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병직 교수는 김문수 지사와의 유대관계가 책임감이 아니라 인간적 매력으로 맺어졌다고 했다.
그런데 그 무렵 민청학련 사건이 터졌다. 1974년 4월 유신정권의 긴급조치에 의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을 중심으로 180여 명을 구속기소한 것. 그는 다시 제적되고, 수배자 신분으로 숨어 지냈다. 자연스레 안 교수와의 연락도 뜸해졌다.
창동에서 숨어 지낸 지 5개월여 만에 고향에 연락한 그는 어머니가 암으로 위독하다는 비보를 듣는다. 곧장 고향으로 내려가 약초를 캐러 다니고 굼벵이를 잡아다 드렸지만, 어머니는 결국 몇 개월 만에 아들의 품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1975년 초, 어머니 장례를 치르자마자 스물다섯 살의 김문수는 청계천으로 향했다. 신평화복장학원에서 재단을 배워 동문시장에 재단보조로 취직했다. 한 달 월급은 단돈 1만원. 그렇게 생활하던 중 서울대 선배인 임무현을 만난다. 일찍이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당시 종근당에 근무하고 있던 임무현으로부터 “앞으로는 산업사회가 발달할 것”이라는 얘기를 들은 그는 노동운동을 본격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에 자격증 취득에 열을 올렸다. 2년 동안 7개의 자격증을 땄다.
그 사이 김문수는 도루코 면도날을 만드는 한일공업주식회사로 직장을 옮겼다. 월급 5만원의 보일러 조수. 그는 공무과 직원, 노조 교선부장을 거쳐 노조 분회장에 당선됐다. 단 2표를 제외한 700여 조합원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탄생한 직선제 민주노조였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자, 사회는 급격한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이듬해 2월, 회사에서 청소를 하던 김문수는 사복형사에게 붙잡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죄목은 불온서적 소지와 이적단체 구성 등으로 인한 국가보안법 위반. 그가 끌려간 곳엔 이미 임무현을 비롯한 서울대 출신 70여 명이 있었다. 안 교수는 학생운동의 이념적 리더이긴 했지만 교수 신분인데다, 학생들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보고받는 처지는 아니었기 때문에 구속되지 않았다. 김문수 지사는 당시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때 얼마나 맞았는지 49일이 지난 뒤에도 엉덩이가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어요.”
다행히 2명을 제외하고, 모두 풀려났다. 김 지사와 함께 구속됐던 임무현 현 대주전자 회장의 얘기다.
“그 사건 때 조사관들 사이에서 김문수에 대한 평이 좋았어요. 협조를 해서가 아니라, 같은 인간으로서 조사하다 보면 파악되는 인간적인 매력 때문이죠. 호쾌하고 구김살 없으며, 통 큰 남자답다고요. 풀려난 후, 김문수에게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더니 노동운동을 더 하겠다고 하더군요. 나는 신분이 드러난 이상, 이제부턴 사업을 할 테니까 각자 알아서 잘 살자고 했죠.”
신군부에 짓밟힌 ‘서울의 봄’
1980년 5·18민주화운동 이후 정부가 발표한 전국의 정화대상자 190명 중에 김문수의 이름도 들어 있었다. 노조 일에서 손떼지 않으면 삼청교육대로 끌고 간다고 해서 그는 사표를 내고 신림동에 대학서점을 열었다. 책방에서 혼자 라면을 끓여 먹으며 생활하던 그는 구로동 세진전자 노조분회장이던 설난영씨와 결혼에 골인한다. 청첩장을 돌리기는커녕 봉천중앙교회 교육관에서 드레스도 입지 않고 결혼식을 하니, 당국에서 위장결혼을 하는 줄 알고 전경 버스를 대기시키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나이 오십이 넘은 요즘에야 여자 심리를 조금 알 것 같아요. ‘가정을 책임질 수 없다,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 40세까지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청혼을 했으니…. 그런데도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결혼한 사람이 바로 제 아내죠.”
1980년 서울의 봄은 신군부에 짓밟혔다. 이에 격분한 지식인들이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5월15일에 발표된 ‘지식인 134인 시국선언’으로 전국 86명의 교수가 강단에서 강제로 물러났다. 안병직 교수도 시국선언에 참여했으나 가까스로 해직은 피했다.
한편 1984년 해고노동자들이 모여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를 결성했는데, 김문수가 부위원장을 맡았다. 이듬해 서울노동운동연합(이하 서노련)의 지도위원이 된 그는 ‘서노련신문’을 통해 일간지에서 보도 통제된 ‘국방위 회식사건’과 ‘미군병사의 여교사 추행사건’ 등을 세상에 알렸다. 그리고 1986년 군사독재반대투쟁을 서노련의 주요활동목표로 내걸고, 5·3 직선제 개헌투쟁을 도모했다.
결국 5·3 인천사태 주동자로 지목된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 집시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당시 서노련 사건으로 모두 14명이 구속되고, 8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징역 4년, 자격정지 4년을 선고받았다가 1988년 10월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서울대 이영훈 교수는 당시 사건을 이렇게 회고했다.
“노동운동 조직사건으로는 최초로 국가보안법과 소요죄를 적용한 서노련사건 재판 때 김문수가 언론의 주목을 받았어요. 법정에서 ‘노동자들이 조직적으로 단결해 우리를 억누르는 권력과 금력에 대항해 싸워 나가지 않으면, 노동자들의 해방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억압받는 서민대중과 억압하는 자들까지 인간성을 회복할 수 없다고 믿으면서 노동운동에 힘써왔습니다. 법정이 사회정의와 진리를 밝히는 곳이라면 우리를 심판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을 주고 독재자들을 엄벌해야 마땅합니다’라는 항소이유서를 낭독했거든요. 대단한 용기였어요.”