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1월호

모순어법(Oxymoron)

  • 저자 이윤재 / 편집기획·진행 구미화

    입력2006-11-16 10: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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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립으로 빚어낸 역설의 미학인 모순어법(Oxymoron)은 활발한 두뇌활동의 결과물이다.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단어를 결합시켜 더 높은 진리의 세계로 안내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순어법은 사고의 폭을 한없이 넓혀준다. ‘미운 정’ ‘부부는 원수간에 만나고 자식은 부모의 빚쟁이’ 등은 우리말의 대표적인 모순어법이다.

    영영(英英)사전에서는 Oxymoron을 ‘a rhetorical figure of speech in which contradictory terms are used together, often for emphasis or effect’(상반된 어휘가, 때로는 강조와 효과를 위하여 함께 사용된 수사법)라고 설명한다.

    oxymoron이라는 단어는 1640년에 처음 영어로 표기되었는데,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 oxy는 ‘날카로운(sharp)’ 혹은 ‘예리한(keen)’을 의미하고 moron은 ‘저능아(fool)’를 의미한다. 결국 Oxymoron은 sharp fool(똑똑한 바보)이라는 뜻이고, 문자 자체에 모순이 드러나 있다.

    모순어법은 겉으로 보기에는 부조리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심오한 진실을 담고 있다. Close your eyes, and you will see. (눈을 감아라. 그러면 보일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주베르(Joseph Joubert)의 말이다. 논리에 어긋나 보이는 양면가치(ambivalence)를 활용하면 당신도 ‘언어술사’가 될 수 있다.

    맛과 멋을 극대화한 수사법



    우리는 1970∼80년대를 ‘암울했던 시절’이라고 말한다. 이때의 시대상황과 맞물려 크게 유행한 노래가 사이먼 앤드 가펑클(Simon · Garfunkel)의 ‘The Sound of Silence(침묵의 소리)’다. 이들의 미성(美聲)과 화음은 어두운 뉘앙스를 풍기는 시적인 노랫말과 어우러져 전설이 됐다. 한국에서는 침묵이 깊어질수록 그 반동역학이 강해져 마침내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났다. 지난해 TV에서 방영된 한 콘서트에서 사회자가 재미있는 얘기를 했다.

    “학창시절 소풍을 갔는데 노래자랑이 벌어졌다. 한 학생이 나와서 약 30초간 가만히 있었다. 사회자가 ‘왜 노래부르지 않느냐’고 묻자 그 학생은 ‘The Sound of Silence(침묵의 소리)를 노래했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이 학생은 인기상을 받았다.” 다음은 ‘The Sound of Silence’의 노랫말이다.

    And in the naked light I saw ten thousand people, maybe more,
    People talking without speaking,
    People hearing without listening,
    People writing songs that voices never share.
    And no one dare disturb the sound of silence.

    그 환한 불빛 속에서 나는 수많은 사람을 보았지,
    소리 내어 말하지 않지만 속마음을 말하는 사람들을,
    듣는 척하지만 건성으로 듣는 사람들을,
    소리 내어 부르지 않는 노랫말을 짓는 사람들을.
    아무도 감히 침묵의 소리를 막지 못하네.


    “Fools” said I, “You do not know silence like a cancer grows.
    Hear my words that I might teach you.
    Take my arms that I might reach you.”
    But my words like silent raindrops fell,
    And echoed in the wells of silence.

    나는 “바보들, 암(癌)처럼 침묵이 자라고 있음을 당신들은 알지 못하는군요.
    당신들을 깨우치는 내 말을 들으세요.
    당신들에게 내미는 내 손을 잡으세요”라고 말했지.
    하지만 이러한 나의 말은 소리 없는 빗방울처럼 떨어져,
    침묵의 샘에서 메아리쳤지.


    ‘The Sound of Silence’, 즉 ‘침묵의 소리’는 제목부터 모순어법이다. 노랫말 군데군데에도 모순어법이 드러난다.

