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리에 세워진 경성제대 예과(위)와 법문학부(아래) 건물. 경성제대는 일본의 여섯번째 제국대학이었으나, 당시 조선에는 고등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대학에 진학하려면 예과 2년을 수료해야 했다.
‘신동아’ 1933년 4월호 권두언은 이렇듯 애절한 어조로 극심한 입학난과 취업난을 개탄한다. 대학진학과 취업이 어려운 일임은 지금이나 1920~30년대나 마찬가지였던 듯하다. 오히려 당시 청년들이 혹독한 입학난과 취업난에 훨씬 더 시달렸다. 요즘은 대학에 진학할 때만 입학시험을 치르지만 당시는 전문학교나 대학은 물론 초등학교와 중등학교에 진학할 때도 입학시험을 치렀다. 경쟁도 사뭇 치열해서 평균적으로 초등학교는 2대 1, 중등학교는 10대 1, 전문학교와 대학은 학교에 따라 3대 1에서 20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그 가운데서도 세계 유일, 전대미문의 초등학교 입학시험은 말 그대로 ‘어린이 지옥’이었다. 태어나서 한번도 학교를 다닌 적이 없는 7~8세의 아동에게 시험부터 치르게 한 이 제도는 ‘유전(有錢)입학 무전(無錢)낙제’라는 유행어를 남겼다.
인천공립보통학교에서는 지난 26일부터 사흘동안 신입아동의 ‘자격검정’을 하였는데 그 소위 검정한 내용을 보면 기가 막힐 지경이다. 우선 아이들의 정신과 지혜를 헤아리기 위한 시험문제로 말하자면 너무 정도에 지나치게 어려운 것이 많았다. 이는 정원을 초과한 지원아동을 억지로 떨어내자는 의도임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학부형의 자격에 대하여 “학교에 기부를 많이 하였느냐?” “가산이 넉넉하냐?”는 등 문답을 하여 필경은 재산도 넉넉하고 학교에 기부도 많이 한 사람의 자제는 무조건 합격시키고 가난한 사람의 자제는 물어볼 것도 없이 낙제시켰다 한다. 일전에 인천부 내무과장은 “돈 없는 사람의 자제를 공부는 시켜 무엇 하느냐”는 말을 하여 물의를 일으킨 바 있다. 윗물부터가 이러하니 아랫물인 학교당국이 이러한 태도를 갖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부자 전유의 교육’, ‘동아일보’ 1924년 3월30일자)
오늘날 수능시험처럼 거국적인 차원으로 치러지는 시험은 중등학교 입학시험이었다. 경쟁률이 워낙 높다 보니 시험장은 흡사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비참한 입학시험이 얼마나 어린 사람의 가슴을 태우는지 알아보고자, 26일에 거행한 보성고등보통학교의 시험장을 구경했다. 모자 쓴 1000여 명의 학생들이 이른 아침부터 떼를 지어 몰려들었다. 학교의 넓은 운동장에 수험생이 가득 차서 와글거리고 소란한 모양은 동원령을 받은 군인이 영문(營門)에 모여들 때를 방불케 했다.
입학 정원이 200명밖에 안 되는데 지원한 생도는 1200여 명이라니까, 누구든지 1000명을 제치는 재주가 없으면 입학할 가망이 없다. 수험표를 타는 그네의 얼굴은 모두 불안해 보였다. 1000여 명의 수험생을 수용하기 위해 학교의 교실 전부와 맞은편에 있는 중동학교 교실 전부를 사용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근처에 있는 종로소학교까지 빌리게 되었다.
수험표를 받아 든 학생들은 대열을 지어 지정된 시험장에 들어갔다. 시험지를 돌린 후 한참동안 시험지에 번호와 성명 쓰기에 분주하더니 다시 시험장이 적막해졌다. 전장(戰場)에 임한 그들의 얼굴에는 모두 큰 불안감이 감돌았다. 괴로운 빛으로 몸을 비틀고 손가락도 잡아 뽑고 애를 쓰는 모양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애석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게 한다. 책상 위에는 그들의 병기인 두어 자루의 연필이 날카롭게 깎여 있다.
