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호

의사·환자 모두 Big5 병원에만 몰리는 진짜 이유

[박은식의 의사일기] 이재명도 부산서 다치고 서울대병원 가는데…

  • 박은식 내과 전문의·전 국민의힘 비대위원

    입력2024-11-30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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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료권 제도 폐지’가 지방 의료 소멸의 시작

    • 의료진·환자 모두 시설 좋은 Big5 병원 선호

    • 지방의료원 진료 시간 연장해도 찾는 환자 없어

    • 정부, 의대 증원 나섰지만… 가르칠 병원 부족

    부산에서 한 남성에게 습격당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월 2일 오후 서울 동작구 노들섬에 헬기로 이송돼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지고 있다. [뉴스1]

    부산에서 한 남성에게 습격당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월 2일 오후 서울 동작구 노들섬에 헬기로 이송돼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지고 있다. [뉴스1]

    평일 이른 아침, 서울 강남구 고속철도(SRT) 수서역엔 지방에서 상경한 환자들과 이들을 실어 나르려는 대형 병원의 셔틀버스로 인산인해다. 몇 시간 후엔 이들은 약으로 가득 찬 봉지를 들고 다시 수서역으로 아픈 걸음을 옮긴다. SRT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도 여러 대학병원이 있지만 환자들은 그곳을 찾지 않는다.

    필자가 근무했던 서울의 한 중급병원에 부산에서 온 환자가 입원한 적이 있다. 이 환자는 서울아산병원에서 담도암을 진단받고 2개월 입원 대기 상태에서 항생제 치료가 필요해 입원했다. 환자에게 암이 전이되기 전에 부산에서 빨리 치료받을 것을 권고했지만 끝까지 서울아산병원에서만 치료받겠다며 막무가내로 버텼다. 결국 암이 다른 장기로 전이됐고, 수술할 수 없는 상태가 돼버렸다.

    지방의 대학병원에서도 충분히 치료가 가능한 병에 걸렸음에도 굳이 서울 병원을 고집하다 시간과 돈을 낭비하고 건강마저 망치는 기이한 풍경은 왜 펼쳐질까. 이른바 ‘Big5’ 병원(서울대병원, 삼성서울병원, 서울아산병원, 세브란스병원, 서울성모병원)이 단순히 서울의 큰 병원이라는 인식을 넘어 대중이 욕망하는 존재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1990년대 대형 병원에 매료된 의료 소비자

    광복 후 6·25전쟁을 겪으며 폐허에서 출발한 대한민국은 경제발전에 집중하느라 의료에는 자본을 많이 쓰지 못했다. 국내 의료기관의 95%가 민간자본으로 지어졌다. 특히 대형 병원(상급종합병원=3차병원)은 교수와 전공의를 싸게 부릴 수 있는 대학병원 위주로 성장했다.

    1989년 전 국민을 대상으로 건강보험이 확대됐다. 이때 정부는 지역 간 균형적 의료 발전을 위한 ‘진료권역 제도’를 시행했다. 환자가 건강보험으로 진료를 받기 위해서는 건강보험증에 표시된 진료권 내 병·의원에서 진료를 받게 한 것이다. 진료권은 138개 ‘중진료권’과 8개 ‘대진료권’으로 편성돼 있었는데, 1단계 진료는 중진료권의 의원을 이용하고, 1단계에서 진료의뢰서를 발급받아야 대진료권의 2단계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만약 내가 목포시에 산다면, 일단 목포시의 의원에서 진료를 본다. 더 큰 병원에 가야 한다고 의사가 판단하면, 전남에 있는 큰 병원으로 가서 진료를 받는 식이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 별다른 이유 없이 곧장 서울의 대학병원에 가서 진료를 보면 건강보험을 적용받을 수 없었다. 이 제도로 지방에 병의원들은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경제발전 속도가 빨라질수록 국민의 의료에 대한 눈높이는 더 높아져갔다. 지방에서 서울의 큰 병원으로 진료받으러 가는 환자가 점점 늘었다. 이런 수요를 반영해 대기업이 의과대학을 설립하고 대학병원도 짓게 됐다. 사실 의료법인은 외부 투자 및 영리 추구를 할 수 없어 돈이 많은 대기업만이 공익 의료재단을 설립할 수 있었다.

    그렇게 1990년 서울아산병원에 이어 1994년 삼성서울병원이 지어졌다. 기존 대학병원에 익숙했던 의료 소비자들은 놀랐다. 그간 대학병원은 좁고 오래된 건물에서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들로 시장통을 방불케 했다. 하지만 대기업의 자본이 투입된 대형 병원은 시설부터 달랐다. 깔끔한 대리석 바닥, 넓고 쾌적한 공간마다 이어진 에스컬레이터, 기다림의 시간에 품격을 더해주는 예술 작품들, 외벽을 장식한 화려한 유리 채광창에 매료됐다.

