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골당에서의 성묘. 화장 선호도가 크게 높아지면서 이런 성묘 모습도 더이상 낯설지 않다.
국민의식도 최근 몇 년 사이에 크게 바뀌었다. 1980년대까지 10%대에 머물렀던 화장률이 2001년말 조사에서는 울산이 64.9%로 선두를 달렸고 부산 62.2%, 서울 53.6%, 인천 50.1%, 경기 45.9% 순으로 나타났다. 전남은 16.1%, 제주가 15%로 가장 낮았다. 이쯤 되면 화장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넘어서 매장보다 더 선호되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죽음의 역사’의 저자인 필립 아리에스는 죽음에 대한 인식과 그것과 관련된 사회적 행위들은 아주 천천히 변화하기 때문에 유의미한 변화양상을 추적하려면 적어도 천 년의 역사를 살펴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불과 몇 년 사이에 장례방식이 엄청나게 변했다. 그 이유로 흔히 유교사상의 퇴조와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라 조상숭배 의식이 희박해지고 후손들의 묘지관리를 기대할 수 없게 되면서 화장 비율이 높아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이후 화장률 급상승을 견인한 것은 ‘묘지강산을 금수강산으로’라는 표어처럼, 묘지로 가득차버린 국토를 되살리기 위해 화장을 하자는 사회운동이다. 그 중심에 1998년 창립된 (사)한국장묘문화개혁범국민협의회(이하 ‘장개협’)가 있고 언론도 그에 동조하여 계몽에 앞장섰다.
현재 화장률과 매장률을 비교하더라도 화장장려운동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이제 화장의 비율이 매장의 비율을 확실히 넘어섰다고 해도 될 정도다. 이 시점에서 화장 증가가 가져온 긍정적 효과는 과연 무엇인지 냉정히 판단해보자.
사회학자 천선영이 지적했듯이, 그 동안 장개협과 그에 동조한 언론의 계몽활동은 거의 폭력적으로 전개됐다. 매장은 ‘악(惡)’이요, 화장은 ‘선(善)’이라는 관점에 서 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 결과 매장은 없어져야 할 장례방식이며, 화장은 바람직한 대안이라는 ‘강제적 계몽성’이 우리 사회를 휩쓸었다. 그에 따라 화장은 급증했으며 화장 위주의 법령이 제정됐고, 대학에는 장례 관련 학과들이 대거 신설됐다. 특히 이러한 추세에 발맞춰 납골 석재관련업계는 최고 호황기를 맞고 있다. 이들에게 화장장려운동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다름없다. 이러한 먹잇감 앞에 종교계까지 뛰어들었다. 처음 화장장려운동을 전개한 분들의 순수성을 의심하지는 않으나 작금의 상황은 그야말로 죽 쑤어 개 좋은 일 시킨 격이다.
본래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과정
풍수학자 황영웅의 논리를 빌려 설명하면, 모든 생명틀은 집합(삶)과 환원(죽음)의 과정으로 되어 있다. 모든 생명체는 원소핵의 집합체이다. 생명체가 죽으면 집합된 것이 이산, 괴멸되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것이 환원과정이다. 그러므로 환원이란 집합되어 인간의 몸을 구성하기 이전의 원래 원소로 회귀하는 것을 말한다.
시신을 매장하면 통상 200~300년 후에는 깨끗하게 원래의 원소로 돌아간다. 이처럼 매장이란 죽은 인간의 몸을 땅에 묻음으로써 서서히 환원되는 과정이다. 그에 반해 화장은 시신을 태워서 급속히 환원시키는 방식이다. 그런 면에서 매장과 화장의 본질은 같다. 본래 온 곳으로 되돌아가는 환원이라는 목표가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주 자연의 이치에서 매장과 화장의 본질은 같으나, 여기에 인간의 가치개념이 개입되면 달라진다. 인간은 조상의 시신이 환원되는 과정의 생명에너지를 동조·흡수하여 정신적·육체적으로 생명활동력을 개선 상승시키고자 했다. 그것이 바로 풍수지리의 요체다.