선전을 포고하는 종소리가 울리자 그들의 눈은 일시에 빛나며 시험문제 붙이는 곳을 향했다. 시험문제가 붙자 그들의 격렬한 백병전이 일어나고 연필소리만 처참히 들릴 뿐이다. (‘처참한 입학시험 광경’, ‘동아일보’ 1921년 3월27일자)
대학 입학시험은 중등학교 입학시험만큼 전면적이지는 않았다. 경쟁이 덜해서가 아니라 너무 좁은 문이라 평범한 학생들은 엄두조차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광복 이전까지 조선에는 단 한 곳의 대학이 있었다. 조선 유일의 ‘최고학부’는 1924년 개교한 경성제국대학이었다. 연희전문(연세대), 보성전문(고려대), 이화여전(이화여대) 등 사실상 대학교육을 실시하던 전문학교가 있었지만, 총독부는 이들 사립학교에 대학 인가를 내주지 않았다. 35년 동안 식민지 조선에서 대학을 졸업한 조선인은 810명뿐이었다. 총독부는 너무 많은 조선인 학사가 배출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한국 최초의 대학입시는 1924년 3월18일부터 21일까지 나흘간 실시됐다. 당시엔 신학기가 4월에 시작됐기 때문에 ‘입시시즌’이 3월이었다. 내로라하는 조선인 수재들이 모였음은 물론 일본까지 가서 지원자를 모집하여 치른 ‘조선제국대학 예과 입학시험’에는 647명이 응시하여 180명이 합격했다. 그러나 이 180명의 수재는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난 후에야 입학식을 겸한 개교식을 치르고 ‘경성제국대학 예과 학생’이 되었다.
학교의 이름이 어느 날 갑자기 바뀐 이유는 무엇일까. 학생은 있는데 학교는 없는 3개월 동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묘한 기운이 감도는 개교식
‘개벽’ 1924년 7월호에는 ‘경성제국대학 예과 개교식’ 참관기가 실렸다. 기사의 내용을 따라가며 한국 최초의 대학 입학식 풍경을 살펴보자.
6월12일 오전 10시30분부터 식을 행한다기에 분주히 대학 예과가 있는 청량리로 향했다. 도착하니 귀빈석, 내빈석, 학부형석은 벌써 어지간하게 차 있었다. 그날은 마침 도지사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지방에서 상경한 도지사들은 오전회의까지 취소하고 개교식에 참석했다. 고관대작이 운집한 까닭에 문간에는 자동차가 즐비했다.
서양식 교육이 도입된 지 30여 년이 지나도록 조선에는 최고학부가 없었다. 중학이나 전문학교를 졸업한 청년이 공부를 계속하고자 해도 외국에 유학 가지 않는 한 공부할 도리가 없었다. 조선에 대학이 생긴다는 것은 마땅히 축하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기쁘고 경사스러운 날, 식장에는 묘한 기운이 감돌았다. 즐거운 표정을 짓는 사람들 가운데 드문드문 무겁고 착잡한 표정을 짓는 사람이 섞여 있었다.
경성제대는 조선 땅에 있으면서도 조선의 대학이 아니었다. 예과와 법문학부, 의학부만 완성하는 데 임시비만 500만원가량 들었고, 경상비는 매년 40만~50만원이었다. 조선에 있는 10여 개 전문학교 경상비를 다 합친 금액보다 많았다. 그 엄청난 경비는 물론 조선인의 고혈을 짜내 벌어들이는 세금으로 충당됐다. 그런데 그 학교에서 가르치는 사람 중 조선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 168명 학생 중 조선인은 고작 44명이었다.
출입문에서 사무원이 주는 그 학교일람 비슷한 인쇄물을 읽을 때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서글픈 느낌이 전광(電光)같이 머리로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곳에 초대를 받아 온 사람들도 거의 전부가 남이고, 조선 사람 특히 제 정신을 가진 조선 사람은 몇 안 됐다. 나머지는 모두 다 ‘왜장대(倭將臺·일본인 권력자)’ 앞에 가서 허리를 굽히는 자들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저 남의 세상에 돈만 내는가 하였다.
식은 예정보다 40분가량 늦게 시작되었다. 항용 있는 ‘칙어봉독’(勅語奉讀)과 ‘기미가요(君代)’ 합창의 식순이 지난 뒤에 아리요시 예과부장이 단에 올라 식사를 하였다.
