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對)국민 접근성에 있어 영상 매체는 활자 매체에 비해 본질적 우월성을 지녔다. 따라서 TV 드라마가 갖는 지식 전파자로서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방송 3사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 우리의 정체성을 확고히 한다는 차원에서 고구려 드라마를 경쟁적으로 방영하기 시작했다. 이는 마땅히 권장돼야 할 일이다.
알다시피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동명성왕 주몽(또는 추모)에 의해 창업돼 서기 668년 멸망하기까지 동아시아에서 찬란한 문화와 역사를 자랑한 부강한 나라였다. 우리 머릿속에 고구려는 서토(西土·중국)의 여러 나라와 맞서 싸우면서 한민족의 정체성을 지킨 당당한 나라로 각인돼 있다. 우리는 이런 역사물을 통해 과거를 공부하며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
史實 무시, 국민 무시
문제는 이들 드라마에 고증을 무시한 사실(史實)이 섞여 버젓이 방영되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 드라마도 픽션인 까닭에 무한한 상상력이 발휘돼야 하며 재미있는 허구의 캐릭터가 등장할 수 있다. 극의 구성도 가공될 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 연대기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인물, 그와 연관된 사건들, 이미 검증이 끝난 중요한 팩트(fact)는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이런 역사적 팩트들이 마구 가공되면서 지금 각급 학교의 국사 교사는 엄청난 혼란에 직면해 있다. 안시성 싸움을 승리로 이끈 사람이 양만춘이 아니라 연개소문이라는 둥, 검모잠의 고구려 부흥운동에 대조영이 앞장섰다는 둥 학생들은 드라마에 나온 내용을 사실인 양 착각한 나머지 교사의 말이나 교과서의 내용을 믿지 못한다. 만일 드라마에 나온 잘못된 사실과 관련된 문제가 대입 수학능력시험이나 국가 공인 시험에 출제돼 낙방한다면 그 피해는 누가 보상할 것인가.
드라마 작가들이 원작(原作) 없이 대본을 쓰는 것도 문제다. 이들은 내친김에 드라마의 내용을 바탕으로 원작 아닌 원작을 만들어 책장사를 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역사소설은 애정소설과 다르다. 역사소설은 사서(史書)에 대한 정확한 학습과 사실 확인, 현지 취재 등 수년, 수십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완성되는 거대한 결과물이다. 최근 ‘대발해’를 발간한 김홍신씨는 20년간의 고증기간을 거쳤다 하고, 김훈씨는 ‘칼의 노래’를 쓰면서 치아가 8개나 빠졌다고 한다. 역사소설은 결코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지지 않는다. 드라마 작가들은 역사적 사실을 기초로 풍부하고도 독창적인 극본을 쓰려는 본연의 자세로 하루빨리 돌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고구려 드라마에 나타난 잘못된 사실은 무엇일까. 틀린 내용이 너무 많아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지만 국사교과서나 정사(正史)에 반하는 내용, 그중에서도 자라나는 세대들의 역사 교육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중대한 문제만 열거해본다. 우선 현재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대조영’부터 살펴보자.
드라마 ‘대조영’에서는 매국노 집단이 미화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이 당연시되고 있다. 혹은 과장되게 사대화(事大化)하는 경향도 있다. 이럴 경우 시청자는 스스로 우리 역사를 비하하고 패배주의에 빠질 가능성도 있다.
또한 대조영의 출생년도를 너무 이른 시기로 설정했기에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드라마는 대조영의 출생년도를 서기 645년(실제는 663년으로 추정)으로 설정했다. 이대로라면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에 대조영은 이미 24세의 청년이다. 고대나 중세엔 15세쯤이면 성년으로 인정했기에 24세라면 충분히 장수의 직(職)을 가지고 활약할 수 있었다. 드라마도 이에 맞추어 대조영을 고당(高唐)전쟁의 영웅으로 묘사하며 극을 전개했다. 그러나 ‘신당서’ ‘구당서’ ‘삼국사기’ 어디에도 대조영이 고당전쟁에서 활약했다는 기록은 없다. 이렇듯 역사적 인물의 연대기가 뒤죽박죽이라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구분하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연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