    이밖에 잘 알려진 침묵에 관련된 수사로는 thunderous silence(천둥과 같은 침묵), a silent demonstration(침묵시위), Silence is gold, speech is silver(침묵은 금이요, 웅변은 은이다) 등이 있다.

    팝송 ‘I believe I can fly’에도 모순어법을 동원한 소절이 있다.

    I believe I can fly.See I was on the verge of breaking down.
    Sometimes silence can seem so loud.
    There are miracles in life I must achieve.
    But first I know it starts inside of me.

    나는 내가 날 수 있다는 걸 믿어요.
    내가 막 무너져내리려 했던 순간을 보세요.
    어떤 때엔 침묵조차 너무 큰 소리로 느껴져요.
    인생에는 내가 꼭 이루어야만 하는 기적들이 있어요.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내 안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걸 난 알아요.


    모순어법은 대립적인 사실이나 상반된 생각을 맞붙여놓음으로써 상황의 특이성을 강조하고, 맛과 멋을 극대화하는 수사법이다. 시인 고은(高銀)은 백두산 천지의 장관(壯觀)을 보고 “위대한 절망”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창조할 수 없는 자연의 위대함을 인간의 왜소(矮小)함에 견주어 더욱 강조한 모순어법이다.

    1979년 10월26일 밤 박정희 대통령이 급서(急逝)한 후 신군부세력은 집권 시나리오를 연출하는 과정에서 전략적으로 혼란을 야기했다. 혼란을 원했던 측에서 보면 당시의 상황은 clear confusion(깨끗한 혼란)이자, fine mess(멋진 혼란)이었다. 그때의 혼란은 accidentally on purpose(우연을 가장하여 고의적으로) 야기된 것이었다.

    일반화한 모순어법

    이미 격언이 된 의미심장한 모순어법도 많다. 영국의 시인 테니슨(Tennyson)의 His honour rooted in dishonour stood, and faith unfaithful kept him falsely true (그의 ‘영예’는 ‘불명예’에 뿌리박은 채 서 있고, ‘불충한 충성’은 그를 ‘거짓으로 진실’하게 하였소)나, 스코틀랜드의 시인 제임스 톰슨(James Thomson)의 Loveliness is, when unadorned, adorned the most (아름다움은 ‘장식하지 않을 때’ 가장 아름답게 장식된다), 존 밀턴(John Milton)이 ‘실락원(Paradise Lost)’에서 쓴 Out of good still to find means of evil (악의 수단은 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등이 그 예다.

    생활철학적인 요소가 깃들인 모순어법도 있다. less is more(덜 받는 것이 득이다), agree to disagree(서로 견해 차이를 인정해 다투지 말라), fall back in order to leap the better(이보 전진을 위하여 일보 후퇴하라) 등이다. More haste, less speed(급할수록 천천히)와 Make haste slowly(천천히 서둘러라)는 Haste makes waste(서두르면 일을 그르친다) 는 의미를 모순어법으로 표현한 경구다.

    시대가 만들어낸 표현

    시대가 변하면서 예전에는 볼 수 없던 상황이 생겨나기도 한다. We are living apart together(우리는 별거하지만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란 문장에서는 live apart(별거하다)와 live together(함께 살다)가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다. 이런 상황은 커플의 애정에 이상이 없다 해도 사회적으로 복잡다단한 요즘 흔히 있을 수 있는 현실이다. friendly divorce(사이 좋은 이혼)라는 것도 시대의 산물이다. home office는 원래 ‘회사의 본사’나 ‘본점’을 의미했으나 오늘날에는 ‘재택근무 사무실’을 말하고, home school은 ‘학교에 보내지 않고 부모가 가르치는 가정 학교’를 말한다.

    일상사에서 사용되는 모순어법의 예는 실로 많다. faultily faultless(불완전하지만 결점이 없는), hopeful pessimist(가망성 있는 염세주의자), crowded solitude(군중 속의 고독), cruel kindness(지독한 친절), open secret(공공연한 비밀), current history(당대의 역사), genuine fake(진짜 가짜), laborious idleness(고된 나태), full-time hobby(직업 같은 취미), creative destruction(창조적 파괴), cold hotdog(식어버린 핫도그), roughly account(개략적 정산), accurate estimate(정확한 견적), detailed summary(자세한 요약), guest host(주인 행세하는 손님), horribly good(지독하게 좋은) 등이 모두 모순어법이다.

