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호

소설가 복거일

“한국 자유주의는 노태우 정권 때 개화, 이념 일천한 YS는 오히려 전체주의적”

  • 김정호 자유기업원 원장 chunghokim@hotmail.com

    입력2007-10-09 16: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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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구나 자유를 말하고 자유주의를 말하지만, 정작 그 실체를 명확하게 꿰뚫는 사람은 만나기 어렵다. 냉전 종식 이후 거스르기 어려운 대세가 되어가는 세계화와 자유주의를 보다 정밀하고 냉철하게 짚어보기 위한 시리즈를 시작한다. 한국의 대표적인 자유주의 이론가들과 학자들을 만나 그들이 가진 신념은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 개인의 자유와 한국 사회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 이를 통해 바라본 한국의 미래는 어떻게 펼쳐질 것인지를 듣고자 함이다. 그 첫 번째 순서는 소설가 복거일씨다.
    소설가 복거일

    ● 1945년 충남 아산 출생<br>● 서울대 상대 졸업<br>● 중소기업은행, 한국과학연구원 근무<br>● 現 문화미래포럼 대표<br>● 1987년 가상 역사소설 ‘碑銘을 찾아서’로 등단<br>● 저서 : 소설 ‘역사속의 나그네’ ‘파란 달 아래’, 평론집 ‘소수를 위한 변명’ ‘이념의 힘’ 등

    1년전쯤 여의도의 한 식당에서 경험한 일이다. 자유기업원에서 그의 글을 출판한 것을 기념해 복거일씨가 나와 수고한 직원들에게 점심을 내는 자리였다. 내가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것은 계산대에서 벌어진 광경이다.

    계산을 하는 식당 직원에게 그는 금액도 묻지 않고 지갑을 통째로 내밀었다. 알아서 빼가라는 말이었다. 당황스러워하던 직원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순간 내 머릿속에는 연암 박지원의 ‘양반전’이 떠올랐다. 손으로 돈을 만지지 않고 쌀값도 묻지 않는 것이 양반이라는 내용이다. 그 식당에서 본 복거일씨의 태도는 글자 그대로 ‘양반’의 태도였다.

    그는 진정한 선비다. 그가 돈에 연연하지 않는 것은, 서울대 상대를 나온 그의 학력이나 능력으로 미루어 보수가 좋은 직장에 갈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겠지만 십수년간 가난한 프리랜서 작가 생활을 한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그보다 더 그를 선비답게 만드는 것은 용기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글을 쓰고 말을 하는 것이 복거일의 태도다. 도끼를 짊어지고 상소를 올렸다는 올곧은 선비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데 과거의 선비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 있다. 옛날 선비들이 사회를 가난으로 몰고 간 공리공론(空理空論)에 몰두했다면 복거일의 사상은 대중을 잘 먹고 잘살게 하려는 방법들로 가득 차 있다.

    인간 본성에 대한 연구



    그는 이 시대 최고의 자유주의 이론가다. 수학과 물리학과 생물학에서부터 경제학과 법학과 역사학으로, 그리고 문학과 음악과 미술로 뻗쳐가는 그의 지식은 끝이 없어 보인다. 그는 소설가이자 시인이며 희곡작가다. 그런 바탕 위에 정립된 사상이기에 그의 자유주의는 깊고 넓다. 8월29일 오후 여의도 자유기업원 사무실에서 진행된 ‘자유인’과의 대화 첫 손님으로 그를 청한 이유다.

    김정호 자유주의란 사람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 권리가 있다고 믿는 사상입니다. 사람마다 자신의 생명과 신체와 재산을 스스로의 뜻에 따라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타인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는 의무도 지켜야겠지요. 이 때문에 자유주의자는 타인의 부당한 간섭을 거부합니다. 다른 시민들의 강압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지만, 정부의 강압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개인의 자유가 보장됩니다. 그래서 자유주의자들이 꿈꾸는 정부는 작은 정부입니다.

    개인이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과에 대해서도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 자유주의의 생활철학이 아닐까 합니다. 작은 정부와 스스로 책임지는 개인, 이 두 가지가 합쳐지면 시장경제가 탄생합니다. 그래서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는 동전의 앞뒷면을 이룹니다.