    진료권 제도 폐지 후 Big5 병원 환자 폭증

    그뿐인가. 권위적이던 대학병원 교수들만 봐오던 의료 소비자들은 기업이 고액을 들여 스카우트하고 친절 교육까지 시킨 유능한 의료진을 맞이하게 됐다. 전에 본 적 없는 의료서비스에 국민의 반응은 뜨거웠다. 그렇게 서울에서 진료받겠다는 수요가 늘어나자 김대중 정부는 1998년 진료권 제도를 폐지했다.

    거기에 2004년 KTX, 2016년 SRT가 개통되고 때마침 공중파 방송 건강 프로그램에서 서울의 유명한 의대 교수들이 출연해 인기를 끌면서 서울에서 진료받는 환자들이 폭증했다. 암 등 중증질환 부모의 경우 집 근처에 대학병원이 있어도 서울로 올라와 진료를 보게 하는 게 마치 효도를 다하는 것 같은 문화까지 자리 잡았다. ‘진단은 서울대병원에서, 수술은 서울아산병원에서, 항암 치료는 삼성서울병원에서’라는 말이 2000년대 들어 유행했을 정도다.

    서울아산병원은 2700병상, 삼성병원은 1900병상으로 엄청난 성장을 했다. 이에 질세라 국가의 지원을 받는 서울대병원은 1200병상에서 1700병상으로, 기독교재단의 지원을 받는 세브란스병원도 1800병상에서 2400병상으로, 가톨릭의 지원을 받는 서울성모병원은 900병상에서 1500병상으로 몸집을 불렸다.

    서울시내 한 대형 병원 모습. [뉴스1]

    서울시내 한 대형 병원 모습. [뉴스1]

    ‌대형 병원은 매년 10%에 가까운 성장세를 보였고, 진료비는 전체 상급종합병원의 절반을 넘게 차지하게 됐다. 지역에 사는 암환자 10명 중 4명은 서울에서 진료를 받는다는 통계가 나왔다. 의사들에게도 대형 병원은 꿈의 직장이 됐다. 전공의 월급이 다른 사립대나 국립대 병원에 비해 1.5배 정도 높았고 개원할 때 ‘연세내과’처럼 수련받은 병원의 이름을 앞에 내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병원 간 경쟁과 성장은 우리 의료 수준을 끌어올리는 순기능이 분명 있다. ‘뉴스위크’ 선정 세계 최고 병원 250곳에 서울아산병원(29위), 삼성서울병원(40위)를 비롯해 18곳이 선정됐다. 특히 아산병원은 간이식 횟수 및 수술 성공률 세계 1위를 기록했다. 이제는 세계 여러 나라가 한국에 의료 기술을 배우러 올 정도다.

    환자도 의사도 서울의 병원 입성만 바라고 있으니 지역 의료는 시들어갔다. 지방의 의대 교수들도 끊임없이 확장하는 서울의 병원으로 자리를 옮기다 보니 인력이 늘 부족했던 소아과, 흉부외과 등은 지역 거점 대학병원에서도 씨가 마르게 됐다. 오랫동안 의료 인력이 모자라니 환자가 오지 않고 병원은 축소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지방의 대학병원은 그나마 나은 형편이었지만 지방의료원의 현실은 심각한 상태다. 공중보건의라는 싼 인력으로 돌아가던 지방의 의료원은 의학전문대학원이 도입되면서 군미필자가 줄고, 인구 감소로 군 병력이 모자라 공중보건의까지 군의관으로 데려가면서 의료 인력을 구하기 힘들어졌다. 전문의들은 정년이 보장되지도 않는 지방의료원에 가려 하지 않았다. 연봉 4억 원을 준다는 구직 공고가 나와도 다음 해면 계약 해지당할 것을 알기에 지원하지 않는다.

    지역의 환자들은 의료 인력도 부족하고 환자가 많아지길 바라지 않는 행정직원들의 불친절에 지방의료원을 찾지 않는다. 정부는 지속되는 의료대란에 올해 2월 예비비 약 400억 원을 편성해 운영시간을 연장했지만 이 시간에 진료받은 환자는 하루 평균 병원당 5.5명이었다. 목포의료원은 5개월간 0명이었다. 35개 지방의료원은 매년 5000억 원 적자가 났다. 이러니 2013년 진주의료원 폐원 논란이 불거졌을 때도 대다수 지역민이 폐원에 반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문제의 화룡점정 격인 사건이 올해 초 발생했다. 부산 유세를 하다 피습을 받아 경동맥이 손상된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근방의 부산대병원을 뒤로하고 서울대병원으로 간 것이었다. 야당 대표도 국내 최대 인력과 최고 평가를 받은 부산대병원을 놔두고 권역외상센터도 아닌 서울대병원에 가려고 기를 쓰는데 일반 시민은 어쩌겠나. 그렇게 환자도 서울로 의사도 서울로 향하며 지방에 부족한 것이 의사인지 환자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은 달라질 줄 몰랐다.

