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창바이 조선족 자치현에 있는 발해시대 영광탑.
▼ 설인귀는 초인적 영웅이 아니라 졸장
설인귀는 평민 출신으로 당 태종에 의해 발탁돼 나중에 안동도호까지 역임했지만 사료에 나오는 그의 활약상은 보잘것없다. ‘삼국사기’에는 645년 고당전투에서 잠깐 승리했을 뿐 658년 고당전투에서 고구려에 크게 패한 것으로 기술된다. 물론 고구려의 패색이 짙어가는 667년과 668년 고당전쟁에서는 당군이 승리했다. 하지만 675년 신라와의 전투에서 크게 패했으며 676년에 신라군과 맞붙은 기벌포 전투에서도 서전은 승리했으나 결국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
게다가 설인귀는 평양과 신성에만 머물지 않고 당나라의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구당서’와 ‘신당서’에 나와 있듯 설인귀는 670년 티베트의 총사령관 논 흠릉과의 대비천 전투에서 10만 대군이 전멸하는 대패를 당했다. ‘구당서’에는 설인귀가 말년에 광서성 상주로 유배됐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뤄 보면 그는 675~676년 나당(羅唐)전쟁 패배의 책임을 지고 숙청당했을 공산이 크다. 따라서 그가 안동도호를 계속 역임했다는 드라마의 설정은 잘못된 것이다. 어느 면으로 보나 드라마에 나온 것 같은 거물이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적국의 장수를 사실과 다르게 미화하는 것 또한 큰 문제다.
▼ 제1차 고당전쟁(645년)의 요동성주는 고사계가 아니다
드라마에서는 당의 요동성주로 고사계(高舍鷄)가 나온다. 고사계는 고구려가 멸망하자 당나라로 건너가 하서군의 사진교장이 된 인물이다. 그의 아들이 그 유명한 고선지(高仙芝) 장군이다. 고선지는 20세 때 아버지를 따라 안서 지역으로 출전하기 시작해 맹활약했으나 755년 모함에 의해 40여 세에 유명을 달리한다. 요동성은 고구려에서는 평양성 다음의 큰 성으로, 최소한 40대 중반의 욕살이 성주를 역임했을 터이다. 드라마의 설정대로라면 고사계는 730년경 130세의 나이에 20세인 아들 고선지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안서로 출정한 것이 된다. 요동성주로는 가공의 인물을 내세워야 했다.
▼ 당의 강하왕 도종은 고구려에서 죽지 않았다
‘대조영’에선 강하왕(江夏王) 이도종(李道宗)이 안시성 전투 후 퇴각하는 당 태종을 구하려다 연개소문에게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설정됐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강화왕 도종은 이후 설연타 정벌에 참가했으며 서기 653년 장손무기와 저수량의 무고에 의해 상주로 유배돼 죽임을 당했다고 사료에 분명하게 나와 있다.
▼ 방효태 총관을 다섯 살짜리 대조영이 죽였다?
당군의 총관 방효태는 서기 662년 평양으로 쳐들어왔다 연개소문에게 대패해 13명의 아들이 포함된 7만 군사 전원과 함께 죽임을 당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사수대첩이다. 한편 평양성 근처에 진을 치고 있던 소정방은 방효태의 패전 소식에 놀라 김유신이 배달해준 쌀로 밥을 지어 먹고 황급히 퇴각한다. 그러나 드라마에서는 총관 방효태가 설인귀의 일개 부장으로 나온다.
설인귀는 이미 658년 고구려 전투에서 패했기에 이 전투에는 참여하지도 못했으며 한낱 무명의 장수였을 뿐이다. 별 5개의 원수급 사령관이 별 2개짜리 소장의 부하라는 것과 같은 이치다. 게다가 이때 대조영은 5세 정도였을 터인데, 그 꼬맹이가 방효태를 죽인 장군으로 나온 것은 어이없는 일이다.
▼ 연개소문은 설인귀의 독화살에 맞지 않았다
연개소문은 663년 10월쯤 죽었다는 게 요즘 역사학계의 견해다. 드라마에서는 연개소문이 설인귀의 독화살에 맞는 것으로 나오는데, 어느 사료를 보더라도 그가 설인귀의 독화살에 맞았다는 기록은 없다. 연개소문의 지위는 태왕을 능가할 만큼 막강한 태대막리지(太大莫離支)였다. 그런 그가 당나라 일개 장수와 맞서 싸웠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고구려를 당에 비해 아주 작은 소국으로 바라본 사대적 시각에서 나온 오류다.
▼할아버지 연남생이 소녀 고숙영에게 연정을 품었다?
드라마에서는 남생이 대막리지 취임 전후의 시기에도 고숙영에게 연정을 품고 청혼하는 것처럼 나온다. 하지만 ‘삼국사기’에는 연개소문이 죽은 후 큰아들 남생이 국내를 순시할 때 자신의 아들 헌충이 동생 남건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다른 아들 헌성을 당나라에 보내 구원을 청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당시 남생의 아들은 이미 살해당할 만큼 장성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동생도 사신을 갈 정도였음을 고려하면 연남생은 당시 당연히 유부남이었고, 장년이 아니라 노년이었다고 봐야 옳다. 그런 연남생이 젊은 공주 고숙영에게 연정을 품고 결혼을 청했다는 설정은 무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