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제 ‘Legend of the Fall’에서 ‘Fall’을 ‘추락’이 아닌 ‘가을’로 오역했지만, ‘가을의 전설’은 여전히 가을 영화로 기억된다. 이뿐 아니라 ‘뉴욕의 가을’ ‘가을 여행’ ‘만추’ ‘시월애’ 그리고 오늘 이야기할 ‘가을날의 동화’는 가을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작품들이다. 청명한 날씨, 높푸른 하늘, 결실, 낙엽, 쓸쓸함. 조락(凋落)과 같은 어구에서 느껴지는 상반된 정감은 가을뿐만 아니라 사랑의 속성에도 무척 잘 어울린다. ‘가을날의 동화’는 허술한 이야기지만 배우와 감독의 매력 덕분에 동화 같은 영화로 살아난다.
배우 주윤발(왼쪽)과 종초홍이 주연한 영화 ‘가을날의 동화’의 한 장면. [트레일러 영상 캡쳐]
‘가을날의 동화’(1987)를 연출한 메이블 청(Mabel Cheung)은 30년이 지난 2018년, 한 인터뷰에서 옛 기억을 더듬어 영화의 제작 배경을 위와 같이 회상했다. 명문 홍콩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영국으로 건너가 브리스톨대학에서 연극과 문학을 공부한 메이블 청은 유학 시절 방송국에서 다큐멘터리 조감독으로 잠시 일했다. 그녀는 이때의 경험을 살려 1970년대 후반부터 홍콩라디오텔레비전(RTHK)에 입사, 당시 가장 유명했던 TV 시리즈 ‘사자산하(狮子山下)’를 비롯해 어린이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경험했다.
방송국에 근무하는 동안 점차 영화로 관심사가 바뀐 그녀는 1982년, 32세 비교적 늦은 나이에 뉴욕대학교 영화과(석사과정)의 문을 두드렸다. 이미 영상 제작 경험이 풍부했던 메이블 청은 대학원 졸업 작품으로 극장 개봉 영화를 제작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이 야심만만한 계획을 위해 홍콩에서부터 쌓은 네트워크를 총동원해 1985년 ‘불법 이민자(非法移民)’를 세상에 내놓았다. ‘불법 이민자’는 향후 이어지는 ‘가을날의 동화’ ‘팔냥금(八兩金)’(1990)과 더불어 ‘이민 3부작’을 구성하는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며 그녀의 유학 시절 경험이 오롯하게 녹아 있다. 메이블 청은 이 영화로 제30회 아시아·태평양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제5회 홍콩영화상에서 감독상을 수상하면서 일약 업계, 평단, 관객 모두에게 주목받게 된다.
1970년대가 홍콩 영화사 쇼브라더스가 주도하던 무협과 시대물 영화(costume film) 시대였다면, 1980년대는 골든 하베스트와 시네마시티가 홍콩 누아르를 이끈 시대라 할 수 있다. 갱스터 범죄물과 남자들의 우정에 기댄 버디 무비를 혼합해 해피엔딩보다는 파국으로 치닫는 경향이 강했던 홍콩 누아르는 1980년대 중·후반 영화계를 완전히 장악했다. 이 장르는 1980년대 초에 개화했지만 절정에 이른 계기는 ‘영웅본색’(1986)이었다.
‘영웅본색’이 신드롬을 일으키기 전에도 성룡식 액션 코미디와 강호의 의리를 내세운 우정담이 득세한 만큼 투자자들이 ‘동화’에 난색을 표한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더군다나 ‘가을날의 동화’는 ‘영웅본색’이 당시 홍콩 영화사상 최고 흥행 기록을 세운 직후 크랭크인이 예정돼 있었기에 제작이 성사된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까웠다. 설상가상, 주연을 맡은 주윤발과는 정식 계약이 아닌 구두로만 출연 약속을 받아놓은 상태였다.
너무나 허술한 이야기… 그런데
멜로영화를 좋아하는 지인들에게 당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작품이 무엇이냐고 물어볼 때가 있다. 나이가 지긋한 분이라면 ‘애수’(1940), ‘카사블랑카’(1942), ‘러브 스토리’(1970), 그 이후 세대라면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1989), ‘첨밀밀’(1995), ‘러브 레터’(1995), ‘글루미 선데이’(1999) 등을 꼽는데, 아주 간혹 ‘가을날의 동화’를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다. 이 작품은 1987년 제24회 대만 금마장 시상식에서 작품상·감독상·남녀주연상·각본상·촬영상 등 6개 부문에 후보에 올라 주윤발이 남우주연상을, 이듬해 개최된 제7회 홍콩영화상에서는 작품상·감독상·남녀주연상·각본상·촬영상·음악상 등 7개 부문 중에 작품상·각본상·촬영상·음악상을 석권했다.
