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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 아메리칸’ 정체성 확립 계기, 한인 정치력 신장 숙제

LA 폭동 20년, 미주 한인 사회 진단

  • 장태한│ UC 리버사이드대 교수,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장 edward.chang@ucr.edu

‘코리안 아메리칸’ 정체성 확립 계기, 한인 정치력 신장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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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2년 4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대규모 방화, 약탈 사건이 벌어졌다.
  • 폭도들이 코리아타운에 들이닥쳤지만 경찰은 수수방관했고, 결국 교민 사회 전체가 큰 피해를 당했다. 재미교포들이 ‘사이구(4·29) 폭동’이라고 부르는 그 사건 이후 20년이 흐르는 동안 한인 사회는 많이 달라졌다. 타인종·타민족과의 교류가 활발해졌고, 한인들의 정치력도 눈에 띄게 커졌다. 미주 한인 사회의 과거와 오늘을 장태한 UC 리버사이드대 소수인종학과 교수가 살펴봤다. <편집자 주>
20년 전인 1992년 4월 29일 로스앤젤레스 한인 사회는 전쟁을 방불케 하는 악몽을 경험했다. 한인 타운의 많은 업소가 방화로 전소되거나 약탈 피해를 보았고, 사망자도 있었다. 그러나 시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경찰은 수수방관했다. 당시 시장이던 흑인 톰 브래들리와 시경국장인 백인 데럴 게이츠 사이에 빚어진 반목의 불똥이 엉뚱하게 한인 사회로 튄 것이다. 흑인 시장과 백인 시경국장은 2년간 단 한 번도 대화를 하지 않았을 만큼 반목이 심했다. 직무유기와 다를 바 없던 이런 상황에서 폭동이 발생하자 경찰은 한인타운과 흑인 지역의 치안유지를 포기하고 불바다가 되도록 방관했다.

그날의 악몽을 미주 한인들은 ‘사이구(4·29)’라고 부른다. 한인 사회 2280여 개의 업소가 피해를 당했는데, 피해액은 당시 폭동으로 인한 재산피해 총 10억 달러의 절반에 달했다.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성공을 위해 열심히 일한 결과 쌓인 모든 것이 순식간에 잿더미가 된 충격으로 이후 정신 상담을 받은 한인이 많았다. 그중 일부는 약을 복용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정신적인 후유증에 시달렸다. 당시 미국 주류 언론이 자신들의 사업체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든 한인 상인들을 오히려 무법자로 보도하면서 한인 사회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부각시킨 것도 미주 한인들의 삶에 어려움을 더했다.

‘4·29 폭동’의 주역은 흑인이었다. 로드니 킹이라는 흑인 운전자가 로스앤젤레스 백인 경찰에게 마구 구타당하는 장면을 백인 아마추어 카메라맨이 우연히 촬영했고, 이 생생한 구타 모습은 TV로 방영돼 미국은 물론 전 세계를 경악시켰다. 이후 검거된 3명의 백인과 1명의 라틴계 경찰에 대한 재판에서 모두에게 무죄 평결이 내려지자 흑인들이 분노하면서 그것이 폭동으로 번진 것이다. 이내 로스앤젤레스는 방화, 약탈, 폭행이 난무하는 무법천지로 변했다. 특히 흑인 지역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한인 상인들이 흑인 폭도의 주요 표적이 된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사실 1980년대부터 한인 상인과 흑인 고객의 관계는 악화되고 있었다. 특히 1990년 1월 뉴욕 브루클린 지역에서 한인 상인과 아이티계 흑인 고객 사이에 발생한 마찰로 무려 15개월 동안 불매운동이 지속된 ‘레드 애플’ 사건이 있었고, 1991년 3월에는 로스앤젤레스의 한인 상인 두순자 씨가 15세 흑인 소녀를 총격해 사망케 한 ‘두순자 여인 사건’도 일어났다. 이런 사건은 이른바‘한흑 갈등’을 전국적으로 사회문제화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흑인 주민들의 한인 상인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고조된 상태에서 폭동이 발생하자 한인 상점이 흑인 폭도의 공격 표적이 된 것이다.

반복되는 인종 갈등

미국 주류 언론 역시 ‘4·29 폭동’의 원인을 ‘한흑 갈등’으로 설명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인종 폭동은 미국이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생기는 시한폭탄으로, 20년이 지난 지금도 이러한 인종 갈등의 불씨는 여전히 존재한다.

흔히 ‘4·29 폭동’을 흑인 폭동이라고 하지만, 사실 이 사건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다인종 폭동이다. 당시 체포 또는 구금된 사람의 인종별 분포가 이것을 증명한다. 라틴계 45%, 흑인 41%, 백인 11%로 약탈에 참가한 사람 다수가 라틴계 이민자였다.

20세기 들어 미국에서는 주기적으로 인종 폭동이 발생해왔으며, 주로 흑인과 백인 사이 대결 양상을 보였다. ‘붉은 여름’으로 불리는 1919년 시카고 폭동, 1943년 할렘 폭동, 1964년 동부 7개 도시 폭동, 그리고 1965년 로스앤젤레스 와츠 폭동 등이 그렇다.