“제군에게 배부한 인쇄물 중에 있는 것과 같이 현재 본교학생은 문이과를 통하여 전부 168명 중에 조선인은 44명뿐이오. 기타는 모두 일본인인데 그중에는 일본에서 중학을 졸업한 사람이 반수 이상 있으나 그 다수는 조선에 부형이나 친척을 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금춘 예과생을 모집할 때에 조선학생에게는 학교에서 보는 학과시험 이외에 특별히 경찰서에 의탁하야 ‘신분시험’까지 보게 하면서도 일본 각지의 신문에 모집광고까지 내서 일본학생을 모집한 데 대한 변명이었다. 그저 그럴 것 없이 “조선 사람에게는 고등교육 기회를 내심 주고 싶지 않으나 기미년(1919년)에 약속한 것도 있고 또한 외국 사람 보는 눈도 있고 하여 부득이 명색이나마 대학을 만든 이상, 자기의 이익을 도모치 않을 수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하는 것이 오히려 설명하기에 조리도 있고 또한 말하기도 쉽지 않을까 하였다. (‘경성제국대학예과의 개교식을 보고서’, ‘개벽’ 1924년 7월호)
총장의 식사가 끝난 후 이런 종류의 식에는 으레 쫓아다니는 이완용 후작의 축사가 있었다. 우선 그 낭독하는 목청이 간사하기 그지없어 사람 속을 뒤집어 놓더니, “우리 조선에 교육이 시들고 약해져서 활기를 펴지 못하더니, 병합 이후로는…” 하는 구절에 이르러서는 치를 떨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마지막 순서는 학생대표의 사사(謝辭)였다. 그런데 무슨 꿍꿍이인지 그 많은 일본인 학생은 다 제쳐두고 조선인 44명 중 하나인 유진오에게 대표를 맡겼다. 그 순간 장 중에 모인 모든 사람의 눈에는 의혹의 빛이 감돌았다고 ‘개벽’ 기사는 전하고 있다. 개교식 후 자축연이 있었다. 연회장에는 술과 음식만 보면 언제나 벌떼처럼 달려드는 ‘조선 노물(朝鮮老物·늙은 친일파)’이 위세 좋게 먹고 마셔 내외국인의 눈총을 받았다.
대체 경찰서에 의탁하여 보게 했다는 ‘신분시험’이란 무엇일까. 일본인은 왜 그 경사스러운 자리에 ‘하잘것없는’ 조선인 학생에게 대표의 중책을 맡겼을까. 그 연유를 시작부터 되짚어보자.
기막힌 입시요강
1920년대 조선 거주 일본인 학생들이 다니던 경기중학교. 1922년 조선교육령 개정 이전까지 조선인은 보통학교 4년, 고등보통학교 4년을 마친 후 전문학교로 진학했지만, 일본인들은 소학교 6년, 중학교 5년을 마친 후 고등학교나 대학 예과, 전문학교로 진학했다.
일본 정부는 대학령 개정 이후에도 5개 제국대학 출신들에게 배타적인 특혜를 줬다. 법학부 졸업자에게는 고등문관시험의 1차 시험을 면제하여 고급관료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고, 문학부 졸업자에게는 무시험검정에 의해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어느 곳에서든 교원이 될 수 있는 자격증을 줬다. 민간기업에서도 제국대학 출신자에게는 동일한 노동을 하는 사립대학 출신자보다 봉급을 더 주는 것이 관례였다. 국가는 제국대학 출신자에게 각종 특혜를 주고, 제국대학 출신자는 국가의 충직한 신민(臣民)이 되는 완벽한 공생관계였다.
1919년 3·1운동으로 혼쭐이 난 일본은 1922년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조선에서도 대학을 세울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사이토 총독은 “조선의 민도가 높아졌기 때문에 일시동인(一視同仁·차별을 없게 함)의 성지(聖旨)로 조선에 대학을 세우겠다”고 호언했다. 그리고 동대문 밖 청량리에 ‘조선제국대학 예과’ 건물 신축에 들어갔다. 조선인들은 교사(校舍)가 올라가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조선에도 대학이 생기는 줄 알았다.
