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관심 받고 자란 다문화 1세대
가수는 갑갑하던 인생의 탈출구이자 서광
‘아파트’는 연인과 이별한 친구 얘기 듣고 만든 자작곡
꽃 받고 미스코리아 된 고현정·장윤정·김성령
이주일 주목받게 한 ‘타잔과 충돌’ 사고
‘무엇이든 쉽게 포기하지 말자’가 좌우명
한가빈 등 트로트 후배 후원하며 창작 병행
‘신동아’ 인터뷰를 위해 부산에서 상경한 윤수일. [이상윤]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로제 양이 동명의 곡으로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걸 보니 선배로서 축하하고, 또 제 노래까지 역주행하는 상황을 겪다 보니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아파트’ 역주행 덕에 여기저기서 섭외가 많이 들어올 것 같아요.
“인터뷰와 공연 요청이 많이 들어옵니다. ‘아파트’ 역주행이 코로나(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팬데믹 이후 저조했던 활동을 만회할 기폭제가 돼 준 셈이죠.”
‘아파트’가 5분 만에 만든 자작곡이라죠? 탄생 비화가 궁금합니다.
“그 노래가 탄생한 1980년대 초반, 우리나라에 아파트 문화가 정착하기 시작했어요. 주택가에 아파트 단지가 생겨나면서 아파트에 살고 싶은 로망이 싹트던 때였어요. 그래서 평소에 아파트라는 제목으로 노래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군대 갔던 친구가 돌아와 하소연했어요. 애인이 자기한테 말도 없이 이민을 가버렸는데 자기는 그것도 모르고 그녀가 살던 아파트 초인종을 눌러댔고 아무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고요. 그 얘기가 ‘아파트’라는 노래를 만들고자 했던 제 잠재의식을 깨웠죠.”
시대 초월한 띵곡(명곡) ‘아파트’의 전설
수려한 외모와 짱짱한 노래 실력으로 1980년대 전성기를 구가한 윤수일의 한창 때 모습. [온라인 커뮤니티 캡쳐]
“그건 신의 영역 아니겠습니까? 음악을 창작할 때는 항상 제가 가진 역량을 충분히 쏟아붓는 데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이 노래는 소절 사이사이에 ‘으쌰라으쌰’라는 추임새를 넣어 응원곡으로도 큰 사랑을 받아왔다. 그 덕에 그의 히트곡 가운데서도 국민연금처럼 꾸준한 저작권료를 안기는 효자곡이다.
야구나 축구 경기장에서 응원곡으로 인기를 끄는 이유가 뭘까요.
“본질적으로 신나는 곡은 아닌데 노래하다 보면 힘이 나고 용기가 생긴다는 사람이 많아요. 록을 기반으로 한 역동적 리듬이 힘이 떨어졌다 싶을 때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원동력이 아닌가 싶어요”
그는 1982년 발표한 아파트뿐만 아니라 숱한 히트곡을 남겼다. 데뷔곡 ‘사랑만은 않겠어요’(1977), ‘제2의 고향’(1981), ‘아름다워’(1984), ‘환상의 섬’(1985), ‘황홀한 고백’(1986)이 좋은 예다. 이 가운데 안치행이 만든 ‘사랑만은 않겠어요’만 빼고 나머지가 모두 그의 자작곡이라는 점도 놀랍다.
작사, 작곡을 전문적으로 배웠나요.
“전공한 건 아니에요. 학창 시절부터 학우들과 그룹사운드를 결성했을 정도로 어릴 때부터 음악에 심취해 있었어요. 그렇다 보니 데뷔한 후 창작에 대한 열망이 커져 싱어송라이터의 길을 걸어왔죠.”
그동안 발표한 자작곡 중 특별한 애착이 가는 노래를 꼽는다면?
“일일이 열거하긴 어려워요. 앨범을 25장쯤 발표해 자작곡이 300여 곡 되거든요. 그중엔 참 고마운 곡도 있지만 애정을 쏟았음에도 대중적으로 꽃을 피우지 못한 곡이 더 많아요. 취향을 저격해 마니아를 형성한 노래도 다수 있고요. ‘도시의 천사’가 대표적이에요. 가방 하나 둘러메고 성공을 위해 도시로 가는 젊은이를 그린 노래예요.”