    인류사 대부분의 기간에 자유주의는 희귀한 것이었습니다. 왕의 명령에 전체 사회가 복종해야 했고 개인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영국, 프랑스, 미국 등 몇몇 나라에서 자유주의가 자리잡았고 그에 따라 물질적으로 번영하지만, 오래지 않아 사회주의의 격랑에 떠밀립니다. 20세기 초에는 인류의 3분의 1이 자유와는 거리가 먼 공산주의 국가에서 살게 됩니다. 자본주의 국가도 사회주의를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수정자본주의라고 불렀지만, ‘절반의 사회주의’인 셈이지요. 그런 사회에서 자유주의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세계가 이제 자유주의의 물결을 타고 있습니다. 소련이 레이건과의 대결을 견디지 못하고 붕괴된 후 공산권 국가들이 과거의 껍질을 벗고 자유와 시장을 선택했고 그것으로 번영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중국과 베트남, 동유럽의 많은 나라가 그렇습니다. 이제 프랑스와 독일마저 사르코지와 메르켈을 내세워 자유를 선택한 것만 봐도 자유주의는 가히 세계적 정신이고, 시대정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설가 복거일

    1917년 일본인 토목기사들이 전남 무안에서 ‘토지 세부 측량’을 하고 있다. 강점 초기 일제는 전국에서 이러한 세부 측량을 진행했다.

    우리 사회의 자유와 자유주의는 어떤 상태일까요. 우리 시대의 대표적 자유주의 이론가이신 복거일 선생은 자유주의가 세계적으로 시대정신이 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복거일 가장 큰 이유는 오랫동안 계속된 전체주의 실험들이 실패했다는 역사적인 정황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소련, 중국, 동유럽 국가에서의 공산주의 실험과 나치 독일,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등 민족사회주의 체제의 실패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대신에 자유주의를 택한 사회들은 번창했습니다. 세계인이 그런 역사적 교훈으로부터 배우게 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일 것 같아요.

    두 번째는 근년에 자유주의에 대한 이론적 뒷받침이 이뤄졌다는 사실도 중요한 이유라고 봅니다. 특히 사람의 천성(天性)에 대한 연구가 아주 깊어졌다는 것입니다. 전체주의는 대개 인간을 개조할 수 있다는 전제 위에 서 있습니다. 히틀러도, 레닌도, 김일성도 모두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새로운 이론들은 인간의 본성은 고치기 어렵다는 것으로 결론이 모아지고 있어요. 이 때문에 당분간 자유주의에 대한 반론은 설득력이 없을 것 같습니다. 개인에게 자유를 주지 않아야 할 이유가 그만큼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인구가 증가한 까닭

    하지만 자유주의의 앞날이 탄탄한 것만은 아닙니다. 민주주의에서는 다수결을 피할 수 없고, 그러다 보면 다수의 결정 때문에 소수의 자유가 침해당하기 십상이지요. 민주주의가 오래 지속되면 사회주의적 성향이 틀림없이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주의자들이 할 일은 늘 생겨납니다. 어떤 점에서는 자유주의자가 행복한 면도 있지만 걱정스러운 면도 있죠.

    김정호 자유는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줍니다. 자유 그 자체가 무엇보다도 귀하지만, 자유는 물질적 풍요도 가져다준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는 인류 최초로 개인이 자유를 누릴 수 있던 곳이었습니다. 그 자유가 아테네의 시민들에게 여러 분야에서 풍요를 가져다줬습니다. 물질적 풍요뿐 아니라 갖가지 사상과 예술이 생겨나기 시작했어요.

    명예혁명 이후 왕권이 약화된 영국에서 시민들의 자유가 생겨났고, 그것을 기반으로 세계 최초의 산업혁명이 일어납니다. 중국에서도 개인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당나라나 남송시대에는 사람들이 풍요를 누렸지만, 황제의 독단 때문에 개인의 자유가 질식당했던 명나라 이후에는 빈곤이 찾아듭니다. 복 선생께서는 경제적 자유와 재산권을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하시던데요, 이 역시 같은 맥락이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복거일 경제적 자유는 다른 모든 자유의 기본입니다. 그리고 경제적 자유는 재산권과 동전의 앞뒷면을 이루지요. 그렇기 때문에 자유주의를 떠받치는 기본적인 제도는 재산권입니다. 인권도 따지고 보면 재산권의 한 부분입니다. 사람이 가진 가장 중요한 재산이 몸이거든요. 몸의 노동을 통해 얻은 재산은 바로 자신의 일부분과 같지요. 재산의 중심에 바로 자기 몸과 마음이 있다는 겁니다. 제일 먼저 그것을 뚜렷이 밝힌 사람이 존 로크입니다.