1923년 11월 유아사 총독부 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한 조선제국대학 창립위원회가 발족했고, 곧 이어 예과 건물이 준공됐다. 초대 총장으로 내정된 핫토리 도쿄제대 교수는 “세계적인 대학을 만들 것이며, 실력을 갖춘 학생이라면 조선인, 일본인을 차별하지 않고 누구든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했다. 경향각지의 조선인 수재들은 이 말에 용기백배하여 수험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1924년 1월11일 조선제국대학 창립위원회에서 발표한 신입생 모집요강은 대학진학의 꿈에 부푼 수험생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조선제국대학 예과 생도 모집조선제국대학은 제국대학령에 의하는 종합대학으로 도쿄, 교토, 규슈, 도호쿠, 홋카이도의 각 제국대학과 완전히 동일한 종류의 것이다. 조선제국대학 부속 예과 수료자는 무시험으로 본과에 입학할 수 있다.가. 모집인원문과 A. 법학을 수학코자 하는 자 40명.문과 B. 문학을 수학코자 하는 자 40명.이과. 의학을 수학코자 하는 자 80명.나. 입학지원자의 자격중학교 또는 고등보통학교 졸업자 및 이와 동등 이상의 학력을 가진 자.다. 입학시험 학과목문과. ‘국어와 한문’(국문해석, 한문해석, 받아쓰기, 작문) 외국어(해석, 국문영(독)역, 받아쓰기, 작문), 수학(대수, 평면기하), 역사(서양역사와 국사 전부)이과. ‘국어와 한문’(국문해석, 한문해석, 받아쓰기, 작문) 외국어(해석, 국문영(독)역, 받아쓰기), 수학(대수, 평면기하, 삼각법), 박물(동물과 박물 통론)라. 시험기일학과시험 3월18~21일체격시험 3월17일 공고마. 시험장소 경성바. 출원기일. 1월21일~2월14일사. 입학검정료 5원(‘동아일보’ 1924년 1월12일자)
이러한 요강은 조선인 학생을 받지 않겠다는 말이나 진배없었다. 요강대로 시험을 치른다면 조선인 학생이 일본인 학생과 겨뤄서 이길 가능성은 희박했다. 모든 시험은 ‘국어’(일본어)로 출제되고 ‘국어’(일본어)로 서술해야 했다. 무엇보다 일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학생과 외국어로 익힌 학생을 똑같은 조건에서 경쟁시킨 것 자체가 공평하지 않았다. 오늘날 서울대에 진학하고자 하는 외국인에게 한국인 학생과 똑같이 수능시험을 보게 하고, 논술고사까지 치르게 한 후 성적순으로 뽑는다면 과연 몇 명이나 합격하겠는가.
그러나 조선인 수재들은 그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조선인이 다니던 고보의 수업도 일본어로 하는 마당에 제국대학 입학시험을 치면서 조선어로 답안을 작성하게 해줄 것 같지 않았다.
심각한 문제는 ‘국문해석’과 ‘외국어해석’이었다. 일본인 학생에게 일본 문장을 해석시킨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국문해석’이란 ‘겐치이야기(源氏物語)’, ‘마쿠라조시(枕草紙)’, ‘호조키(方丈記)’ 등 고대 일본어로 씌어진 문학작품을 현대 일본어로 해석하는 문제였다. 고대 일본어는 오래된 정도에 따라 문체의 차이가 심하고 그중 현저한 것만 해도 3~4종에 달한다. 뿐만 아니라 각 고대어에는 기억하기도 해석하기도 어려운 다수의 사어가 있다. 일본인 학생들조차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일본 고대문학 작품을 조선인 학생에게 같은 조건에서 번역하라는 것은 언어도단이었다.
경성제대 입학시험의 ‘영어’(왼쪽)와 ‘국문해석’(오른쪽) 문제.
역사와 지리 또한 제 나라 역사와 지리를 공부하는 일본인 학생과 남의 나라 역사와 지리를 공부하는 조선인 학생이 똑같은 조건일 수 없었다. 입시요강이 발표되자 여론은 연일 들끓었다.