그러나 인간의 가치개념마저 끊고자 한 불교적 가치관에서 추구하는 최고의 방법은 일체의 인연을 끊어버리고 즉시 환원되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동기감응(同氣感應)하는 후손을 두지 않은 불가에서 매장을 통한 후손과의 교류는 어차피 무의미했다. 따라서 화장은 고대부터 존재했지만 본격적인 성행은 불교의 영향권하에서 이루어졌다.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풍수지리와 관련하여 매장을 선호했다. 국토의 70%가 산악지대이며 대부분의 산들이 지기(地氣)가 융기되어 형성됨으로써 어떤 나라보다도 생기(生氣)에너지를 많이 획득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매장이 항상 풍수지리와 관련된 것은 아니다. 시신을 불 태우는 화장은 결코 자연스럽지 않다. 따라서 풍수의 영향이 아니라도 사람들은 자신이 살던 근처의 땅에 묻히고자 했다. 한국인의 매장문화에는 한국인의 자연관, 우주관, 그리고 조상숭배사상이 알알이 맺혀 있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현재의 국토상황이 매장을 허용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죽음의 본질에 대한 의식 없이 단순히 매장에 문제가 있으니 화장으로 가자는 양자택일의 이분법은 곤란하다.
매장이든 화장이든 궁극적 목표는 인간이 본래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이므로, ‘무(無)로 돌아간다’거나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표현한다. 그러므로 그 본질을 이해하는 한 어떤 경우에도 자연을 파괴해서는 안 된다. 매장을 반대하고 화장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가장 큰 명분이 국토의 효율적 이용이다.
이와 관련해 흔히 호화분묘를 예로 드는데 어떤 이유로든 호화분묘가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으리라. 그러나 호화분묘가 매장 금지나 매장 반대로 이어지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다. ‘호화’는 어느 시대 어느 분야에나 있었다. 지나치게 ‘호화’에 해당하는 것은 국민정서로 비판하고, 더 나아가 불법적 요소는 강력하게 처벌하여 금지시키는 방향으로 가면 된다. 개인묘지의 경우 현행 법령은 9평을 초과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최소면적 지정과 함께 위치선정이나 부대시설 등과 관련해 자연파괴적 요소가 있다면 강력히 규제하면 되는 일일 뿐 그것이 곧 화장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납골당, 납골묘, 납골탑의 자연파괴
묘지문화에 대한 또 다른 비판으로 묘지가 반(半)영구적이어서 국토를 잠식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논리적 모순이 있다. 지금 존재하는 묘지 가운데 1000년 된 묘지가 몇 기나 있을까. 사실상 200년 이상 된 묘지도 찾기가 쉽지 않다. 묘지는 세월이 흐르면 풀이 나고 나무가 자라 저절로 자연화된다. 당장 산에 가면 나무 사이로 옛무덤의 흔적을 볼 수 있다. 한편 묘역이 차지하고 있는 토지의 절반 가량은 생산농지로 전용할 수 있는 땅이라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생산용지로 전용될 수 있는 묘지가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또 생산용지 때문이라면 놀고 있는 땅을 이용하거나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골프장을 비난하는 것이 낫다.
실제 자연파괴의 주범은 매장 자체가 아니라 석재의 사용이다. 석재는 생산과정에서 산의 중심부를 파괴한다. 단순히 눈앞에 보이는 석재의 크기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가공되어 그 정도 크기의 석재가 나오기까지 그 대상이 되는 산은 이미 결딴났다고 보면 된다.
그러므로 호화분묘든 아니든 간에 석재사용을 원칙적으로 금지해야 한다. 현재 납골당, 납골묘, 납골탑 할것없이 지나치게 석재를 많이 쓴다. 특히 납골탑의 문제는 심각하다. 우리의 문화유산 가운데 1000년 넘게 유지되는 것은 대개 석탑처럼 돌로 만든 문화재다. 돌은 그 수명이 다른 재료와 비교할 수 없이 영구적이다. 요즘 유행하는 납골탑의 500년, 1000년 뒤 모습을 상상해보라. 자랑스런 문화재가 아니라 천하 꼴불견 중에 꼴불견일 것이다. 2000년에 반포된 ‘장사 등에 관한 법령집’에는 다음과 같은 제한이 있다.
묘지의 점유면적 개인묘지는 30평방미터(9평)를 초과하여서는 안 된다. 분묘 1기당 설치할 수 있는 시설물은 비석 1개, 상석 1개, 그 밖의 석물 1개 또는 1쌍으로 한다.