    몸과 마음을 써서 노력한 결과물이 자기 것이 되어야 비로소 사람들은 몸과 마음으로 노동을 하게 됩니다. 그 결과가 물질적 풍요이고요. 조금 전에 영국의 예를 말씀하셨는데, 그와 아주 대조적인 나라가 러시아입니다. 두 나라의 뚜렷한 차이는 재산권 의식이 있고 없음입니다. 러시아에서는 농노제가 강화된 뒤부터 재산권이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반면 영국에서는 일찍부터 재산권 개념이 발전했죠. 그 결과 영국은 자유와 풍요를 얻었고, 러시아는 피폐와 압제의 나락으로 빠져듭니다.

    김정호 우리 경제 발전의 역사에서 일제 강점기를 빼놓고 말할 수는 없을 텐데요. 말하기 매우 불편하지만, 그 기간에 조선인의 생활수준이 많이 향상됐습니다. 조선말에 비해 굶거나 병들어 죽는 사람의 비율이 훨씬 낮아진 것이 사실이고, 교육을 받는 사람의 숫자도 훨씬 많아집니다. 일제 치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생활이 그렇게 좋아진 것도 일제가 이 땅에 이식한 제도들의 자유주의적 요소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신분제도를 타파한 것이 중요했습니다. 신분제만큼 자유를 질식시키는 것이 없으니까요. 갑오경장을 필두로 일본인들은 우리의 신분질서를 무너뜨려갔고, 그 결과 ‘상놈’도 잘살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민법을 도입해 개인의 재산과 계약을 보호하기 시작한 것도 중요했고요. 재산권과 경제적 자유를 보호하는 그런 장치들이 생산력을 높여서 생활수준이 올라가기 시작한 것 아닌가 생각되는데요.

    소설가 복거일
    복거일 식민 지배를 당한 경험이 워낙 아프다 보니 외면하고 싶은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그런 태도를 바람직하다고는 보기 어렵지요. 이제 그 시대의 의미를 직시할 필요가 있어요. 식민시대의 의미는 인구의 변천사를 보면 잘 드러납니다. 이 땅의 인구는 조선조 순조 때부터 계속 줄어들었는데, 일본의 식민통치와 더불어 늘어납니다. 이리 깎고 저리 깎더라도 최소 40%는 늘었다고 봐야 할 거예요.

    그 시절에 인구는 영양상태, 즉 생활수준을 반영하는 지표였습니다. 생활이 곤궁하면 인구가 줄고 살기 좋아지면 인구가 늘었습니다. 그러니 일제 때 살기가 좋아진 측면이 있다는 말이죠. 그것은 일본 통치가 나름대로 합리적이었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 합리적인 요소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재산권입니다.

    조선조에는 기본적으로 백성의 재산권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막비왕토(莫非王土), 즉 하늘 아래 왕의 땅이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권력자가 원하면 백성은 다 내놓아야 했지요. 게다가 조선 조정은 직접 세금을 거둘 능력조차 갖추지 못했습니다. 대신 세금을 대리징수(tax farming)했습니다. 지방 수령들에게 조세징수권을 부여하고, 왕이 다스리는 조정에서는 정한 양만 가져가는 체제를 말합니다. 그러니 지방 수령들의 수탈이 극에 달했지요. 백성의 재산권이 보장될 리가 없었습니다. 백성이 근로의욕을 잃는 것은 합리적 반응이었습니다.

    그것을 처음으로 바로잡은 것이 일본이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습니다. 일본이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개인의 소유권을 인정했고, 그것을 기반으로 법정 조세징수를 제도화합니다. 비로소 우리 사회에 재산권이 확립된 것이지요. 그런 재산권의 바탕 위에서 우리 사회가 효율적으로 되고 개인이 재산을 축적해갑니다. 재산권의 확립, 그것이 철도나 도로와 같은 사회간접자본의 확충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다고 봅니다.