    다음 대화를 보자.

    A: Soju, please! (소주 주세요!)

    B: What would you like? (무슨 소주를 원하십니까?)

    A: Any kind. Soju is soju. Same difference. (아무거나 주세요. 그게 그거지.)

    ‘같으면서 다르다’는 의미의 Same difference는 모순어법이다. 일상생활에선 ‘그게 그거지’란 의미로 많이 쓰인다. 문장 안에 들어갈 때엔 same앞에 the를 붙인다. It’s not the same difference. (그건 다릅니다.)

    멋쟁이 문필가 맥아더 장군

    우리나라와 인연이 깊은 미국 육군 원수 맥아더가 고인(故人)이 된 지 40년이 넘었다. 그는 모순어법을 적절히 배합해 시(詩)와 진배없는 감동적인 기도문을 남겼다.

    Build me a son, O Lord;
    who will be strong enough to know when he is weak,
    and brave enough to face himself when he is afraid,
    one who will be proud and unbending in honest defeat,
    and humble and gentle in victory.

    오 주여, 이러한 아들이 되게 하여주옵소서.
    ‘약할’ 때 ‘용감하게’ 자신을 지키고,
    ‘두려움’에 ‘대담’하게 맞서며,
    정직한 ‘패배’에 ‘당당하고 꿋꿋한’,
    ‘승리’에 ‘겸손’하고 ‘온순한’ 자식을 저에게 주옵소서.

    Lead him, I pray, not in the path of ease and comfort,
    but under the stress and spur of difficulties and challenge.
    Here let him learn compassion for those who fail.

    바라옵건대 그를 평탄하고 안이한 길이 아니라,
    고난과 도전의 긴장과 자극 속으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패자를 관용할 줄 알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Build me
    a son whose heart will be clear, whose goal will be high;
    a son who will master himself before he seeks to master other men;
    one who will learn to laugh, yet never forget how to weep;
    one who will reach into the future, yet never forget the past.

    이러한 아들이 되게 하여주옵소서
    마음이 깨끗한, 목표가 드높은 아들이;
    타인을 정복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정복할 줄 아는 아들이;
    웃음도 알되 울음도 아는 아들이;
    미래로 나아가되 과거를 잊지 않는 아들이.

    And I pray enough of a sense of humor,
    so that he may always be serious,
    yet never take himself too seriously.

    그리고 진지하지만
    너무나 진지하게 자신을 얽어매지 않도록,
    넉넉한 유머감각이 있는 아들이 되도록 하여주옵소서.

    Give him humility,
    so that he may always remember
    the simplicity of true greatness,
    the open mind of true wisdom,
    and the meekness of true strength.

    아들에게 겸허한 마음을 갖게 하시어,
    참된 위대함은 소박함에 있음을,
    참된 지혜는 열린 마음에 있음을,
    참된 힘은 온유함에 있음을,
    항상 명심하도록 하여주시옵소서.


    모순어법(Oxymoron)

    외모 뿐만 아니라 문장력도 뛰어났던 맥아더 장군.

    맥아더는 알려진 대로 선글라스를 끼고 옥수수 파이프를 입에 문 모습이 그야말로 포토제닉했던, 배우 뺨치는 군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렇듯 글에 멋을 낼 줄 아는 문필가였다. 그런데 맥아더의 인간됨을 깊이 들여다보면 이 기도문은 곧 자신에 대한 성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엄청난 육체적·정신적 에너지와 철저한 분석능력의 소유자였다. 위기에 처해도 대담하고 냉정하며 침착하면서도 자신만만했다. 그는 부하들의 충성심을 유발하는 카리스마를 가진 지휘자였다.

