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당보다 인기 높은 장마당, 체제 균열 야기
푸틴은 김정은에게 절박한 체제 유지 돈줄
북측, ‘부끄러운 파병’ 밝혀질까 전전긍긍
어느 쪽이 전사할 군인 많이 확보하느냐가 관건
트럼프와 나토, 우크라이나 밀착 지원 결의해야
10월 30일(현지 시간) 러시아 쿠르스크 지역에서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군 진지를 향해 방사포를 발사하고 있다. [러시아 국방부]
쿠르스크는 러시아 남서부에 자리한다. 군사 전략가들에게 낯설지 않은 지명이다. 71년 전인 1943년 봄, 히틀러의 독일과 스탈린의 소련이 제2차 세계대전 유럽 전선의 명운을 바꾼 전쟁터이기도 하다. 당시 참전한 독일군 80만여 명, 소련군 120만여 명 가운데 독일군 20만여 명, 소련군 25만여 명이 전사한 곳이다. 이 전투에서 스탈린이 승리하고, 히틀러가 패배했다. 6·25전쟁 전사자 명비를 일상적으로 눈에 넣고 가슴에 담은 채 생활하는 전쟁기념사업회 회장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사망한 45만 명 전사자와 유가족이 흘렀을 피눈물을 짐작해 본다. 전쟁기념사업회 전사자 명비에 새겨진 국군과 유엔군 전사자 수는 21만 명에 달한다.
쿠르스크 전쟁 이후 스탈린의 소련은 양극체제 중 일극 국가가 됐다. 히틀러의 도박은 쪽박이 되고, 스탈린의 도박은 대박이 난 셈이다. 쿠르스크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 동부전선의 게임체인저(어떤 일의 결과나 흐름의 판도를 뒤바꿔 놓을 만한 인물이나 사건, 제품 등을 이르는 말)가 됐다. 스탈린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부유럽에 소련식 정치체제를 수출하고, 모스크바가 쥐락펴락할 수 있는 전후 동유럽 체제를 완성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푸틴과 김정은은 쿠르스크 지역을 거점으로 ‘용병형 파병’이라는 정치군사적 도박을 감행했다. 그 도박의 결과가 푸틴과 러시아에 대박을 안길지, 쪽박을 안길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점은 이 도박이 당사국뿐만 아니라 주변국에도 심각한 영향을 줄 것이란 사실이다. 볼셰비키혁명이 우랄산맥을 넘어 한반도 분단을 잉태할 줄 누가 예상했던가. 우크라이나 전쟁이 다시 우랄산맥을 넘고 두만강을 건너 김정은 체제의 내구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시 한강을 건너 한반도 정치에 회오리를 만들 태세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는 태평양을 건너 국제질서에 엄청난 지진을 일으킬 것 같다. 도박을 결행한 당사자의 대박 기대심리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우리 정부를 비롯한 관련국들은 푸틴과 김정은의 도박을 쪽박으로 만들어야 한다.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
쿠르스크 총성에서 힘겨루기까지
11월 현재 쿠르스크에서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예상되는 정전협상을 앞두고 유리한 입지를 차지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다. 마치 6·25전쟁 막바지 휴전협정을 앞두고 매일 혈전을 벌일 때와 상황이 유사하다. 6·25전쟁 당시 휴전협상 과정에서 38선이 아닌 교전 지역을 중심으로 정전협정이 진행된다는 내용이 국내외에 알려진 이후 한 평이라도 더 차지하려는 고지전이 진행됐고, 그 기간에 사상자가 가장 많이 발생했다.
8월 6일 우크라이나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결심으로 러시아 본토인 쿠르스크를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젤렌스키는 불리한 상황에서 장기화하는 러시아와의 전쟁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쿠르스크 전선을 새로 만든 것이다. 점령 면적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대략 서울시 절반 면적에 해당하는 러시아 영토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우크라이나는 점령지역에 군사 행정부를 수립했다.