    대학병원 위탁운영으로 지방 의료질 재고해야

    정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지방의 의대 정원을 증원하려 든다. 하지만 지역의 병원이 성장하지 못하는데 의대생만 많이 배정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광주의 조선대 의대 정원은 125명이지만 조선대병원 한 연차당 레지던트 총 수용 인원은 36명이다. 수련을 받으려면 90명이 외부로 나가는 수밖에 없다. 이 상태에서 정원을 150명으로 늘린다고 해도 광주·전남에 의사 수가 늘지는 않는다. 의대생들은 수도권에 분원 설립이 계획된 6600병상의 대학병원들에 갈 것이다.

    해결책은 의료인과 지역민의 요구 사이에 있다. 의료인이 근무하고 싶은 곳, 지역민도 거리에서 시간과 돈을 낭비하지 않고 가고 싶은 의료원이 돼야 한다. 앞서나가는 병원들은 병상을 줄이고 중환자 진료와 연구에 매진할 수 있도록 지원해 줘야 한다.



    서울보라매병원은 서울대병원이 위탁운영하고 있다. [서울보라매병원 홈페이지]

    서울보라매병원은 서울대병원이 위탁운영하고 있다. [서울보라매병원 홈페이지]

    ‌먼저 지방의료원을 지역민이 신뢰할 수 있는 병원으로 만들어야 한다. 가장 확실한 해결책은 대학병원에 위탁운영을 하는 것이다. 가장 성공적인 예가 서울대병원-서울시립보라매병원이다. 보라매병원은 저소득층 환자를 주로 돌보는 병원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지역 주민에게 대학병원으로 인정받는데 이는 서울의대 교수진이 진료하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부지와 병원을 제공하되 서울대병원이 책임지고 경영 및 운영하기 때문에 직원들도 만족도가 높다.

    대학병원에 위탁운영을 하면 대학과 교수 입장에서도 안정된 교수 자리를 늘릴 수 있어서 이득이다. 지역민은 유능한 의료진을 믿고 방문할 수 있으며 지방자치단체는 큰돈을 들이지 않고 지역민의 건강 향상을 이룰 수 있다.

    공영방송에서 지역의 명의를 알리는 방송을 편성하는 것도 방법이다. 지역민들이 신뢰하고 지역 대학병원을 방문하게 만들어야 한다. 어차피 한국은 단일 건강보험을 강제 지정하고 있기에 꼭 공공병원을 지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 재원으로 이미 있는 지역 대학병원이 중증 환자 진료를 더 잘할 수 있게 지원해 주면 될 일이다. 지역 의료에 대한 지역민의 신뢰가 전제된 뒤에 ‘진료권역제도’를 다시 시행하면 의료 자원 서울 집중 현상을 해결할 수 있다.

    수도권의 대학병원들은 양적 성장보다는 질적 성장에 중점을 둬야 한다. 세계 최고 암병원인 미국 MD앤더슨 암센터 병상수가 700개. 일본 도쿄대 의학부 부속병원 병상수는 1218개로 하루 3500명 환자를 본다. 그런데 서울아산병원은 병상수가 2700개로, 하루 평균 외래환자 1만2000명을 진료한다. 저수가의 박리다매 구조에서 지방에서도 밀려드는 환자를 보느라 교수는 연구를 못 하고 전공의의 수련은 부실해진다. 저수가를 개선해 주어 진료 부담을 덜고 중환자 진료 및 연구 그리고 전공의 교육에 투자해야 한다.

    마침 정부에서도 ‘진료권역 제도’ 시범사업 및 상급종합병원 구조전환 시범사업을 시작했다. 시범사업에 참여한 병원들에 중환자실·일반입원병실·마취료(수술 관련) 수가를 50%, 중증 수술(시술 포함) 수가도 50% 올리는 대신 일반병상을 5~15% 감축한다. 이에 따라 서울아산병원 339개,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290개 이상, 서울대병원 180개, 서울성모병원 140병상을 줄일 예정이다. 그렇게 상급종합병원의 중환자 비율을 52.8%(2022년 기준)인 전체 평균을 70%로 끌어올릴 예정이다.

    의료개혁이 단순히 의대 증원에만 매몰되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현장의 상황을 이해한 디테일이 살아 있는 정책으로 국민의 삶을 나아지게 해야 한다. 수많은 환자가 도로 위에서 시간을 버리다 치료 시기를 늦추는 일을 막는 것이 개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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