    그러나 동시에 오만함과 자존심, 독단과 과시 때문에 비난을 받았다. 6·25전쟁 당시 트루먼 대통령은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와 회담하기 위해 맥아더 사령부가 있는 남태평양의 웨이크 섬(Wake Island)을 방문한다. 맥아더는 고의로 대통령을 영접하러 비행장에 나가지 않았다. 웨스트포인트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맥아더는 고졸 농부 출신인 트루먼에게 우월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을 태운 비행기가 비행장 상공을 수차례 선회했다. 트루먼의 자존심과 맥아더의 오만함의 대결이었다.

    2006년 8월11일 헨리 하이드(Henry Hyde) 미국하원 국제관계위원회(The U.S. House International Relations Committee) 위원장은 인천 자유공원을 방문해 맥아더 장군 동상에 헌화하며 이렇게 말했다. “Make new friends, but keep the old, one is silver and the other is gold (새 친구를 사귀어라. 그렇지만 옛 친구를 지켜라. 새 친구는 은이요, 옛 친구는 금이다).” 즉 맥아더 장군이 금이라는 얘기다.

    모순어법의 진수를 보여준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는 설화(說話)시 ‘Venus and Adonis’에서 모순어법을 선보였다.

    And being set, I’ll smother thee with kisses
    And yet not cloy your lips with loathed satiety
    But rather famish them amid their plenty
    Making them red and pale with fresh variety
    Ten kisses short as one, one long as twenty
    A summer’s day will seem an hour but short
    Being wasted in such time-beguiling sport

    앉아서, 키스로 그대를 숨 막히게 하리라
    그러나 지겹도록 하여 입술을 물리게 하지는 않으리
    오히려 풍요로움 속에 갈증을 느껴
    싱싱한 다채로움 속에 입술이 빨갛게도 하얗게도 되게 하리라
    열 번의 키스는 한 번같이 짧고, 한 번은 스무 번같이 길리라
    시간가는 줄 모르게 하는 그런 유희 속에서 보내면
    긴 여름날도 한 시간같이 짧으리


    모순어법(Oxymoron)

    셰익스피어는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모순어법으로 비극적인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관객은 오늘날의 관객보다 무대 위에서 주인공이 말하는 대사에 훨씬 민감하게 반응했다. 조명이나 무대 장치 등 연출의 기술적인 분야가 발달하지 않아 관객은 극작가가 묘사하는 말, 특히 수사적 표현을 듣고서 무대상황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비유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표현은 더 뛰어난 수사로 여겨졌다. 그래서 당대의 극을 ‘수사의 극(The Play of Rhetoric)’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프랑스의 작가요 사상가인 볼테르는 32세 때인 1726년 영국으로 망명, 3년 가까이 그곳에 살면서 문학에서도 프랑스가 영국으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특히 셰익스피어 연극이 그를 압도했고, 등장인물의 수사적 표현에서 흘러나오는 활력과 줄거리의 극적인 힘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The Magician of Language(언어의 마술사)’ 셰익스피어는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절묘한 모순어법을 보여준다. 이것은 작품 전체에 놀랄 만한 향기를 불어넣는다. 이탈리아 북부의 베로나(Verona)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서 캐플릿(Capulet)이 딸 줄리엣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전해 듣고 내뱉는 탄식(4막 5절 86∼90행)을 보자. 모순어법이 극의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절묘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Our instruments to melancholy bells,
    Our wedding cheer to a sad burial feast,
    Our solemn hymns to sullen dirges change,
    Our bridal flowers serve for a buried corpse,
    And all things change them to the contrary.

    축하음악은 슬픈 종소리로,
    혼례식 축배는 슬픈 장례식 음식으로,
    장엄한 찬미가는 음울한 장송곡으로,
    혼례식의 꽃은 매장되는 시체의 장식용으로,
    이렇게 모든 것이 정반대로 바뀌는구나.


    그는 또 1막 1장 175∼181행에서 사랑과 미움이 공존하는 모순적 세계를 모순어법을 빌려 다양하게 표현한다. 하나의 특정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비유를 열거하며 주제를 두드러지게 부각한다.