    김정호 일본 사람들이 조선인의 자유를 뺏은 것은 사실 아닌가요.

    복거일 조선 사람들이 일본인의 지배를 받겠다고 나선 것도 아닌데 강제로 합병했으니 그것 자체가 근본적으로 자유를 침해한 것이지요. 여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다만 개인의 자유는 식민시대에 오히려 늘었다는 것 역시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조선 사회에서는 많은 백성에게 개인의 자유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지배계급인 양반계층이 권력을 독점하고 나머지 양민과 노비의 자유는 굉장히 제약됐죠. 특히 인구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던 노비에게는 자유가 없었지요. 노비는 인격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 개나 소와 같은 재산으로 간주됐으니까요.

    그런 노비들에게는 갑오경장은 거의 ‘양자도약(Quantum Jump)’인 셈이었어요. 그 사건으로 신라 말기부터 1000년 넘게 이어져온 신분제가 철폐됐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갑오경장은 일본이 당시 조선 지배계층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한 사건임을 간과하기 어렵습니다. 신분광복에다 재산권의 보장이 겹쳤으니 실제로 일반 대중이 느끼는 자유는 그 시대에 크게 신장된 것입니다.

    김정호 자유가 확장되는 추세는 광복 이후에도 지속됐다고 봐야 할까요. 광복이 되고 나서 식민지 시기보다 물질적으로도 더 풍요로워진 것이 사실인 만큼 이 땅의 자유도 늘었다고 봐야 할 것 같은데요.

    복거일 일본의 식민통치 자체에 초점을 맞추면 본질이 가려집니다. 일본의 식민통치는 당시의 우세한 문명인 근대 서양 문명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파이프라인이라고 봐야 합니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받아들인 서양 문명을 우리는 일본을 통해서 받아들인 겁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제도의 거의 전부가 일본의 식민지시대에 만들어진 거예요. 법률, 정부기구, 쓰는 용어 또는 관행 등 대부분 거의 그대로지요.

    이토 히로부미의 선택

    그런데 약간 왜곡된 형태로 받아들였어요. 일본이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기로 했을 때 그 구체적 형태를 선택한 사람이 이토 히로부미입니다. 그 앞에 자유주의적 요소가 강한 영국 헌법과 전체주의 색채가 강한 프로이센 헌법이 있었는데, 이토 히로부미는 프로이센의 것을 택했지요. 조선총독부는 그걸 이 땅에 시행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총독이 사법권까지 행사하는 형태로 나타난 것입니다.

    반면 광복이 된 뒤에는 보다 합리적인 미국식 헌법의 기초 위에 우리의 체제를 구성할 수 있게 됐습니다. 삼권분립도 확실히 이뤄집니다. 결론적으로 서양 문명의 자유주의 사상을 일본을 통해 불완전하고 제약되고 왜곡된 형태로 받아들였다가, 광복과 더불어 우리가 보다 완전한 것으로 만들게 됐다고 보는 게 정확하지 않을까 합니다.

    소설가 복거일
    김정호 경제적 자유만큼이나 정치적 자유도 중요합니다. 자신의 의지대로 대표자를 뽑고 그에게 자신을 대신해서 결정할 힘을 주는 것입니다. 다수의 이해가 걸린 문제는 다수의 의사에 따라 결정하는 것도 정치적 자유의 중요한 일부분입니다. 그럴 자유가 없으면 독재자의 지배를 받게 마련이지요.

    그런데 정치적 자유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치적 자유는 대부분 집단적 결정의 자유이고, 다수결의 자유를 말합니다. 다수가 원한다면 그 나머지는 원하지 않아도 따라야 하는 것이 정치적 자유의 속성이지요. 그러다 보니 그 다수에 속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자유가 아니라 속박이 되는 경우도 생깁니다. 잘못하면 전체주의, 민중주의가 되어버리는 거지요. 복 선생께서는 민중주의라는 개념을 많이 사용하시던데, 정치적 자유에 대한 생각이 궁금합니다.