이 법령은 석재사용을 제한하고 있다. 그러나 자연회귀가 되지 않는 석재사용을 전면 금지해야 한다. 환경운동은 매장이냐 화장이냐가 아니라 석물 사용이 부끄러운 일임을 일깨우는 쪽으로 전개돼야 한다.
사실 풍수적 논리에서 볼 때도 석물은 묘소 안의 시신처를 물구덩이로 만드는 부정적 요소다. 둘레석으로 봉분을 두르거나 묘소 앞에 거대한 돌을 세우는 것은 설혹 풍수적 명당이라 해도 흉지로 만들 가능성이 높다. 삼투압현상으로 묘소 안에 물이 차기 때문이다. 풍수와 관련된 일화 중에는 명당발복(明堂發福)된 묘지 덕에 후손이 잘살게 된 후 자랑삼아 돌로 치장했다가 흉지로 변하여 망하게 되었다는 일화가 셀 수 없이 많다.
어느 문중의 묘지조성과 산림훼손. 수십 기의 가족묘가 들어설 수 있는 엄청난 규모로 재실과 관리실을 짓기 위해 산자락을 파괴했다.
석물사용을 금지해야 함은 화장문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석물 사용 문제는 화장후 유해처리와 관련해 더욱 심각한 상황이다. 석탑이나 석함, 혹은 석조납골당 시설은 곧 환경오염이다. 나아가 일반 건축물에도 석재 사용을 제한해야 한다.
석재 화장보관시설은 외형적인 환경파괴일 뿐이지만 시간이 흐른 후, 뼛가루가 썩으면서 뿜어내는 악취는 더욱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것이다.
장례 관련 법령부터 정비하자
현재 우리의 화장문화는 납골, 즉 화장하고 남은 유해를 보존하는 식으로 굳었다. 무슨 보물덩어리인 양 유해를 항아리에 담아 석재 조성물 안에 보관한다. 흔히 그 유해가 그대로 있거나 자연적으로 없어진다고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결로현상으로 습기가 생기고 온갖 악취를 풍기며 썩는다. 항아리 안에서, 그리고 돌덩이 안에서 영원히 본래의 원소로 환원되지 못한 채, 부패상태로 백년 천년을 지낸다. 그것은 형태만 다를 뿐 흡사 ‘뼛가루 형태의 미라’ ‘뼛가루와 물이 결합된 악성 부패물 공장’이나 다름없다.
오래된 석탑 하나가 서 있다면 아름다움이라도 있겠지만, 악성 부패물을 간직한 저 수많은 돌집들을 천 년 후 어찌할 것인가. 현재의 법률은 유해의 안치기한을 한정해놓고 있지만 그것이 지켜지리라 믿는 사람은 없다.
흔히 화장을 하면 무해무득(無害無得)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화장한다 해도 100% 완전연소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완전 ‘무해무득’이라 할 수는 없다. 유해가루에 산소 질소 수소 박테리아 등이 붙어서 산성 혹은 염기성물질이 되면, 뼛가루가 새로운 이물질로 바뀌어 ‘환원’이 아니라 ‘산화’되는 것이다. 이처럼 유골가루가 물 또는 바람과 결합하면서 산화해 썩게 되는데, 그것은 풍수적 관점에서 보면 마치 시신을 물구덩이나 바람구덩이에 내동댕이친 것과 같다.
석재채취로 결딴난 산의 모습(사진제공 : 녹색연합). 양질의 석재를 채취하기 위해서는 산의 중심부를 캐고 들어가야 한다.
신라시대 천마총의 봉분형태를 본떠 만든 왕릉식 납골시설의 경우 8000위 정도를 안치한다면서, 환경과 자연보호의 바람직한 사례로 제시되기도 했다. 장차 그러한 시설물과 그 속의 내용물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과연 지금의 화장장려운동의 결과 나타난 유해처리방식과 시설물들이 천년 후에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인지 묻고 싶다.
풍수지리를 시대착오적인 구복신앙 정도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으나 시신 혹은 유해의 처리문제에 관한 한 풍수지리는 수천년간 경험적 지식을 축적해왔다. 시신의 부패와 환원은 화학반응이며 그 자체가 과학이다.
