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호

일본의 사례로 본 한국 의료시장의 앞날

의료시장 개방, 병원경영평가 시스템 도입 검토해야

  • 글: 민도영 조세연구원 재정분석센터 연구원

    입력2004-03-29 11: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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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사례로 본 한국 의료시장의 앞날

    2월 22일 대한의사협회 회원 4만여명이 여의도 둔치에 모여 의약분업 철폐와 의료보험제도 전면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최근 국내 의료계에서는 의료시장 개방이 화두가 되고 있다. 인천 경제특구에 미국의 대형 병원인 존스 홉킨스 병원을 유치하려고 한다는 비교적 구체적인 이야기도 들려오고, 또 외국계 병원이 국내 의료시장에 들어오게 되면 여러 가지 제한에 묶여 있는 국내 병원들은 당장 고사하고 말 것이라는 심각한 우려도 나오는 실정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들 중엔 과장된 측면도 많다. 사실 국내 의료시장은 이미 우루과이라운드(UR) 당시 외국인에게 개방되었다. 따라서 그동안 외국계 병원이 왜 국내시장에 진출하지 않았는지를 알게 된다면 현 상황을 특별히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그동안 외국계 병원들이 한국 의료시장에 투자하지 않은 것은 ‘과실 송금’ 문제 때문이었다. 외국계 병원들은 사실 한국 의료시장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자국의 의료 수가가 꾸준히 낮아지고 있고, 의료 사고로 인한 천문학적 배상 비용 등으로 인해 경영에 심각한 압박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한국 시장에 들어올 경우 물적 투자가 아닌, 합자병원에 대한 브랜드 제공과 일부 전문 의료진의 파견만으로도 충분한 수익을 거둘 수 있어 한국 의료시장은 이들에게 무척이나 매력 있는 시장이다.

    문제는 한국에서 일정 규모 이상의 병원을 운영하려면 ‘비영리 법인’이어야 한다는 데 있다. 비영리법인은 한국 시장에서 발생한 이익금을 자국으로 송금할 수 없다. 과실 송금이 불가한 것이다. 이것이 시장이 개방된 지 수년이 지났음에도 외국 의료기관들이 한국 의료시장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다.

    영리병원은 세계적 추세



    따라서 의료시장 개방 논의에서 ‘개방’보다 더 중요한 사안은 ‘병원의 영리법인화 허가’와 ‘민간 보험 도입’이다.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영리병원은 이미 세계적인 추세다. 정치 철학에 따라 정책을 달리하는 북유럽의 일부 사회주의 국가를 제외한 대다수 선진국은 이미 영리법인을 허용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엔 AMI(American Medical International) 같은 대형 민간 영리병원들이 국민 건강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현재 국내 의료시장은 중소 병원들을 중심으로 심각한 경영난을 겪고 있다. 그 원인은 중소 병원 경영자들의 능력 부족보다는 의료제도 및 시장환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정부도 이러한 문제점을 타개하기 위해 영리법인 허가를 전제로 한 의료시장 개방에 적극성을 보이고 있다. 도하개발어젠더(DDA: 2001년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제4차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에서 출범시킨 다자간 무역협상)가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빠르면 2005년부터 부분적 시장개방과 함께 영리병원 탄생도 예상된다.

    그러면 정부는 왜 의료시장을 개방하려 하고 병원의 영리법인화를 허용하려 하는가? 한마디로 현재의 사회주의적 의료체계를 하루빨리 고치지 않으면 결국 재정부담이 누적되고, 그 부담은 국민이 떠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 기획관리실장을 역임한 김종대 한국복지문제연구소장에 따르면 1993년 대비 1998년 건강보험료는 총 83.8% 증가했으며, 매년 전년 대비 평균 13.0%씩 증가한 반면, 1998년 대비 2003년 보험료는 147.4% 증가했고, 매년 전년 대비 평균 19.9%씩 증가했다고 한다.

    또한 건강보험에 투입되는 정부 재정의 연도별 증가 실태를 살펴보면, 1993년 대비 1998년 정부 부담은 총 68.6% 증가했으며, 매년 전년 대비 11.1%씩 증가해 1998년 대비 2003년 정부 부담은 총 240.2% 증가했다. 매년 전년 대비 평균 29.4%씩 늘어난 것이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문제는 1977년 7월 의료보험제가 실시된 이후 진료비 부족에 대비해 적립해온 법정 준비금이 1997년 말 현재 3조7831억원에 달해 있었으나, 보험재정이 파탄나자 이 적립금을 부족한 진료비에 충당하는 바람에 모두 소진했다는 점이다. 이미 소진한 법정 준비금은 결국 국민이 부담해야 할 몫이 된다.

