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호

콘텐츠의 힘, 제도적 생태계가 빚어낸 ‘K-컬처’ 성공 법칙

[성지연의 21세기 문화 뉴노멀 지도]

  • 성지연 에세이스트

    입력2024-12-09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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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류1.0’에서 ‘한류2.0’으로 진화한 K-컬처

    • 봉준호와 한강, 우리 현대사의 명암을 응시

    • 정부 기관과 민간 제도 간의 효율적 협력

    • 홍콩 영화의 쇠퇴는 K-컬처의 반면교사

    • K-컬처 미래, 콘텐츠·제도·후속 세대에 달려

    2024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이 10월 17일 오후 서울 강남구 삼성동 포니정홀에서 열린 ‘2024 포니정 혁신상’ 시상식에서 수상 소감을 말하고 있다. [뉴시스]

    2024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이 10월 17일 오후 서울 강남구 삼성동 포니정홀에서 열린 ‘2024 포니정 혁신상’ 시상식에서 수상 소감을 말하고 있다. [뉴시스]

    K-컬처의 출발은 ‘한류(韓流)’였다. 1997년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가 중국에서 인기를 끌었다. 그때 ‘한류’라는 말이 만들어졌다. 한류란 한국 문화가 광범위하게 소비되는 현상을 말한다. ‘한류1.0’을 이끈 것은 드라마와 대중가요다. 2004년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2005년 ‘대장금’과 ‘풀하우스’가 각각 홍콩과 태국에서 열풍을 일으켰다. 동방신기, 빅뱅, 소녀시대 등 아이돌 그룹들이 일본과 중국 등에서 선풍적 인기를 모은 것도 2000년대다.

    한류1.0이 아시아를 무대로 했다면, ‘한류2.0’의 무대는 세계다. 한류2.0으로의 진화를 선도적으로 이끈 것은 대중가요다. 그 맨 앞에는 싸이와 방탄소년단(BTS)이 있었다. 2012년 싸이의 노래 ‘강남 스타일’이 160일 만에 유튜브 조회수 10억을 기록했다. BTS는 2018년 앨범 ‘Love Yourself 轉 ‘Tear’’로 ‘빌보드 200’ 차트의 1위에, 2020년 싱글 ‘Dynamite’로 ‘빌보드 핫 100’ 차트의 1위에 올랐다.

    K-컬처 전성시대

    2021년 배우 윤여정이 영화 ‘미나리’로 아카데미영화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뉴시스]

    2021년 배우 윤여정이 영화 ‘미나리’로 아카데미영화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뉴시스]

    한류2.0에서 영화와 드라마 또한 주목할 만했다. 2020년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아카데미영화제에서 작품상·감독상·각본상·국제영화상을 받는 쾌거를 이뤘다. 황동혁 감독의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넷플릭스로 서비스되는 세계 83개국에서 모두 시청률 1위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2021년에는 배우 윤여정이 영화 ‘미나리’로 아카데미영화제 여우조연상을, 2022년에는 박찬욱 감독이 영화 ‘헤어질 결심’으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다.

    한류2.0의 새로운 지평을 연 이는 작가 한강이다. 10월 한강은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뜻밖의 선물을 우리 국민에게 안겼다.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 스웨덴 한림원이 밝힌 수상 이유다. 이제 문학 등 순수문화도 지구적으로 주목받을 수 있게 됐다.

    한강 소설이 호소력을 가진 까닭은 봉준호 영화의 경우와 유사하다. 두 사람의 작품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과거와 현재를 깊이 있게 응시한다. 광복·분단·전쟁·산업화·민주화를 거치며 우리 사회는 현대사회의 빛과 그늘이 응축된 초상화를 드러냈다. 봉준호와 한강은 각자 특유의 섬세하고 능숙한 감각으로 명암이 선명한 한국적 현실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해 감동을 안겨주는 데 성공했다. 순수문화든 대중문화든 공감보다 더 큰 무기는 없다.

    한류2.0은 2010년대 후반부터 ‘K-컬처’로 불렸다. ‘K’라는 접두어는 ‘K-팝’에서 비롯됐다. BTS의 놀라운 성공은 K-팝의 등장을 알렸고, 이어 ‘K-무비’, ‘K-드라마’의 명명이 이뤄졌다. 접두어 K는 ‘K-방역’, ‘K-선거’, ‘K-민주주의’ 등에서 보듯 정부 홍보에까지 활용됐다. 모든 분야에서 K가 이렇게 무분별하게 쓰이는 것에 동의하기 어렵지만, 대한민국 국격에 대한 국민적 자부심이 높아진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동안 일각에서는 K-컬처가 이내 시들해질 것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하지만 K-컬처는 ‘K-웹툰’, ‘K-뷰티’, ‘K-푸드’에서 보듯 오히려 영역을 넓혀 21세기 문화 뉴노멀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바야흐로 ‘K-컬처의 전성시대’가 열리고 있다.