만일 이러한 것이 대학교육을 받는 데 절대로 필요하다면 아무리 어렵더라도 시험을 보게 하여야겠지만, 어떠한 추리법을 쓰더라도 대학교육이 이러한 것과 무슨 필연적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없다. 특히 일본 고대문학의 연구를 지원하는 자라면 모르거니와 혹은 법률, 혹은 영문학, 혹은 의학을 지원하는 자로는 한문해석, 영(독)어의 실력만 있고 교수하는 것을 알아듣고, 시험답안이나 논문을 쓸 만한 현대일본어만 알면 족하지 않은가. 그러면 무슨 까닭으로 조선인 학생에게 이렇게 특수하고 불공평한 곤란을 주어 대학교육을 받을 기회를 일본인 학생보다 적게 하는가. 우리는 당국의 반성을 촉하며 동시에 조선인 교육가 제씨의 분기를 절규하는 바다. (‘동아일보’ 1924년 1월19일자 사설)
조선제대 입학시험은 일본인보다 일본어를 더 잘하지 않고서는 절대 합격할 수 없는 시험이었다. 조선인과 일본인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말만 믿고 2년 동안 시험준비에 매달렸던 다수의 조선인 학생은 입시요강을 받아들고 지원 자체를 포기했다. 원서마감 결과 총 647명의 지원자 중 조선인은 겨우 241명이었다. 교수와 직원도 일본인으로 뽑고, 학생마저 일본인 위주로 뽑을 것 같으면 대학을 조선에 세운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물론 나름대로 이유는 있었다.
중학교 vs 고등보통학교
1924년 서울의 인구는 대략 30만명이었는데, 그중 4분의 1인 8만명 정도가 일본인이었다. 당시 일본은 식민지 개척과 자국의 실업난 해소를 위해 조선과 만주 이민을 장려했다. 그렇게 식민지 이민 사업이 10여 년을 넘기고 보니 이민자 사회 곳곳에서 불만이 터져나왔다. 조선에는 고등학교와 대학이 없었기 때문에 이주 일본인들도 자식교육에 어려움을 겪었다. 조선에 대학이 없다는 것은 조선인의 불행이기 이전에 조선에 이주한 일본인들의 불만 사항이었다.
1922년 조선교육령 개정 이전까지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은 서로 다른 학교에 다녔을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교육과정을 이수했다. 조선인 학생들은 4년제 보통학교와 4년제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조선 내 전문학교에 진학하거나 곧장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반면 일본인 학생들은 6년제 소학교와 5년제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돌아가 고등학교나 대학 예과, 전문학교 등에 진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당시 서울에 일본인이 다니던 중학교는 경기중학교와 용산중학교 두 곳이 있었다. 경기중학교는 주로 총독부 관리의 자제가, 용산중학교는 주로 용산에 주둔하던 군인의 자제가 다녔다. 조선인이 다니던 고등보통학교로는 경기제일고보(현 경기고), 경기제이고보(현 경복고), 평양고보, 대구고보(현 경북고)의 공립학교와 휘문, 보성, 중앙, 배재, 양정 등 사립학교가 있었다.
고보 출신과 중학 출신은 ‘조선 내에서’ 형식적으로는 동급이었지만 수학 연한에 있어 3년이나 차이가 났다. 고보 출신이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상급학교에 진학하려면 중학교 4~5학년에 편입해 중학과정부터 새로 이수해야 했다. 조선인의 수학 연한이 3년이나 짧았던 것은 조선인이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어 속성교육을 시킨 것이 아니라 조선인에겐 기초적인 지식만 가르쳐 전문직 진출을 원천 봉쇄하겠다는 의도가 강했다.
고보에서는 중학보다 훨씬 쉬운 교재를 사용했다. 일본어, 수학, 물리, 화학 등은 초보적인 지식만 훑는 것으로 끝냈고, 영어는 성적이 좋은 학생에게만 가르쳤다. 그대신 ‘수공(手工)’ 시간을 두어 직업교육을 시켰다. 수공 시간에 농촌 출신 학생은 농업기술을, 도시 출신 학생들은 부기와 주산을 배웠다.
이처럼 교육과정 자체에서 차이가 났기 때문에 고보에 다니는 조선인 학생들은 중학에 다니는 일본인 학생에 대해 막연한 열등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같은 학교에 다닐 일이 없었기 때문에 서로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실히 알지 못했다. 조선제국대학 예과 입학시험은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의 학력을 평가할 수 있는 사실상 첫 번째 기회였다.
1924년 2월14일 입학지원서 접수마감 결과 총 647명이 접수했는데, 조선인이 241명, 일본인이 406명이었다. 일본인 중 일본에서 학교를 졸업한 학생이 200명, 조선에 있는 학교를 졸업한 학생이 206명이었다. 조선인, 조선 출신 일본인, 일본에서 건너온 일본인의 비율이 거의 1대 1대 1이었다. 전체 모집인원이 160명이었으니 전체 경쟁률은 4대 1을 상회했다.