    Here’s much to do with hate, but more with love.
    Why, then, O brawling love, O loving hate,
    O anything of nothing first create,
    O heavy lightness, serious vanity,
    Misshapen chaos of well-seeming forms,
    Feather of lead, bright smoke, cold fire, sick health,
    Still-waking sleep, that is not what it is!

    독한 미움이여, 그보다 더 진한 사랑이여.
    그러면, 오 싸우는 사랑이여, 사랑하는 미움이여,
    오 태초의 무(無)에서 창조한 유(有)여,
    오 무거운 가벼움이여, 진실한 허영이여,
    보기 좋은 것 같지만 보기 흉한 혼돈이여!
    납으로 된 나래, 밝은 연기, 차디찬 불, 병든 건강이여,
    늘 눈떠 있는 잠이여,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존재!


    쉬어갑시다!

    ‘우둔한 천재’ 아이작 뉴턴


    불세출의 천재 뉴턴(Isaac Newton)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뉴턴이 나이가 들어 어느 날 난로 앞에 앉아 있었는데, 너무 뜨거워 하인을 불러 벌겋게 달구어진 석탄을 꺼내도록 했다. 하인은 “왜 의자를 조금만 옮겨 난로에서 떨어져 앉지 않으십니까?”라고 물었다. 또 뉴턴은 크고 작은 두 마리의 고양이를 길렀는데 그놈들이 서재에 들어오려고 소란을 피울 때마다 문을 열어줘야 했다. 뉴턴은 성가신 나머지 기발한 방법이랍시고 문짝에다 큰놈을 위해서 큰 구멍을, 작은 놈을 위해서 작은 구멍을 뚫어놓았다. 작은놈이 작은 구멍으로만 들어올까? 이럴 경우 ‘우둔한 천재(foolish genius)’라는 모순어법이 적절할 것이다.


    Sweet Sorrow의 유래

    sweet sorrow(달콤한 슬픔)는 셰익스피어가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구사한 표현이다. 그는 작품 전체에서 gall(쓴것), sorrow(슬픔), bitter(쓰라린), fearful(무서운), division(이별)이라는 어휘를 번갈아 sweet(달콤한)와 결합시켜 사랑의 ambivalence(반대 감정 병존) 상태를 나타낸다.

    1막 1장에 나오는 로미오의 대사는 사랑의 이중성을 표현하고 있다.

    Love is a smoke made with a fume of sighs;
    Being purged, a fire sparkling in lovers’ eyes;
    Being vexed, a sea nourished with lovers’ tears.
    What is it else? A madness most discreet,
    A choking gall and a preserving sweet.

    사랑이란 한숨으로 된 연기;
    개면 연인의 눈 속에서 불꽃이 번쩍이고;
    흐리면 연인의 눈물이 바다를 이루네.
    그밖에 사랑이란 무엇인가? 가장 분별 있는 광기이고,
    숨 막히게 하는 쓴 약이며 생명을 구하는 달콤한 사탕.


    2막 2장 185∼186행에서 줄리엣은 로미오에게 사랑을 맹세한 후 이렇게 작별인사를 한다.

    Good night, good night! Parting is such sweet sorrow
    That I shall say good night till it be morrow.
    안녕, 안녕! 헤어진다는 것은 감미로운 슬픔이니
    날이 샐 때까지 줄곧 ‘안녕’이라는 말만을 하고 있을 거예요.


    슬픔이면 슬픔이지 왜 sweet sorrow(감미로운 슬픔)라고 했을까. 일단 의문으로 남겨두자. 3막 5장에서 새벽이 다가옴을 알리는 종다리의 노랫소리가 들리자 로미오와 줄리엣의 행복한 부부생활은 단 하루로 끝나게 된다. 로미오는 떠나야 하고, 줄리엣은 종다리의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가져다준 슬픔을 한탄하며 다음(3막 5장 29∼30행)과 같이 말한다.

    Some say the lark makes sweet division;
    This does not so, for she divides us

    종다리 소리를 들으면 달콤한 이별을 한다는데;
    저 소리는 달콤하지는 않고, 우리를 떼어놓는구나.


