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한국영화를 빛낸 스타들⑪

1980년대 섹스심벌 이대근

“에로 배우? 내가 찍은 건 의미있는 예술영화”

  • 글: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

1980년대 섹스심벌 이대근

2/8
-서라벌예대를 나와서 KBS 7기 탤런트로 연기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영화는 어떻게 데뷔하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37년쯤 됐나요. 그러니까 1968년에 찍은 김기영 감독의 ‘화녀’가 데뷔작이죠. 그 다음 작품이 이상구 감독의 ‘사나이 현주소’. 그 때까지는 비중 없는 조연이었고, 세 번째 작인 최무룡 감독의 ‘제3지대’에서 정식으로 출연했어요. 그때는 탤런트는 배우가 될 수 없었어요. 황해 선생님이 추천을 해줬으니까 됐죠. 주인공으로 발탁된 첫 영화는 신상옥 감독이 제작한 ‘김두한’ 1편이었고요. 김두한 시리즈 다섯 편에 주인공으로 캐스팅된 거였죠.

그 때 배우 출연료가 보통 1만8000원이었죠. 신성일씨 혼자서 45만원을 받았는데 내가 40만원을 달라고 했어요. ‘연기 공부 많이 하고 왔으니까 주슈…’ 그랬죠. 신상옥 감독이 ‘저놈 봐라’는 표정으로 40만원을 주셨어요. 그렇게 김두환 시리즈 세 편 찍어서 집도 샀어요.”

-연기를 하기로 마음먹게 된 계기가 있었을 텐데요.

“우리 어릴 때는 오락거리가 악극하고 영화밖에 없었잖아요. 내가 변사에 홀딱 빠졌어요. 배우들은 또 좀 멋있어요, 황해, 장동익, 이예춘, 최봉…. ‘아리랑’ ‘상하이의 밤’ 같은 영화를 보러 가면 막간에 가수들이 나와서 노래도 부르고 그랬어요. 그게 그렇게 좋아보여서 나도 배우가 됐으면 싶었죠.



원래는 운동을 하려했어요. 어릴 때는 기계체조를 했고 좀 자라서는 당수(唐手)를 했죠. 나중에는 아마추어 복싱하고 레슬링도 했고. 부모님이나 사범들도 운동 열심히 하라고 권했는데, 악극을 보며 배우가 하고 싶어지는 바람에 결국 영화과에 들어간 거죠. 그래도 운동을 잘했던 게 나중에 김두한 시리즈나 시라소니 시리즈 같은 액션물을 하는 데 도움이 됐죠.”

영화, 연극, TV의 차이

-기록에는 연극무대에 선 적도 있다고 돼있습니다.

“원래 학교를 졸업하면 연극부터 출발했잖아요. 연극도 꽤 잘했어요. 극단 ‘민예’의 ‘고려인 떡쇠’, ‘성좌’의 ‘노틀담의 꼽추’ 같은 작품은 모두 내가 초연이었어요. 닷새동안 공연을 하는데 국립극장이 터져나갈 정도로 인기가 좋았어요. 흥행발이 있어서 연극도 많이 했죠. 오죽하면 ‘신협’이나 ‘광장’ 등 다른 극단에서 나를 끌어가려고 애를 썼겠어요.

장민호 선생님이 국립극장에서 단원들한테 ‘이대근만한 발성 없다’고 하셨죠. 국립극장이 명동에 있을 땐데 무대에 서기가 그렇게 어려웠거든. 그때 나랑 최불암씨랑 몇몇이 계획을 하나 세웠는데, 어떻게든 우리 손으로 극장 하나 지어보겠다는 것이었죠. 나중에 그 꿈을 이룰 만한 때가 되니까 뿔뿔이 헤어져버렸더라고. 지금 와서 생각하면 무척 아쉬워요.”

-김기영 감독의 ‘화녀’에 출연할 당시의 영화계 분위기나 환경이 궁금한데요.

“우리 학창시절에는 영화를 제대로 공부할 수가 없었어요. ‘제7의 예술’ 운운하며 강의는 더러 많이 들었지만, 학교에서 볼 수 있는 영화는 16mm 한두 편뿐이었죠. 선생님도 박종화 교수 한 분뿐이었고. 영화를 실질적으로 접할 기회가 드물었어요. 연극과는 많이 달랐죠.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연극을 주로 하고 TV에 간혹 출연했는데, TV는 영화는 또 전혀 달랐어요. 어쨌든 영화에는 상영시간 1시간45분이라는 약속이 있단 말이에요. 텔레비전에서 하던 연기를 영화 찍을 때 그대로 하니까, 감독이 ‘야, 관객이 너를 그렇게 많이 어떻게 쳐다보냐. 그 연기를 3분의 1로 줄여’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그게 굉장히 어려웠어요. 항상 그 작품에 빠져 있지 않으면 안 돼요. 늘 스스로가 영화 속 인물인 것처럼 최면을 걸어야 하고, 그 최면 속에서 살지 않으면 연기를 못해. 그러니까 세상도 가정도 가까운 친구도 잘 모르게 되죠.

영화와 연극의 차이는 이런 거예요. 가령 대본에 주먹으로 사람을 때리는 장면이 있으면, 나는 연극식으로 생각해서 직접 상대의 눈앞까지 다가가서 때려요. 나는 그게 맞다고 봤지요. 그런데 영화에서는 조금 멀리 떨어져서 때리는 시늉만 해도 카메라 각도에 따라서 얼마든지 화면을 만들 수 있는 거에요. 감독이 ‘임마, 이렇게 때리면 시늉만 하면 되지 왜 자꾸 가까이 와!’ 하고 아무리 혼내도 쉽게 고쳐지지 않았어요. 감독이 다시 하라고 하면 100번이라도 해야잖아요. 감독은 첫 번째 관객이니까.

‘화녀’에서 내 역할은 범인이었어요. 세월이 하도 많이 흘러 줄거리가 다 생각나지 않습니다만 내가 주인공 집의 운전수였는데 나쁜 짓을 하는 역할이었어요. 그 무렵 내가 TV 연속극 ‘수사반장’에서 범인 역할을 많이 했거든요. 김기영 감독은 참 대단하신 분이었죠. 하루는 감독님이 나를 보고 영화에 왜 클로즈업이 있는 지 아냐고 묻더라고. 그리고 우물쭈물하는 내게 ‘영화관 맨 뒤에서 보는 사람도 생각해야 된다. 연기를 할 때도 적절한 과장이 있어야 되는 거다’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배운 게 많았어요.”

2/8
글: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
연재

한국영화를 빛낸 스타들

더보기
목록 닫기

1980년대 섹스심벌 이대근

댓글 창 닫기

2023/06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