돈바스 등을 장기간 점령당하고 탈환 작전이 성과를 내지 못한 채 교착국면에 있던 우크라이나 당국은 ‘공정한 평화 협상’ 조건을 만드는 것이 쿠르스크를 기습 점령한 군사적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우크라이나가 쿠르스크를 공격한 가장 중요한 전술적 목적은 러시아군에 피해를 강요해 동부전선에 있는 러시아군의 전력을 분산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전황을 종합해보면 우크라이나는 쿠르스크 상당 지역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동부전선의 러시아군을 분산시키지 못했다. 우크라이나 전력이 오히려 쿠르스크 지역으로 분산돼 동부전선의 전략적 요충지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러시아는 대외적으로 우크라이나군을 격퇴했다고 선언하면서 자국민을 안심시키려 했지만 우크라이나군이 28개 마을을 점령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아울러 쿠르스크와 인접 지역의 민간인을 소개(疏開)시키는 등 쿠르스크 지역에서 고전하고 있다. 고전하는 이유는 병력 부족에 있다. 젠렌스키가 먼저 쏘아 올린 쿠르스크의 총성은 힘겨루기 속에 심각한 소모전으로 치닫고 있다. 어느 측이 전사할 군인을 많이 확보하느냐가 관건이 됐다. 극심한 장병 목숨 소모전이다.
푸틴의 갬블링, 북한군 파병 요청
2주 정도에 끝내려는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략전쟁 계획이 좌절된 이후 푸틴이 사용할 ‘게임체인저’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전술핵무기다. 전술핵무기로 위협해 서방의 참전을 막으면서 침략 의도를 관철하려는 것이다. 6월 5일 필자가 만난 카르스텐 브로이어(Carsten Breuer) 독일 연방군 참모총장은 “푸틴이 핵무기를 활용해 우크라이나를 의도대로 끌고 갈 가능성이 크다”고 귀띔한 적이 있다. 핵무기를 실제로 사용하기보다 나토의 파병을 막는 데 활용할 거라는 얘기다. 둘째는 압도적 군사력이다. 이를 이용해 우크라이나의 군사 자원을 조기에 소모시켜 전쟁 수행 능력을 상실하게 한 다음 젤렌스키 정권을 무너뜨리려는 것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정부는 나토의 지원을 받아 전쟁 능력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일부 전비로 드론 등 전술 무기를 자체 생산해 장기전에 적응해 가고 있다.북한군 병사들이 러시아의 군 훈련장에서 보급품을 받고 있다. [우크라군 전략소통센터 및 정보보안센터 계정 영상 캡처]
푸틴이 김정은의 파병을 성사시켜 얻으려고 기대하는 바는 간단하다. 첫째는 쿠르스크 지역의 소모전을 조기 승리로 마무리하는 것이다. 북한 장병의 목숨을 담보로 우크라이나 침략전쟁을 유리한 상황에서 종결하려는 것이다. 둘째, 나토의 직접 파병 가능성을 양측이 보유한 핵무기를 방패로 막는 데 있다. 러시아와 북한 간의 군사동맹은 핵무기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푸틴은 북한군 장병을 목숨으로 우크라이나와의 소모전을 끝내고, 핵 동맹으로 나토를 겁박하는 차원에서 북한군 파병을 성사시킨 것이다.
러시아 돈줄로 체제 유지
현재 김정은 체제는 ‘노동당’보다 인기가 높은 ‘장마당(북한 주민이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 때문에 체제 내구력에 심각한 균열이 진행되고 있다. 균열 현상의 증거는 차고 넘친다. 북측 주민이 노동당 집회보다 장마당에 가서 돈벌이하는 사회 풍조가 정착해 가고 있다. 장마당에서 의식주를 해결하고, 대한민국과의 통일 가능성을 미륵 신앙처럼 기대하는 의식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그런 북측 주민의 민심을 방치하면 체제가 위험하다는 정치적 절박감이 김정은을 분단 이데올로기(분단을 유지하는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에 집착하게 하고 있다.