    문화의 지속가능성을 결정짓는 요소 중 하나는 자발적 수용자다. 외교부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내놓은 ‘2023 지구촌 한류 현황’에 따르면, 2023년 12월 현재 전 세계 한류 팬(동호회원) 규모는 2억2500만 명에 달한다. 21세기는 팬덤의 시대다. BTS의 팬덤 ‘아미’나 블랙핑크의 팬덤 ‘블링크’가 보여주듯 전 세계에 뿌리내린 팬덤은 한국에 대한 관심과 호감도를 높이는 탁월한 민간 외교사절로도 기능하고 있다.

    콘텐츠의 힘, 제도의 힘

    K-컬처의 주류를 이뤄온 것은 대중문화다. 대중문화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콘텐츠의 힘’이 중요하다. 문화콘텐츠가 대중에게 사랑받기 위해서는 즐거움과 위로와 공감을 선사해야 한다. 즐거움과 위로를 안겨주지 않으면 계속 즐기지 않고, 공감이 없으면 계속 소비하지 않는다.

    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은 K-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한 장면. [넷플릭스]

    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은 K-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한 장면. [넷플릭스]

    ‌한국학자 마크 피터슨은 K-컬처의 힘이 가난 등 부정적 이미지를 극복하려는 한국인의 욕망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설명은 특히 ‘기생충’과 ‘미나리’ 등 K-무비와 ‘오징어게임’ 같은 K-드라마의 성공 이유를 알려준다. 광복 이후 우리 사회 발전이 ‘압축적 근대화’로 특징지어진다면, 이 압축 과정에서 개인이 겪은 고난과 상처, 품어온 꿈과 희망을 K-콘텐츠는 진솔하게 그려냄으로써 지구적 공감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한류1.0이 아시아적 정서에 적합했다면, K-컬처는 세계적 정서에 어울린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지구적 차원에서 불평등, 경쟁주의, 이민과 난민 등은 인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왔다. K-무비와 K-드라마는 바로 이 문제들을 작품 안에 설득력 있게 담아내 공감과 성찰을 불러일으킨다. 당대의 현실과 마주한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은 순수문화와 대중문화를 초월해 문화가 담당해야 할 마땅한 역할이다. K-컬처는 이러한 역할에 충실한 콘텐츠를 선보여 왔다.

    K-팝의 경우는 영화·드라마와 사뭇 다르다. K-팝은 지구적 취향을 겨냥한 하이브리드(혼종) 음악이다. 힙합, 발라드, 록, 전자음악, 라틴팝 등 다양한 요소가 혼재한다. 여기에 준수한 비주얼과 현란한 퍼포먼스가 결합해 매력을 배가한다. 어느 시대든 대중음악의 핵심 소비 주체는 젊은 세대다. K-팝이 성공한 이유는 국경을 뛰어넘어 청년세대가 자신의 음악으로 수용하고 소비했다는 점에 있다.

    K-팝의 성공은 스웨덴 대중음악을 떠올리게 한다. 1970년대 이후 스웨덴 팝그룹들은 세계 대중음악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스웨덴 음악 기적(Swedish Music Miracle)’으로도 불린다. 아바를 위시해 에이스 오브 베이스, 록시트, 더 리얼 그룹 등 스웨덴 그룹들은 세계적 팬덤을 보유하고 있다. 마룬 파이브, 테일러 스위프트, 케이티 페리 등의 곡들을 프로듀싱한 스웨덴의 맥스 마틴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프로듀서로 꼽힌다.

    ‘스웨덴 음악 기적’을 가능하게 한 것은 대중문화산업 생태계다. 스웨덴 정부는 대중음악 분야에 지원을 아끼지 않고, 청소년들은 높은 수준의 음악교육 혜택을 누리고 있다. 여기에 1만5000개 기업으로 구성된 스톡홀름 뮤직 클러스터가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다. 미국, 영국에 이어 스웨덴이 세계 3대 대중음악 수출국인 까닭은 바로 이러한 제도적 조건에서 찾을 수 있다.

    스웨덴 사례는 대중음악의 세계화에서 콘텐츠의 힘 못지않게 ‘제도의 힘’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대중음악은 문화이자 산업이다. 대중음악 문화산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민간 등 여러 제도가 적절히 결합해 시너지 효과를 내야 한다. 사회과학에서는 이를 ‘제도주의적 설명’이라고 표현한다.

    제도주의적 관점에서 K-컬처의 부상을 잘 설명할 수 있는 분야가 K-팝이다. 제도주의적 논리는 정부와 민간의 효율적 협업을 주목한다. 김대중 정부부터 박근혜 정부까지 우리 정부는 문화산업 육성을 위해 K-컬처에 적극적 지원을 주저하지 않았다.

