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1월호

쿼바디스? 大혼돈의 범여권

“권력 끈 놓치면 곧장 실업자, 이전투구 아닌 사생결단!”

  • 조인직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cij1999@donga.com

    입력2007-11-10 17: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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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야말로 ‘뒤죽박죽 한 달’이었다. 대통합민주신당 대선후보 경선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기대만큼의 ‘드라마’를 만들지 못했다는 평부터, 마지막에 터진 ‘모바일 투표 흥행’이 범여권의 본선 가능성에 희망을 줬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대통합민주신당 경선은 대선 정국에 무엇을 남겼을까.
    쿼바디스? 大혼돈의 범여권

    정동영 전 의장 캠프 사무실에 대한 경찰의 압수수색을 막기 위해 입구를 지키는 지지자들.

    이른바 ‘명의도용’ 사건으로 얼룩진 부정·불법·동원·조직 선거 공방은 그동안 민주평화개혁세력으로 자칭해온 대통합민주신당의 도덕성에 타격을 입혔다. 원하는 모든 국민에게 문호를 개방한다는 취지에서 ‘완전국민경선’(오픈 프라이머리)을 도입했지만 실상 유권자의 자발성은 모바일 투표를 제외하고는 극히 미미한 것으로 드러났다. 급기야 ‘완전국민동원경선’이란 말까지 회자됐다.

    이런저런 ‘명부’들이 당사자도 모르게 접수되며 투표율은 20%에도 미치지 못했다. 온-오프라인 선거인단이 196만여 명이었고, 여론조사 10% 반영률을 유권자 수로 환산해도 결국 55만명 남짓한 유권자만 실제로 ‘한 표’를 행사한 셈이다. 이는 17대 대선 전체 유권자 3754만7000여 명 중 1.7%에 불과한 수치다. 55만여 명 중 전북을 포함한 호남 유권자가 약 15만명에 이르는 등 지역별 편차도 커서 이래저래 ‘오픈 프라이머리’ 수사(修辭)는 무색하게 돼버렸다.

    ‘명의도용’ 사건의 후폭풍

    여기에 더해 후보자들 간의 갈등 양상이 한나라당 경선 때의 불화보다 더 심각한 수준이었다는 얘기도 나온다. 친노(親盧) 신당 창당이나 문국현 전 유한킴벌리사장이 이끄는 창조한국당(가칭)으로 정치세력이 합종연횡(合縱連衡)하면서 그야말로 대통령후보만 서로 공유하는 정당·정파간 ‘선거연합체제’가 거론되기도 한다.

    이번 경선의 최대 화두는 ‘동아일보’ 단독 보도로 불거진 노무현 대통령 명의도용 사건이었다. 앞서 예비경선 때도 ‘동아일보’는 출입기자 명단이 선거인단 명부에 올라있다는 사실을 단독 보도해 이른바 ‘명부떼기’의 진상을 밝혀낸 바 있다. 알려진 바와 같이 노 대통령의 이름은 서울 종로구 구의원인 정인훈씨가 미리 입수한 옛 열린우리당 당원 명부를 자신의 아들과 아들의 친구 2명에게 시켜 선거인단으로 등록하는 과정에서 도용됐다.



    다른 후보측에서는 정씨가 ‘정동영 경선후보 여성선거대책위원회’ 소속으로 된 명함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점과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의 외곽 조직인 ‘평화와 경제를 여는 포럼(평경포럼)’의 핵심인사로도 활동했다는 점 등을 거론하며 정 전 의장이 ‘배후’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 전 의장측은 “열렬 지지자의 우발적 행동에 대해 도의적 책임을 느끼지만, 일개 하부 조직원의 과잉 충성에서 빚어진 일을 어떻게 후보가 감당하느냐”고 반박했다.