    5막 3장에서 가사(假死)상태에서 깨어난 줄리엣은 진짜 죽어버린 애인의 뒤를 따른다. 5막 3장 161∼166행은 이들의 부활(復活)을 암시하는 듯한 대목이다.

    What’s here? A cup, closed in my true love’s hand?
    Poison, I see, hath been his timeless end.
    O churl, drunk all, and left no friendly drop
    To help me after? I will kiss thy lips;
    Happily some poison yet doth hang on them,
    To make me die with a restorative.

    이게 뭐지? 잔이 로미오님의 손에 꼭 쥐어져 있네?
    독약을 마시고 순식간에 죽었나보다.
    인색한 사람, 내가 뒤따라가지 못하게 다 마시고
    단 한 방울도 남겨놓지 않았단 말인가? 그럼 당신 입술에 키스하리다;
    혹시나 독약이 아직도 묻어 있다면,
    생명의 묘약처럼 날 천당으로 보내주겠지.


    종합하면 셰익스피어는 1막에서 gall(쓴 약)과 sweet(달콤한 사탕)를, sweet(달콤한)와 bitter(쓰디쓴)를 모순적으로 대비시킨다. 2막에서는 Parting is such sweet sorrow(헤어진다는 것은 감미로운 슬픔이다)라고 표현했다. 이어 3막에서도 sweet division(달콤한 이별)이라는 모순어법을 썼고, 5막에서는 restorative(생명의 묘약·부활의)와 die(죽음)라는 모순된 두 단어를 함께 쓰고 있다.

    이제 왜 sweet sorrow(감미로운 슬픔)라고 했는지 의문을 풀어보자. 헤어짐(parting·division)은 슬픔(sorrow)이지만 ‘달콤한(sweet)’이란 말을 붙여 헤어짐을 운치 있게 그려냈다. 더불어 생명의 묘약(restorative)으로 죽음(die)을 승화시켜 결국 부활(restoration)이라는 행복의 상태에 이르도록 만들었다.

    이 극은 일종의 해피엔딩이다. ‘비극 아닌 비극’이다. 작품은 비극이지만 비극의 침울함을 찾아볼 수 없다. 두 사람의 인연은 불행하게 끝나지만 그 불행은 오히려 두 사람의 사랑을 승화시킨다. 빛과 생명을 준 사랑은 어둠과 죽음을 초래하나, 오랜 원수지간이던 양가를 화해시키고, 시민들의 싸움을 종식시킨다. 이 극의 주제인 모순적 사랑은 지상의 것이지만 천상의 것이며, 생명이면서 죽음이다.

    Sweet Sorrow의 현대화

    원어민은 sweet sorrow를 작별인사(farewell)로 많이 쓴다. 다음은 레이건 대통령의 퇴임 연설이다.

    People ask how I feel about leaving. And the fact is, ‘parting is such sweet sorrow.’ The sweet part is California and the ranch and freedom. The sorrow the goodbyes, of course, and leaving this beautiful place. (떠나는 기분이 어떠냐고 사람들이 묻습니다. 사실 ‘떠나는 기분이 시원섭섭합니다.’ 내 고향 캘리포니아로 돌아가 목장과 자유를 얻을 수 있으니 시원하고, 이 아름다운 곳을 떠나야 하는 건 섭섭합니다.)

    ‘감산(甘酸: 달고 신맛), 쓰고도 단맛, 괴로움과 즐거움, 씁쓸하면서 달콤함, 희비가 엇갈림, 시원섭섭함’을 영어에서 the sweet and the sour, the sweet and the bitter, pleasures and pains, joys and sorrows 등으로 표현한다. 아예 형용사 bitter와 sweet가 합쳐져서 bittersweet란 단어가 사전에 실려 있다. ‘시원섭섭한 이별’을 bittersweet parting이라고 한다.

    다음은 ‘팝계의 흑진주’라 불리는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의 ‘I’ll Always Love You’의 일부분이다.

