’을 골자로 한 것으로서 ‘선 탁치, 후 정부 수립’을 규정한 미국안과는 상당히 달랐다. 소련은 미국이 제시한 ‘탁치’라는 용어를 러시아어 (영어의 ‘후견(tutelage)’에 해당)로 번역해 ‘조선인의 자주적 정부 수립을 미·영·중·소가 원조한다’는 후견 제안으로 수정했다.
소련이 이처럼 수정안을 낸 것은 미·영·중·소가 참여하는 미국안대로라면 3대 1로 수적으로 우세한 자본주의 국가들이 탁치를 주도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따라서 먼저 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함으로써 조선인의 참여를 보장해 자국에 우호적인 정부 수립을 기도하는 실리를 챙기고 조선인의 자주적 욕구를 반영하는 명분을 살리는, 일거양득을 노린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소련의 속셈을 파악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타협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 해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 실현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지 않아서인지 소련안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합의된 의정서는 문구를 몇 군데 수정한 것을 빼곤 소련안과 거의 같았다. 이처럼 모스크바 결정 중 한국문제 조항은 당시 한시적으로 조성된 한시적인 미·소 협조 분위기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당사자간 실질적인 협조가 불가능하다면, 그 문구가 해석상 논란의 여지없이 치밀하게 구성되지 않은 한 실현 가능성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예측은 이후 역사에서 여지없이 현실로 드러났다.
흔히 모스크바 의정서 한국 조항은 임시정부 수립과 신탁통치 실시에 관한 결정으로 간주되며 이 의정서대로 따랐더라면 통일민족국가가 건설됐을 것이라고 아쉬워한다. 그렇지만 그 조항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어느 것 하나 결정되지 않은 휴짓조각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들 정도로 구체성이 결여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