    급기야 경선 말미에 가서는 경찰이 평경포럼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대통령 명의도용뿐 아니라 신용정보업체와 연대해 개인신용정보를 도용한 것 아니냐는 의혹 때문이었다. 이에 정 전 의장측에서는 “친노 진영과 권력층이 결탁해 ‘정동영 죽이기’에 나선 것”이라고 강력히 반발했다. 특히 이해찬 전 국무총리가 이택순 경찰청장과 용산고 선후배 사이라 이 청장 임명 당시부터 ‘봐주기 인사’라는 말이 돌았던 만큼, 빠르게 진행된 이번 수사에 이 전 총리측이 영향력을 행사했을 거라고 주장했다.

    실제도 경찰은 대통령 명의도용에 대한 보도(9월17일) 직후인 9월18일 대통합민주신당으로부터 정식 수사의뢰를 받고 12일 만인 9월30일 용의자인 대학생 3명을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다음날 주동자인 정인훈씨의 인적사항도 공개했다. 인터넷 주소(IP) 추적 결과 ‘종로구 PC방’이라는 것까지는 금방 나오지만 단순히 CCTV 판독만으로 범죄경력도 없는 용의자 검거에 나서기는 어렵다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물론 경찰과 이 전 총리측은 펄쩍 뛰었다. 경찰에 따르면 검거된 대학생 중 한 명이 선거인단 등록 아르바이트 도중 유명 인터넷 게임 사이트에 접속해 장시간 게임을 했으며, 이 게임 사이트를 통해 해당 대학생의 신원정보를 빠르게 입수했다고 한다. 또한 최고권력자가 결부된 사건인데다가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조차 “대통령도 수사상황에 대해 보고를 받고 있다”고 할 정도이니 수사 속도를 내지 않을 수 없다는 게 경찰측 항변이다. 이 전 총리측은 “압수수색 사실을 포함해 수사상황 전반에 대해선 오로지 연합뉴스와 인터넷 등을 통해 파악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정동영과 이해찬의 ‘금 간 우정’

    명의도용 사건은 소강상태를 맞고 있다. 이미 후보자가 확정된 상태라 정치적으로 무마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단순히 한 경선 후보자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개혁세력’의 지지기반, 나아가 20여 년간 나름대로 공고하게 굳어져 내려온 대선 구도가 무너질 경우 범여권의 존립근거 자체가 흔들릴 우려도 있기 때문에 다른 후보자들이 섣불리 다시 문제 제기에 나서기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쿼바디스? 大혼돈의 범여권

    경선이 치러지는 동안 대학 동기인 정동영 전 의장과 이해찬 전 총리 사이에 골이 깊어졌다.

    다만 이 전 총리측 관계자는 “당규를 보면 ‘선출된 후보자에게 후보자 지위를 지속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길 경우’ 경선 차순위 득표자가 후보직을 승계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경선을 하도록 돼 있다”고 말했다. 만의 하나 명의도용 부분에서 지금껏 예상치 못했던 수사결과가 밝혀질 경우 경선결과 자체가 무효가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희망 섞인 얘기다.

    이번 경선에서 줄곧 회자된 것이 정동영 전 의장과 이해찬 전 총리의 ‘금 간 우정’이다. 우정만 금이 간 것이 아니라 경선 후 정 전 의장측과 이 전 총리 세력과의 화학적 결합은 고사하고 물리적 결합도 힘든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올 만큼 감정다툼이 치열했다. 당사자인 두 후보는 물론 두 후보 진영의 감정대립이 걷잡을 수 없이 격화된 것. 나아가 한나라당 경선 때 이명박-박근혜 두 주자의 관계보다도 훨씬 심각한 수준이라는 평도 나온다. 이에 대해선 해석이 분분하지만 그 중 대통합민주신당 한 관계자의 말이 신빙성 있어 보인다.

    “한나라당 인사들은 현역 의원이건 보좌진이건 경선이 끝나면 돌아갈 ‘둥지’가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범여권엔 권력과의 인연을 끊는 순간 바로 실업상태에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그런 의미에서 이전투구가 아니라 사생결단식 승부에 익숙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실전에 가서도 한나라당보다 응집력이 강한 것이다.”