난데없는 신분시험
남은 시간은 한 달. 지원서를 접수한 조선인 학생들은 일본인 학생과 벌이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밤낮으로 시험준비에 매달렸다. 그러나 시험이 코앞에 닥쳤을 무렵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다.
금년 신학기부터 개교하게 된 조선대학 예과에 지원서를 제출한 학생에게 형사, 순사가 찾아와서 신분조사를 한다는 기괴한 사실이 있었다. 이는 곧 대학 예과의 제일차 시험을 각 경찰서의 형사, 순사가 집행한다는 것과 똑같은 결과를 맞는 기괴한 사건이다. (‘동아일보’ 1924년 3월13일자)
입학지원자의 신분조사를 한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사실이 밝혀지고 난 후 교육 당국자들의 반응이었다. 나가노 총독부 학무국장은 조금도 당황한 기색이 없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자세히 아는 일은 아니오. 그러나 그러한 일이 있다 하면 종래 각 관립 전문학교에서도 한 것과 같이 각 도지사에게 신분조사를 부탁한 듯하오. 그러나 이는 특별히 조선인 학생에만 한 것이 아니라 일본인 학생에게도 똑같이 한 것이오. 조사방법은 각 도지사에게 일임했으니 어떠한 방법으로 조사하는지 우리가 알 바 아니오. 대학 예과 지원자에 한하여 엄밀한 조사를 한 일은 없을 줄로 생각하오.
우리는 대학 예과 개교에 대하여 예산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터이오. 충실한 학교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중인즉, 그 점에 대해 충분한 양해를 바라오.” (‘동아일보’ 1924년 3월13일자)
나가노 학무국장이 거리낌없이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관립 전문학교 입학 지원자에 대한 경찰의 신분조사가 오랜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듯 전문학교 지원자에 대한 신분조사가 관행으로 굳어지기까지 일반인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조선인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건전한’ 사상을 지니지 않고서는 대학은 물론 전문학교조차 갈 수 없었다.
입학시험 실무책임자 오다 예과과장은 한술 더 떠 입학지원자의 신분조사는 대학 자율성에 관한 사안이니 침해하지 말아줄 것을 당부했다.
“나는 선량한 학생을 얻기 위해서는 학교성적 외에 품행, 가정형편, 이력 등에 대하여 충분한 참고자료를 얻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신분조사를 행정관청에 의뢰한 것이오. 의뢰받은 관청에서 필요에 응하여 형사를 시켜 방문케 하였을지도 모르지요. 일본 내지의 고등학교에서는 이러한 전례가 없는 모양이나 나는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시킨 것이오.
학교의 교육방침이 자유롭고 자유롭지 아니한 것은 학교 당국자의 의견 여하에 있는 것인즉 그 점에 대하여 의논할 여지가 없소. 조사항목은 인사에 관한 것인즉 관리의 신분조사를 발표할 수 없는 것과 같이 발표할 수 없소.” (‘동아일보’ 1924년 3월14일자)
학생들은 대학에 지원서를 냈는데 대학 당국은 입사 지원서를 받기라도 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오다 예과과장은 조사항목 공개를 거부하려다 무심결에 입학지원자의 신분조사가 관리 채용시 신분조사만큼이나 엄중했음을 털어놓았다. 입학지원자 신분조사는 각 경찰서 고등계 형사가 주도했다. 조사 내용은 지원자의 전과 유무, 사상의 경향, 소요사건과의 관계 유무 그리고 가정의 사상경향과 재산 정도 등이었다. 입학지원자에 대한 고등계 형사의 신분조사는 광복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경성제대는 학과시험 전에 경찰이 ‘신분시험’을 치르는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대학이었다.
입학시험은 1924년 3월18일에서 21일까지 예정대로 치러졌고, 일주일 후 합격자가 발표됐다. 문과 80명 이과 80명, 총 160명을 뽑을 예정이었지만, 되도록 많은 지원자에게 교육기회를 제공한다는 취지에서 과별로 10명씩 증원하여 최종합격자는 180명이었다. 합격자를 발표하면서 당국자는 조선인과 일본인을 차별하지 않았다고 거듭 다짐했다.
입시결과는 예상대로 조선인 학생의 참패였다. 241명의 조선인 지원자 중 합격자는 법학부 9명, 문학부 19명, 의학부 16명 합계 고작 44명이었다. 그러나 ‘차별하지 않는 차별’을 고려하면 그 정도의 합격자 숫자도 경이적인 수치였다.