가수를 꿈꾼 건 언제부터인가요.
“10대 청소년기에 음악을 접하면서 비틀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김치, 된장찌개를 좋아하는 DNA도 있고요. 그때부터 팝에 가요나 트로트를 접목한 새로운 형태의 음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룹을 결성하기 전 야구부에 몸담은 적도 있던데요.
“학창 시절 ‘야구선수의 길로 가볼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마침 교내 야구부가 생겨 들어갔는데 1년 만에 해체돼 ‘내 길이 아니구나’ 싶어 마음을 접었습니다.”
외로운 소년과 음악의 상호작용
1955년 울산에서 태어난 윤수일은 다문화 1세대다. 아버지는 주한미군 공군 비행사였던 백인계 미국인 칼 브라울 어게스트 대위, 어머니는 한국인 지복희 씨다. 그의 친부는 임신 중이던 지 씨를 데리러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미국으로 돌아갔으나 그가 태어나기도 전 사고로 사망했다. 윤수일은 지 씨가 재혼한 후 새아버지의 성을 따 지은 이름이다. 친부의 영향으로 이국적 외모를 타고난 그는 온 동네의 불편한 관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소년 윤수일은 어떤 아이였나요.
“소외감을 굉장히 많이 느꼈고 외로움을 많이 탔어요. 그러다 보니 비뚤어지고 탕아 같은 기질을 보이기도 했지만 자라면서 불편한 시선을 극복하고 사회에 적응하는 방법을 터득했죠. 무엇보다 음악이 갑갑하던 인생에 탈출구가 돼줬어요.”
음악에 자전적 이야기를 녹여냈나요.
“맞습니다. ‘아파트’와 ‘아름다워’는 물론이고 직접 만들지 않은 ‘사랑만은 않겠어요’에도 제 이야기가 녹아 있어요. ‘사랑만을 안 하겠다’는 테마 자체가 저와 어머니 스토리예요. 어머니가 혈혈단신으로 저를 키우면서 겪은 애환 때문에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거든요.“
1980년대 미스코리아선발대회에서 본인이 장미꽃을 건넨 사람이 진(眞) 아니면 선(善)에 당선됐어요. 장윤정, 김성령, 고현정 씨가 대표적이죠. 그 바람에 당시 ‘윤수일에게 꽃을 받아야 당선된다’는 속설이 생겨나기도 했어요. 당선을 예감하고 꽃을 준 건가요.
“우연의 일치일 뿐이에요. 제가 한창 활동할 때는 시대를 풍미하던 분들이 전부 아담 사이즈였어요. 제 키는 177cm로 다른 가수들에 비해 큰 편이었고요. 그렇다 보니 미스코리아선발대회에 나온 미녀들과 함께 서 있으면 키가 나름대로 잘 맞았어요. 그런 이유로 연출가들이 초대 가수로 저를 섭외했는데 신기하게도 ‘아름다워’를 부르며 장미꽃을 건네준 이들이 진·선·미에 들어 저까지 주목받은 ‘추억’이 있습니다.”
코미디계의 대부였던 고(故) 이주일 씨와도 특별한 인연이 있다고 들었어요.
“이주일 선생이 언더그라운드에서 인기가 많았는데 무명의 세월이 참 길었어요. 그러다가 방송에 도전장을 냈어요. 방송에 나가면 반드시 큰 코미디언 스타가 될 거라 믿고 있었는데 마침 좋은 프로그램에 함께 나가게 됐어요. 제가 타잔 역을 맡고 이 선생은 행인으로 출연했죠. 그런데 제가 타잔으로 분장하고 밧줄을 타고 내려오는 과정에서 이 선생이 저와 부딪혀 물웅덩이에 풍덩 빠지며 폭소를 자아냈어요. 순간 포착이 아주 대단한 분이거든요. 그때부터 이 선생이 큰 인기를 끌기 시작했어요. 그 인연으로 함께 공연도 많이 했어요.”
한창 잘나갈 때 라이벌로 여긴 가수가 있나요.