    정 전 의장과 이 전 총리는 서울대 문리대 72학번 동기생으로 1학년 때부터 운동권 서클 활동을 통해 친분을 쌓아왔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 때는 함께 경찰서에 잡혀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정 전 의장은 MBC 기자로 활동할 때도 당시 국회의원이던 이 전 총리와 우정을 이어갔고, 정 후보가 1996년 총선을 앞두고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함으로써 정계에 입문하는 과정에 이 전 총리가 적극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친구란 얘기 좀 그만 하세요”

    1996년 당시 국민회의 대변인실 행정직으로 근무했던 김현미 의원(정 전 의장측 대변인)은 “당시 이 전 총리가 정 전 의장과 함께 사무실에 와서 ‘내 친구야’라고 소개하던 때가 기억난다. 그때 직원들이 ‘정동영씨가 훨씬 어려 보이는데 진짜 친구 맞냐’고 농을 건네기도 했다”고 말한 적 있다.

    2004년 5월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경선 때 정 전 의장이 당내 초기 파워그룹이던 ‘천·신·정(천정배·신기남·정동영)’의 천 의원을 도왔을 때, 그리고 2006년 3월 ‘이해찬 총리 골프 파문’ 당시 열린우리당 의장으로서 노 대통령에게 총리 사퇴를 건의했을 때도 “두 사람 사이에 감정의 골이 패기 시작했다”는 말이 나왔지만 “서로 정치적 처지가 있으려니…” 하는 분위기가 대세였다.

    경선 전, 그리고 초기만 해도 두 주자는 TV토론 등에서 손학규 전 경기지사를 협공하며 전선을 형성했다. 정 전 의장은 “이 전 총리가 대학시절 유치장에 있을 때 관식의 질이 나쁘다며 경찰과 싸우는 늠름한 기상을 보였다”고 했고, 이 전 총리는 “민주개혁세력의 근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나 아니면 정 전 의장 중 한 명이 후보가 돼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 전 총리는 경선 중반부터 정 전 의장을 향해 집중적으로 공격의 날을 세웠다. 9월27일 TV토론에선 이 전 총리가 ‘정말 나쁜 사람’이라며 정 전 의장을 몰아붙였다. 당초 이 전 총리측 실무진 회의에서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노무현 대통령을 향해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말한 것에 착안, 정 전 의장을 ‘참 나쁜 사람’으로 지칭하기로 기획했었다. 정 전 의장이 “이 후보와 저는 서울대 동기로…” 하며 분위기를 가라앉히려 하자, 이 전 총리는 “아, 그 친구 이야기 좀 그만 하세요. 공적인 자리에서…” 하며 화를 버럭 냈다. 정 전 의장이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으면서 이 전 총리도 변한 것 아니냐”고 다시 농담조로 말을 이었지만, 험한 분위기는 좀처럼 수습되지 않았다.

    이 전 총리는 ‘슈퍼 4연전’으로 불린 추석 이후 광주 전남 부산 경남 경선에서 모두 대패하자 10월2일 ‘절대 후보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던 손학규 전 지사와 손을 잡고 당에 경선 잠정 중단을 요구하는 초강수를 던졌다. 다시 경선에 복귀하기 직전인 10월7일엔 국회에서 친노 외곽 조직원 6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민주개혁세력대토론회’를 열었다. 말이 토론회지 사실상 불법 조직 동원선거 주도 의혹을 받고 있는 정 전 의장 규탄대회나 다름없었다. 이 전 총리는 “진실이 사라지면 요괴가 판을 친다”며 비난수위를 올렸다.

    이에 정 전 의장측 관계자는 “부산·경남 경선에서 친노 조직을 총 가동해 20만 선거인단 중 10만명을 이 전 총리측에서 모았다는 이야기가 경선 중반에 이미 광범위하게 돌았다. 똑같이 모았지만 그쪽 지지자들엔 내부 동력이 없었던 것을 갖고 누구를 탓하나”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 점에 대해선 이 전 총리측 관계자도 일부 인정했다. “(친노 핵심조직인)참여정부평가포럼에 벌써 1만 회원이 모였다고 하기에 그 사람들이 10표씩만 동원해도 너끈하게 이길 줄 알았다. 우리 측에서 방심한 탓도 있다”는 것.