풍수지리의 관점에서 현재 장례 법령은 반드시 재정비해야 한다. 현행법은 제정과정에서 죽음의 본질적 측면까지 고려하는 심도 있는 논의가 부족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밖에 없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다음 조항이다.
묘지의 설치기간 사설묘지에 설치된 분묘의 설치기간은 15년으로 한다. 그리고 15년씩 3회에 한해 연장할 수 있다.
설치기간이 종료된 분묘의 처리 설치기간이 종료된 분묘(최장 60년)의 연고자는 설치기간이 종료된 날로부터 1년 이내에 당해 분묘에 설치된 시설물을 철거하고 매장된 유골을 화장(火葬) 또는 납골(納骨)할 수 있다.
어느 사찰에서 분양하여 설치운영하고 있는 납골탑. 당장은 보기도 좋고 냄새도 나지 않지만 머지 않아 찾는 이 없는 흉물이 될 것이다.
현재 정부는 묘지의 시한과 관련하여 전국 묘지의 전산화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더 늦기 전에 현행 장사법 개정안을 보다 합리적으로 조정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야 한다.
법령의 재정비는 매장관련 부분의 필요성 때문만이 아니다. 현행 법령에 의하면 어떤 형태이건 땅에 묻으면 묘지로 간주된다. 그리고 무조건적인 매장 반대 분위기에 편승하여 납골시설에 대한 검토가 대단히 미흡한 것도 문제다. 그것은 오늘날 납골시설의 왜곡을 초래하는 커다란 원인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현재의 법령은 올바른 토론과 모색을 통해 재정비될 필요가 있다.
유골을 그대로 묻는 수목장묘
화장운동을 전개하는 사람들은 흔히 외국의 사례를 들어 우리도 그렇게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선진장묘시설로 유럽과 일본의 사례를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화장을 장려해야겠다는 목적성이 강하다 보니 그 보고서는 실상을 왜곡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해외 사례들이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도 과연 우리에게 정답일 수 있는지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자주 인용되는 일본의 화장문화는 그 나라의 자연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일본의 국토는 대부분 화산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지기발복(地氣發福)을 따지는 묘지풍수의 적용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일찍부터 화장을 선택했던 것이다.
장례와 관련된 문제는 실험실에서 실험하듯, 이렇게 해보다가 잘 안 되면 저렇게 해보는 식으로 전개되어서는 안 된다. 잘못될 경우 풍수적 관점에서 보면 한 집안이 결딴나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문화적 측면에서 보아도 장례문화를 단지 실용적 측면으로 축소시키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 “만일 영혼이 부정된 것과 화장이 결탁을 하면 그것은 쓸모없는 것의 소각(消却)과 구별하기 어려워진다”는 김열규 교수의 경구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여기서 필자 나름대로 대안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먼저 현재처럼 유골가루를 지상에 넣어두거나 항아리에 담아 돌 속에 넣어두는 방식은 한 인간이 영원히 환원되지 못하고 안에서 썩는 것이므로 절대 시행해서는 안 된다. 유골가루는 원칙적으로 땅에 묻어야 한다. 습하지 않고 양지바른 땅이라야 한다. 그래야 유골가루가 완전히 자연에 환원될 수 있다. 따라서 화장한 뒤 남는 유골가루를 땅에 묻는 ‘납골묘지’ 방식이 적당하다.
묻을 때는 항아리에 넣지 말고 그대로 땅에 넣어야 한다. 이와 같이 하면 무덤 1기당 땅의 넓이는 사방 한 자(30cm)면 충분하다. 봉분은 필요 없으며, 물과 바람이 들어가지 않도록 유의하면 된다. 양지바른 땅을 선택하여 깊이 묻은 뒤 다시 흙을 잘 채워주면 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만들 수도 있지만, 공원묘지처럼 납골묘지를 집단적으로 조성할 수도 있다. 이 경우 면적을 넓게 차지하지 않으므로 비용 절감 효과도 있다. 그리고 표지는 돌을 사용하지 말고 나무로 만든다. 그래야 나중에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간다.
이 방식대로 하면 세월이 흘러 유해는 하나도 남지 않게 되고 그것을 완전한 ‘환원’이라 한다. 기술적으로 그 위에 나무가 자라고 풀이 나게 해서 자연화시키면 거의 완벽하게 자연으로 복원되는 것이다.