“방송사가 연말에 주는 10대 가수상을 10년 정도 꾸준히 받았어요. 이은하, 혜은이, 전영록, 김수철, 구창모, 조용필 씨와 한 시대를 풍미한 셈이죠. 그런 가수들에게 라이벌 의식이 없지는 않았지만 서로 경쟁하면서 음악적 발전을 도모하는 동반자 같은 관계였어요. 선의의 경쟁을 한 거죠.”
배우에 도전해 볼걸
그는 50년 가까이 가수로 살면서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걸어왔다. 이런 그의 인생에도 슬럼프가 있었다. 2002년 다단계 사건에 연루돼 벌금 500만 원 형을 선고받고 활동을 잠정 중단한 것이다. 2008년 항소심에서 그는 최종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그사이 체중이 10kg이나 줄고 머리털이 다 빠지는 후유증을 겪은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마음고생이 심했다죠?
“네트워크 사업이 나쁜 일은 아닌데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잘못된 방식으로 운영하는 사람들 때문에 인식이 안 좋아졌죠. 네트워크 사업으로 성공한 다국적회사가 꽤 있습니다. 그런 회사를 만들고 싶었는데 평생 음악만 하다 보니 경영에 맹점이 있어 사업을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이었죠. 마음고생을 하긴 했지만 인생의 한 과정으로 여깁니다. 다른 사업을 했더라도 힘든 시간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힘든 시간을 견디게 해준 보약 같은 좌우명이 있나요.
“무슨 일이든 ‘쉽게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되자. 매사에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을 늘 가슴에 새깁니다. 그것이 제 삶의 목표입니다.”
살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과 후회되는 일이 뭔가요.
“제가 데뷔하자마자 어머니가 암으로 투병하셨어요. 그런 어머니에게 제가 가수로서 히트곡을 내고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어머니를 잘 모신 일이 가장 보람됩니다. 좀 후회스러운 것은 젊은 날 배우로 데뷔할 기회가 정말 많았는데 그런 제의를 다 뿌리친 일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쉬워요. 제가 가진 개성을 충분히 더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음악에만 몰두하겠다는 고지식한 판단으로 저버려서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활동이 뜸했습니다. 어떻게 지내셨나요.
“창작 활동을 하면서 후배들을 후원했어요. 지금도 두 가지를 병행하고 있고요.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에서 결선에 진출하지 못했지만 실력이 뛰어난 한가빈, 장보윤 같은 가수요.”
그는 후배들에게 “지금은 노래와 춤 실력만으론 안 된다. 예능 감각을 키워야 한다. 표정과 정신 관리도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세월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정말 건강해 보입니다. 비결이 뭔가요.
“평소 운동을 즐기고, 크게 나쁜 짓이나 건강에 해로운 일을 안 합니다. 꾸준한 음악 창작 활동도 건강에 도움이 됐을 거라 생각합니다.”
본인에게 가수란 어떤 의미인가요.
“인생의 탈출구이자 서광이지요. 다문화 1세대여서 심한 편견과 문제가 많은 사회에서 성장해 외톨이로 지냈습니다. 군대에도 갈 수 없었고, 공무원이 될 수도 없었어요. 선택지가 별로 없던 제게 가수라는 직업은 행운 그 자체입니다.”
히트곡이 워낙 많아 공연을 열면 늘 성황을 이루는 걸로 압니다. 50년 가까이 희로애락을 함께한 팬들을 위해 공연이나 앨범을 선보일 계획이 있는지요.
“이르면 내년 1~2월에 지금 준비하는 정규앨범이 나올 겁니다. 까다로운 기준으로 엄선해 10곡 넘게 담을 거예요. 음반이 나오는 시기에 맞춰 전국 투어 공연을 펼칠 계획입니다.”
‘록뽕(록 음악+트로트)’이란 말을 탄생시켰고 시티팝의 창시자로 불립니다. 앞으로 어떤 가수로 기억되고 싶은가요.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적인 음악을 꾸준히 창작하는 가수로 남고 싶어요. 힘닿는 데까지,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그런 가수가 되려는 다짐을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김지영 기자
kjy@donga.com
방송, 영화, 연극, 뮤지컬 등 대중문화를 좋아하며 인물 인터뷰(INTER+VIEW)를 즐깁니다. 요즘은 팬덤 문화와 부동산, 유통 분야에도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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