    Bittersweet Memories
    That is all I’m taking with me.
    So goodbye. Please don’t cry.
    We both know I’m not
    what you need.
    And I will always love you.
    I will always love you.
    아쉽지만 아름다운 기억들
    나는 그 기억들만을 가지고 떠나요.
    잘 있어요. 그리고 제발 울지 말아요.
    우린 둘 다 알잖아요, 제가
    당신께 짐만 될 뿐이라는 것을.
    영원히 언제까지나 당신만을 사랑하겠어요.
    영원히 언제까지나 당신만을 사랑하겠어요.


    승리자가 곧 패배자

    호탕한 성격과 육중한 체구의 소유자로 유명한 영국 작가 체스터턴(Gilbert Keith Chesterton)은 ‘The Giant’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It is remarkable that in so many great wars it has been the defeated who have won. The people who were left worst at the end of the war were generally the people who were left best at the end of the whole business. (그렇게도 많은 대전쟁에서 승리자가 패배자였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모두 결산하고 나면 결국 최악의 상태로 남은 사람들이 최선의 상태로 남은 사람들이었다.)

    부연 설명하자면 프랑스혁명은 패배로 끝났다. 혁명은 최후의 싸움에서 패했다. 그러나 혁명의 첫 목표는 달성했다. 세계는 결코 전과 같지 않았다. 이후로는 어느 누구도 가난한 사람을 단지 디디고 걸어가는 바닥으로만 여길 수가 없었다.

    모순어법의 백미, 고린도 후서

    성경에 나타난 모순어법도 다양하다. 특히 성경의 고린도(Corinthians) 후서 6장 8~10절은 전체가 모순어법으로 씌어 있다.

    Through glory and dishonor, insult and praise,
    we are treated as deceivers and yet are truthful;
    as unrecognized and yet acknowledged;
    as dying and behold we live;
    as chastised and yet not put to death;
    as sorrowful yet always rejoicing;
    as poor yet enriching many;
    as having nothing and yet possessing all things.

    우리는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모욕과 칭찬으로 말미암아,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살아 있는 것을 보라.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유케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쉬어갑시다!

    ‘상처뿐인 영광’의 유행


    미들급 권투선수와 같은 근육질 체형의 폴 뉴먼(Paul Newman)이 주연한 영화 ‘상처뿐인 영광’의 원제목은 ‘Somebody Up There Likes Me’(1956)다. 직역하면 ‘하늘에 계신 분도 날 좋아하나봐’다. 이 말은 영화 마지막 장면에도 등장한다. 챔피언이 된 주인공을 축하하는 오픈카 퍼레이드에서 높은 빌딩을 쳐다보며 옆자리에 앉은 부인에게 ‘Somebody up there likes me’라고 말한다. ‘종이를 뿌려주는 저 빌딩 위의 사람들도 날 좋아하는군’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오랜 가시밭길의 고통을 견뎌내며 이룬 값진 승리를 우린 곧잘 ‘상처뿐인 영광’이라 표현하고, 또 단어를 바꿔 ‘영광의 상처’라는 표현도 곧잘 써왔다. 여하튼 이 영화가 개봉된 이후, ‘상처뿐인 영광’은 우리나라에서 대단한 유행어가 됐다. 역시 모순어법을 동원한 멋진 제목이다.


    걸출한 모순어법, 반야심경(般若心經)의 공(空)사상.

    색불이공(色不異空)·공불이색(空不異色)·색즉시공(色卽是空)·공즉시색(空卽是色). 형체는 헛것과 다르지 않고; 헛것은 형체와 다르지 않다; 형체는 헛것이고; 헛것은 형체이다. Form is not different from emptiness; Emptiness is not different from form; Form is emptiness; Emptiness is form.

    ‘불(不)’이라는 부정어를 통해 부정의 논리를 펴다가, ‘즉(卽)’이라는 긍정의 단어로 긍정의 논리를 편다. ‘색’은 ‘형체’요, ‘공’은 ‘헛것’, 즉 ‘색’은 ‘세속(世俗)’이고 ‘공’은 열반(涅槃)을 가리킨다. 반야심경의 공(空)사상은 결국 ‘속(俗)과 진(眞)은 원융(圓融)하다’는 뜻을 전하고 있다. 원융이란 일체의 사리가 널리 어울리어 하나가 되어 구별이 없음을 의미한다.