    복거일 하이에크의 표현을 빌리면 자유주의란 ‘어떤 사회를 이룰 것이냐’에 관한 이념이고, 민주주의는 ‘그런 사회를 이루고 운영하는 방식’에 관한 이념입니다. 하나는 본질에 관한 것이고 하나는 절차에 관한 것인 셈이지요.

    다수가 원하는 방향으로 결정한다는 것이 민주주의입니다. 반면 자유주의는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살 수 있어야 하고 다수가 무엇을 원하든 각 개인이 사회적 강제로부터 자유로워야 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다 보니 둘이 상충되는 면이 있죠. 지금 우리 사회처럼 흔히 민중주의라고 하는 현상이 나오기도 합니다. 민중주의의 등장은 보편적인 참정권을 주자는 주장이 나왔을 때 이미 자유주의자들이 예견했습니다.

    “정권 이기주의 극대화한 YS”

    민중주의가 등장하면 사회주의 색채가 짙어질 것이고 자유가 많이 훼손되게 마련입니다만, 그것을 막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은 없다고 봅니다. 모든 사태에 대비해서 뭔가를 마련해둘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앞으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강해질수록 사회주의적인 색채도 강해질 겁니다. 그러다가 그에 따른 부작용이 커지면 또다시 자유주의로 오겠죠. 이렇게 시계추처럼 오가는 것입니다. 자유주의가 이 시대의 큰 물줄기이긴 하지만 그에 도전하는 잔물결은 끊임없이 일어날 거라는 얘기입니다.

    김정호 우리 역사에서 자유주의 색채가 가장 강했던 시대는 언제라고 볼 수 있을까요.

    복거일 제 생각으로는 노태우 정권인 것 같아요. 단군 이래 자유주의가 가장 흥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의 언론자유를 생각해보세요. 대통령을 ‘물태우’라고 부르고도 신변이나 재산상의 피해를 걱정하지 않아도 됐어요. 이는 전두환 정권과도 연결되는데요, 전두환 정권은 정치적으로는 권위적이었지만 경제적으로는 재산권을 보장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노태우가 정치적 권위주의를 걷어내니까 갑자기 자유주의만 남게 된 거지요.

    김영삼 정권부터는 전체주의적인 풍조가 다시 시작됩니다. 김영삼 정권 때는 원칙이 없었어요. 원칙이 사라지고 나면 유일한 나침반이 정권의 이익입니다. 그래서 정권 이기주의가 가장 적나라하게 나타난 것이 김영삼 정권 때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김영삼 대통령을 열렬히 지지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분은 이념적으로 투철한 면은 없었어요. 자유주의를 진작시킬 그런 이념적인, 지적인 바탕이 없었던 것이지요.

    포퓰리즘, 햇볕정책, 보호무역 같은 성향들이 다 그때 강화됐습니다. 흔히 햇볕정책은 김대중 정권이 시작했다고 말하지만, 그 뿌리는 김영삼 정권 때부터라고 봐야 합니다. 요약하자면 노태우 정권 때 자유주의가 개화했고 김영삼 정권 때부터 민중주의에 편승한 사회주의 색채가 짙어지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김정호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그렇습니까.

    복거일 대표적인 것이 노동조합의 정치활동을 허용한 부분입니다. 그전까지 노동조합의 활동은 기업체 내로 국한됐어요. 김영삼 정권은 그 원칙을 깨고 노조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그 결과 노동조합이 정치단체가 되어 버린 겁니다. 그게 지금 화근이 돼 우리 사회에서 경제적 자유와 번영을 해치고 있습니다.

    외국의 기업들이나 경제평론가들이 우리나라의 노동시장을 묘사할 때 ‘toxic’이라는 표현을 쓰기까지 합니다. 우리나라 노동시장이 마치 독극물에 오염됐다고 여기는 겁니다. 한국에 투자하면 큰일이 날 수 있음을 경고하는 단어지요.

    “자유주의 예술은 재미가 없다”

    게다가 우리 사회에서 정치활동은 어차피 북한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노조의 정치활동도 예외가 아니고요. 얼마 전 현대자동차 노조에서 북한에 국수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한 일이 있습니다. 기술적으로 아직도 전쟁 상태에 있는 북한에 한 기업의 노동조합이 몇억원을 들여서 국수공장을 짓는 일은 분명 경제활동이 아니라 정치활동입니다. 그처럼 정치활동이 시작되면 끝이 없어요.