이상한 시험 결과
조선인 학생은 합격자 숫자로는 참패를 당했지만, 합격자의 질로는 대승을 거뒀다. 일본의 제국대학은 입학시험 석차대로 입학식 자리를 배정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 때문에 입학생은 모두 자신의 입학시험 석차를 알 수 있었다. 일본인 학생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던 그 시험의 수석 합격자는 의외로 19세 조선인 유진오였다.
수석 입학자 유진오는 제국대학 관례에 따라 입학식에서 학생대표로 사사를 했다. 2등에서 10등까지 모조리 조선인 학생이 석권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인 합격자는 모두 전체석차 3분의 1 안에 드는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이에 대해 ‘신분시험’을 주관하여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던 오다 예과과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유진오는 경성제일고보를 수석 졸업하고,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수석 입학·수석 졸업한 수재였다. 그는 일본인보다 일본어를 더 잘 구사했고, 소설가로 이름을 떨칠 만큼 한국어 구사능력도 뛰어났다. 그러나 그 때문에 평생 자기모순 속에서 살아야 했다.
조선인 수재가 일시에 몰렸기 때문에 조선인 합격자의 성적이 양호했다는 설명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조선인 학생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았는데 그처럼 소수의 학생만이 합격한 것은 여전히 의문이었다. 정상적으로 사정(査定)했다면 평균 이하의 성적으로 합격한 조선인 학생도 있어야 했다. 그러나 조선인 학생은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거나 아니면 탈락했을 뿐 평균 이하의 저조한 성적으로는 합격하지 못했다.
이런 이상한 결과는 그후 입시 때마다 되풀이됐다. 조선인 학생은 어지간히 높은 성적을 받지 않고서는 합격할 수 없었지만, 일본인 학생은 성적을 웬만큼만 받아도 합격할 수 있었다. 치열한 경쟁을 통해 걸러진 조선인 학생들은 대학 재학 중에도 일본인 학생보다 학업성취도가 훨씬 높았다. 입학생 가운데 조선인, 조선 거주 일본인, 일본 거주 일본인의 비율은 해마다 대략 1대 1대 1의 비율로 엇비슷하게 맞아떨어졌다. 분명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고 있었다. 민족차별을 하지 않는다는 당국자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조선제대는 애초 4월1일 개교할 예정이었지만 4월 중순이 되도록 대학에서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신입생들은 그 어려운 입학시험에 합격하고 제복과 모자까지 맞춰놓고도 거의 두 달간 집에서 빈둥거리며 놀아야 했다. 조선제국대학이 제국대학령에 의한 대학이 되느냐 조선교육령에 의한 대학이 되느냐 하는 문제로 관제안(官制案)이 법제국에 걸려 표류했기 때문이다.
어느 쪽으로 결정이 나건 학생 처지에서는 하등 차이가 없었다. 단지 대학을 총독부가 관할할 것인지 일본 내각이 관할할 것인지를 놓고 벌이는 자기들끼리의 신경전이었다. 학교 건물도 완성됐고, 교수·학생·직원도 있는데, 정작 대학이 없어 건물도 놀고, 교수도 놀고, 학생도 놀고, 직원도 노는 형국이었다. 팽팽하게 대립하던 두 세력은 제국대학령에 의거해 대학을 세우되 조선총독이 관할하기로 타협했다.
조선 ‘제국대학’ vs ‘조선제국’ 대학
대학 명칭도 논란거리였다. 일본의 5개 제국대학 중 도쿄와 교토제대는 도시 명칭을 가져다 썼지만 규슈, 도호쿠, 홋카이도제대는 지역명칭을 썼다. 일본은 조선을 한낱 지방으로 인식했으므로 처음엔 아무 생각 없이 ‘조선제국대학’이라 이름붙였다.
그 이름으로 학생모집까지 끝낸 후 뒤늦게 치명적인 문제가 발견되었다. 읽기에 따라 조선 ‘제국대학’이 아니라 ‘조선제국’ 대학 곧 ‘조선제국의 대학’으로 보일 수 있었다. 대학의 관제가 일본 정부에서 표류하는 동안, 조선제국대학이라는 명칭은 슬그머니 경성제국대학이라는 명칭으로 개정됐다. 따라서 학생들은 조선제국대학 예과 입학시험에 합격하고도 공부는 정작 경성제국대학 예과에서 하게 됐다. 이들은 1924년 5월12일 천신만고 끝에 첫 수업을 받았다.