김정은은 장마당 위세를 꺾는 방편으로 러시아 파병을 선택했다. 러시아 파병을 통해 푸틴의 환심을 얻어 유엔안보리 제재를 형해화(形骸化·내용은 없이 뼈대만 있게 되는 것)하고 장마당을 억제할 돈줄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덤으로 꿈에도 그리는 러시아를 시작으로 국제사회로부터 핵무기 보유를 인정받고, 첨단 핵투발 기술을 도입할 찬스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파병으로 얻을 김정은의 정치·군사적 이익은 김정은 체제 유지에 독이 될 수 있다. 북측 체제는 이미 외부 사조에 상당 부분 노출돼 있다. 주민들이 명분 없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위해 장병들의 목숨과 거래한 쌀과 기름에 감동하겠는가. 김정은 체제가 당당하게 파병 사실을 밝히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0월 25일 조선중앙통신은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설에 대해 “…외무성이 하는 일을 국방성이 관여하지 않으며, 확인해 줄 필요가 없으며, 만약 있다면 국제규범에 부합한다…”고 횡설수설했다. 북측 체제 스스로 부끄럽고 명분 없는 파병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푸틴 한 사람의 환심을 사는 조치로 러시아 국민 다수와 전 세계의 공분을 야기하고, 북·중 관계마저 불신의 절벽으로 밀어붙이는, 득보다 실이 큰 도박을 행한 것이다.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이 10월 28일(현지 시간) 벨기에 브뤼셀의 나토 본부에서 한국 고위급 대표단과 회의 후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뉴시스]
도박을 쪽박으로 만들어야
푸틴과 김정은이 협업한 용병성 파병의 의도대로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쪽박으로 만드는 길이다. 나토 등 서방은 우크라이나가 실질적으로 패배하는 상황에서 정전, 종전협상이 진행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아울러 북측의 핵 보유를 인정하고, 김정은 체제의 내구력이 강화되게 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토와 서방은 영국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과 미국의 제33대 대통령, 제34대 부통령을 지낸 해리 S 트루먼의 결단을 학습해야 한다. 처칠은 독일 히틀러의 속셈을 알아챘고, 트루먼은 소련이 공산주의를 동유럽과 한반도 전체에 수출하려는 의도를 간파했다. 두 지도자는 그 속셈과 의도를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는 결기를 보여줬다. 미국 국민의 재신임을 얻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와 나토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크라이나를 밀착해 지원하겠다는 결의를 해야 한다. 최악의 경우 나토는 직접 파병도 고려해야 한다. 파병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파병된 북한 장병의 철수를 압박하는 차원에서도 필요하다. 우리 정부는 북측에 대한 심리전을 강화해야 한다. 북측이 전전긍긍하는 그 지점에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이 있다. 북측 주민이 명분 없는 파병 사실과 장병의 희생을 알게 해야 한다. 쿠르스크에서 북한 장병이 흘릴 피눈물이 김정은 체제에 독이 되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은 심리전이다. 그러나 푸틴과 러시아를 구별하는 중장기 대러시아 원모(遠謀) 외교도 필요하다. 푸틴도 김정은도 글로벌 차원에서 고립무원이라는 독배를 들고 있다. 어렵지만 반전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필요하다. 쿠르스크를 점령하는 데 앞장선 우크라이나 제22기계화여단은 히틀러를 패배시킨 소련군 부대를 전신으로 하고 있다. 히틀러를 좌절시킨 그 장면의 재현을 기대해 본다.
백승주
● 1961년 출생
● 부산대 정외과 졸업, 경북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
● 한국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장
● 국방부 차관, 20대 국회의원
● 現 전쟁기념사업회 회장, 국민대 석좌교수, 한중안보평화포럼 회장
● 저서 : ‘백승주 박사의 외교이야기’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