    김정호 민주주의가 민중주의나 포퓰리즘으로 흐르지 않으려면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알고 그 자유를 지지하는 지식인의 숫자가 많아지고 활발하게 활동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행히도 대한민국 사람들의 사고방식 속에 자유주의적인 요소가 많이 자라난 것 같아요. 예전에는 정부에서 하라고 하면 국민은 당연히 따르는 것으로 알았는데, 이제는 정부와 국민이 따로 갈 때도 많지만 그것을 그리 불편하지 않게 여기게 된 것은 상당한 진전으로 봅니다. 국회가 만들어놓은 법률에 대해 헌법소원을 내는 것도 자유에 대한 자각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지요.

    언론의 논조도 상당히 많이 바뀌었습니다. 예전에는 많은 언론이 개인의 자유보다는 국가 전체의 이익을 강조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제는 상당수 언론이 경제적인 자유를 강조합니다. 학계에선 경제학자와 경영학자들 중에 자유주의적 시각을 가진 사람이 많은 듯합니다. 민족이나 국가 같은 개념을 덜 강조하지요. 반면 인문과학자들은 아직 개인보다는 전체를 더 강조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복거일 선생께서는 소설가나 시인, 연극인들을 자주 접하시니, 그분들의 자유에 대한 성향이 어떤지 평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복거일 현실적으로 자유주의자는 대부분 경영학자, 경제학자인 것 같아요. 정치학이나 사회학계에서는 자유주의보다는 전체주의적인 성향을 많이 드러내는데, 거기에는 학문의 방법론적 차이가 놓여 있습니다. 경제학은 개인의 행동으로부터 사회 전체의 움직임을 이끌어냅니다. 반면 정치학이나 사회학에선 개인이 아니라 거대한 집단의 움직임을 갖고 사회를 파악합니다. 그래서 경제학자들은 개인에게 관심을 갖는 반면 정치학자나 사회학자들은 큰 집단에 관심을 두지요. 그러다 보면 아무래도 개인에 대한 생각이 덜해집니다.

    예술가들로 가볼까요.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예술가도 사회를 이해해야 합니다. 예술가도 사회를 이해하고 싶어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틀을 습득할 기회가 없어요. 게다가 애초부터 그런 공부를 좋아하는 성향도 아니고요. 그 결과 예술가에게 사회는 이해할 수 없는 대상으로 비쳐지고 두려운 괴물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사람들은 자기가 모르는 것은 발전시키기보다는 없애려는 성향이 있죠. 많은 예술가가 사회에 적대적인 태도를 지니게 되는 원인입니다.

    예술가들이 이 사회를 설명하는 유일한 도구가 ‘자본의 논리’입니다. 자본가들이 장막 뒤에서 사회를 인형극의 인형술사처럼 조종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 토대가 되는 것이 마르크스주의 이론입니다. 복잡한 경제학 이론보다 간단하고 직관에도 맞기 때문에 마르크스의 이론이 예술가들 사이에서 널리 퍼졌어요. 당연히 자유주의에 대해선 적대적이지요.

    거기에 덧붙여진 것이 북한의 영향입니다. 박정희, 전두환 두 정권의 억압적인 분위기에 절망한 젊은이들이 마르크스주의와 주체사상에 물들게 됩니다. 1980년대 후반의 젊은 예술가, 이론가들이 6·25전쟁을 서슴없이 ‘조국광복전쟁’이라고 하던 것을 기억합니다. 조국을 미제국주의로부터 광복시키기 위한 전쟁이라는 뜻의 북한 용어지요. 그 사람들이 많이 전향을 했지만, 기본적인 철학이 바뀐 건 아니에요. 자유주의에 대해선 여전히 적대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정호 1930년대 미국 할리우드에선 찰리 채플린 같은 배우, 감독들이 대부분 공산주의자였습니다. 자본주의가 가장 성한 나라에서 공산주의가 왕성하게 활동한 곳이 영화계였죠. 우리나라 영화계는 어떨까요. 자유주의적인 씨앗들이 생겨나고 있나요.