    삶 자체가 모순, 그 안에서 ‘현자의 돌’을 찾아라

    33세에 생을 마감한 예수처럼, 45구경 권총에 맞아 쓰러진 김구 선생처럼, ‘죽어서 태어난(born dead)’사람이 있는가 하면, 노태우 전 대통령처럼 퇴임 후 ‘숨죽이며 사는(living dead)’사람도 있다. 나폴레옹이나 박정희는 ‘작은 거인(little big man)’이었다. 삶이란 다분히 모순적인 여정이 아닌가 싶다.

    충무공(忠武公) 이순신 장군의 명문구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죽으려고 하면 반드시 살고 살려고 하면 반드시 죽는다)’라는 임전훈(臨戰訓)은 반동역학으로 작용하여 7년간 지속된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다. 그는 노량해전에서 전사하나 그의 이름은 불멸(不滅)했다.

    라틴어 Sic Vis PacemPara Bellum을 영어로 바꾸면 If you want peace, prepare for war다. 우리말로 직역하면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다. 겉으로 보면 모순적이지만 국가 안보나 국제 정세를 논할 때 자주 인용되는 경구(警句)다.

    영국의 비평가요 사회사상가인 존 러스킨(John Ruskin)은 이렇게 말했다.

    Remember that the most beautiful things in the world are the most useless; peacocks and lilies for instance.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가장 무용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면 백합이나 공작이 그렇다.)

    16세기 전반에 생겨난 경구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It is an ill wind that blows nobody (any) good. (아무리 거센 바람이라 할지라도 득보는 사람이 있다.) 아무리 나쁘게만 보이는 일도 유용한 측면이 있다는 의미다.

    실제 태풍이 엄청난 해를 입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늘 해로운 것만은 아니다. 태풍으로 파고가 높아지면 물이 순환하면서 바다의 용존산소량이 많아지고 생물학적 자정작용도 활발해진다. 해수를 뒤섞어 순환시킴으로써 플랑크톤을 용승(湧昇) 분해해 바다 생태계를 활성화하는 작용을 한다. 이때 적조(赤潮)는 큰 파도에 휩쓸려 사라진다. 이렇듯 대기의 폭군인 태풍은 유용한 면도 지니고 있다.

    자연계의 양면성과 모순성에서 삶의 지혜를 찾아야 한다. ‘Poison, properly used, turns to medicine(독도 잘 쓰면 약이 된다)’란 말도 있지 않은가.

    고대에는 물질세계가 더운 것과 찬 것, 젖은 것과 마른 것, 양성과 음성, 남과 여 등 정반대의 개념에 의해 작용한다고 봤다. 이후 납과 같은 천한 물질을 금과 같은 귀한 물질로 변성시키는 연금술(alchemy)이 발전했다. 거의 모든 연금술사가 섞으면 금이 되는 특별한 물질인 ‘Philosophers’ Stone(현자의 돌)’을 찾아내는 일에 몰두했다.

    카를 구스타프 융은 연금술의 공정을 마음의 치료를 위한 정신분석 과정에 적용, 독자적인 분석법을 창출했다. 연금술이란 메시지는 단순한 물질 조작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상의 체계로 각자의 참된 운명, 새로운 자아를 창조하는 메시지로 승화될 수 있다.

    어떤 연금술사들은 연금술 용기를 동물의 자궁에 비유하면서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특별한 고통, 심지어 죽음까지 감수했다고 한다. 모든 동물이 태어날 때 고통이 따르듯, 고통이 수반해야 새로운 것이 탄생한다고 믿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자의 돌’ 아닌가! 연금술사의 현자의 돌은 먼 곳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자살’을 거꾸로 하면 ‘살자’가 되고, nowhere(아무데도 없다)를 띄어 쓰면 now here(지금 여기에 있다)가 된다. 위기를 기회로, 부정을 긍정으로 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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