하지만 1987년도 금마장은 왕동(王童)을 위해 존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는 허우샤오시엔(侯孝賢), 에드워드 양(楊德昌)과 더불어 대만 뉴웨이브를 이끌면서 역사 3부작 ‘허수아비’(1987), ‘바나나천국’(1989), ‘돌아오지 않는 산하’(1992)를 제작한 촉망받는 인재였다. 그런 그가 1987년 역사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인 ‘허수아비’를 발표해 작품·감독·각본상을 수상했다. 대만의 1980년대는 영화로 새로운 세상을 꿈꾼 시대였다. 그러므로 메이블 청의 말랑말랑한 ‘동화’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영화 ‘가을날의 동화’를 연출한 메이블 청 감독. [Asian Film Awards Academy]
아침 드라마에는 골목만 돌아서면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이 마주치는 장면이 매번 등장한다. 마치 이 복잡한 도시에 주인공 가족, 이 가족과 관계를 맺고 있는 몇 사람들만 사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우연한 조우가 빈번하고 관계 역시 그들끼리만 형성된다. ‘가을날의 동화’는 그러한 TV 드라마의 아주 오래된 전형이다. 세계 최고의 대도시 뉴욕에서 그들은 약속도 없이 어찌 그리 자주 부딪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캐릭터는 또 어떤가. 미국에 연극 공부를 하러 온 여자는 영어를 단답형으로만 말하고 하루 벌어서 매일 그 돈을 도박장에서 탕진하던 무일푼 남자는 여자가 떠나자마자 대오각성해서 레스토랑을 차린다. 그는 술, 담배, 도박을 끊고 문법에 맞는 고급 영어를 어느 세월에 그렇게 능숙하게 익혔을까. 나머지 등장인물들 역시 너무나 전형적이어서 오히려 경외감이 들 정도다.
배우 진백강은 ‘가을날의 동화’ 시나리오가 너무 마음에 들어 출연 분량이 적지 않았음에도 무료로 출연했다. [트레일러 영상 캡쳐]
그리고 이어지는 소설가 오 헨리의 명작 ‘크리스마스 선물’ 에피소드. 제니퍼는 할아버지 유품으로 애지중지하던 오래된 시곗줄을 새것으로 교체하려 했지만 너무 비싸서 엄두를 내지 못한다. 샘은 이를 유심히 바라보며 기억해 둔다. 제니퍼로 인해 갱생의 용기를 얻은 남자는 가진 걸 모두 팔아서 그녀가 눈여겨보던 시곗줄을 산다. 선물을 전하며 고백할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진 샘은 힘든 줄도 모른 채 한달음에 그녀에게 달려간다. 그런데 여자는 그런 샘의 마음도 모른 채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서 떠난단다. 남자는 차마 붙잡지 못한다. 둘은 어색해하면서 선물을 교환한다. 샘은 제니퍼가 떠난 후에 선물을 풀어본다. 그녀가 샘에게 준 것은 그토록 고이 간직하던 할아버지의 시계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남자도 알고 관객도 안다.
샘은 제니퍼의 멀어져가는 뒷모습이라도 보려고 뉴욕 시내를 한참 동안 뛰어다닌다. 하지만 그녀는 시야에서 사라지고 마침내 처량한 밤이 찾아온다. 아마도 남자는 그 밤에 대오각성했으리라. 그리고 이후에는 시간이 지나 결말을 맞는다. 샘은 언젠가 제니퍼에게 말했던 그 꿈을 번듯하게 이룬다. 그리고 그들은 미소를 띤 채 또다시 우연히 재회한다. 모름지기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 마지막 장면에 가슴이 훈훈해지기 마련이다.