    “후유증이 상당할 겁니다”

    쿼바디스? 大혼돈의 범여권

    이 전 총리측 선대위원장을 맡았던 유시민 전 장관의 행보도 관심을 끈다.

    과연 대통합민주신당의 모든 경선 주자가 힘을 합쳐 이명박 후보에게 대항할 것인지에 대해선 아직까지 회의적인 분위기다. 이 전 총리에 대해선 내년 총선에서 ‘민주개혁세력’을 친노 진영 주도로 재편하기 위해 당권을 쥠으로써 확실한 지분을 챙기려고 노력할 것이라는 전망이 대세다. 대통합민주신당은 당규상 대선을 치르고 난 내년 1월 전당대회를 열고 당 체제를 재편하게 돼 있다.

    그와 정치적 동지 관계인 유시민 선대위원장은 이미 선거기간 내내 “민주개혁세력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함께 가기 어려울 정도로 정 전 의장측과 멀어졌다. 그쪽에서 이렇게 불법, 탈법 선거를 할 줄은 몰랐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전 총리는 10월10일 기자들과의 오찬 간담회에서 “경선 결과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승복하고, 경선 결과 이후에는 따로 법적인 문제제기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하지만 정 전 의장이 당선될 경우 선거대책위원장 등으로 협력할 생각이 있느냐는 물음에는 “후유증이 상당할 겁니다. 민주개혁세력이 제대로 합치려면 명분이 있어야 하고, 명분이 있어야 후보를 돕는 자발적 동력(動力)이 될 텐데 그러기가 쉽겠어요?”라고 답했다. 캠프 내에서는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처럼 선거대책위원회 고문 정도의 상징적인 자리라면 모를까 선거대책위원장을 맡긴 힘들다는 게 지배적 관측이다.

    이 전 총리는 기자간담회에서 당권만큼은 호락호락 내주지 않겠다는 의지도 내비쳤다.

    “내년 총선도 이런 식으로 조직 동원 선거해서 공천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5선인)내가 김원기 선배 정도 제외하면 우리 진영에서 벌써 최고참 아닌가. 우리 민주개혁세력이 붕괴하지 않도록 내가 역할을 할 것이다.”

    이 전 총리측 핵심 관계자에 따르면 이 전 총리는 마지막 TV토론을 앞둔 시점에 손학규 전 지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후보자간 직접 통화연결 시도에 이 전 총리도 약간 당황했다고 한다. 손 전 지사는 ‘정 전 의장이 경선 재개 의미로 후보자간 3자 모임을 갖자고 제의해왔는데 나갈 거냐’고 물었고, 이에 이 전 총리는 ‘참모들과 결정한 뒤 연락하겠다. 나가서 모양을 만드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정 전 의장측에서 ‘정 후보가 현재의 경선국면 타개와 민주세력의 화해 결집을 위해 3자 회동을 제의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기자들에게 흘리고, 이것이 기사화하자 이 전 총리는 대로(大怒)했다고 한다. 캠프 관계자는 “속이 뻔히 보이는 언론 플레이에 감정이 무척 상한 것 같았다. (이 전 총리가) ‘이래서 얘는 안 된다니까’라는 말을 반복했다”고 전했다.

    이해찬 半, 유시민 半

    이 전 총리측 선대위원장을 맡았던 유시민 전 장관은 초기부터 정동영 전 의장을 집중 공격했다. “참여정부 그 자체이면서도 늘 곶감만 빼먹고 간 곶감 동영” “당의장을 두 번이나 한 사람이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에서 가장 먼저 뛰어내렸다” “정말 신의 없는 정치인” “이런 식으로 하면 진정성을 갖고 함께 대선을 치르기 어려울 것” 등등.