    복거일 좌파 일색이라고 봐야 할 텐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자본주의나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작품은 재미가 없어요. 내가 소설을 쓰는 사람이지만, 소설만 봐도 그렇습니다. 이 사회가 잘못됐다며 용감하게 불의에 맞서 싸우는 영웅을 내세워야 작품이 됩니다. 불완전하지만 그래도 지금의 체제가 낫다고 하는 작품은 팔리질 않아요. 제 작품은 잘 안 팔리지 않습니까(웃음). 그런 면에서 어차피 기존 체제를 비판하는 작품들이 나올 수밖에 없어요. 우리 사회가 기본적으로 자유주의, 자본주의 체제이기 때문에 영화든 소설이든 필연적으로 그것을 반대하는 사회주의적 작품들이 나온다는 거죠.

    게다가 그것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더욱 증폭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미주의는 분명히 상업주의에 물들어 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의 생각 속에 어느 정도 반미주의가 있었던 게 사실이지만 그렇게까지 퍼지진 않았어요. 영화 같은 장르에서 그것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과정을 통해 문제가 더 커진 경향도 있습니다.

    “기업은 왜 우파에 관심이 없나”

    김정호 자유로운 사회를 지탱하려면 자유의 사상이 어느 정도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교육이 맡아야 할 임무일 것 같은데요. 우리의 학교가 그런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 의문이에요.

    저도 초·중·고교를 거치면서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자유에 대해 제대로 배운 기억이 없습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개인의 자유는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배웠어도, 국가가 개인의 자유에 봉사해야 한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복거일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에요. 서양에서도 그런 얘기가 나온 지 얼마 안 됐거든요. 또한 인간의 유전자 속에 집단을 위한 희생의 성향이 들어 있습니다. 자식이나 부모를 위해 자기 몸을 내어주는 것은 그런 유전적 성향의 발로입니다. 그러니 집단을 위한 개인의 희생을 설파하는 것은 본능에 충실한 일입니다. 그러한 본능적인 행태를 떠나 사람이 자유를 의식하고 모두가 같이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주장은 최근에 생겨난 것입니다. 사람이 진화하면서 최근에 나온 고귀한 생각이 바로 자유라는 것이죠. 교육이 그것을 얘기하게 된 것은 더욱 최근이고요.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에는 자유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자유주의가 융성하려면 학교교육뿐 아니라 가정교육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불행히도 우리는 가정에서의 자유에 대한 교육이 일천한 데다, 학교에서는 좌파적 교사노동조합이 자유주의에 적대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더욱 큰 문제입니다. 교육 내용도 중요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런 문제에 대한 대책을 세워 영향을 줄이는 일이 필요해요.

    김정호 자유주의 사상의 씨앗을 퍼뜨리는 데는 연구소의 기능도 중요할 텐데요. 자유기업원이 그런 일을 하는 곳이지만, 시장이 너무 작아요. 경쟁업체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미국에서 헤리티지재단과 더불어 미국기업연구소, 케이토 연구소 같은 여러 자유주의 연구소가 치열하게 경쟁하고 또 협력하는 것을 보면 부럽습니다. 어떻게 해야 자유주의 싱크탱크가 더 많이 생겨날까요.

    복거일 원래 싱크탱크를 이념 전파의 도구로 쓴 것은 좌파가 먼저입니다. 최초의 싱크탱크는 영국의 페이비언 소사이어티(Fabian Society)일 거예요. 시드니 웹과 조지 버나드쇼가 19세기 말에 만든 조직으로 영국 노동당의 기초가 되지요. 거기서 한 일이 자유기업원이 해온 일과 똑같습니다. 교육하고 팸플릿 만들어내고 뉴스레터 돌리고 좌담회 열고 그런 일이지요. 영국 노동당의 탄생과 집권에 지대한 기여를 합니다.

    그 일을 자유주의자가 모방하게 됩니다. 1940년대 초에 하이에크가 쓴 ‘노예의 길’을 읽고 안토니 피셔가 감명을 받습니다. 양계업으로 큰돈을 번 영국인 기업가죠. 감명을 받은 차에 하이에크를 찾아가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물었더니 사회주의자들이 만든 페이비언 소사이어티와 같은 싱크탱크를 만들어서 자유주의 사상을 전파하라고 권합니다. 그렇게 설립된 연구소가 영국의 경제문제연구소(Institute of Economic Affairs)입니다. 나중에 대처 총리의 집권에 크게 기여하는 바로 그 연구소지요. 뒤이어 캐나다의 프레이저 연구소 등 자유주의를 지지하는 연구소들이 등장합니다.

