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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⑪

조선 최초 스웨덴 경제학사 최영숙 애사(哀史)

명예·사랑 버리고 조국 택한 女인텔리, 고국에 버림받고 가난으로 죽다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조선 최초 스웨덴 경제학사 최영숙 애사(哀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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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생긴 ‘혼혈 사생아’

최영숙은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곧장 여성운동, 노동운동에 투신할 수 없었다. 대신 기자가 되어서 집안도 돌보고, 조선 실정도 알아보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경제학을 제대로 공부했고, 영어·독일어·스웨덴어·중국어·일본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하고, 국제감각까지 갖춘 최영숙은 인재가 부족한 조선에 보석 같은 존재였다. 어떤 직장이고 최영숙이 손을 내밀면 잡아줘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어느 직장도 최영숙을 받아주지 않았다.

“조선사회는 아직 인텔리 여성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외국어 교수 노릇을 하려고 애썼으나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서울 어느 학교에 교사로 취직하려다가 문부성에서 교원면허를 내주지 않아 그것도 불가능했습니다. 나중에 어떤 신문사의 여기자로 입사하려고 운동했으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마지막에 할 수 없이 낙원동에 있는 여자소비조합을 인계해서 사람의 왕래가 많은 서대문 밖 교남동 큰 거리에 자그마한 점포를 빌려서 장사를 벌였습니다. 그래서 배추, 감자, 마른미역줄기, 미나리, 콩나물을 만지는 것이 스톡홀름대학 경제학사 최영숙 양의 일상직업이 되었답니다. 그런데 자본이 없는 일개 구멍가게로 어떻게 한 집안 생활비가 나오리까. 오직 최영숙 양은 살을 깎는 듯한 경제적 곤란을 당하고 지냈을 뿐입니다.”(‘서전 경제학사 최영숙 양 일대기’, ‘삼천리’, 1932년 5월)

핍박받는 조선의 노동자와 여성을 위해 일하겠다는 일념으로 스웨덴에서 5년 동안이나 공부하고 돌아온 최영숙에게 고국이 허락한 일자리는 고작 ‘콩나물장수’였다. 그나마 오래 할 수도 없었다. 귀국한 지 채 5개월도 지나지 않은 1932년 4월, 임신 중인 최영숙은 태아에 탈이 생겨 동대문부인병원에 입원했다. 인도청년 ‘미스터 로(Mr. Row)’와의 관계가 드러난 것은 그때였다. 산모의 생명이라도 구하고자 낙태수술을 받았지만 병세는 나빠져만 갔다. 마지막 희망을 품고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계속했지만 악화되는 병세를 돌이킬 수 없었다. 4월23일 오전 11시, 최영숙은 홍파동 자택에서 27세를 일기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스웨덴에서 돌아온 최영숙이 조선을 위해 일할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을 때, 그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최영숙이 홍제원 화장장에서 한줌의 흙으로 돌아간 이후에야, 사람들은 그에게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그에게 쏟아진 관심은 뜻을 펼치지 못하고 요절한 인텔리 여성을 향한 안타까움의 표현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단지, 스웨덴 유학까지 마친 인텔리 여성이 무슨 까닭으로 인도에서 ‘혼혈 사생아’를 임신하고 돌아왔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마르크스 걸’의 멀고 먼 유학길

최영숙은 1906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다. 부친 최창엽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일찍이 농사를 정리하고 포목상을 차려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최영숙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비상하고 총명했다. 일곱 살에 여주보통학교에 입학해 열한 살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당시 보통학교 수학연한은 4년이었다. 중등학교는 14세 이상만 입학할 수 있었기 때문에 3년을 집에서 보냈다. 14세 되던 해는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이었다. 최영숙의 부모는 여자가 보통학교를 졸업했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딸의 상급학교 진학을 반대했다. 최영숙은 매일 예배당에 나가 백일기도를 드리며 완고한 부모를 설득했다. 가까스로 부모의 허락을 얻은 최영숙은 상경하여 이화학당에 입학했다.

3·1운동 직후 이화학당 분위기는 몹시 어수선했다. 학교는 입학식만 치르고 휴교에 들어갔다. 교사와 학생 다수가 투옥됐고, 최영숙의 1년 선배 유관순은 옥중에서 사망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학업을 시작한 최영숙은 일찍부터 조선이 처한 현실에 눈떴다. 1923년 이화학당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최영숙은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을 향해 유학길에 올랐다.

난징(南京)으로 건너간 최영숙은 명덕(明德)여학교에 들어가 중국어를 익혔다. 중국어를 배운 지 단 몇 달 만에 유창하게 구사할 정도로 어학능력이 탁월했다. 이듬해 난징 회문(?文)여학교에 편입했다. 최영숙은 회문여학교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학생이었다. 영어, 독일어 능력은 다른 학생이 감히 넘보지 못할 수준이었고, 성악과 피아노 실력이 뛰어났다.

회문여학교 재학시절 최영숙은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해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가 됐다. 공부하는 틈틈이 상하이로 가서 중국에 망명 중이던 여러 인사와 교유했다. 당시 최영숙에게 큰 감화를 준 인물은 도산 안창호였다. 총명하고 민족정신이 투철한 최영숙을 안창호도 남달리 아꼈다.

회문여학교를 졸업한 최영숙은 스웨덴 유학을 결심했다. 하고많은 나라 중에 유독 스웨덴으로 유학 가고자 한 이유는 그곳에서 엘렌 케이(Ellen Key·1849~1926)를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엘렌 케이는 스웨덴 출신 여성운동가이자 교육운동가였다. 활동 무대인 서구에서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지만, 조선과 일본, 중국의 여성운동에는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910~20년대 동아시아의 자유연애와 여성운동은 엘렌 케이의 사상에 뿌리를 뒀다. 이광수가 소설 ‘무정’(1917)의 주인공 이형식의 박식함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타고르의 이름을 알고 엘렌 케이 여사의 전기를 보았다”고 기술할 정도로 엘렌 케이는 동아시아 지식인 사회의 저명인사였다. 엘렌 케이의 저술 ‘아동의 세기’(1901), ‘연애와 결혼’(1911), ‘연애와 윤리’(1912)는 신여성의 필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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