    정부는 ‘동북아 허브 병원’이라는 보건복지부 정책을 발표하면서 의료시장 개방에 시동을 걸었다. 여기에 재경부가 의료시장의 전면 개방을 의미하는 ‘경제자유구역 내 내국인 진료 허용’ 방침을 발표해 의료시장 개방을 가속화하고 있다. 또 최근에는 ‘2004년 경제 운용 방향’을 발표하면서 시장 개방과 외자 유치를 통한 서비스업 유치에 의료 분야도 예외일 수 없으며 세계 초일류 의료기관과 합자병원 설립을 위한 협상을 벌이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의료시장 개방을 앞두고 정부 내에서조차 아직까지 완전한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복지부 관계자는 DDA 협상이 소강 국면에 있고, 의료의 공공성이 침해받을 가능성이 큰 데다 실익도 별로 없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반면 통상교섭본부 민동석 DDA담당심의관은 “DDA는 일괄타결 방식을 취하기 때문에 어느 한 분야만을 개방에서 제외할 수는 없으며 의료 서비스 분야는 대다수 국가에 이익이 되기 때문에 결국 개방될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보건 의료 발전 계획안을 통해 의료시장 개방과 영리병원 허가에 대한 종합적인 대책을 마련한 바 있다. 그러나 5조원에 이르는 공공의료 확충, 부실병원 인수 등 이 계획에 필요한 9조원의 자금을 어떻게 마련할지, 시행 과정에서 이해관계를 어떻게 조정할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

    사실 영리법인 허용과 건강보험 요양기관 강제지정제도의 철폐는 국내 의료인들의 오랜 소망이다. 보건복지부가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의료시장 개방에 대해 의료 공급자의 63%가 찬성한 반면, 시민단체는 40%만이 찬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영리병원 개설에 대해서는 의료계의 80%가 찬성한 반면 시민단체의 경우 71%가 반대해 극명한 시각 차이를 보였다.

    보건사회벤처협회 박인출 회장은 “시장을 개방하고 관계 법령을 정비하는 것보다 더 확실한 경쟁력 강화책은 없다”고 개방에 대한 의료계의 인식을 대변했다.

    반면 일부 시민단체의 반응은 한·칠레 FTA협상 때 못지않게 심각하다. 김홍신 전 의원은 지난해 전국보건의료노조 등 12개 단체가 소속된 ‘의료개방저지 공대위’ 주최 공청회에 참석해 “의료 개방은 동남아 지역의 시민 건강권을 다국적 기업이 장악하려는 음모”라며 “공공의료가 취약하고 의료보험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큰 상황에 의료시장이 개방된다면 엄청난 문제에 직면할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시장원리를 의료계에도

    그런데 시민단체들은 시장개방 자체보다는 개방과 연계한 민간 의료보험 도입 시기를 앞당기는 데 더욱 반발하고 있다. 시민단체들은 ‘영리법인 인정’과 ‘강제요양기관 지정제 철폐’를 우리나라 의료시장 개방의 핵심으로 보고 있다. 의사들과는 완전히 반대 입장이다. 그들은 의료시장 개방 자체에는 어느 정도 수긍하지만, 민간 의료보험 도입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영리병원이 허용되면 환자는 자신의 경제력에 걸맞은 맞춤 진료를 받을 수 있게 된다. 반면 상대적으로 저소득 계층에게는 정부가 제공하는 최소한의 진료밖에 받을 수 없는 부작용과 비인격적 대우를 받는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그렇긴 해도 ‘영리병원 제도’ 채택은 대세다. 적자가 가중되고 있는 의료 부문을 정부가 계속해 전적으로 책임진다면,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결국 국민의 부담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병원은 병원대로 운영상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개인 소유임에도 사회주의 성격이 강한 의료체계 탓에 영리성을 배제하다 보니 경쟁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우 이미 영리병원이 허용된 상태다. 그러나 일본 역시 공익성에 무게를 두고 있어 병원이 일정 수준 이상의 수익을 내는 것은 통제되어왔다. 대신 부족한 부분을 정부가 부담해주는 관치 영리병원 제도를 운영함으로써 병원 자체의 경영은 나쁘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장기간 재정 지원을 통한 관치 영리병원 제도가 정부의 재정 부담을 가중시키자 일본 정부는 본격적인 의료개혁을 서두르고 있다.

    현재 일본에서 일고 있는 의료개혁의 핵심은 병원의 경쟁력과 자생력을 키우는 데 있다. 이를 위해 병원의 영리성을 최대한 강화해, 자본주의 색채가 짙은 자금 조달 방법인 직접 금융을 허락했다. 직접 금융이 가능해지면 경쟁력이 있는 병원은 직접 금융으로 축적된 자금을 활용해 의료의 질을 높이고, 경쟁력이 없는 병원은 자연 도태된다. 즉 시장의 법칙을 의료계에도 도입하겠다는 것이다.

