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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를 빛낸 스타들⑧

‘넘볼 수 없는 그녀’ 유지인

“물 흐르듯 따라가야 하는데 버리지 못한 게 너무 많아요”

  • 글: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

‘넘볼 수 없는 그녀’ 유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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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0~80년대를 풍미한 소위 ‘신 트로이카’의 세 여배우 유지인, 정윤희, 장미희. 그 가운데 유지인은 최지희, 남정임, 윤정희 같은 서구적인 미인 여배우의 계보를 이으면서도 지적이고 부유한 중산층의 안온함과 양지의 느낌을 가지고 있는 여배우였다. 미스코리아 출신도 아니고 스캔들에 시달린 적도 없었으며 흉흉한 과거를 멍에처럼 지고 다니는 일도 없는 환한 미소의 소유자였다.
‘넘볼 수 없는 그녀’ 유지인
누군가에게 의존하거나 남자에게 매달리거나 불행한 일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을 것 같은 유지인의 매력이 1970년대 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감히 넘볼 수 없을 것 같은 상류층 여성이 주는 신비로움과 막연한 동경심을 피부로 느끼게 하는 질감 때문이었다. 환하고 여유로운 고급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동시대 관객에게 어떤 적대감이나 위협감을 줄 만큼 차갑거나 되바라지지는 않은 그런 느낌. ‘상노’ ‘아내’ ‘결혼 행진곡’ ‘보통 사람들’ 같은 TV드라마에서 그녀는 천편일률적으로 결혼을 통해 행복을 보장받는 여성을 연기했는데, 이들 드라마는 대부분 유지인이라는 브랜드를 일상적인 이미지로 만드는 역할을 했다. 김화가 쓴 ‘한국영화전사’는 유지인에 대해 ‘다듬어진 세련미와 소박한 순진함, 성숙함과 앳됨을 동시에 발산하는 복잡한 캐릭터’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의 유지인은 달랐다. ‘1970년대 한국 여배우 스타덤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은 이호걸은 유지인에 대해 ‘당시 한국영화계에서 여배우에 대한 가학적 쾌락이 거의 허용되지 않았던 경우’라고 정의한다. 남성편력을 통해 인생유전을 거듭하는 부박한 여성들을 즐겨 그렸던 당시 감독들이 유독 유지인에게만은 그럴 수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심지어 그녀가 ‘26×365=0’에서 맡았던 역할, 즉 오빠의 성 불구, 동생의 가출, 어머니의 죽음을 모두 경험하며 호스티스가 된 여인도 원래는 부유한 여대생이었다. 또 ‘가시를 삼킨 장미’에서는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과 결혼을 거부하는 페미니스트의 면모마저 보여준다.

유지인의 배우론을 준비하면서 놀랐던 것은, 그녀가 사람들이 생각한 것과 달리 ‘정형미인’의 고양이괴물부터 ‘심봤다’의 소박한 아낙네, ‘피막’의 무녀, ‘바람불어 좋은 날’의 오만한 부잣집 딸 명희까지 무척이나 다양한 역할을 소화했다는 사실이었다. 유지인은 공포물과 호스티스물, 멜로와 전쟁영화를 넘나들며 여러 감독과 일했다. 어느 한 사람의 페르소나나 고정된 이미지로 남기를 거부했던 자립심과 스스로에 대한 보호본능은, 그녀로 하여금 틀을 깨고 싶다는 욕망과 ‘유지인답다’는 세간의 평가 사이에서 끊임없이 작두춤을 추게 했던 것 같다.

상상과는 다른 배우

그런 의미에서, 죽어가는 아이 앞에서 절규하는 ‘심봤다’의 무지렁이 아낙네나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우는 ‘피막’의 무녀 역할 등 그녀가 대표작에서 맡았던 캐릭터들이 매우 소박하고 가족주의적이며 아무런 자본이나 학력이 없는 ‘자연과 가까운 여성’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속 깊이 내재한 ‘질박하고 원초적인 본능을 지닌 여성’을 연기할 때 가장 자연스럽고 농밀한 연기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2004년 초입에 필자는 근 16년 만에 본격적으로 활동을 재개한 유지인을 만났다. 두 아이의 어머니며 이제는 홀로서기를 시작한 그녀는 놀랍게도 필자가 만나본 어떤 여배우보다도 유머 감각이 넘쳤고 자신만만함을 지니고 있는 당찬 여자다. 솔직히 고백건대 유지인은 누구보다도 상상했던 이미지와 실제 모습이 차이가 나는 여배우였다. 순댓국과 육개장을 좋아한다는 이 여배우는 자신에 대해, 마음 깊숙이는 연약하고 겁이 많은 측면이 있지만 그런 모습을 보이기 싫어 더욱더 강하고 당찬 모습을 보여주었노라고 회고한다.

필자는 인터뷰를 마치고야 비로소 1970년대가 유지인이라는 여배우에게만은 ‘시대가 낳은 가학적 욕망’을 휘두르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사생활에 대한 노출 혹은 그것을 통해 누군가가 상처받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는 여배우. 한 사람의 페르소나로 정착하기보다는 다양한 감독들과 협업하면서 차라리 영화계의 아웃사이더로 남고 싶었다는 이 여자. 내면 깊숙이 소박한 단순함과 짱짱한 자존심을 함께 갖고 있는 유지인의 성정은 당시의 폭압적 욕망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는 꿋꿋한 방패막이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인터뷰는 바로 그 점을 조명하고 싶었다. 이제는 대학 강단에 서서 여성으로서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사는 장미희, 가족의 그늘에 자신을 묻으며 전통적인 주부의 역할을 고수하고 있는 정윤희, 그리고 한때는 대한민국의 가부장 질서에 편입했으나 그것을 거부하고 다시 튕겨나온 유지인이라는 배우. 2000년대의 여성들에게 무언가 상징적 의미를 던지는 듯한 1970, 80년대 트로이카 여배우 중 한 사람의 삶과 영화를 통해 그녀가 행복할 수밖에 없는 이유, 동시에 그녀가 불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듣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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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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