최근 들어서는 산골(散骨)이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본래 산골이란 땅이나 산, 물에 유해를 뿌리는 것인데 새롭게 얘기되는 산골은 필자가 위에서 제시한 납골묘지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수목장묘(樹木葬墓)와 같은 것이다.
단 유해를 묻는 곳은 수분이 많으면 안 된다. 앞으로 유해를 묻을 수 있는 수분기준과 마사토를 활용한 수분방지 방안 등이 좀더 과학적으로 논의될 필요가 있다.
새롭게 논의되기 시작하는 산골방식이 단지 유해를 땅이나 물에 뿌리는 것이 아니라 땅에 묻는 것이라면, 예전의 납골당이나 납골탑과 같은 유해 처리방식보다는 바람직한 측면이 많다.
그러나 결론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장례문화를 바라보는 기본시각, 죽음의 문화에 대한 통찰을 담아 화장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근본정신에 입각하지 않고 단지 눈앞의 해결책이나 실용적 측면만을 중시한다면, 그 또한 호응을 얻지 못할 것이며 틀림없이 왜곡될 것이다.
뼛가루도 남기지 말라
필자가 제시한 ‘납골묘지’나 새로운 방식의 ‘산골’도 과도기적인 방식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흔히 망인(亡人)과의 관계를 생각하여 그 흔적을 남기고 싶어한다. 따라서 화장한 뒤 뼛가루를 보관하여 기념일 등에 찾아가 망인을 기억하고자 한다. 그에 따라 지금의 납골방식이 나왔다. 그러나 긴 역사의 흐름으로 보았을 때 화장을 하면서 유해를 남기고자 하는 것은 과도기적 현상일 뿐이다.
우리가 죽음의 깊은 의미를 깨닫는다면 모든 것을 본래의 원소로 환원시키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매장한다면 일정기간 묘지가 남겠지만, 어차피 화장을 선택할 바에야 무슨 애착이 남는다고 뼛가루를 남기겠는가. 따라서 앞으로 시신을 화장할 때 100% 완전연소법을 개발해야 한다. 그것이 최적의 대안이라고 본다.
현재는 기술수준도 그렇고 또한 유해를 남기고자 하기 때문에 100% 완전연소시키지 않는다. 따라서 화장 후 유해가 남는데, 그것은 산화물질의 형태다. 이것을 마른 땅에 넣어 서서히 본래의 원소로 환원되는 방식을 제시한 것이, 앞에서 언급한 ‘납골묘지’다. 현재의 납골당이나 납골탑 형식에선 유해는 절대로 환원되지 못하며, 그저 산화물질의 형태로 무한정 돌 안에서 썩는다.
그런데 어차피 화장을 선택했다면 애초에 산화물질인 유해조차 남길 이유가 없지 않은가. 고인의 흔적은 사진이나 기타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면 될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전세계의 화장문화 개선에 기여할 수도 있다.
아름다운 환원이 있어야 아름다운 삶이 있다. 아름다운 환원은 올바른 장례문화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 장례문화가 서야 죽음의 문화가 바로 선다. 죽음의 문화가 서야 삶의 문화도 제대로 세울 수 있다. 이처럼 삶과 죽음의 문화가 균형을 이룬다면, 인류의 문화는 건강하고 아름답게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장례문화논쟁은 시체에 대한 처리방식 논의가 아니라, 새 문화 창조에 대한 모색과정이다.
만약 삶의 문화와 죽음의 문화를 같이 들여다보지 않고 오직 삶의 문화만을 중시한다면, 우리 사회는 결국 천박한 반(反)문화에 빠질 것이다. 그러한 사고에서는 죽음이란 빨리 잊어버려야 하는 것으로 정리된다. 부모를 포함해서 망자의 죽음은 다른 그럴듯한 이유가 덧붙여지기는 하겠지만, 결국 쓰레기 처리하듯 빨리 처리해서 잊고 싶은 것이다.
현재의 화장추진운동은 그러한 경향을 부추기고 조장하며 합리화하는 측면이 있다. 필자가 작금의 화장장례운동을 비판적인 관점에서 고찰한 것은 이 때문이다. 매장과 화장의 본질적 의미와 그 문화, 환경적 전망을 다시 생각해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