    이 같은 일본 정부의 정책에 발맞추기라도 하듯이 피치 레이팅스를 비롯한 세계적인 신용평가 회사들이 병원 신용 평가 시장에 뛰어들었다. 진료 보수 채권의 증권화나 병원채 등 새로운 사업 기회를 발견한 것이다. 특히 병원들이 주식회사처럼 소유와 경영이 분리돼 있지 않아 기업 통합이 어렵고 경영의 불투명함 등으로 투자자들이 투자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도 신용평가 회사들이 속속 시장에 참여하는 이유다. 신용평가 회사들은 앞에서 언급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등급 평가의 필요성과 실제로 투자자를 끌어들여 수익을 낼 수 있는 기반이 존재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최근 우리 의료계도 병원에 대한 평가로 논란이 일고 있다. 그런데 의료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주요 평가 내용은 ‘의료의 질’이다. 의사들은 병원이 서열화될 경우 한 병원으로 환자가 몰리는 쏠림 현상이 나타날 것을 우려하면서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물론 병원 평가에서 ‘의료의 질’은 가장 중요한 사안이다.

    그러나 ‘의료의 질’ 부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해서 수익을 내기가 쉽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원가 이하의 의료 수가 부문에선 진료가 많을수록 적자폭이 커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정부와 의료계는 의료의 질 평가와 함께 병원의 경영평가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시민단체 역시 의료 서비스의 최종 소비자인 국민에게 좀더 혜택을 줄 수 있는 경영평가 기준을 대안으로 제시해야만 한다. 아무리 국민의 혜택을 부르짖더라도 병원이 무너지거나 정부의 부담이 늘어난다면 결국 그 부담은 고스란히 국민에게 넘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시장 개방의 대처 방안으로서 병원의 경영 상태를 강화하는 정책이 나와야만 한다. 재정이 뒷받침되지 않는 의료의 질은 유지되기 힘들다.

    피치 레이팅스의 경우 1980년대 후반부터 미국의 병원 평가 시장에 참여했다. 미국도 매년 의료의 질에 대한 평가를 실시하고 있는데 그와 동시에 경영의 질 평가도 자리를 잡은 상태다. 피치 레이팅스가 처음 시장에 참여할 당시 미국도 비용 절감 압력이 높아져 병원 경영환경이 무척 어려웠다. 따라서 이를 돌파할 수 있는 직접 금융의 필요성이 제기돼 신용평가 회사들이 의료시장 개방에 참여하게 됐다.

    일본의 경우도 진료 보수 인하 등의 제도 개정을 거쳐 미국과 같은 상황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자금 조달이 가능하고 경쟁력을 높이는 의료법인과 그렇지 않은 곳으로 양극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피치 레이팅스를 비롯한 세계 주요 신용평가 회사들이 의료기관을 평가하는 방법은 시장에서의 우위성, 관리 체제, 재무 등 일반 기업 평가 항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는 병원을 사회를 떠받치는 공공기관으로 보지 않고 수익을 내야 하는 주식회사로 본다는 방증이다. 다만 같은 재무라고 해도 기업과 병원이 다른 만큼 회계법인의 감사 등 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를 활용해 구축하고 있다.

    또 의료의 질이 경쟁력의 원천인 만큼 이 부분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일본 의료시장에 참여하고 있는 신용평가 회사들은 우선 데이터가 정리된 병원에서 모델을 만들고 병원과 협력하는 형태로 등급 평가 체제를 정비할 것으로 보인다.

    정보공시제도 시급히 도입해야

    물론 우리 의료시장에 이 제도가 도입될지는 미지수다. 필자가 최근에 만난 피치 레이팅스의 오사무 고바야시 이사는 아직 한국의 의료시장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나마 사정이 나은 일본에서도 병원의 재무 자료를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데, 한국 병원들의 정보는 훨씬 더 열악하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의료시장이 외국인에게 매력적으로 보일 만큼 적절한 환경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반면 피치 레이팅스의 일본 의료시장 평가 책임자인 요코 아카시 이사는 한국이 금융권을 개혁했던 것처럼 의료개혁을 추진한다면 성공할 가능성이 무척 높다는 긍정적인 의견을 밝혔다.

    이제 국내 의료계도 직접 금융에 관심을 돌려야 할 시기다. 영리병원 제도 도입은 곧 시장을 무한경쟁으로 몰아갈 것이고, 자금력이 달리는 병원은 의료의 질 확보에 앞서 도태되고 말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은행에 담보를 제공하고 대출을 받는 간접 금융에만 의존했던 병원들에게 무한경쟁이 허용되는 철저한 자본주의 방식으로 자금을 직접 조달하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그런데 직접 금융으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는 경영평가가 선행돼야 한다. 등급 평가는 승자와 패자를 선명하게 나누는 작용을 한다. 평가 결과에 따라 각 병원의 환자 유치능력이나 의료의 질뿐만 아니라 자금 조달력, 경쟁력이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병원들은 경영 환경에서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패러다임 쉬프트(Paradigm Shift)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정부와 의료계는 현재 진행중인 의료의 질 평가 외에도 병원의 경영 내용을 평가하기 위한 신용과 마케팅 등 경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신뢰성 높은 정보공시제도를 시급히 준비해야만 한다.

    우리 시장에 맞는 경영 평가 기준을 조속히 마련하지 않는다면, 국내 병원은 외국 투자가는 물론 상업자본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발생하는 폐해와 부담은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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