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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레스’의 독불장군 대인관계가 ‘집단 성격장애 사회’ 열었다

본인은 알코올 중독, 부인은 우울증… 풍수학자 최창조의 체험적 진단

‘노블레스’의 독불장군 대인관계가 ‘집단 성격장애 사회’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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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 불가능한 마음병

‘노블레스’의 독불장군 대인관계가 ‘집단 성격장애 사회’ 열었다

직설적인 화법은 노무현 대통령의 특성이 됐다.

남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병이 바로 신경증이다. 예컨대 우울증이라고 하면 주위에서는 “고생을 덜 해봐서 그렇다” “너무 곱게만 살아와서 그렇지. 정신 좀 차려라” “왜 그렇게 의지가 약하냐? 마음을 강하게 먹어라”고들 한다. 병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다. 그런데 환자 본인과 가족은 영원한 지옥 속에서 살아가는 느낌일 만큼 심각하다.

고생? 미국의 한 통계에 따르면 가난한 사람들의 우울증 발병 비율은 평균과 다르지 않다. 이렇게 얘기하면 사람들은 또 이렇게 얘기한다. 그들은 가난하니까 우울한 게 당연하다고. 게다가 비싼 치료비를 감당할 능력도 없으니 지옥 중의 지옥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그러나 아무리 가난으로 우울해도 이를 닦다 칫솔을 떨어뜨렸을 때 그것을 줍지 못할 만큼 막막해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울증 환자는 흔히 그런 행동을 한다.

의지? 미국의 저널리스트 캐롤라인 냅은 ‘술, 전쟁 같은 사랑의 기록’에서 이렇게 썼다. 알코올 중독자들을 향한 일반적인 충고 “너의 의지로 해봐”에 대해 “너는 설사가 나올 때 의지로 통제가 되냐”고. 신경증도 마찬가지다. 신경증은 질병이다. 의지로만 해결될 일이 아니다. 성격장애인에게는 불행히도 자신의 의지로 극복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성격이 정상에서 벗어난 사람은 잔인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다른 사람을 향한 언어폭력을 행사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텔레비전으로 중계되는 상황에서 한 기업인에 대해 악담을 했다. 그것과 관련이 있는지는 몰라도 그 기업인은 자살했다. 노 대통령은 또 “그놈의 헌법”이라며 권위(‘권위주의’가 아님)와 국기(國基)를 뒤흔들었다. 언어폭력의 대표적 사례다.



우리 사회에서 권위주의는 배척돼야 할 악덕이었다. 내가 사장이니까, 내가 교장이니까, 내가 대통령이니까 나의 인품이나 능력과 관계없이 나를 존경하고 따라야 한다는 권위적 태도는 사회악(惡)이었다. 문제는 덕망과 실력을 갖춘 권위자까지 분위기에 휩쓸려 도태됐다는 데 있다. 요즘 어느 분야에서든 권위자를 찾기 힘들다. 권위는 조직을 지탱해주는 순기능을 갖는 법인데, 이게 없으니 조직이 지리멸렬하고 사람들은 혼란에 빠진다. 대부분의 사람은 권위자가 아니다. 그들은 권위자의 방향 제시에 힘입어 일을 하며 삶을 영위해왔다. 그게 무너진 것이다. 경계성 성격장애자가 늘어난 한 이유다.

우리 모두에게는 그럴 수 있다면 끝없이 탐닉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모든 주의나 주장, 사상은 종국에 가면 그 자체에 탐닉하게 된다. 근본주의나 편협은 이에 따른 산물이다. 그 바탕은 권력(힘)이다. 권력이 부에 비례하기 때문에 현대의 탐욕은 권력과 부를 향하는 것이다.

니체는 그 권력을 빼앗으려면 ‘탐욕’ ‘시기’ ‘증오’ 3가지가 필요하다고 했다. 근래까지 이런 인간의 본성은 감추는 게 위선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예(禮)와 일반 규범에 의해 통제돼왔다. 이게 무너졌다.

위선은 지도자의 미덕

위선이라고? 그건 나쁜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죽기 직전 측근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친구들이여. 내 연기가 어땠소?” 인생을 연기에 비유한 것이다. 훌륭한 황제는 그렇게 자신의 본심을 털어놓았다. 위선적 연기란 지도자의 미덕일 수밖에 없다.

노 대통령은 취임 초 젊은 검사들을 모아놓고 토론을 벌였다. 검찰의 지휘계통을 무너뜨리는 행위일 수도 있었다. 그 자리에서 이런 말도 했다. “이렇게 되면 막가자는 거지요?” “민주주의보다 정부 조직 보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무슨 막가자는 말씀인가. 거기에다 “확 긁어버린다”도 있고 “진보언론까지 나를 조진다”도 있다. 개그맨도 방송에서 쓰지 못할 말들이다. 가슴 시리도록 통쾌한 표현이긴 하지만 정도를 많이 벗어났다.

이쯤 되면 비난이 아니라 언어폭력이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면서 자신은 피해자 행세를 한다. 좀 유치하다. 이후 이런 식의 언어폭력은 그의 특성이 되다시피 했다. 어찌 아랫사람들이 본받지 않을 수 있으랴.

이런 난삽한 언어는 특히 온라인 세상을 석권했다. 그렇게 이 나라 전체의 수준을 떨어뜨렸다. 언어폭력이나 교묘한 조종, 방어기제 같은 경계인의 행동은 사람 사이의 신뢰와 친밀감을 부숴버리곤 한다.

세상은 참으로 속되고 인생은 쓸데없이 허망하다. 충동적인 행동을 통해 공허함을 채우고 정체성을 만들려고 애쓴다. 그 목적은 하나다. 내적인 고뇌의 극복이다. 그러나 이런 진단은 아직도 ‘휴지통 진단명’이다. 치료사가 환자의 병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이해하는 척하며 붙여준 이름표라는 말이다.

이것은 위선이 아니라 허위다. 허위는 투사(投射)라는 이름으로 드러난다. 투사는 스스로 싫어하는 자신의 특징, 행동, 느낌들을 다른 사람의 것으로(종종 비난하는 식으로) 돌림으로써 부정하는 일이다. 대단한 자기 합리화이자 책임 전가인 것이다. “나는 잘못이 없어. 다 네 탓이야” 하고 나면 마음이 편하다. 세상이 온통 그런 식이다.

여기에 권위를 부정하는 본성이 덧붙으면 상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요, 잘난 자의 불행은 더 큰 행운이며, 가장 뛰어난 자의 불행이야말로 최고의 치료약이다. ‘폭력과 사랑’이라는 주제의 시사 콩트를 만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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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조 풍수학자 countrymani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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