결코 잊을 수 없는 배우들
주윤발이 주연한 홍콩 누아르의 대표작 ‘영웅본색’ 포스터. [IMDB]
하지만 크랭크인 들어가기 전, 메이블 청의 불안은 극에 달했다고 한다. 1986년과 1987년에 11편씩 도합 22편에 출연하면서 인기의 정점에 올라선 ‘따거(大哥)’가 과연 구두 출연 약속을 지킬 것인가? 이제 막 두 번째 영화에 접어든 그녀가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 채, 그에게 “믿어도 되느냐”고 물었다. 메이블 청 표현대로라면, 주윤발은 ‘영웅본색’의 마크처럼 약간의 허세를 부리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그녀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주윤발이 두 달간의 촬영을 위해 뉴욕에 머물게 된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당시 홍콩 영화계를 좌지우지하던 범죄 조직, 삼합회(三合會)는 영화계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주윤발을 통제하려 했다. 그들은 배우의 스케줄을 간섭하면서 일거수일투족을 관리했기 때문에 돈벌이가 신통치 않은 작은 영화에 톱스타가 출연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메이블 청은 구두로만 출연 약속을 한 주윤발이 뉴욕에 나타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는 삼합회를 설득해 두 달만 머문다는 조건으로 ‘가을날의 동화’에 극적으로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 ‘따거’가 지금도 존경받은 이유를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주윤발과 종초홍은 허안화의 ‘호월적고사’(1981)에서부터 호흡을 맞춘 사이였다. 특히 연기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했던 종초홍은 주윤발의 포용력을 믿고 신참 감독의 영화에 출연할 결심을 했기 때문에 그녀에게 ‘따거’는 꼭 필요한 존재였다. 주윤발은 그렇게 모두의 은인이 됐다.
주윤발과 종초홍이라는 대스타에 가려 잘 안보이지만 빈센트 역할을 맡은 진백강도 잊을 수 없다. 흔히들 여명, 장학우, 곽부성, 유덕화를 일컬어 ‘홍콩 사대천왕’이라고 한다. 이들 사인방은 배우인 동시에 최고의 반열에 오른 가수들이다. 사대천왕이라는 애칭은 배우보다는 가수를 염두에 두고 붙인 표현이다. 이 사대천왕에 앞서서는 알란 탐, 왕걸 그리고 진백강이 있었다. 세상이 알아주던 장국영과의 돈독한 우정의 탑은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장국영이 실없이 던진 농담 한마디에 완전히 무너졌고, 이후 팬이 퍼뜨린 가짜 사망사건이 겹치면서 진백강은 어린 시절부터 앓던 우울증이 폭발해 서른다섯 꽃다운 나이에 산화했다. ‘가을날의 동화’에서는 재수 없는 바람둥이 역할이었지만 언제나 소년 같던 진백강을 칸토팝(Cantopop) 팬들은 도저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원래 시나리오상에서 진백강의 역할명은 윈스턴이었지만 그가 고집을 부려 빈센트로 바꿨다. 처칠보다는 고흐가 더 좋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진백강은 이렇게 일생을 소년으로 살다가 소년으로 마감했다.
“동화처럼 산다”라는 말의 의미
영화 ‘가을날의 동화’에서 관객을 사로잡는 장면들. [IMDB, 트레일러 영상 캡쳐]
메이블 청과 영화의 각본을 담당한 나계예 두 사람은 뉴욕대학에 유학 중이던 1982년부터 연인으로 지냈다. 2022년 69세의 나이로 나계예가 타계하기까지 40년간 그들은 비록 제도적 부부는 아니었지만 가장 신뢰하는 사이를 평생 유지했다. 그들은 서로에게 최고의 예술적 파트너였다. 메이블 청이 연출한 거의 모든 영화에 나계예가 각본을 썼고, 간간이 나계예가 연출한 작품에 메이블 청은 프로듀서를 맡았다. 그들은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고 때로는 서로를 비추는 거울로서 오랜 세월을 함께했다. 홍콩 영화계의 탕아로 유명했던 주윤발은 ‘가을날의 동화’를 촬영하기 직전 진회련과 결혼한 후, 영화 속 샘처럼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 이들 부부는 아이를 갖지 않은 채, 해로하면서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노라 선언했다. 영원한 소년으로 살다간 진백강은 심지어 ‘가을날의 동화’의 시나리오가 너무 마음에 들어 출연 분량이 적지 않았음에도 무료로 출연했다. 이 모든 것이 영화의 소박한 이야기가 가진 힘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우리는 이제 ‘가을날의 동화’의 결말이 열린 채 끝나는 이유를 어렴풋이 깨닫는다. 진백강은 영원 속에서 고흐(빈센트)의 열정과 순수함으로 못다 이룬 사랑을 기원할 것이며 두 주연배우, 주윤발과 종초홍 그리고 이야기의 원작자인 메이블 청과 나계예는 본인들의 삶을 통해 ‘가을날의 동화’의 결말을 보여줬다. ‘가을날의 동화’는 동화가 가장 불가능한 뉴욕과 홍콩에서 피어난 이야기를 재료로 삼아, 사내들의 핏빛 복수극이 넘실대는 홍콩 누아르의 파토스 속에서 아름답게 피어올랐다. 그래서 허술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오래 기억되는 것이 아닐까?
김채희
● 1990년 출생
● 부산대 예술문화영상학과 졸업
● 부산대 대학원 박사
● 201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등단
● 現 부산대 영화연구소 연구원 및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