    K-팝 열풍의 차원을 높인 아이돌 그룹 BTS. [동아DB]

    K-팝 열풍의 차원을 높인 아이돌 그룹 BTS. [동아DB]

    ‌한편 민간은 일본 연예산업을 창조적으로 응용해 ‘기획사’라는 연예 매니지먼트 프로덕션 시스템을 구축했다. SM엔터테인먼트, YG엔터테인먼트, JYP엔터테인먼트, HYBE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연예 기획사는 ‘캐스팅-트레이닝-프로듀싱-마케팅’ 매니지먼트를 일관하는 인하우스(in-house) 시스템을 통해 K-팝 아이돌 스타를 대거 탄생시켰다. BTS, 블랙핑크, 뉴진스 등 남녀 아이돌그룹이 지구적으로 큰 인기를 누리는 것은 콘텐츠와 퍼포먼스의 높은 경쟁력뿐만 아니라 이러한 제도적 생태계 기반이 지속 가능한 성장을 도운 덕분이다.

    미국 US뉴스&월드리포트와 와튼스쿨의 글로벌 문화적 영향력 랭킹을 보면 한국 문화가 지구적으로 미치는 파급력은 2017년 세계 80개국 중 31위에서 2022년 85개국 중 7위로 크게 상승했다. K-컬처는 콘텐츠 수출을 통한 경제적 기여와 국가 브랜드 제고라는 외교적 기여를 통해 우리나라가 문화 선진국으로 부상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해 왔다.



    지속 가능한 K-컬처를 위하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글로벌 대중문화의 표준을 이뤄온 것은 미국 대중문화였다. 할리우드 영화와 미국 드라마, 로큰롤에서 힙합에 이르는 대중음악 등 미국 대중문화의 영향력은 압도적이었다. 필자는 젊은 시절 영화관, 텔레비전, 라디오에서 미국 대중문화를 차고 넘치게 접했다.

    미국 주도의 글로벌 대중문화에 균열이 없었던 건 아니다. 1940~60년대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포착하고자 하는 영화운동)’과 프랑스의 ‘누벨바그(새로운 물결이란 뜻으로 주제와 기술상의 혁신을 추구하는 영화적 경향)’, 1960년대 이후 영국 록뮤직과 스웨덴 팝뮤직이 미국 주도의 대중문화 시장 틈새를 파고들었다. K-컬처는 비(非)서구 대중문화가 새로운 틈새시장을 개척한 이채로운 사례다. 이른바 ‘국뽕’이라고 지적할지 모르겠지만, 앞서 말했듯 K-컬처는 글로벌 대중문화의 뉴노멀 중 하나로 부상한 경이로운 현상이다.

    K-컬처에 장밋빛 미래만 예견된 건 아니다. 반면교사는 홍콩 영화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홍콩 영화가 아시아와 세계를 강타했다. 아쉽게도 그 붐은 2000년대 이후 시들해졌다. 콘텐츠가 단조롭고 제도적 기반이 취약했기 때문이다.

    K-컬처가 글로벌 소프트파워로 지속 가능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중요하다. 첫째, 콘텐츠의 다양성을 확보해야 한다. 문화의 일차적 힘은 콘텐츠에 있다. 21세기는 혁신과 전통, 개인과 공동체, 세계화와 지방화, 전쟁과 평화가 충돌하고 공존하는 시대다. K-컬처는 이런 시대적 풍경 아래 살아가는 개인들의 다채로운 서사로 청중과 관객과 독자에게 다가가야 한다.

    둘째, 제도적 생태계가 역동성을 가져야 한다. K-컬처의 성공에는 정부와 민간의 협업, 특히 연예 매니지먼트 시스템으로 대표되는 제도의 힘이 결정적이었다. 대중문화의 제도적 생태계가 살아 있기 위해서는 투명하고 공정하고 민주적인 거버넌스가 요구된다. 그동안 한류 클러스터가 추진돼 왔지만, 민간이 중심을 이루고 정부가 지원하는 역동적인 제도적 생태계를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

    셋째, 후속 세대가 등장해야 한다. K-컬처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맡아온 이들은 이수만(1952년생)을 제외하고 양현석(1970년생), 박진영(1971년생), 방시혁(1972년생) 등이다. 여기에 봉준호(1969년생), 한강(1970년생), 황동혁(1971년생) 등을 더하면, 이들은 1970년 전후에 태어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 세대를 잇는 창의적 후속 세대가 더욱 적극적인 활동을 펼쳐야 한다.

    “어쩌면 누군가를 / 사랑하는 것보다 / 더 어려운 게 나 자신을 / 사랑하는 거야. (…) 우리 인생은 길어 / 미로 속에선 날 믿어 / 겨울이 지나면 / 다시 봄은 오는 거야.”

    BTS의 ‘Answer: Love Myself’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노래는 세계 곳곳의 MZ세대에게 용기와 자존감을 선사한 곡으로 평가받는다. K-컬처가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즐거움과 희망을 계속 안겨주길 기대한다. 앞으로 더 많은 BTS, 더 많은 봉준호, 더 많은 한강이 탄생하길 나는 소망한다.

    성지연
    ● 에세이스트. 전 연세대 국문학과 강사
    ●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동 대학원 국문학 박사
    ● 여성동아에 ‘성지연의 다시 만난 그녀들’ 연재
    ● 저서: ‘어른의 인생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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