    정 전 의장과 친노 진영의 대명사 격인 유 전 장관은 ‘참여정부’ 초기만 해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노무현 지킴이’라는 공통 코드가 있었고 이심전심 ‘차기 후보는 정동영’이라는 데 대해 유 전 장관도 공감했다고 한다. 정 전 의장도 열린우리당 창당 당시 유 전 장관에게 정치개혁분야 팀장을 맡기며 기간당원제로 대변되는 그의 의견을 대폭 수용했다. 유 전 장관과 함께 개혁당 시절을 지낸 이 전 총리측 허동준 공보특보는 “열린우리당 창당 당시 유 전 장관이 정 전 의장을 차기 대통령후보로 생각하고, 당의장 선거 등에서도 적극적으로 밀겠다는 의사를 표시해 나 같은 개혁당파 출신들은 반대를 많이 했다. 그만큼 유 전 장관과 정 전 의장의 신뢰는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두 사람이 결정적으로 틀어진 계기는 2004년 총선 때로 알려진다. 유 전 장관이 비례대표 몫으로 여성단체 핵심인사인 고은광순씨 등 2, 3명을 추천했으나, 정 전 의장이 이를 모두 거절한 것. 유 전 장관은 이때부터 정 전 의장이 당을 통합하려 하지 않고 ‘자기 사람 심기’만 하려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한다. 이후 당 운영에서 사사건건 정 전 의장과 부딪쳤고, 정 전 의장도 일찌감치 유 전 장관과는 관계 정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유 전 장관은 ‘친노 후보 단일화’ 선언 다음날 저녁 각 언론사 ‘마크맨(담당기자)’ 몇 명과 술자리를 가졌다. 여기서 비교적 솔직한 속내를 들을 수 있었다. 유 전 장관은 “내가 왜 고향인 경주나 부모님이 살고 계신 대구 수성구에서 내년 총선에 출마한다고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고 다녔는지 아느냐”면서 “정 후보가 대선후보가 되고 당권을 잡더라도 설마 내가 TK(대구 경북)에 ‘죽으러 간다’고 하는데 공천을 안 주거나 하지는 않을 거 아니냐”고 말했다.

    10월12일 마지막 서울 연설회장에서 유 전 장관과 독대할 기회가 있었던 기자는 다시 한 번 그의 속내를 들어봤다.

    “정 전 의장측이 거의 1년 전부터 명부란 명부는 다 모았던 것 같다. 다른 세력은 대통합 준비다 뭐다 시끄러울 때 그쪽에서는 이미 대통령선거를 염두에 두고 이런저런 계획을 짠 거다. 경선 몇 주 전에 ‘룰 미팅’을 했으니, 당시 대통합민주신당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던 우리로서는 ‘(국민경선 선거인단)문턱을 낮춰야 한다. 이름과 주민번호만 있으면 된다’고 하는 그쪽 주장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명부란 명부는 다 싹쓸이해서 집어넣고 집요하게 선거운동 하는데, 이런 비정상적 불법 조직선거를 어떻게 이기겠나. 신용정보 도용 등도 막판에 문제가 되고 있는데 저게 만약 우리 판단대로 수사기관에서 사실로 밝혀지면 정말 큰 문제다. 상황이 이런데 정 후보가 대선후보가 되면 내가 대구 경북에 가서 동창이며 친지들 만나서 ‘내 면을 봐서라도 정 후보 찍어라’고 유쾌하게 이야기할 수 있겠나. 이미 금도를 넘어버려서 진영을 하나로 모으기는 정말 힘들 것이다.”

    정 전 의장의 유 전 장관에 대한 비토 심리도 이에 못지않다. 정 전 의장은 경선 초기 광주 TV토론 때 이 전 총리로부터 ‘참 나쁜 사람’이란 말을 듣자 “유 전 장관이 선대위를 맡더니 이 전 총리가 ‘이반유반(李半柳半·이해찬 반 유시민 반)’이 됐다”고 맞받아쳤다. 이미 후보 사퇴한 유 전 장관을 걸고넘어진 것이다. 정 전 의장은 당일 기자들과의 점심식사 자리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다 “‘이반유반’이라고 한 건 꼭 써달라”며 농반진반으로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 전 총리보다 유 전 장관이 더 탐탁지 않다는 뜻으로 들렸다.