    결국 문제는 돈입니다. 세계의 모든 자유주의 싱크탱크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뜻있는 기업이나 부자들이 그런 일에 기부를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리 기업가들은 자유주의 사상을 키우는 싱크탱크 같은 것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반성해야 할 부분입니다.

    조심스러운 낙관

    김정호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유주의가 앞으로의 세계적 물줄기라는 점에는 틀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100년간 우리나라 역사도 큰 틀에서 자유가 신장되어온 역사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 듯하고요. 약간의 굴곡은 있었지만 사람들의 삶은 전체적으로 자유로워졌고, 그에 힘입어 물질적으로도 풍요로워졌습니다.

    그 자유를 더욱 튼실하게 하려면 복거일 선생이나 저처럼 직업적 자유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도 자유주의 사상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해주시죠.

    복거일 전세계적인 맥락을 살펴보면 자유주의가 왜 시대정신인지가 드러나요. 요 근래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이 FTA(자유무역협정)이거든요. FTA는 세계화 흐름의 일부분인데, 세계화라는 현상은 인류가 시작된 이래 계속되어왔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수백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인류의 조상은 동아프리카의 작은 침팬지 무리에 속한 소수파였습니다. 그 일부가 나와서 진화를 거쳐 인간이 되고 전세계로 퍼졌습니다. 그 자체가 세계화지요. 작은 무리가 씨족이 되고 부족이 되어 민족국가가 됩니다. 지금은 민족국가가 전세계적 규모의 공동체로 변해가는 과정을 거치고 있습니다. 이는 자유를 향한 거대한 흐름이기도 합니다.

    우여곡절을 거치겠지만 길게 보면 우리 사회도 자유를 향해 나아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면에서 자유주의가 시대정신이고, 그 한도 내에서는 번창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나라의 앞날도 상당히 밝다고 생각하고요. 전 늘 조심스러운 낙관을 강조하거든요.

    김정호 ‘조심스러운 낙관.’ 예전에 복 선생께서 펴내신 책의 제목이군요(웃음). 긴 시간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짧지 않은 시간 복거일씨와 더불어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우리 근세사를 훑어보면서, 필자는 새삼 관점을 달리하면 역사가 완전히 달리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수치스럽게만 여기는 일제 강점기는 다른 방향에서 보면 조선 민중의 신분 자유와 재산권이 확장된 시기이기도 하다. 그것을 바탕으로 당시 조선 사람들 생활의 질이 높아지고 인구도 늘어났다. 그 시기를 수치스럽게만 여겨온 것은 어쩌면 우리가 민족이라는 틀 안에서 전체주의적으로 사고했기 때문일 수 있다.

    소설가 복거일
    김정호

    1956년 서울 출생

    연세대 경제학과 졸업, 서울대 환경대학원 수료

    미국 일리노이대 석·박사 (경제학), 숭실대 박사(법학)

    한국산업경제연구원, 한국지방 행정연구원, 한국경제연구원 근무

    서울대, 연세대, 한양대 겸임교수

    現 자유기업원 원장

    저서 : ‘땅은 사유재산이다’ ‘7천만의 시장경제 이야기’(편역) ‘갈등하는 본능’ 등


    자유의 잣대로 보면 광복 이후도 달리 보인다. 노태우 정권 시절에 자유주의가 개화했고, 문민정부라고 자칭하던 김영삼 정권에서 전체주의가 가장 심했다는 부분이 그러하다. 이 대목에서 복거일씨는 민주주의의 양면성을 본다. 민주주의가 자유를 보장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지만, 다수가 소수를 억압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이 심해지면 이른바 민중독재, 사회주의가 등장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는 미래에 대해 낙관적이었다. 민주주의가 민중주의, 사회주의로 흐르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세계화와 자유주의라는 큰 흐름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그의 낙관론을 들으며 적잖은 소회에 잠겼다. 그리고 그 전제, ‘보다 많은 사람이 자유를 고민하는 세상’에 대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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