미국 인종 폭동의 원인은 크게 3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흑백 간 빈부 차다. 1960년대 보고서는 흑백 인종 간 빈부 차가 해소되지 않으면 폭동은 재발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1992년 미국의 현실은 흑백 간 빈부 차가 1960년대보다 더 커졌고 흑인들의 불만 역시 최고조에 달했다.

둘째, 흑인 지역의 낙후한 교육시설과 교사의 자질이다. 이 때문에 흑인 청소년의 고교 중퇴율은 매우 높고, 그것은 높은 실업률로 이어진다. 일부 흑인 지역의 고교 중퇴율은 50%가 넘는다. 흑인 학교의 질이 백인 학교에 비해 매우 열악하기 때문에 흑인 학생의 경쟁력이 떨어지고 그것이 빈곤과 직결되는 구조적인 모순을 해결하기란 쉽지 않다. 또한 흑인 청년 남성의 경우 대학에 진학한 숫자보다 범죄로 감옥에 수감된 숫자가 많다. 이러한 현실은 흑인 사회의 미래가 어둡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경찰의 과잉진압이다. 경찰에 대한 흑인 사회의 불신으로 경찰과 흑인 주민 간의 대립상태가 지속돼 양자 관계가 악화되는 것이 문제로 지적된다. 흑인 지역에서 경찰은 범죄자로부터 주민을 보호하는 집단이 아닌 ‘공포의 대상’이다. 이 때문에 ‘로드니 킹 사건’ 같은 것이 도화선이 돼 폭동으로 번질 위험이 농후한 것이다. 최근 플로리다에서 발생한 ‘트래번 마틴 사건’, 즉 백인이 흑인 소년을 총으로 쏘아 죽인 사건도 인종 폭동으로 번질 위험이 있었으나 정부가 즉각 대처해 막을 수 있었다.

1970년 이후 아시아계 및 라틴계 이민자가 급증하면서 미국 대도시의 인구 구성은 크게 변했다. 특히 로스앤젤레스의 경우 이 과정에서 흑인 백인 중심 도시에서 다인종 다민족 사회로 급변했다. 이후 인종 갈등이 심화된 것도 ‘4·29 폭동’의 한 원인이다.

그러나 당시 큰 사회문제를 일으킨 한인 상인과 흑인 고객 간의 마찰, 즉 ‘한흑 갈등’이라는 단어는 20년이 지난 지금,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됐다. 지난 세월 미주 한인 사회가 로스앤젤레스 폭동을 교훈 삼아 변화를 위해 노력해왔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 주류 언론들은 미주 한인들이 어떻게 재기에 성공했는지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새로운 시작

‘4·29 폭동’으로 미주 한인 사회는 엄청난 피해를 당했으나 동시에 많은 교훈을 얻었으며 그것은 미주 한인 사회 변화의 시작이 됐다. 20년 전 미국인들은 한인 사회에 대해 무관심했다. 미국 사회에서 한인의 존재는 전혀 각인되지 못하고 있었고, 중국계 또는 일본계로 오인되는 일이 흔했다. 그러나 ‘4·29 폭동’의 최대 피해자가 한인이라는 사실을 접하면서 미국인들은 비로소 한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4·29 폭동’이 미국인에게 한인 사회의 존재를 알리는 시작점이 된 셈이다.

동시에 그 사건은 미주 한인들에게 ‘코리안 아메리칸’의 정체성을 심어준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당시만 해도 미주 한인들은 ‘미국 속의 한국인’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민은 했으되, 일상생활은 주류 사회와 단절된 한국인의 그것이었다. 그러나 폭동을 경험한 이후 이들은 비로소 ‘코리안 아메리칸’의 새로운 정체성을 갖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주인 의식 없이 이방인으로 살아가면 또다시 엄청난 피해를 당해도 억울함을 호소할 방법이 없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코리안 아메리칸은 ‘한국계 미국인’을 의미한다. 미국 속의 한국인이 아니라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당당히 주인 의식을 갖고 정치, 사회, 문화,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책임과 의무 그리고 주권을 행사하는 사회구성원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정체성 확립은 미국에서 태어나고 성장하는 차세대에게 매우 중요한 변화다. 그들이 미국에서 성장하면서 주류 사회에 진입하고 미주 한인 사회에 기여하는 발판을 마련해주고 있으며 동시에 그들이 한미관계 그리고 모국인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도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 바탕이 된다.

‘4·29 폭동’이 가져온 또 다른 변화는 이때부터 미주 한인들이 모국 지향적인 성향을 지양하고 미국에서 정치력을 신장하는 것을 당면 과제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당시 한인 사회는 엄청난 재산 피해를 당했으나 미국 정치인 중 누구도 한인 사회에 관심과 배려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흑인 지역에서 사업하다 전소된 업소들이 재기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의 시 조례를 통과시켜 한인들이 또 한 번 피해를 당하기도 했다. 미주 한인 사회가 전혀 정치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현실이 많이 바뀌었다. 이제 한인 사회는 한인 사회에 불리한 법규가 제정될 움직임이 보이면 즉각 대응해 한인의 목소리를 제대로 반영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해졌다. 주목할 것은 미주 한인 사회의 정치력 신장은 한미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다. 가령 유대인은 미국이 친(親)이스라엘적인 외교정책을 펴도록 하는 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미주 한인 사회의 정치력은 한미관계뿐 아니라 나아가 한반도 평화에도 큰 기여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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