경성제국대학은 지난 12일 오전 9시부터 개학하였다. 입학생을 일본까지 가서 끌어오느니 조선인 입학생을 형사가 뒷조사를 하였느니 세상의 물의를 일으켰던 그 학교는 세인의 감시 하에 첫날 수업을 시작하였다. 뒤로 송림이 울창하고 앞으로 수양버들 늘어진 청량리 한편에 자리잡은 그 학교는 세상의 비평도 못 듣는 듯 평화로워 보였다. 새로 지어 깨끗한 강당에서는 강사의 강설이 새어 나오고 교실 안에는 흰 두루마기 입은 조선인 학생과 얼룩옷 입은 일본인 학생이 섞여 앉아서 정숙히 공부하는 것은 이 학교에서만 보는 특별한 현상이라 할는지! (‘동아일보’ 1924년 5월13일자)
이렇게 천신만고 끝에 대학에 입학한 조선인 학생들은 예과 2년, 본과 3년 도합 5년간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적어도 이 학교 재학 중에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이 없었다. 심지어 조선인, 일본인이라는 말 자체가 금기시되어 ‘국어(일본어)를 상용하지 않는 사람’ ‘국어(일본어)를 상용하는 사람’이라 부를 정도였다. 그러나 교문을 나서는 순간 그들은 엄청난 현실의 벽에 직면해야 했다. 제국대학 출신이면 어지간한 일본인도 무시 못할 엘리트였다. 그렇지만 제국대학을 졸업했다고 조선인이라는 굴레마저 벗어던질 수는 없었다.
일본인의 교묘한 차별을 뚫고 경성제대에 수석 입학하여 한국인의 자존심을 지킨 19세 소년 유진오는 사회주의 사상과 문학에 심취해 대학생활을 보내다 5년 후 경성제대를 수석 졸업하여 또 한번 조선인의 우수성을 과시했다. 그러나 교문을 나서는 순간 그는 심각한 자기모순에 빠져들었다. 제국대학 출신 엘리트 관료로 살아가자면 민족을 배반하는 것이 되고, 소시민으로 살아가기엔 배운 것이 너무 많았고, 제국주의와 싸우는 것은 그의 뿌리를 부정하는 것이 됐다.
그는 총독부 관리생활이 싫어 고등문관시험을 치지 않았고 사상 문제로 검거되기도 했지만, 태평양전쟁 때는 일본의 전승을 위해 헌신하는 과오를 범하기도 했다. 광복 후 그는 대한민국헌법을 기초했고 야당총재 생활도 했다. 유진오는 자신의 모순된 운명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대학시대에 문화비판회라는 학생단체의 한 멤버이었던 일, 졸업하자 그때까지 속으로 멸시하고 있던 N교수를 찾아 취직을 부탁하던 일, N교수로부터 경성 어떤 관청의 H과장의 소개장을 받던 일, 서울서는 H과장 집에 자주 드나들면서도 일변으로는 신문 잡지 같은 데에 독일 좌익문학운동의 소개나 평론 같은 것을 쓰던 일, H과장의 소개로 작년 가을 처음으로 이 S전문학교 교장을 찾아갔던 일 이 모든 것은 하나도 모순의 감정 없이는 한꺼번에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생이란 도대체 모순 그것이 아닌가 하고 그는 생각해보았다. 그 중에도 지식계급이라는 것은 이 사회에서는 이중 삼중 사중 아니 칠중 팔중 구중의 중첩된 인격을 갖도록 강제되고 있는 것이다. 그 많은 중에서 어떤 것이 정말 자기의 인격인가는 남모르게 저 혼자만 알고 있으면 그만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사실 똑똑하게 이것을 의식하고 경우를 따라 인격을 변한다. 그러나 어떤 자는 자기 자신의 그 수많은 인격에 황홀해 끝끝내는 어떤 것이 정말 자기의 인격인지도 모르게 되는 것이다. (유진오, ‘김강사와 T교수’, ‘신동아’ 1935년 1월호)
“인생이란 모순 그것이 아닌가” 하고 매순간 탄식해야 하는 삶. 그것이 유진오의 운명이었다. 일본의 여섯 번째 제국대학을 졸업한 810명 조선인 졸업생의 운명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