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8년 5월31일 중앙청에서 거행된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이승만 초대의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대통령 이승만은 이날 기념사를 통해 “이날에 동양의 한 고대국인 대한민국 정부가 회복돼서 40여 년을 두고 바라며 꿈꾸며 투쟁해온 결실이 실현되는 것”이라고 밝히고 “이 정부가 대한민국의 처음으로 서서 끝까지 변함없이 민주주의의 모범적 정부임이 세계에 표명되도록 매진할 것”을 선언했다. 또한 건국의 대장전이 되는 제헌헌법은 다음과 같이 그 전문을 선포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해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해 이제 민주독립 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정의 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모든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 민주주의 제 제도를 수립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케 하며 각인의 책임과 의무를 완수케 해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해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결의하고 우리들의 정당 또 자유로이 선거된 대표로서 구성된 국회에서 단기 4281년 7월12일 이 헌법을 제정한다.
그리고 그 첫 조항과 둘째 조항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했다. 이로써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최초의 근대적 국민국가가 세워진 것이다.
분단으로 가는 건국의 길
동북아시아에서 냉전 구조가 심화되면서 한반도의 전후 처리를 위한 미국과 소련 사이의 협상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통일정부 수립의 가능성도 사실상 사라지기 시작했다. 불안한 하나를 어렵게 만들어가는 것보다 반쪽만이라도 확실하게 확보하는 것이 당시 미국과 소련의 안보적 요구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1947년 7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국은 9월에 한국 문제를 유엔에 상정했다. 유엔은 그해 10월 한국에 유엔위원단을 파견하기로 가결했고, 11월에는 남북총선거를 통한 한국 통일안(案),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설치안, 정부수립 후 미소 양군 철퇴안 등을 가결했다. 단정(單政) 수립을 둘러싼 지지와 반대의 대치 정국에서 1948년 1월8일 유엔한국위원단이 남한에 입국했다.
하지만 소련측은 위원단의 북한 진입을 거부했다. 이에 유엔 소총회는 1948년 2월26일 유엔 한국위원단의 임무수행이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 즉 남한만의 단독선거 실시를 의결했다. 사실상 단독정부 수립이 결정된 것이다.
1948년 3월1일 하지 미군사령관은 남한의 총선 실시를 발표했고, 5월10일 제헌국회 구성을 위한 총선거가 실시됐다.
5월31일 개원한 제헌국회는 헌법을 제정하고 정부를 조직했으며 새 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을 선출했다. 정치세력과 정치과정의 분화가 활발하지 못한 탓에 권력구조와 정치의 제반 기능이 비교적 단순했던 당시 상황에서 대부분의 정치적 쟁점은 의회로 결집됐다. 따라서 제헌국회가 차지하는 정치적 비중은 매우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