    구심점 확보, 독자세력화

    대통합민주신당은 앞으로 치열한 당권 분쟁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대선 후에는 당장 총선 체제를 앞둔 전당대회가 있고, 내년 2월이면 공천에 들어가야 한다. 2002년 대선 상황이 재연되기는 어렵다는 어두운 전망이 짙어지는 마당이어서 더 그렇다. 누가 후보로 선출되건 당의 총력을 모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른 만큼 내년 총선을 겨냥한 힘겨루기가 본격화할 것이다.

    정대철 고문이나 김원기·문희상·유인태 의원 등 당내 중진이 경선 도중 사실상 정동영 전 의장측의 독주에 제동을 걸고 우회적으로 이해찬 전 총리나 손학규 전 지사 쪽을 지원했던 것이나, 중진그룹에서 의도적으로 이른바 ‘김한길 그룹’과 정 전 의장측의 당권밀약설을 흘려 공론화한 것도 따지고 보면 향후 정 전 의장측을 중심으로 당권이 재편될 것에 대비한 견제심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김한길 그룹’측에서는 “어떻게 미국에서 아들상(喪)을 당한 뒤 망연자실해 있는 김한길 의원을 향해 ‘당권을 위해 밀약을 했다’는 식의 말을 퍼뜨릴 수 있느냐”며 분노하고 있다. ‘당권 밀약설’은 애초 실체가 불투명한 것이어서 경선 중반 이후론 쏙 들어갔다.

    당내에선 벌써부터 내년 총선을 앞두고 ‘살생부’가 돌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한 중진그룹 인사는 “정 전 의장측에 대한 재선·3선 그룹의 비토 분위기가 상당하다. 주로 정 전 의장측의 ‘자기 사람 심기’를 우려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전 총리측에서는 “경선 불복은 없지만 법적 하자가 발견될 경우 누군가 후보자 자격 정지 가처분신청 같은 것을 제기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을 흘리고 있다. 경선이 끝나고 난 뒤라도 이 전 총리 진영을 함부로 대해선 안 된다는 뉘앙스다. 이 전 총리 본인도 거듭 경선 승복을 다짐하면서도 “경선에 법적 하자가 있으면 (후보로서의) 정통성이 없는 것”이라며 여지를 남기고 있다. 8개 지역을 한꺼번에 묶어 투표한 ‘원샷 경선’이 있기 하루 전인 10월13일 이 전 총리가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의 요청으로 비공개 만남을 가진 것도 살펴볼 대목이다.

    1시간30분가량의 단독면담에서 이 전 총리와 김 전 의장은 “민주개혁세력의 이미지가 경선을 통해 크게 훼손됐다”는 데 공감하고 향후 민주개혁세력 진영의 구심점 확보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자는 데 의견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졌다.

    영남권 일부 친노 그룹 인사들은 ‘독자세력화’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이수성 전 국무총리가 추진 중인 ‘화합과 도약을 위한 국민평화연대’는 물론, 일찌감치 경선을 포기하고 의원직을 버린 김혁규 전 경남지사까지 아우르는 모양새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李-孫’ 연대, 지속될까

    경선 말미에 접어들며 연설회에서 유독 “신당을 내 힘으로 살리겠다” “남의 자식 취급 말아달라. 손학규가 신당의 주인”이라며 당에 대한 소속감과 주인의식을 강조했던 손학규 전 지사의 행보도 관심거리다. 현재로서는 독자세력이 없는 손 전 지사가 범여권 장외 주자인 문국현 전 유한킴벌리 사장과의 단일화에 어느 정도 기여를 하고, 수도권 초·재선, 중도성향, 386의원그룹을 중심으로 세를 확장시킬 것이라는 전망이 설득력을 얻는다. 어차피 민주당 이인제 후보와의 연대 내지 후보 단일화는 정 전 의장측에서 공세적으로 커버할 것으로 보여 손 전 지사가 더 실익을 챙길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인제 후보와의 단일화’는 이슈 자체가 진부하기 때문에 시너지 효과가 크지 않을 것이라는 게 그 이유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경선 막판에 ‘예상을 깨고’ 사실상 느슨한 형태의 연대를 도모한 ‘李-孫’ 연대가 계속 이어질지도 관전 포인트다. 이렇게 되면 사실상 대선결과에 따라 정동영 전 의장 진영이 고립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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